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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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합니다.

 고작 페미니즘이 여성주의 정도의 의미이며, 페미니스트는 여성해방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라는 식의 단편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을 뿐이죠.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이해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큰 오해이자 착각일 수 있는지 알기에 잘못 알고 있는 거라면 바로 잡아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평소 나름대로 개방적이라고 믿어왔고 또 여성에 대한 시각도 뒤틀려 있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름대로'였던 거지만요. 정말 그랬습니다. 실제로는 조금만 깊이 들어가도 아는 것도, 이해하고 있는 것도 거의 없었죠. 

 '차별'은 생각보다 심했고, 깊었으며, 해결하기가 간단하지 않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에 대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무엇이, 어떻게 문제가 되고 있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어떤 배경에서,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거대한 규모로, 얼마나 오래 차별받아 왔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어떤 차별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현실을 명료하게 짚어주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즘 입문서로 추천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이유를 알겠더군요.

둘째, 얇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학문적 배경이나, 역사적 사건들을 깊이 파고 들어가기엔 부담스러웠습니다. 

왜, 우리가, 왜 지금,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지 일단 알고 시작하고 싶었던 거죠. 


 100페이지도 안 되는 책이기에 누구나, 부담 없이, 쉽게 읽을 수 있을 테니 줄거리나 내용을 따로 적지는 않으렵니다. 잠깐만 시간을 내시면 됩니다. 수천 년이나 억눌리고 차별받아온 이들을 생각하면 너무 쉬운 일이지요.

 

 페미니스트는 '평등'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싸우지 않는 방법도 있겠지만, 싸우지 않고는 내어주려고 하지 않기에 결국 싸우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평등.


우리는 모두가, 누구나가 평등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은 평등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여성들의 말이 옳습니다. 우리는 평등하지 않습니다. 평등을 부르짖으면서 실제로는 평등할 수 없도록 사회가 만들어져 있었고, 바로 잡으려는 시도는 번번이 봉쇄됐습니다. 


 서구, 개방적이고 평등하다고 하는 나라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경제학의 아버지이자 <국부론>의 저자인 애덤 스미스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이야기하면서, 집에서 자기 식탁에 저녁을 차려주는 어머니의 손도 '보이지 않는 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부키). 

 

 현실에서 남성과 여성은 전혀 평등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많은 차별이, 말도 안 되는 이유들을 내세우며 행해지고 있죠.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옛날보다는 나아지지 않았느냐?"라고요. 나아졌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더 나아져야만 하죠.


 우리가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여성들만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당연히 주어졌어야 할 권리와 지위를 돌려주는 것뿐이며, 그 과정을 통해 남성들 역시 더 나은 삶으로 가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하고, 여성스러워야 한다는 식의 말은 반대로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남성스러워야 한다는 말도 됩니다. '남자다운', '여자다운' 모습이 정해져 있기에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평등'이 달성된다면 남성과 여성 모두 강요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이제 막 페미니즘에 입문하는 중이라 잘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페미니즘은 남성의 권리를 빼앗고자 하는 움직임도, 남성 위에 군림하겠다는 시도도 아닙니다. 당연히 주어져야 하는 권리를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유치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남자의 말입니다.

"그럼 여자들도 군대 가라고 그래!" 

이게 말인지, 망아지인지.

이 말을 또 이렇게 받게 만듭니다.

"그럼 남자들도 애 낳던가!"

오죽 답답했으면.


 남성과 여성은 똑같지 않습니다. 다릅니다. 

어느 쪽이 열등하거나 우월하거나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다른 건 다른 겁니다.

