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 픽션 : 파리 시티 픽션
기 드 모파상.드니 디드로 지음, 이규현 옮김 / 창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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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전을 통한 세계여행이라는 주제 아래 런던을 비롯 파리, 뉴욕 등 다섯 도시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 한 두 편씩을 수록하여 구성된 콤팩트(compact)한 작품집이며, 그 중 파리 편이다. 단편소설의 대가인 19세기 사실주의 소설가 기 드 모파상과 백과전서파의 대표자인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소설가인 드니 디드로의 한 작품씩으로 구성된 시티픽션; 파리(Paris)는 지나칠 만큼 부담없이 얇은 책이기에 집어 들었다. 보다 실질적 이유는 디드로의 실험정신의 한 면모를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디드로를 말하기 전에 모파상의 단편 ; 악몽 (La nuit)의 간략한 감상으로 먼저 시작해야겠다.


; 악몽 (La nuit)

 

나는 밤을 열렬히 사랑한다. [....] 애인을 사랑하듯 본능적이고 물리칠 수 없는

깊은 애정으로 밤을 사랑한다.” - ; 악몽 (La nuit)의 시작 문장에서

 

모파상의 이 단편은 그가 정신질환을 앓기 시작한 후기 작품 중의 한 편인 것 같다. 애드거 앨런 포 류()의 공포와 지옥의 심연에 빠져드는 자기 영혼에 탐닉하는 인물을 본다. 위의 인용 문장처럼 이런 소설의 아주 전형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아마 지옥을 개발해 나가려는 부정적 상상력, 점진적으로 흉가(凶家)화 되어가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탐닉하는데 즐거움을 찾는 독자에게는 인상적일 작품이다.

 

밤의 정적과 어둠, 캄캄한 무한한 공간에 도취되며 낮의 떠들썩함, 아침이 밝아오는 빛의 힘겨움과 불편함을 혐오하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그래서 그는 해가 기울면 막연한 기쁨이 몸 전체에 밀려들어온다고 짐짓 어둠을 찬양한다. 그런데 곧이어 밤에 대한 그의 사랑의 밀어가 모순당착처럼 여겨지기 시작한다. 빛나는 밤, 휘황하게 번쩍이는 카페들의 어둠속에 빛나는 빛이 어우러진 밤거리를 사랑하는 것이지, 진정 어둠,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님이 드러난다. 어쨌든 화자인 는 늦은 파리 밤거리, 블로뉴 숲 속을 거닐며 기이한 전율, 강렬한 감동과 격앙된 사유의 엄습을 즐긴다.

 

그는 오랫동안 파리의 밤거리를 걷는다. 이윽고 도시는 아무도 없었고, 불 밝힌 카페조차도 없음을 발견하며, 파리가 이처럼 생기없고 황량한 곳인 줄은 정말 몰랐다.”고 주절거리기 시작한다. 바스티유까지 걸어가며 그토록 어두운 밤은 한 번도 본적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으며, 칠흑 같은 어둠, 무한한 공간처럼 넓고 짙은 구름의 궁륭이 펼쳐진 듯한 깊은 잠에 빠져있는 소름끼치는 파리에, 그 출구없는 어둠 속에서 울부짖기에 이른다. 살려주세요!”

 

천공(天空)보다 캄캄한, 도시보다 더 깊은 어둠 [....] 고요하고 버려져 있고 죽은 것 같은, 격렬한 공포가 엄습해 온다. 그리고는 차디찬 냉기가 올라오는 센 강변, 강물에 팔을 집어넣고 [....] 얼어붙는다.” 지옥을 파 들어가며, 그 어둠을 사랑한다는 환상에 사로잡히지만 그것은 곧 자기파멸,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는 세계에 이르렀음에 좌절하는 인간의 원시적 두려움이다. 나는 모파상, 앨런 포를 위시하여 그들의 아손(兒孫)격 작품의 하강하는 영혼들의 탐닉에 공감하지 못한다. 삶이란 것이 환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에서 깨어나는 것, 그 궁극의 희원(希願)은 상승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Ceci n'est pas un conte)

 

소설 이야기 속에다 독자라 할 수 있는 인물을 집어넣겠다.”

