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이민경 지음 / 봄알람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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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말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습니다. 

 비록 제가 페미니즘에 얼마쯤 관심이 있고, 관련 책을 몇 권쯤 찾아 읽었으며, 차별적인 행위들에 분노를 표하고, 들리는 이야기에 공감하고,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고 해도 스스로 페미니스트를 자처하거나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제목을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적었는가 하면, 이 책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의 말미에 이런 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즘이란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권력의 불균형을 바로잡으려는 움직임일 뿐이며, 페미니스트는 그저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중

페미니즘을 설명하고 논쟁에 지지 않을 만큼의 지식과 논리를 갖추고, 어디에서 열리는 집회나 강연에 참석하지 않아도, 성별에서 발생한 권력의 불균형을 인정하고, 그 불균형이 만들어낸 온갖 어려움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며, 마침내는 그 불균형이 사라지기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제 이해가 아주 틀리지 않았기를 바라지만, 혹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다면 꼭 바로 잡아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한 데에는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이유는 제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만들어 주었습니다. 


"누구는 페미니스트야."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 거죠.


별 거 없습니다. 

그래서입니다.

이번 기회에 페미니스트가 되어보기로 한 거죠.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를 읽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온라인 서점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책에 달린 평을 읽게 된 거죠. 재밌는 현상을 발견했는데, '구매'라고 적힌 글들은 하나같이 평점이 높은데 반해 '구매'가 없이 적은 글들은 '별 하나도 아깝다'라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던 거죠. 내용도 비슷비슷해서 평점이 높은 글들은 '꼭 읽어보라'라고 권하는 반면 평점이 낮은 글들은 내용은 물론 책 자체를 폄하하고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흥미가 생기더군요. 

 '이건 꼭 읽어봐야 해'라는 생각으로 바로 주문을 했고, 그렇게 빨리 오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당일 배송으로 저녁에 받게 됐습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에 붙은 부제는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입니다. 부제에 걸맞게 '대화를 하다가 말문이 막힐 때 바로 쓸 수 있는 실전용 매뉴얼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라고 소개하고 있죠. 하지만 이 책의 진짜 시작은 '대화법'이 아니라 '대화하지 않아도 된다'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누군가 대화를 시도한다고 해서, 질문을 던진다고 해서 반드시 받아줘야 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상대에 따라, 대화할 준비가 되지 않았거나, 자신이 대화할 상태가 아니라면 단호히 거절할 수 있음을 전하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겁니다. 우리는 종종 원치 않는 대화를, 내키지 않는 상대와, 원하지 않는 순간에 하기도 합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로 나쁘거나 무례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거나,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응하게 되거나, 상대를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싶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라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반드시 사라져야 할 상황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외의 순간에 대화의 주도권, 선택권은 '나'에게 있음을 알려주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거죠.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강하며, 심지어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논쟁을 하는 건 너무나 힘겨운 일이며 설사 그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거나, 납득시켰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너무 지치게 되거나 반대로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면 그 대화는 득 보다 실이 더 컸다는 겁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는 실전 매뉴얼답게 여성들이 흔히 마주하게 되는 차별적인 대화의 상황에서의 대처 요령을 다양한 상황에 맞게 알려줍니다. 언제든 대화를 끝낼 수 있으며, 처음부터 대화에 응하지 않을 권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전제로요. 


 저는 남자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태어나 남자로 자랐습니다. 스스로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남성 중심 사회의 분위기에서 살며 오랫동안, 마치 공기처럼 차별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모른 척 외면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텐데 나 하나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던 거죠. 나름 배려한다는 생각이 남자니까 여자를 보호하고 도와야 한다는 수준이었으니 한심했습니다. 


 페미니즘, 차별, 혐오에 관심이 생기면서 몇 권인가의 책을 읽어도 보고 얘기도 나누며 현실을 조금 더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 '안다'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를 읽으며 제일 크게 느낀 건 부끄러움이었는데, 저 역시 가해자라는 신분에서 자유롭지도 떳떳하지도 못함을 순간순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호감을 표현하는 거라며 잡았던 손목, 툭툭 어깨를 두드리는 식의 스킨십, 자연스럽게 내뱉곤 하던 반말. 