우리는 이 다름을 '차이'라고 합니다.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차이가 차별의 빌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사회에나 '성역할'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남자는 근력이 더 강하고, 신체적으로도 사냥이나 채집에 유리했기에 밖에서의 활동을 맡아했습니다. 여자는 아이를 낳고, 길러야 했기에 집안일을 맡아했습니다. 상황에 맞게 업무를 분담한 거죠. 그랬던 것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로 굳어진 게 현재의 모습입니다. 사회의 모습이 달라졌다면 과거 효율을 위해 맡았던 일에도 변화가 따르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남자가 사장이 되고, 여자는 비서가 되는 게 자연스러운 게 아닙니다.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집안일이나 하는 게 자연스러운 게 아닙니다. 관습이 잘못됐다면 바꾸는 게 당연합니다. 그게 서로를 위하는 일인 거죠.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는 현대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잘못을 짚어가며 문제를 제기합니다. 

 첫째 효과는 이런 일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배워왔기에 잘못됐다는 걸 모르는 이들에게 잘못이라는 걸 일깨우는 것입니다.

 둘째 효과는 당연히 받아들이고 참아왔던 여성들의 자각을 이끌어 낸다는 것입니다.

 셋째 효과는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의 반론이 얼마나 모순되는지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넷째 효과는 편견의 탄생 배경과 실체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효과는 더 이상 억지로 꾸미거나 억누르느라 에너지를 소모하는 동시에, 화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여섯째 효과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 자유라는 겁니다. 

여성성이나 남성성은 강제되지도 고정되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 대로 하면 되는 겁니다.  페미니스트도 힐을 신을 수 있습니다. 여성성이나 남성성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이상적인 모습이 사회나 타인이 강요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이기만 하다면 문제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페미니스트는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페미니스트가 추구하는 태도에 반하는 생각이라는 거죠.


앞으로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의 언어를 조금씩 배워나갈 겁니다.

생각도 넓혀갈 겁니다. 그때는 오늘 쓴 이 감상을 다시 읽으며 부끄러워하거나, 미안하게 느끼는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나름대로 말을 골라서 적는다고 했지만 우왕좌왕하고, 횡설수설하다가 시간만 보내고 말았구나 싶습니다. 

나아지겠지요. 나아질 겁니다.


저는 페미니스트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차이가 차별을 정당화할 수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적은 노력이나마 보태겠습니다.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한 인간으로서, 저를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한 근본과 근원을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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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켄트 하루프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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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죽는다.

대드 루이스는 인간이다.

대드 루이스는 죽는다.


가장 잘 알려져 있을 삼단 논법을 흉내 낸 이 세 문장은 켄트 하루프 소설 <축복>의 줄거리이기도 합니다. 

70이 넘은 노인, 대드 루이스는 폐암 진단과 함께 한 달도 남지 않았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죠. 대드는 담담하게 선고를 받아들입니다. "100세 시대에 80도 안 돼서 죽다니 말도 안 돼!"하는 식으로 현실을 부정하거나 하는 일 없이요. 부인 메리도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둘 다 진실로, 조금도 힘들거나 슬프거나 괴롭지 않았던 건 아니었습니다. 대드는 부루퉁해졌고, 메리는 대드를 간호하다 과로로 쓰러지기도 합니다. 

 

 더 이야기를 하기 전에 대드가 '대드'인 이유를 적어야겠네요. 

아빠가 됐기 때문입니다. 

대드가 메리와 결혼해서 딸 에일린을 낳았을 때부터 '대드 루이스'가 됐던 거죠.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은 게 너무 단순하고도 간단히 일어납니다. 대드에게 내려진 시한부 선고처럼 말이죠.


 죽음, 너무나 확실한 죽음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이 되지 않습니다. 대드에게는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여러 가지 있었고, 마무리 짓고 싶은 일도 여럿 있었으며, 꼭 만나고 싶은 사람도 하나 있었습니다. 아직 기운이 있는 동안 대드는 해결해야 하는 일들과 마무리 짓고 싶은 일들을 하나하나 처리합니다. 유언도 남기고, 운영하는 철물점 경영에 대한 문제도 해결하죠. 

 적어도 대드에겐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갑작스러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나았던 거죠. 하지만 한 가지 풀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벌써 오래전에 집을 나간 아들, 프랭크와 화해하는 일이요. 