-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Ceci n'est pas un conte)도입 문장 중에서

 

디드로는 어쩌면 기성의 소설 형식에 반기를 들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 작품에서 소설적 화자가 전개하는 이야기에 공감 또는 의문을 제기하거나, 변변치 않은 식견으로 비평 또는 해석을 해대며 떠들어대는 터무니없는 비평가나 독자들의 허영심, 그것을 소설에 대한 장애물 혹은 필요물로 여겼던 듯하다. 이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고 선언하지만, 그것은 소설 속 언어이지 소설 밖의 독자에게까지 소설이 아닌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화자의 이야기에 시시콜콜 반응을 해대는 독자(청자)로 이해되는 방해인물에 의해 실재하는 이야기처럼 보이게 하지만, 어쨌거나 두 인물 모두 소설 속 존재에 불과하니 허구냐 사실이냐는 의미없는 물음에 불과할 것이다,

 

사실 내용이란 것은 화자가 자신이 전개할 이야기에 대해 열광적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보잘 것 없는 이야기며, 아주 시시하기조차 한, 저녁 한 때를 보내기에 충분할 듯하다고 말하듯 그런 내용이다. 두 이야기인데, 순수하고 헌신적인 남자와 이런 남자의 경제적 지원만 갈취하며 뭇 남자들과 쾌락을 지새우는 극단적 교활성을 보이는 여자의 이야기가 하나이고, 자신의 재기와 상상력, 지식은 비평 및 문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고도 남을 정도의 지성을 가진 여자가 별 볼일 없는 남자를 물심양면 도우며 사랑을 보내지만 10여년이 지난 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여자를 내차 버리는 남자라는 앞 선 이야기의 반대로 짝을 이루는 이야기다. 결국 이 사랑의 엇나감, 인간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연정에 대한 뻔한 견해의 논쟁이다. 여자를 버리고 부당한 명성을 누린 남자, 남자의 노동을 끊임없이 갈취하여 죽음으로까지 내모는 현실에 대해 세상사란 본디 거의 그렇게 되어 있소.” 라든가, 사기꾼과 부정한 사람의 옹호자라며 비판하는 식의 정말 시시한 주제의 논의이다.

 

, 이러한 소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해결해야 일이 독자에게 과제로 던져진 것 같다. 이 소설 읽기를 줄거리에 천착하게 되면 그야말로 싱겁기 그지없어진다. 디드로는 이 소설을 통해 전통적 소설 형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실험을 하고자 했던 듯싶다. 화자와 화자의 전개에 수시로 끼어드는 독자로 간주되는 방해꾼으로 인해 줄 곧 이야기의 방향이 변경되거나 고수되는 장면을 통해 소설에 대한 반응의 즉시적 수용이란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를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들이 서로 충돌하거나 혹은 동의하는 장면을 주목하며 읽는다면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이 소설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의 관점에서 다소 퇴색한 시차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잠 안 오는 밤에 침대에 누워 가볍게 읽을 수 있기에는 그만이다. 한 번 펼쳐들면 아마 마지막 쪽을 어느 새 넘기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쏟아지는 잠으로 숙면에 빠져들 것이다.

 

책의 편집 구성상 하나만 지적하고 맺어야겠다. 이 시티 픽션 시리즈는 작가별 한 편 내지 두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있다. 즉 다분히 맛보기를 통한 문학 인구의 유입을 위한 방편의 성격도 있을 것인데, 지나치게 당해 작품에 대한 해설이나 가이드가 없다. 책날개에 대여섯 줄 짧은, 그야말로 압축된 설명글은 불친절하다. ‘시티픽션이라는 이 기획의 의도를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반쪽 분량정도씩이라도 할애하여 해당 작품들의 해설을 곁들였으면 보다 알찬 작품집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기성의 독서가들 누가 이 책을 찾겠는가? 대상은 입문자들, 가벼운 독서를 찾는 이들, 어린 학생들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대상 독자를 위해 조금은 더 친절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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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복종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지음, 심영길 외 옮김 / 생각정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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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는 더럽고 비굴한 욕망을 까발린 이 책은 서른세 살 이른 나이에 요절한 에티엔 드 라 보에시가 열여덟 청년시절에 쓴 인간 존엄과 자유의 회복을 위한 언설(言說)이다. 그의 죽음 원인이 전염성 복통이라 알려져 있는데, 일종의 독살로 추정될 수 있는 의심을 거둘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스물네 살인 1554, 보르도의회 재판관으로 임명되었을 만큼 출중했던 이 젊은 지성은 1548년 전제군주가 벌인 시민에 대한 잔혹한 진압을 목도하며 절대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된 매서운 통찰을 담아내고 있다.