 격의 없고 친밀한 사이라면 조금 다르겠지만(그런 사이라고 해도 조심해야겠고) 흔히 여성들이 겪는 당황스럽고, 두렵고, 수치스러운 상황을 만들어낸 배경은 성별에 따른 불평등, 요즘에 대두된 '여성 혐오'의 문제가 가장 결정적입니다. 혐오라는 표현에 이의를 달고, 불만을 제기하는 이들이 존재함에도 혐오는 실재하는 현상이지 과장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특히 남성들이 '혐오'라는 표현을 거슬려하는데 저자의 논리는 단순합니다. 


 '당신이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다면, 혐오라는 말을 불쾌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도 맞는 말로, 지적할 곳이 없는 말이죠. 이 '혐오'라는 표현을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혐오'가 만연한 증거라는 거죠. 


 제가 뭘 잘 모르고 하는 말이라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텐데, 어차피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라면 시작부터 '무슨 소리야?' 싶었을 테고, 그나마 맥락을 이해하는 분들이라면 제 어지러운 말을 나름대로 정리해서 이해해 주시리라 믿고 조금 더 이야기를 적어보겠습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를 읽는 동안 많은 순간에 '성 불평등'을 경험했습니다. 쉬운 예부터 들자면 저는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일이 잦습니다. 때로는 아무도 없는 길을 걷게 될 때도 있고 종종 가로등이 꺼진 곳을 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들에, 그 많은 날들에 두려움이나 걱정에 시달린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정말 사이코패스가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나서 칼이라도 휘두르지 않을까 하는 극단적인 상상아 아니라면 일상 속에서 공포를 느낄 일은 없었던 거죠. 하지만 여성들에게는 그 모든 순간이 위험이고 공포라고 합니다. 

 책에서 거듭 언급하는 사례가 '모든 남자가 잠재적인 범죄자는 아니다'라는 논리인데, 여성에게는 그 논리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억지나 다름없다는 겁니다. 일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체력과 근력에서 남성이 여성을 압도한다는 건 부정하기 힘든 사실입니다. 너무 많은 상황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과 곤란을 겪어 왔기에 남성의 논리로 여성을 안심시키고 설득하겠다는 건 여성의 경험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겁니다. 한 번도 여성으로 살아본 적 없는 남성이, 여성의 경험을 무시하고 조언하고 설득하며 가르치려고 든다는 것부터 문제라는 거죠.


 이런 상황도 있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 1층에는 짜글이 집이 있습니다. 10시에 가까운 시간이었고, 사장님은 영업을 끝내고 가게를 정리하고 계셨죠. 그냥 봐도 손님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중년 남자 셋이 가게로 향하더군요. 그러더니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아줌마, 영업 끝났어요?"

사장님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 상황이면 아직 영업 중인 다른 식당을 찾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싶었는데 그 남자분들의 상식은 좀 달랐던 모양입니다. 먼저 물었던 사람이 다시 말을 던집니다.

"아, 여기서 좀 먹고 가면 안 돼요?"

'돼요?'였는지 '되나?'였는지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몇 번 더 물어보면 먹을 수 있게 될 거라고 믿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장님은 물론 곤란해했습니다. 영업이 끝났다고 하는데 다짜고짜 안 되면 되게 하라 식으로 거듭 물어오는 아저씨가 불편했겠죠. 제가 본 건 거기까지였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가게 주인이 남자였다면, 그 중년 남자들은 영업하느냐고 물어봤을까?'

'물어봤다고 해도 안 된다고 했을 때 거듭 물어봤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안 그랬을 거다. 

 

 데이트 폭력으로 목숨을 잃는 여성 이야기가 자꾸만 들린다. 그동안 그런 사건이 없었다기보다 공론화되지 않던 사건들이 최근에 더 자주 노출된 거라고 생각한다. 한 의원은 데이트 폭력 방지 법안을 제출했다고 한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에서는 '여성 혐오'논란에 '남성 혐오'로 맞서는 이들의 논리도 이야기한다. 하지만 두 가지, '여성 혐오'와 '남성 혐오'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으며, '남성 혐오'의 결과는 기분이 상할 뿐이지만 '여성 혐오'의 결과는 목숨을 잃는다는 거였다. 이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현실이다. 작은 기득권조차 내려놓지 않으려는 남성들, 차별과 혐오의 존재를 부정하며 부추기거나 방관하거나 자행하는 사람들. 그들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언어가 절실하다는 거다.