 죽음을 앞에 둔 적이 없어 확실히는 모르지만 흔히 말하기를 죽을 때 제일 후회하는 건 '하지 않았던 일'이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습니다. 대드가 후회하는 건 두 가지였으니까요. 

 하나는 '하지 않았던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지 말았어야 했던 일'이죠.

말장난 같지만 후회를 하기 시작하면 했던 일이나 하지 않았던 일이나 모두 후회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결국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엇을 할 것인지 마음먹는 게 후회하지 않는 혹은 덜 후회하는 길이라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대드는 현명했습니다. 자책하지만 스스로를 괴롭힐 만큼 얽매이지 않았고 덕분에 주변 사람까지 고통스럽게 만들지 않았으니까요. 오히려 대드의 마음을 헤아린 주변 사람들이 큰 도움과 위안이 되어줍니다. 마지막까지 곁에 머물며 이야기를 듣고, 들려주는 거죠.


 모든 인간은 죽기 전까지는 살아갑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정말 소중한 사람이 죽어간다고 해도 삶은 이어지죠. <축복> 속에서도 삶은 이어집니다. 삶에는 갈등과 슬픔과 아픔과 미움이 따릅니다. 거기에 사랑과 기쁨과 웃음과 공감과 위로와 배려와 친절이 섞여들죠. 자연스럽게 말입니다.


 사람으로 나고, 자라, 살다 죽는 일.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모든 과정은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하나입니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무지한 필멸자라는 생각으로 괴로워하는 일 없이죠. 인식할 수도 없을 만큼 평범하게 지나가 버리는 하루하루의 일상. 특별한 무엇이 아닌 그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소중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괜찮다, 다 괜찮다'거나, '모두 지나갈 거다'라거나, '너만 그런 게 아니다'라거나 하고 위로의 말을 건넬 생각도 없습니다. 전혀 괜찮지 않은 일이 매 순간 벌어지고, 지금이 지나가 버리면 모든 게 끝일 것만 같고, 모두가 그런 거라고 해도 위로되지 않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축복>이라는 제목은 원제의 의미를 비추어 보면, '떠나는 자의 평화와 남겨진 자들의 안녕 모두를 기원한다'라는 의미로 읽힙니다. 떠나는 사람이 소중한 만큼, 남겨질 사람이 사랑스러운 만큼 이별은 고통스러워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그들이 서로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서로가 서로를 축복하는 일, 마지막까지 마음을 나누는 일이 아닐지.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슬프지만 작위적으로 꾸며낸 눈물이 스며들 틈 같은 건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담담히 받아들이고 견디어 가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따뜻한 이야기였음에도 읽기 힘들었는데, 그 이유를 이제 알게 됐습니다.

번역된 문장에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많은 그와 그녀와 그와 그녀가 등장했던 거죠. 생략해도 되겠고, 고유명사로 바꿔 적어도 좋았을 텐데, 대드도 그고, 대드 아들도 그고, 목사도 그고, 목사 아들도 그고, 목사를 때린 남자도 그고, 목사 아들을 때린 남자도 그고. 게다가 메리도 그녀고, 메리 딸 로레인도 그녀고, 옆집에 사는 메이도 그녀고, 목사 아내도 그녀고, 또 다른 이웃 윌라도 그녀고, 윌라 딸도 그녀라는 식. 

 솔직히 지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외엔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불평하기도 하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보통의 시간.

잊혀서 기억하지도 못할 거의 모든 시간이야말로 삶이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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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이야기 - 시대를 움직인 뒤틀린 정의 예문아카이브 역사 사리즈
월러 뉴웰 지음, 우진하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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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선 시대 폭군을 떠올려 보면 '연산군'이 생각납니다. 

밖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같은 이름이 떠오르죠. 

우연일까요,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역사는 이들을 폭군으로 기록하는 동시에 '실패자' 혹은 '패배자'로 적습니다. 만약 이들이 승리했다면, 그래서 그들의 뜻이 실현됐다면, 그때도 이들은 폭군으로 기억됐을까.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한 번은요.


