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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분노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평점 :
줄거리를 대신하여.
한 남자가 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상의 사랑을 독차지할 운명을 타고난 남자죠. 그리고 한 여자가 있습니다. 여자의 내면은 임계점까지 분노로 가득합니다. 신화 속 비극의 여주인공들. 키르케, 메데이아, 안티고네를 잇는 저주받은 운명이 만들어낸 분노를 형벌처럼 품고 살아가죠. 여자에겐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불타버리거나 불태우거나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죠. 여자는, 태우는 쪽을 선택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요. 그런 여자가 사랑에 빠집니다. 오직 그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지금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여자는 모든 것을 걸죠. 사랑이 여자를 구원할지 아니면 완전히 파괴시킬지. 신이 부여한 운명에 맞서는 한 인간의 분노가 600페이지에 이르는 지면을 뜨겁게, 순식간에 불살라 버립니다.
<운명과 분노>는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였던, 누구보다 서로에게 충실했던 두 남녀의 운명과 분노 그리고 헌신적인 사랑 이야기입니다.
미리 경고하자면, 완벽한 사랑, 순수한 사랑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결코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오히려 사랑은 한 사람의 전부 혹은 그 이상을 내놓기를 요구할 때가 더 많습니다. 때로는 목숨까지도 요구하죠. 그래서 겁쟁이들은 사랑에 빠지지 못합니다. 지나치게 머리가 좋은 사람도 그러하죠.
두 사람은 예외입니다. 너무나 똑똑한 두 사람이 사랑 앞에서는 눈이 멀어 버리죠. 주인공 남자와 여자, 로토와 마틸드는 그야말로 '미친 사랑'을 합니다. 어리석다고 말하는 세상도, 타협을 권하는 사람도 외면한 채 오로지 두 사람의 사랑만을 위해 살아가죠.
하지만 이 사랑의 이면에는 여자, 마틸드에게 내려진 저주의 그림자가 숨겨져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세상의 모두가 마틸드에게 등을 돌리게 만든 저주 가요. 마틸드는 사랑으로 빛나는 존재인 로토를 이용해 저주를 풀고자 합니다. 그렇게 될 테고, 그럴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믿고 살아가는 거죠.
역사와 신화 속 무수한 이야기가 증거 하듯, 인간은 운명을 이기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이루지 못할 꿈이었던 거죠. 모든 인간은 병들고, 나이 들어 죽음에 이릅니다. 언제든, 덜컥, 불쑥 들이닥쳐 깜짝 놀라게 하죠.
사랑받은 적 없는 마틸드와 사랑으로 가득했던 로토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몹시 '고독하다'는 거죠.
고독.
어떤 이들은 나이 들면 고독에도 익숙해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고독은 결코 나이 들지 않습니다. 나이를 먹는 건 사람뿐이죠. 때문에 사람은 고독에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고독 앞에 무력해져 갈 뿐인 거죠.
더 좋지 않은 건 고독이 나이 들지 않듯 분노 역시 사멸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존재가 분노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도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은 물론 주변의 존재들도 분노에 휩쓸리게 되는 거죠. 통제되지 않는 분노는 재앙 혹은 저주가 되어 모두를 파멸시킬 때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나이들 지도 사멸하지도 않는 고독과 분노만큼이나 어려운 상대가 있습니다.
그 상대의 이름은 '기억'입니다.
기억은 망각에 덮여 흐려지거나 지워지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결국 저절로 흐려지거나 병 혹은 사고로 지워지기 전까지는 고되고 치열한 싸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숨을 곳조차 없는 내면에서 매일 기억과 마주치는 일은 작고 왜소한 자아를 피폐하게 하죠. 이 피폐함, 고통을 끝내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용서하는 거죠.
말은 쉽지만 용서하기란 간단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타인을 용서하는 일보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일은 더 힘이 듭니다. 타인이 모르는 것까지 '나'는 알고 있기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왠지 어렵고 복잡하게 적고 말았는데 사실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 모든 건 사랑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사랑은 주기만 할 수도, 받기만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는 말도, 먼저 사랑을 주지 않으면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말도 모두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운명'의 장난이라고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죠. 큐피드의 화살 이야기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갑자기 이 무슨 낭만주의인가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낭만적인 상상도 없이 운명과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운명과 분노>를 먼저 읽어본 지인은 제게 "이 얘기는 딱 네 얘기다."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솔직히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온통 물음표 투성이었죠.
'이 소설의 어디가 내 얘기란 말인가?'
초반을 넘기고 중반을 지나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
확실히 제 모습이 있더군요. 남자 주인공이나 여자 주인공 한쪽이 아니라 둘을 합쳐둔 모습. 분명 제 이야기였습니다.
억지스럽게 들릴 수 있지만 저주나 운명을 이겨내는 방법은 완전히 무시하거나, 철저하게 믿거나 하는 두 가지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운명이, 나 자신조차 무시하고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거죠.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불가능하다고 해야겠죠.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모든 걸 무시한다면 삶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남은 건 '믿는 것'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믿고, 친구를 믿고, 가족을 믿는 거죠. 이 방법도 그리 간단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믿는다고 해도 어디까지, 어떻게, 누구를 믿는가의 문제가 남아 있으니까요.
그래서, 용서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큐피드의 화살이 주는 내 눈에 콩깍지도 필요하죠.
고독은 '나' 홀로 존재할 때 생겨납니다.
'나'를 그 혹은 그녀에게 준다면, '나'가 없기에 고독도 생겨날 수 없죠.
사랑이라면 그런 낭만, 환상, 불가능을 꿈꿔도 좋을 겁니다.
삶 동안 한 번쯤이라면요.
이번에는 기필코 정리해서 적겠노라 마음을 먹었건만, 사랑 이야기라면 젬병이라 역시 정리되지 않은 혼란과 어수선함만 잔뜩 늘어놓고 말았네요.
한 번쯤은 "너는 내 운명"이라 믿는 사람을 만났거나, 만나게 될 겁니다.
그러나 운명의 사람인 그에게도 "참을 수 없이 분노하게 되는 날"이 찾아올 거예요.
그럼에도 "너는 내 전부"라는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사랑 아닐까요.
역시, 사랑해야 합니다.
+ 더하여.
<운명과 분노> 곳곳에 삽입된 셰익스피어 희곡과 신화를 읽다 보면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해질 겁니다. 이번 기회에 만나보는 것도 좋지 않은가 하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