 사실 나는 스스로 페미니스트를 자처하기에는, 선언하기에는 부족한 '남자'다.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려는 일이 적지 않고, 이런저런 이유 혹은 핑계를 만들기도 하며, 합리화하거나 내 생각 중심의 논리로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여성의 처지에 놓여본 일이 없으면서 아는 척, 공감하는 척, 이해하는 척하기도 한다. 물론 노력하고 있다는 건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거리, 격차는 존재한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러한 사실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게 고작이다. 


내 손으로 평등을 완성하겠다거나 불평등을 해소하겠다거나 혐오를 일소하겠다는 포부 같은 건 없다. 앞장서서 시위를 할 계획도 없고, 그래야 한다는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나는 다만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내 손바닥만큼의 페미니즘을 실천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내 손바닥, 손에 잡히고 팔로 안을 수 있을 만큼의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사람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면 나는 역시 페미니스트다. 

 내가 원하지 않았어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불평등과 차별이 만들어 낸 혜택의 수혜자로 자랐음을 안다. 반성해야 할 게 한 가지 더 떠올랐는데, 이것도 참 부끄러운 이야기다.


 <82년생 김지영>의 감상에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잔뜩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고는 나름 만족하고 있었을 때였다. 어떤 분이 댓글을 남겨주셨는데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글 쓴 분의 여성관이 어떤 건지, 오히려 그 여성관에 사로 잡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82년생 김지영>의 감상문 제목은 '여자는 그래도 되는 존재가 아니다'다. 함정에 빠졌던 거다. 착각하고 있던 거다. 잔뜩 공정한 척, 깨어있는 척, 허영에 부풀었던 거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건 잘못이었던 거다.

 당시에는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부인했다. 내가 쓴 글을 곡해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를 읽으며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과연 곡해한 건 누구였는가.

 

 결론은 의도적인 건 아니었다 해도 얼마간 반성해야 할 만큼의 여지는 있었다는 거였다. 분명 감상을 쓰던 순간의 나는 어떤 '여성관'을 갖고 글을 썼으며, 그 '여성관'이 결코 완전히 평등하다고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그때 감상을 쓰는 이유를 그때의 생각, 깨달음, 의지, 해석을 기록하고 싶어서였다고 말하곤 했는데 만약 그 생각이 잘못이었다면, 그래서 그 생각으로 누군가가 상처를 받았다면, 그래도 나는 자유라고 말하며 '나의 자유'를 행사해도 되는 걸까. 정말 오랜만에 내 생각을 쓰는 자유에 회의를 느꼈다. 참, 새삼스럽게 두껍지도 않은 책 한 권을 읽으며 많은 걸 생각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앞으로 조금 더 말과 행동, 글에 주의를 기울일 거고, 잘못이나 실수가 있다면 정정할 것이며, 조금 더 읽고, 듣고, 배우고, 이야기 나눔으로써 부족함을 채워나갈 거다. 이게 이 책을 덮으며 떠올린 생각이었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할 말은 많은데 논리에서 자꾸 말문이 막혀서 답답한 이들이 읽고 연습한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속 시원히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딱 내 손바닥만큼, 아직 나는 내 손바닥만한 페미니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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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 2019-08-25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본인이 쓰신 글 맞나요? 안녕하세요. 눈치보여서 댓글 달기가 무서웠는데.. 역시 알라딘이라 그런가.. 타 온라인과는 다르게 책을 가까이두는 지성인이 많아 그런지 글들을 보면 신사숙녀가 많네요. 댓글을 달아도 안심됩니다.. 사실 이런 내용을 입안으로 꾹꾹 눌러담고 산지 십여년이 된 것 같네요. 입밖으로 꺼낸지가 언젠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실제로 현실에선 여자가 성폭행을 당해도 여자를 욕합니다. 제가 실제로 여러일을 겪고 살면서 버팀으로 버티고 있는 산증인입니다.동정? 실제론 그런거 없습니다. 더한일을 겪으면 겪었죠. 세상, 생각보다 미화된 일이 많고. 생각보다 아픕니다. 그런 세상에서 이런 사상을 가진 남성분이 있다니 놀라울따름입니다. 현실에선 페미니스트란 말도 못꺼내요. 안좋게봐요. 눈치만 보고 제 몸 사리게 되는데.. 감동받고 용기도 얻고 갑니다. 멋지십니다.