2017년 3월 10일.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탄핵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탄핵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국민 다수는 끊임없이 탄핵을 요구해왔고 마침내 그 결과가 나온 거죠.

박근혜 전 대통령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제왕적 통치'로 함축되는 불통의 정치였습니다. 

'불통'.

불통은 폭군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태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역사는 오늘을 어떻게 기록할까요.

진실이 밝혀지면 알게 될 일입니다.


 <폭군 이야기>는 신화 속 인물인 아킬레우스에서 시작해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이후까지 3,000년 인류 역사 속에 등장한 폭군들을 이야기합니다. 

 "아킬레우스는 영웅이 아닌가?"하고 의아할 수 있겠는데, 그는 영웅인 동시에 '전형적 폭군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는 게 저자의 판단입니다. 판단의 근거는 아킬레우스의 '분노'였습니다. 

아킬레우스는 전쟁을 치르는 동안 무수한 적을 죽입니다. 그 적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미래가 있었겠지만 아킬레우스는 그런 건 생각조차 하지 않죠. 다만 죽이고, 부수고, 파괴하고, 점령할 뿐입니다. 

 그랬던 그가, 분노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의 손에 죽은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가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죠. 아킬레우스는 기어이 헥토르를 해치웠고, 시신을 끌고 다니며 모욕하기에 이릅니다. 늙은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가 시신을 돌려주기를 빌기 전까지요.

 뛰어난 재능과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추었지만 오만하고 방자하며 자기만을 생각하는 모습.

이것이 폭군의 대표적인 면모 가운데 '하나'라는 겁니다.


 <폭군 이야기>에서 저자는 폭군의 유형을 크게 셋으로 나눕니다. 

첫째는 '전형적인' 폭군입니다.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죠. 자기 자신과 측근들을 위해 국민을 착취하는 것조차 서슴지 않는 이들이 바로 전형적인 폭군입니다. 

둘째는 '개혁형' 폭군입니다. 권력을 활용하되 국가의 발전이나 공공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책을 펴는 지도자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예를 들면 국가 발전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가진 자들의 재산을 반강제 혹은 강제로 거두어 간다거나, 국가사업에 국민을 반강제 혹은 강제로 동원한다는 식의 수단을 통해 실제로 발전을 이루어내는 지도자들 말이죠. 

첫째와 둘째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도 경험한 바 있습니다.

셋째는 앞의 둘과 조금 다릅니다. 저자는 이들을 '영원불멸형' 폭군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포함되는 건 공포정치를 실행했던 로베스 피에르를 시작으로 유태인 600만 명 이상을 학살한 히틀러와 경제 부흥을 이유로 수천만 러시아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수천만 중국인을 희생시킨 마오쩌둥과 같은 이들이 포함됩니다. 

 이들이 '적'을 죽이는 이유는 필연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끝없는 증오와 잔혹함이 있을 뿐이죠.

'인종청소' 혹은 '인종말살', '대대적이고 광범위한 숙청'을 일삼는 이들이 바로 영원불멸형 폭군들입니다. 


 저자는 영원불멸형 폭군을 특별히 깊이 다룹니다. 이들이야말로 이해할 수 없으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이고 참혹한 살육과 학살, 파괴의 흔적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어느 폭군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영원불멸형 폭군이야말로 다시는 역사 속에 등장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거죠.


 <폭군 이야기>는 단순히 폭군들의 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쓴 것이 아닙니다. 저자는 이야기를 시작하며 이렇게 묻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용인될 수 있는 '좋은' 폭정이 존재할 수 있느냐?"라고요.

우리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대략 이런 답이 되겠죠.

"그래서는 안 되는 걸 알지만, 그렇게 용납되고 시행되는 폭정은 어디에나 있다."라고요.


많은 나라에서 국가의 이익을 위해 타국을 희생시키는 정책을 찬성합니다. 

