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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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5월도 끝.

여름은 시작도  했건만 자꾸 땀이 나고 낮에는 벌써 더위에 지친다. 

이런 날에는 시원한 얼음이나 추운 겨울을 떠올렸으면 좋으련만 실제로 떠올리는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소설이다.


혼자 지내기 좋은 계절이란 없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쩌면 한 걸음만 내딛는다면, 혹은 손만 내민다면 벗어날 수 있을 시간을 유예하고 있다. 마치 시간이 타버려서 재만 남기를 기다리듯, 마치 조금 뒤에는 시간의 재마저 흩어져 사라지기를 바라는 듯이. 
<미상> 시작


 이런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제대로  소설일 리가 없다. 그냥 꿈, 개꿈, 초여름밤의 신기루로 끝날 일이다. 하지만  꿈이 이유도 없이 괜히 꾸게   아니다. 이유는 있다.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다. 

어느 소설?

하루키의 소설이다.

『상실의 시대』라고도 하고, 『노르웨이의 숲』이라고도 하는 소설이다.

지금도  이야기가 다른  아는 사람이 있어서 말해두지만, 같은 이야기다. 같은 작가가 쓴, 제목만 달리  같은 작품이다.


 처음과 두 번째는 『상실의 시대』로 읽었다.  2 무렵이 처음이었고, 찾아보니 2013년이  번째였다.

세 번째는 『노르웨이의 숲』으로 읽었다. 같은 작품인데도 분위기가  다르다.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알아두면 좋을  같아 보태둔다.


 처음 읽었을 때의 기분, 생각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뭐, 보나 마나 섹스 장면마다 침을 삼키며 종이가 뚫어져라 읽었으리라. 하지만 섹스 장면만큼이나 인상 깊었던  있었다. 

 화자인 '나', 와타나베의 성격과 태도다. 이런 인간이 현실에 존재할  없다고 생각될 만큼, 독특했다. 일종의 동경 효과겠지만, 그런 독특한 와타나베의 모습에서 나와 닮은 점을 발견했을  무척 반갑고 위안이 됐다.


 고등학생 때 와타나베에게는 절친한 친구가 둘 있었다. 한 명은 기즈키다.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평범한 존재인 '나'와 기꺼이 어울리는 친구다. 둘도 없는 친구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다른 한 명은 나오코다. 기즈키의 여자 친구다. 

 기즈키와 나오코는 어려서부터 가까이 지냈으며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틀림없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갈 거였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비극이 찾아든다. 고 2, 열일곱. 기즈키는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죽어버린다. 자살이었다. 

 그 후로 2년, 와타나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이유로 고향을 떠난다. 나오코와도 연락하거나 만나지 않는다. 기즈키의 죽음이 와타나베의 일부를 죽음으로 끌고 들어갔고, 와타나베는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은 '쿨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우연이었을까, 어느  와타나베는 나오코와 재회한다. 기즈키의 죽음 이후 처음이었다. 우연한 만남 이후  사람은 오래, 많이 함께 걷는다. 도시 곳곳을, 여기저기를, 대화를 나누는 일도 없이 다만 걷고  걷는다.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뭐, 그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면 직접 읽어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다.


  『노르웨이의 숲』을 처음 읽으며 떠올린 생각 하나는 확실히 기억한다. 그때의 나를 사로잡았던 최대의 화두이자 바람이었던 소망이었으므로. 

 와타나베와 재회한 나오코는  가지 부탁을 한다. 그중  번째 부탁은 이런 거였다.


"나를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네 곁에 있었다는 걸 언제까지나 기억해줄래?"
『노르웨이의 숲』 중

그랬다. 

 열여덟 소년이었던 나는 누군가가 기억해주기를 바랐다. 나를 기억해줄 누군가를 찾고자 했다. 기억되는  살아가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느끼는 날도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런 바람을 잊고 살게 됐지만(정말, 기억되거나 잊히거나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잊고 지냈다), 그때는 그게  간절했다.


  다시 읽으며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고, 예전으로 돌아가기도 했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문득 옛날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고등학교 시절들. 뭔가 뒤죽박죽 엉망이라서  순간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기억의 홍수' 같은 거였다. 지나갈, 그런 혼란이었다.

  

 와타나베 주변에는 기이한 인물이 유난히 많은데 나가사와라는 인물도 무척 독특하다. 도쿄대 생으로 똑똑하고, 부유하지만 도덕성이 대단히 결여된,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인물이다. 이기적인 동시에 완고하고, 누구를 신뢰한다거나 누구에게 의지할 줄도 모르는 그런 남자다. 

 와타나베와 나가사와는 전혀 비슷하지 않음에도 서로에게 끌리는데, 나가사와는  이유를 둘이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점이다.