대장물방울 2019-09-18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감동까지,,
한참 멀고 멀지만 그래도 계속 노력해보려고 합니다.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감사합니다.

2020-06-11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이민경 지음 / 봄알람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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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평만 봐도 별3개 이하를 준 사람들은 ‘구매‘ 확인이 안 되는 사람들인 반면, 실제 구매한 것으로 표시되는 ‘읽은 것‘이라고 추측되는 이들의 별점이 높은 걸 보며 이 책은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극명한 문제는 들여다볼만 하다. 예상별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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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센터로 2020-07-11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도서관에서 봤을 수 도 있다고 생각하며 나같은 경우에도 도서관에서 이상한 책 있으면 알라딘이나 교보문고앱에다가 쳐서 댓 올릴때있음... 그리고 다른생각 가졌다고 틀린생각이라고 받아드리면서 그걸 강요하는건 좀...

대장물방울 2020-07-16 01:24   좋아요 0 | URL
논지를 벗어난 댓글입니다. 댓글을 쓸 생각이면 자기 관점에서 판단하지 말고 댓글 관점에서 해석하시길 권할게요. 굳이 짚어드리면, 제 글 어디에도 누군가 ‘틀렸다’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음에도 스스로 ‘틀렸다고 말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부터 억지스럽고 덧붙이면 ‘들여다볼만 하다’는 평이 강요라고 느끼는 것도 지나친 비약.
 
우리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37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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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 쓰기를 멈춘 지 16일째인 오늘, 새삼스레 '어떻게 쓰는 거더라?'하는 당황 섞인 반문을 던지고 말았다. 

아, 읽기든 쓰기든 꾸준히 계속하는  중요함을 다시 깨닫는다. 


 한 시간 넘게 방황을 하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쓰기 시작한다. 

흐려진 기억을 더듬으며, 잊어버린 이야기를 떠올리며. 

시작.


 나는  세상에서 나보다  중요한  만들고 싶지 않다. 

과거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적어도 지금은, 앞으로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고  명료하다. 

 내가 없다면 세상도 없고, 설혹 있다 해도 무의미하므로.


이런 나이기에 자먀찐이 만들어낸 세계는 지옥의 풍경처럼 들이닥쳤다.

개인보다 전체가, 자유보다 하나가  중요한 세계. 

저마다 개성을 추구하고, 자유를 누리던 과거를 미개하다 말하는 세계가 '우리들'의 세계다.


『우리들』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대는 지금, 21세기로부터 적어도 천 년 이후다. 200년 간 지속된 전쟁으로 세계 인구의 10분의 2만이 살아남게 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외부와 격리된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벌인다. 그 결과 현재의 세계, 『우리들』의 시대에 이르게 된다. 

 『우리들』의 세계는 자유도 소유도 사랑도 없다.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보여준 세계와 무척 닮아있다. 시기 상으로는 올더스 헉슬리보다 자먀찐이  앞서 있기에, 자먀찐의 세계관에 올더스 헉슬리가 영향을 받았다고 봐야겠다. 

 디스토피아 소설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조지 오웰의 <1984>. 성적 쾌락이 제한된 <1984>와 달리 『우리들』의 세계에서는 쾌락이 권장된다. <멋진 신세계>가 떠오르는 부분이다. 그러나 자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시간과 방법, 장소가 제한되어 있고, 반드시 신청을 거쳐야만 한다. 질투나 소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나' 혹은 '개인'이 아닌 '우리'이기에 우리는 나의 것도, 너의 것도   없다. 

 자유를 추구하는  미개하고, 야만적인 일이기에 통제받는 데서 오는 거부감도 없다. 

주인공에게는 이름이 없다. 다만 D-503이라는 숫자가 있을 뿐. 무슨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역시 아무 의미도 없는 편이  소설에  어울린다. 의미를 부여한 순간 개성이 생겨버릴 테니.

 D-503은 우주선 '인쩨그랄호'를 설계하는 수학자다.  세계에 아무런 불만도, 위화감도 없이 하루하루 생활과 일에 만족하며 자부심까지 느끼며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런 생활에 위기가 닥쳐온다.  남자의 인생이 위기 혹은 변화를 맞는 이유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조금 식상한 이야기일  있지만 사랑에 빠졌을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D-503도 그랬다. I-330이라는 여자가 그의 인생에 뛰어들면서 만족도, 평화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D-503이 느끼는 감정은 사랑인지, 사랑이라면  사랑이 그의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개성도, 자유도 없는 세계에서 변하는  가능하기는  건지. 이야기는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궁금하다면 읽어보기를.