한 나라가 전쟁터로 변해도, 그 전쟁 속에서 무고한 사람들과 아이들이 죽어가도 '어쩔 수 없다'라고 합니다.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순간에도요.


사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저자의 시선과 판단은 전혀 공정하지 않았습니다. 특정 국가와 특정 인물에 대해서는 더 적대적이고 부정적으로 대하고 있음을 느끼기도 했죠. 예를 들면 레닌의 경우 혹독한 비판을 내놓습니다. 

 반대로 미국인이기에 자국 지도자가 세계사에서 행한 악행들은 언급하지 않고 넘어갑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만 해도 그렇습니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리틀보이와 팻맨의 경우 수십만 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냈음에도 말이죠. 

 

여기서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저자의 시선이나 판단이 전적으로 옳다거나 객관적이지 않다는 걸 잊어버리기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압도적인 악인, 상대적으로 더 나쁜 범죄가 있다고 해서 죄를 저지른 사람이 무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 사실을 잊는 순간 우리 역시 폭군의 성정을 품게 됩니다. 

 누구든 폭군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다면 그 사실을 꼭 잊지 말아주기를 새삼 부탁드립니다.


<폭군 이야기>에는 많은 폭군이 등장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현대에도 얼마든지 그런 폭정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게 폭정이라는 걸 모르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자신들을 다스리는 사람이 폭군이라는 걸 모르는 걸 강요당하기도 합니다. 

 

 인식되지 않는 것, 드러나지 않는 일은 결코 해결되지도 해소될 수도 없습니다. 

이 책이 도움이 되는 부분이 바로 그 지점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폭정이고, 누가 폭군인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우리에게 이득이 되기에 폭군이 아니고, 해가 되기에 폭군이라는 생각은 너무나 안일한 생각입니다. 지금 당장은 타인에게 가해지는 폭정이 언제 내게 돌아올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내일을 약속하며 제한된 자유와 기쁨을 언제 돌려받을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확신이 없는, 알지 못하는 상태의 기다림은 고통이 됩니다. 폭정은 누군가의 고통과 괴로움을 연료로 지속됩니다. 그렇기에 어떤 폭정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폭정은 국민이 궁극적인 행복을 추구하도록 만들 수 없다.
<폭군 이야기> 中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폭력, 강압, 고통, 희생.

역사는 이 모든 어둠이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며, 끝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줍니다. 

나의 정당한 분노가 타인에게도 정당한 건 아닐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정의가 타인에게는 불의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절대, 틀림없이, 이것이다'라고 확신하는 순간.

이 확신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강제하는 순간 폭군은 탄생합니다.

국가, 사회처럼 거대한 세계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와 너, 나와 우리.

어디에서든 폭군은 생겨납니다. 

만드는 것도, 없애는 것도 우리의 몫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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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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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일.

그 대상이 복잡하고 난해한 존재일 경우에는 특히나 더.

'이해'는 기쁨이 됩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가 존재합니다. 

 어떤 인간은 이해할수록, 실상에 가까워질수록 화가 나고, 괴롭고, 슬퍼집니다. 

"이것이 인간인가!"하는 처참하고도 참혹한 외침, 비명이나 다름없는 그 말이 저절로 나오는 그런.


 <이것이 인간인가>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가 겪은 수용소 생활의 참상을 담담하고, 사실적인 어조로 적어 내려 간 기록입니다. 격앙되거나, 흥분하거나, 울부짖거나, 소리 지르지 않았음에도 가슴 깊은 곳까지 고통과 괴로움이 전해지는 날 것 그대로의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인간인가?"하는 물음은 비단 외국의 사례, 남의 나라의 일이 아닙니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1980년 광주만 가도, 1987년 서울에서도, 2014년 진도 앞바다에서도, 2015년 광화문에서도, 2017년 오늘도 우리는 이 물음과 마주해 있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는가?"

하지만 누군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것이 인간이다."