 "나와 와타나베가 닮은 점은 말이야, 자신에 대해 남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거야. 그런 점이 다른 인간들하고 달라. 다른 놈들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며 애를 태워. 그렇지만 나와 와타나베는 그렇지 않아. 이해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나, 남은 남이라고."
『노르웨이의 숲』 중

 확실히 둘은 닮았다. 나가사와가 말한 '이해'라는 측면에서 특히.  역시 나가사와의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했다. 하지만 동의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렇게 강한 인간은 못 되는 존재였으니까. 재밌는  나가사와의 말에 와타나베가 보탠 말이  생각에 무척 가깝다는 거다.

"설마요. 난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에요. 아무도 이해 안 해줘도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고 싶은 상대도 있는걸요. 다만 그 외 다른 사람들한테는 별로 이해받지 못한다 해도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체념하는 거죠. 그러니까 나가사와 선배가 말하듯이 아무한테도 이해받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노르웨이의 숲』 중

 이 정도다. 모두에게 이해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정말 이해받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할 때는 너무나 힘들고 쓸쓸해지고 마는 거였다.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조금  많은 사람과 어울리려고 하고, 조금  참게   달라졌을 뿐이다.


 하루키 작품은 '가벼움'을 넘어 '경박하다'거나 '천박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인물이, 이야기가 그런 혹평으로 가치를 잃는 일은 없다. 

『노르웨이의 숲』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불완전함이라는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종종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기도 하지만 그 역시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중요한 건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다. 불완전한 타인 혹은 나를 동정하지 않는 거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사랑하는 거다. 


 사실 방법은 그것 하나다. 

사랑하는 것.

예전에는 사랑이라는 결론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다만 허덕이며, 기억에 매달리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시간은 멈출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그래서   지나간  돌아오지 않는다. 억지로 되돌리려 해도 점점  멀어질 뿐이고,  빨리 지칠 뿐이고, 공허해질 뿐이다.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도, 오래 걸리더라도, 다만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희망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없다. 안타깝지만 대부분은  몰이해가 영원히 지속된다. 완전히 이해했다고 느끼는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그대로 '순간'에 불과한 것이 된다. 당연히  순간은 지나간다. 그리고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나가사와는 '이해'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넌 뭔가를 착각하는 것 같은데, 사람이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럴 만한 때에 이르렀기 때문이지 누군가가 상대에게 이해받기를 바라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야." 
『노르웨이의 숲』 중

 그랬다. 나가사와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해는 '받고 싶다'라고 해서 받을  있는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왔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인간인 이상 당연하지 않은가.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도, 불완전한 존재라도 이해받고 싶다고 느끼는  자연스러운  아닌가? 

그렇게 바라는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바람은 잘못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몹쓸 짓이었다. 

 이해는 바라거나, 구하는  아니라는 사실로 돌아가면 간단히 결론이 나오는 문제다. 


 누구에게나 그런 경험이 있으리라.

전혀, 영원히 이해할  없다고 느꼈던 사람이 한순간 '그런 거였나?'하는 생각과 함께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경험. 그런 거다. 대부분의 이해는 그렇게 조금 늦게, 예기치 않은 순간에,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찾아든다. 슬퍼할 일도, 안타까워할 일도  되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게 바로 이해다.


  2013년에 감상을 남긴 나는 '10년 후에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를 궁금해했다. 

4년 후의 '나'가 느낀  지금까지 적어 두었다. 이제 2013년의 나에 이어 2017년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다시 6년 후에 『노르웨이의 숲』을 읽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전혀 모르겠다. 감도 오지 않는다. 상상도   없다.

그런 거다. 

우리가 알거나 안다고 믿을  있는  모두 과거에 있다. 

미래를 걱정한다고 해도 달리 방법은 없다.

  

 기억해야    가지를 적어본다.

첫째,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

둘째, 불완전한 나지만 동정해서는  된다.

셋째,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라지 말아라.

넷째, 이해는 받고 싶다고 받아지는  아니다. 

다섯째, 사랑해야 한다. 무엇보다 나를.


 보통의 감상도 그렇지만  감상은 유난히 나를 위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 나를 위해 읽었고, 나를 위해 써낸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사랑하는 나의 편지와 다르지 않은 그런 이야기라는 얘기다.

  

 그나저나 『상실의 시대』는 애초에 의미가 전혀 달랐고, 『노르웨이의 숲』도 비틀스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노르웨이 목재 가구' 정도의 의미라는데. 무슨 말이냐 하면, 솔직히 제목은 아무래도 좋다는 거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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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6-09 15: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장물방울님,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독서모임 하루키가 책을 벌어다 주었네요 :>

대장물방울 2017-06-09 15:15   좋아요 0 | URL
오잉? 오, 몰랐는데 고맙습니당. ㅎㅎ
달궁독서모임 덕분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