『우리들』은 앞에서 이야기한 <1984>나 <멋진 신세계>보다 적게는 10년, 많게는 30년 가까이 일찍 발표된 작품이다. 1920년에 완성됐지만 러시아에서 발표되지 못하고, 영역본으로 출간되어야 했던 불운을 겪은 작품이기도 하다. 실제로 조지 오웰의 <1984>에 영향을 줬다고 하는데, 『우리들』에 나오는 '은혜로운 분'과 '보안 요원'들은 <1984>  빅브라더와 사상 경찰을 떠올리게 한다. 


100여 년 전에 완성된 소설에 공감하게 되는  '개인의 소멸은 미래 이야기일까?'라는 물음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장이 있다.

사소함에서 위대함으로 이어지는 당연한 길은 자신이 그램이라는 사실을 잊고 1톤의 백만 분의 1 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들』중

1그램은 백만 분의 1톤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1톤은 백만 개의 1그램이 더해진 결과다. 이건 1+1=2라는 결과와 다름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1그램은 1그램이 아니다. 자신이 그램이라는 사실은 잊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램이 아니라 백만분의 1톤이기에. 

 이중사고를 아는 사람이라면 납득할  있으리라. 내가 '나'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우리가 '나'가 모여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잊어버리는 거다. 그리고 '나'가 모여 '우리'가  후에는 내가 '나'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거다. 결국 남는  '우리'가 된다. '나'는 있으나 없는 존재가 되는 거다. 


 전체주의 사상과 함께 눈에 띄는  '기계'의 등장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도 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다.

인간화한 기계와 기계화한 인간은 결국 동일한 것이다.
『우리들』중

인공지능과 기계 발전이 인간의 지위를 위협하게  지금에  크게 와 닿을 문장이다. 적어도 현재,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인간'같은 '기계'와 '기계'같은 '인간'이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하지만 지금도 온라인 상에서는 인간과 기계의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고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조금  시간이 흐른 미래에, 인간과 기계가 동일한 존재처럼 여겨지는  불가능할  뭔가?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유토피아란 '어디에도 없음'을 뜻한다. 뒤집어 생각하면 유토피아의 반대 개념인 디스토피아도 존재할  없는  된다. 전제가 되는 유토피아가 없이 전제에서 확장된 디스토피아가 존재할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무 불안해하거나 미리 절망하지는 말기를.

 <유토피아>를 언급했으니   이야기하자면, 유토피아를 읽으며 가장 의아했던 존재가 바로 '노예'였다. 일하지 않으면 먹을  생기지 않는 법이다. 누구도 가축을 치지 않고, 농사를 짓지 않으며, 식사를 준비하지 않는데 어떻게 먹을  생길  있겠는가? 하늘에서 떨어진다면 모를까.

 유토피아에도 범죄자와 포로는 존재한다. 그들은 벌로써 노예 생활을 하게 된다.

차별 없이, 모두가 천국에서의 생활을 하는  적어도 지상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격차가 크게 벌어지는 것보다는  비슷비슷할  상대적 박탈감이나 불만족이 적어진다. 


 결국 1920년에 완성된 『우리들』이 러시아에서 출간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존의 세계를 전복하려는 혁명 세력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이야기는 권력자들이 좋아할 이야기가 못됐던 거다. 특히 혁명으로 세계를  전복시킨 권력자들이라면 더욱더 경계했을  분명하다. 


개성과 인격을 스스로 말살시키고, 자유로 내팽개치고 전체, '우리'의 삶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시대. 

언젠가 그런 시대가 정말 찾아올까. 

은연중에 강요되고 추종되는  하나의 진리,   사람의 위대한 존재. 

그런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세계가 정말 열릴  있을까.


 다시 말하지만 나에게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소중하다. 

우리들 같은 건,  다음의 문제일 뿐.

오래간만에 감상문을 적었더니 정말 터무니없는 횡설수설만 늘어놓고 말았다.

이래서 꾸준히 적어나가는  그렇게 중요하다고 하는 거란  새삼 깨닫는다.


 디스토피아 소설의 효시라 일컬어지는 『우리들』.

감상은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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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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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과 어머니의 근친상간.

형제 살해.

남편 살해.