언제든, 어디서든, 누구든 그럴 수 있다고, 그렇게 들고일어날 것 없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유대인 학살을 증언하는 인물인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보다 더 사실적으로 다가옵니다. 

믿을 수 있는 것도,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없이 오로지 생존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모습. 

그런 스스로를 경멸하고 비참하게 여기면서도, 때마다 찾아오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속이고 훔치는 일을 계속하는 자기모순.

프리모 레비는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는 상태, 말 그대로 '파괴'하는 일에 성공한 자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전쟁이고, 독일의 나치였습니다. 


 헤밍웨이의 멋진 말.

"인간은 파괴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는 말도 아우슈비츠에서는 통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패배했을 뿐 아니라 철저하게 파괴당한 산 증인들이 바로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이니까요.


 340페이지 분량의 어렵지 않은 단어로 적어 잘 읽히는 이 책이 실제로는 까다롭고 읽기 어려웠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자꾸 멈춰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인간'일 텐데, 그렇게 여러 차례 인간을 이야기해주고 있는데도 도무지 인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가해자들이 인간이 아닌 외계인이나, 다른 존재였다면 오히려 이해가 쉬웠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인간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왜 외딴곳에서 마주쳤을 때 가장 두려운 존재가 인간인지 확실하게 알려줬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알고 있었던 겁니다. '인간을 죽이는 건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을요. 그래서 두려워했던 겁니다. 겁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들이 우리를 죽일 테니까요.


 <이것이 인간인가>가 단순히 학살의 폭력성과 나치의 잔인함만을 이야기했다면 이렇게까지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했을 겁니다. '이것이 인간인가'하는 물음은 조금 더 근본적인 데서 시작됩니다. 인간의 본성과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치의 바닥, 한계까지를 보여주는 거죠. 


 빅터 프랭클이 극한의 상황에서도 자기를 잃지 말라고,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말했다면, 프리모 레비는 무엇도 믿을 수 없다, 다만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을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변화란 나쁜 것이다."

수용소에서 무엇인가가 변한다는 건 적응을 다시 해야 한다는 의미 이전에 생존 자체가 불투명해진다는 걸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변화는 희망이 아닌 절망이 되기 쉽고, 결국 나쁜 것이 되어 버리는 거죠.


 프리모 레비의 입장에서 빅터 프랭클은 운이 좋았던 셈입니다. 아무리 건강해도, 자기 관리를 잘해도, 누군가에게 잘못 찍히면 저항할 수 없는 죽음을 선사받는 그런 상황이었으니까요.


<이것이 인간인가>는 '인간이라면 이러할 것이다'라는 모든 가정을 거부합니다.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예측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는 거죠. 


차라리 몰랐다면, 그들이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와 비슷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면, 인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도저히, 도무지 인간이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가?', '저것이 인간인가?' 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만인의 행복과 평화를 파괴하더라도 나 하나의 즐거움을 누리려 하는 자들.

그들 역시 인간이라는 게 두렵고 또 화가 납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이 피해국들에 사과를 하고, 배상금을 치르느니 마느니 하는 소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사과도 배상도 잃어버린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라진 생명들을 되돌리지는 못했습니다.


 아우슈비츠에 들어간 사람들은 우스개처럼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들어갈 때는 문으로 들어가지만 나갈 때는 굴뚝으로만 나갈 수 있다."라고요.


'굴뚝으로 나간다'는 말은 소각되어 연기가 되어야 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죽는다는 거죠. 나가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아우슈비츠가 '죽음의 수용소'라 불리게 된 거고요. 


 아주 낙관할 수는 없지만 1945년의 아우슈비츠와 비교하면 헬조선 운운하는 대한민국은 아직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나아질지 어떨지를 결정짓는 건 지금부터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이죠. 


 이런 식으로 안도하게 되어 안타깝지만, 아직까지 대한민국은 우리의 노력과 수고로 우리를 살리는 것도, 구하는 것도 가능한 상황입니다. 이성을 잃어버린 것처럼,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 것처럼 막무가내로 구는 이들이 있지만 광기는 오래가지 못하는 법입니다.