그 모든 공모와 과정, 결말까지를 지켜보는 무력한 아들.

『넛셸』은 이야기 속 인물과 사건의 발단, 진행, 결말까지 셰익스피어 희곡 『햄릿』과 닮아 있습니다.

 작가 이언 매큐언의 생각, 출판사의 의지가 어떻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생각이기에  이 소설이『햄릿』을 재해석한 것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읽은 이, 독자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고 땅콩 아니, 호두 얘기부터 해야겠습니다.


 호두는 영양가 높은 견과류의 하나죠. 뇌와 닮은 알맹이 모양이 불쾌할 법도 한데 두뇌 발달에 좋은 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다는 결과로 오히려 그렇게 생길만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게 조금 우습기도 합니다.

 사람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듯, 호두는 나무에서 열립니다.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어서 수정이 된 결과 호두 열매가 맺히죠. 처음 열린 열매에서 적당한 숫자가 떨어지고 남은 열매만이 영글어 호두가 됩니다. 

이런 거야 뭐, 다 아는 얘기죠. 


 호두나무 생각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인간이 보기에 호두나무는 의지도 없고, 사고도 불가능하기에 큰 차이가 생겨납니다. 『넛셸』을 염두에 두고 두 가지 정도만 적어보기로 합니다.


 첫째, 호두나무는 개개의 호두 열매를 걱정하거나 마음 쏟지 않습니다. 수정이 안 되면 썩고, 바람을 견디지 못하면 떨어지죠. 마지막까지 나무에 붙어 있었다 해도 다람쥐 같은 천적을 막지는 못합니다. 결국 정말 많은 열매 중에 일부만이 영근 호두가 되고, 그중 극히 일부만이 뿌리를 내려 호두나무가 됩니다. 

 호두나무에게는 모정이란 게 없습니다. 뿌리내리고 열매 맺기를 매해 거듭할 뿐이죠.

 어머니는 다릅니다(모든 어머니가 그렇지 않을 수 있다지만). 자기 안에서 자라나는 생명을 느끼고, 염려하며, 생각하고 마음을 씁니다. 약물이나 담배, 알코올을 자제하고, 나쁜 이야기를 하거나 듣는 것도 피하죠. 

 어머니는 아이의 완벽한 보호자가 되어 줍니다. 그 차이를 증명하는 하나의 근거가 호두의 껍질입니다. 호두는 두툼한 겉껍질과 단단한 속껍질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태아는 무르고 연약한 상태로 자라고, 태어나죠. 그 차이를 만든 결정적인 원인은  생물학의 특성이겠지만, 존재 본질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둘째, 호두나무에 열린 호두 열매는 발생부터 영글 때까지 전적으로 무기력합니다. 양분이 적게 올라온다고 투덜댈 수 없고, 위치가 불편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움직일 수도 없으며, 호두나무에게 자기 존재를 인식시킬 수도 없습니다. 비와 바람의 위협에 스스로 맞서고 지켜야 하며, 보호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죠. 

 호두 열매에게는 애착이란 게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지나, 영글어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뿐이죠.

 태아는 다릅니다. 일정 단계 이상으로 발달하면 어머니에게 직접적으로 신호를 보낼 수 있게 됩니다. 태동이라는 방법으로요. 어머니의 언행, 즐겨 듣는 음악, 좋아하는 음식에 반응함으로써 어머니의 행동, 습관, 취향을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입덧이라는 방법이죠.


그런데 만약, 이 두 가지에서 인간과 호두나무 사이에 차이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호두나무가 호두 열매에 마음을 쏟지 않듯 어머니가 태아에게 마음을 쏟지 않고, 호두 열매가 호두나무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듯 태아의 모든 의지가 묵살되고 거부된다면요?

뱃속의 아이가 어머니에게 단순한 장해물, 방해꾼, 귀찮은 짐덩어리가 된다면요?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순간 이야기가 시작되게 됩니다.

바로 『넛셸』이야기가요.


 시작하며 적었듯 이야기는 제법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습니다. 만삭에 가까운 어머니는 아버지의 동생, 태아의 삼촌과 불륜을 맺고 있습니다. 태아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사랑이 클수록 어머니는 아버지를 역겨워하고 보기 싫어하죠. 어머니가 사랑 대신 선택한  삼촌과의 욕망과 쾌락입니다. 만삭이 가까워진 시기에 섹스를 피하거나 조심해야 함에도 격렬한 관계를 계속 갖죠. 