 비록 인간을 죽이는 것이 인간이고, 인간을 파괴하는 것도 인간이지만, 인간을 구하는 것도 결국 인간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우리는 우리의 미래, 내일을 믿어야 합니다.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이 파괴되었다고 말한 프리모 레비는 오랜 시간 살아남아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전하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결국 자살하기 전까지 말 그대로 최선을 다해 더 나은 세상을 꿈꿨습니다. 


 개인, 한 인간이 역사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작고 또 사소합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이렇다, 인간은 저러해야 한다는 정해진 관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더 나아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인간, 역사의 주인들이 있을 뿐입니다.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인간성은 땅에 묻혔다. 혹은 그들 스스로, 모욕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줌으로써 그것을 땅에 묻어버렸다. 
<이것이 인간인가> 中

하지만 이어서 이렇게 적습니다.

하지만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았다. 그는 이 무화의 세상 밖에 있었다. 로렌초 덕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것이 인간인가> 中

로렌초는 수용소 수용자는 아닙니다. 이탈리아 노동자로 빵을 주거나 편지를 전해주는 일을 아무런 대가 없이 해준 한 사람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한 사람이 자신을 살게 했다고, 자신이 인간임을 잊지 않게 해줬다고 프리모 레비는 말합니다. 


 누군가는 모욕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합니다. 누군가는 인간임을 포기하고 얻는 이익을 위해 인간임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어떤 순간에도, 마지막까지도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인간입니다. 하나가 아닌, 서로 다른, 그것이 인간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빛이 밝아지면 그림자도 짙어지지만, 그림자가 아무리 짙어져도 빛은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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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처방해드립니다
카를로 프라베티 지음, 김민숙 옮김, 박혜림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책 추천을 넘어 책을 처방해주는 서점이 생겼더군요. 

"아, 이거 내가 하려고 했던 건데."하는 생각이 한편에 떠오르긴 했지만, 정말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서 역시 할 사람은 따로 있는 거라며 마음을 달랬습니다.(후후)


<책을 처방해 드립니다>는 사려고 했던 책이 아니었는데 읽어보다가 사게 된 책입니다. 

안 사려다가 산 이유는 '책'이라는 대상에 접근하는 '방식'이 독특했기 때문입니다. 

아, 이렇게 얘기해도 "뭔 소리야?"싶으실 테니 간략하게 줄거리를 먼저 적어보겠습니다.


 루크레시오라는 좀도둑이 하나 있습니다. 이 도둑은 친한 친구, 수프와 함께 한 집을 털기로 하고 약속을 합니다. 약속한 날, 약속한 시간에 루크는 그 집에 먼저 도착해서 친구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친구는 나타나지 않죠. 
 집이 비어있는 것처럼 보였고, 헛걸음을 하는 게 아쉬웠던 루크는 혼자서라도 집을 털기로 합니다. 그런데! 막 집에 들어가려던 순간 묘하게 생긴(묘하게 무서운?) 남자아이인지, 여자 아이인지 모를 아이에게 들켜버립니다. 
 처음에 루크는 힘없는 아이 하나쯤이야 하고 생각하고 무시하려고 하지만 애완견으로 키우는 거대한 늑대가 등장하자 깨갱하고 물러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아이는 루크를 보내기는커녕 자기 아버지를 대신해서 아빠 역할을 해야 한다고 부탁(협박)을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낯 모르는 아이의 아빠 역할을 하게 된 루크.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요? 점차 아빠 역할에도, 기이한 집에도 익숙해져 갑니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그렇게 간단히 흘러가지는 않죠. 거대한 늑대(85킬로그램)를 산책시키는 일과 칼비노(이상한 아이)를 병원까지 데려가는 일이 루크를 기다립니다. 
 루크는 병원에서 신기한 경험을 합니다. 정신병원이었는데, 환자들이 저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 속 인물들처럼 말하고, 행동했던 거죠. 마치 루크가 좀도둑이면서 칼비노의 아버지 역할을 하는 것처럼 자신들이 누구인지 자각하는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다. 

 아, 이러다가는 끝까지 다 얘기해버리겠네요. 아무튼, 마지막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반전까지 기다리고 있으니, 관심이 있으시면 슬쩍 읽어보시길. 얇고, 짧고, 쉽고, 은근히 재밌습니다.


 줄거리에서 살짝 언급한 것처럼 <책을 처방해 드립니다> 속 인물들은 어딘가 '모호함'을 품고 있습니다. 이중적 혹은 다중적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남자아이 같은가 하면 여자 아이처럼 보이고, 사납고 거칠 듯 보이면서도 소심하고 겁이 많습니다. 제정신인 듯하면서도 얼마간 미쳐있고, 미친 듯 보이지만 지극히 정상이죠. 

 

 이야기를 시작하며 꺼냈던 책에 접근하는 '독특한 방식'을 이제는 얘기할 수 있겠군요. 

<책을 처방해 드립니다>라는 제목이 핵심입니다. 루크가 칼비노와 함께 방문했던 '정신병원 도서관'에서는 환자들에게 책을 처방하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읽기를 권하는 게 아니라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을만한 인물이 등장하는 책을 찾을 때까지 말입니다. 여기까지는 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정신병자는 말 그대로 정신에 병이 있는 사람, 좀 더 해석하자면 자아를 잃어버린,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불안정한 상태 이기에 자신을 책 속 주인공이라고 '착각'하거나 '동일시'하는 거라고 말이죠. 

 그런데 이런 행동은 수동적인 반응도, 제어 불가능한 발작도 아닙니다.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환자 자신도 자신이 주인공과 다름을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는 상태죠. 자신이 주인공이 아님을 알면서도, 자신의 본래 모습을 인지하면서도 혼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상하겠죠. 이상한 상태라고 생각되겠죠. 이게 무슨 소리야 싶을지도 모릅니다. 좀 더 얘기해보죠.


 이 환자들은 스스로 이야기 속 인물들을 선택합니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합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어떻게 행동하나요? 물론 쓰인 대로 행동하고, 생각하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어떤가요? 스스로 생각하고,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떠오르는 걸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차이가 발생하는 거죠. 

 소설 속 인물들은 평면적입니다. 입체적으로 성격을 그린다고 해도 한계가 있죠. 하지만 그 인물을 자기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인물의 성격, 특징, 습관을 모두 갖춘 상태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됩니다. 이야기의 줄거리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거죠. 불안은 덜어질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 속 인물의 성격이나 습관, 특징은 고유한 상태로 존재하니까요. 혼란은 덜고, 자유로운 생각과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정신질환의 주된 원인은 불안입니다. 너무 불안하고 또 불안해서 끊임없이 걱정하고 근심하고 노심초사하다가 보면 지쳐서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는 거죠.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어 불안한 사람에게 확실한 존재를 부여한다는 게 <책을 처방해 드립니다>에서 책에 접근하는 독특한 방식입니다.


 혼란스러운 세상입니다. 믿을만한 사람도, 의지할만한 데도 거의 없죠. 그렇다 보니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보다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이 정상으로 보일 때도 적지 않습니다. 

 <책을 처방해 드립니다>에서는 책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결국에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건 사람이며, 사랑이라는 메시지도 놓치지 않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고 중대한 건 사랑의 문제입니다. 부자이거나 권력자 거나 힘이 세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약자가 될 수밖에 없죠. 결국 사랑의 문제라는 겁니다.


책을 처방하는 일, 전문가라는 공식적인 인증을 받은 건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어울리는, 맞는 이야기를 찾거나 발견하는 일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할 수 있습니다. 큰 도움은 아니더라도 댓글은 언제나 열려있으니 이야기 걸어주세요. 그럼 처방은 아니더라도 함께 고민해보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이 있나요? 호오, 저런.

시작해 볼까요? 

책을 처방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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