 이쯤에서 이름을 밝히자면, 어머니의 이름은 트루디, 아버지는  케언크로스, 삼촌은 클로드입니다. 

이야기는 아버지,  케언크로스 살해 모의로 시작합니다. 어머니 트루디가 가담하고, 어쩔  없이 태아인 '나'까지 휩쓸린 살인 계획으로. 투루디는 얼마간 망설이는 듯 보이지만 마음을 굳힌 뒤로는 뱃속의 태아를 전혀 배려하지 않습니다. 호두나무가 호두 열매를 생각하지 않듯이.

 태아가 호두 열매 취급을 받게 되면   있는  거의 없어집니다. 고작 이런  가능할 뿐이죠.


생각해보라. 태아가 하는 일이라곤 존재하고 성장하는 것뿐이고, 성장도 의식적인 행위라고 하긴 어렵다. 순수한 존재의 기쁨, 별다르지 않은 나날의 지루함. 연장된 희열은 곧 실존적 권태다. 여기 갇힌 시간이 감옥살이가 되어선 안 된다. 나는 여기서 고독의 특권과 사치를 누려야 한다.
『넛셸』중

태아는 양막에 싸여 가죽  장에 불과하지만 벗어날  없는  속에 갇혀서 단지 영양을 공급받으며 타의에 의해 성장할 수 있을 뿐입니다. 거기엔 기쁨도, 희망도, 미래도 없죠.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실존의 권태에 시달려야 하는 절망.  절망 속에서 홀로 떨어야만 하는 겁니다. 

 호두 열매는 영글어 땅에 떨어진 다음, 싹을 틔울  비로소 단단한 껍질을 벗습니다.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린다고 해서 호두나무로 성장할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갇힌 세계에서 생명으로, 독립된 개체로 존재할  있게 되는 거죠. 인간은 어머니의 뱃속을 떠나서야, 세상에 태어나서야 완전한 생명으로, 존재로 인정받게 됩니다. <데미안>에서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고, 알이 깨어져야 새가 된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죠. 

 호두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호두 열매가 싹을 틔우고, 태아가 태어난 다음의 이야기를 저로서는 상상할  없으니까요.


 『햄릿』이야기를 조금 할까 했는데, 그전에 '사고하고 고뇌하는 태아의 존재'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넛셸』을 함께 읽을 독서 모임 회원  분은  이야기의 배경, 화자가 뱃속의 태아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언 매큐언은 낙태에 반대하는 모양이다."라고요.

 정말 그럴까 싶기는 하지만 들어보면 설득력이 있는 말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존재, 뱃속의 태아가 사고하고 고뇌하며 고통과 권태를 느낄  있다면, 그의 존재와 권리는 인정받고 보호되어 마땅합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분명히 무시할  없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깊이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미뤄뒀던 『햄릿』얘기를 조금 하고 감상을 마치기로 하죠.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서는 아버지인 살해된 왕이 유령으로 나타나 햄릿에게 진실을 일깨웁니다. 햄릿은 고뇌하지만 결국 아버지의 복수를 결심하죠.  실행의 결과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그대로의 비극입니다. 

 햄릿이 복수를 포기했거나, 절망과 치욕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결말은 달라졌을 겁니다. 작가의  앞에서 햄릿은 호두 열매처럼 무력했겠지만요.


『햄릿』을 모른다고 해도 『넛셸』을 읽는 데 지장은 없습니다. 흔히 뉴스를 통해 접하는 비정한 살인 사건과 의 전말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딱 하나, 뱃속의 태아가 그 사건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요. 하지만 『햄릿』을 안다면 작가가 이야기 곳곳에 숨겨둔 장치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덤으로 얻을  있을 겁니다. 

  

왜 이 이야기의 제목이 『넛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알게 될 수도 있고, 영영 모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야기 앞에서 호두 열매처럼 무력하니까요. 

언젠가 두툼한 겉껍질과 단단한 속껍질을 벗고 세상과 마주할 용기가 생긴다면, 그때는 조금  고민해봐도 좋겠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문제가 나의 것이 아님에 조금은 안도하고 감사하며, 감상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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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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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조나단 노엘.

직업, 은행 경비원.

나이, 50대.

소원, 7.5평방미터짜리 아파트를 소유하여 남은 평생을 평화롭게 지내기.

가족 관계, 이민  누이동생.

친구, 특정한 인물 없음.

인생 최대 위기, 출근을 준비하던 아침, 아파트 복도에 들어와 있는 비둘기와 마주친 일.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세상이 끝나버린  절망하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사람들이 나약하다거나, 유난히 비관적인  아닙니다. 

단지, 조금  예민하고, 섬세하며, 일상이라는 평화를 몹시 아끼고 사랑하고 있을 뿐이죠.

일상이 너무 소중해서, 영원히 흐트러지지 않기를, 변하거나 끝나지 않기를 몹시도 바랄 뿐입니다.


 조나단 노엘 역시 그런 사람의 하나입니다.

오래전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고, 누이동생과도 헤어진 뒤에 마지막으로 믿었던   아내였던 여자의 배신을 경험한 이후, 조나단은 더는 세상에 많은  바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소박하고  소박하게, 다만 지금 살고 있는 7.5평방미터짜리 아파트를 자기 소유로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30년 넘게 해온,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경비 일에서 퇴직하는 날을 기다리며,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전부죠.


 인생 최대의 위기가 찾아온 건, 어느 평화로운 금요일 아침입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화장실에 가려던 조나단은 복도  복판에 앉아 있는 비둘기  마리에 얼어붙고 맙니다. 

 고작 비둘기  마리.

어디에나 있는 회색 날짐승 하나가  인간을 절망으로 몰아넣는데 걸린 시간은 순식간이었습니다.

조나단은 30년 넘게 살아온 집을 영원히 떠날 생각, 불안, 초조, 긴장, 좌절, 절망, 죽음까지를 생각하죠. 


  오래전에는, 사실은 얼마 전까지도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조나단을 나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작, 비둘기  마리인데.'하고요.

조나단이 삶을 그리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비둘기  마리 때문에 포기할 정도의 삶이니까요. 

그런데 오늘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조나단은, 자기의 삶, 쓸쓸할 만큼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너무나 사랑했던  아닐까."


 다른 사람, 세상,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쓸쓸하고 외로워 보여서 비참하게 느껴지는 삶이라고 해도 당사자에게는 너무나 소중해서 잃고 싶지 않은 삶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독하고 고독해서, 위태로워 보일 정도의 삶이라고 해도 말이죠.


나는 <비둘기>에서 너무나 작고, 사소해서 무시하기 쉬운 삶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평소라면 너무나 당연했을, 그래서 고마움은커녕 번거롭고 귀찮게 여겼을 일들조차 소중하게 느끼게 됩니다. 

당연할 거라 믿었던 내일, 계속될 거라 믿었던 일상이 얼마나 간단히 부서질  있는지 깨닫습니다.

 순식간에 불안에 집어삼켜졌다가,   아닌 일을 계기로 회복할  있음도 알게 됩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행복이라고 이름 짓는 일들의 허허로움과 착각에 생각이 닿습니다.

행복은 불변하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거죠.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책 속의 이야기, 누군가의 일화를 더하면 감상을 얼마든지 늘일 수도 있겠지만 그만 두기로 합니다.

<비둘기>는 짧은 이야기입니다.

 시간, 길어도 하루면 충분히 읽을  있으며 어렵거나 복잡한 이해를 요구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집채만 한 바위가 아니라 작은 돌부리에도 우리는 간단히 균형을 잃어버립니다. 때로는 넘어져 다치기도 하죠. 

하지만 너무나 운이 나쁘지만 않다면 보통은 조금 다치는 정도에서 털고 일어날  있습니다. 운이 좋다면 작은 돌부리 덕에  바위를 피할 수도 있겠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롭기만 한 삶도 좋을 겁니다. 

그러나 가끔 일어나는 예기치 못한 사건들, 작은 위기들을 넘어서는 경험은 우리가 잊고 지낸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떠올리게 도와줄 거예요.


다른   포기해도 좋습니다마는, 자신만은 간단히 포기하지 마세요. 

비둘기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언제든 날아들 수 있습니다. 

비둘기는 자기 삶을 열심히 살아갈 뿐, 누구를 훼방하거나 위협하거나 놀라게 하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나의 삶과, 나의 일상과, 나의 지금과,  모두를 더한 나를 사랑하시길 바라요.


불안도, 두려움도, 사랑도, 모두 나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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