 

그는 유언으로 친구 몽테뉴(Esse를 쓴 미셸 드 몽테뉴다)에게 자신의 모든 원고를 맡기고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나 이 책의 원고는 그의 사후 11년이 되기까지 출간되지 않았다. 몽테뉴는 이 원고를 위험하다고 여겼기에 간직하고만 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절대왕정에 반대하던 모나르코마크란 인물에 의해 비로소 1574년 세상에 그 사유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전하려는 의미가 인간 세상에 폭넓게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200년이 지난 프랑스혁명(1789) 즈음해서였던 것 같다. 이후 그 이름만 들어도 의지가 전해지는 시몬베유, 빌헬름 라이히, 미셸 푸코, 질 들뢰즈 등으로 계승되며, 드 라 보에시가 제기한 문제는 21세기 오늘 한국사회에서도 그 의미를 역동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사실 500년 남짓 전에 써진 이 책이 거듭 소환되어야 하는 사회만큼 암울한 일도 없을 것이다. 매양 역사의 시간 속에서 반복되는 이러한 말을 하고 있는 나의 어리석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다시금 이 젊은 저항의 에너지, 이성의 열정을 여타의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대신 나만이라도 상기(想起)하려는 뜻에서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은 읽기를 반복하였다. 대체 굴종의 몸짓과 스스로 기어들어가 복종하는 인간들이 망령처럼 살아나 부쩍 증가하는 까닭은 무엇인지,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들이 온몸으로 과시하는 저 추하고 천박한 행태의 의미를 확인키 위함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이 분노를 다스리고자하는 무의식적 행위였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책이 쓰여 질 때에는 거의 모든 민중이 절대 권력을 의심하지 않는 시대였을 것이다. 2023년 1012일 지방 보궐선거 결과에서 드러나듯 여론 조사에서 항시 36~7%를 맴도는 그것으로 감소하였으니 민중의 의식에서 자발적 복종이라는 의미는 상당부분 와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 비율이 한 나라의 자유와 정의를 어떻게 갉아대는지는 너무도 중대하다. 바로 그것에 권력을 위임하는 자신들의 자유를 맡겼으니 말이다.

 


책의 번역자 한 명인 목수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 생뚱맞게 유신을 추억하고 반공을 맹세하는 노예집단들이 간판을 내걸고 설쳐대고 있다. 가장 변태스러운 권력의 꼬붕이 되어, 이 혐오그룹의 선봉에 서려는 일베들이 그 추한 낯짝을 백일하에 드러내고, 급기야 국가각료에 임명되는 황당한 일이 거듭되고 있다.”. 이들 양아치 집단에 맞서면 존재하지 않는 죄를 뒤집어씌우고 언론공작으로 공개처형을 가하고는, 압수와 수색, 그리고 자의적으로 남용되는 기소로 인간 존엄을 구렁텅이에 쑤셔 박으려 온갖 몹쓸 짓을 서슴지 않는다.

 

또 한 역자인 심영길은 드 라 보에시를 읽으며 카뮈의 글을 떠올렸음을 쓰고 있다. 8년 전에 쓴 글이 바로 지금에도 한 치의 변함도 없이 적용될 수 있음에 수치를 느끼게 된다. 일본과 미국에 대한 굴종에 길든 관료와 수구 언론의 습성이 자신들과 다른 사고의 사람들을 종북,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구태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개 짖는 소리를 내고 있다.” 말이다. 1948년 카뮈는 파리 가톨릭 도미니크 수도원 초청 연설에서 스페인 정치범 처형장에서 사형집행에 신의 축복을 기원하는 주교의 행위에 대해 더 이상 주교도 아니며, 기독교도도 아니고 인간조차도 아니라고, .... 그는 사형집행을 벌이는 권력자와 마찬가지로 개자식일 뿐이라고신랄하게 비난한다. 종교를 빙자한 독재권력은 가장 가증스러운 독재 형상이라고 말이다.

 


스스로 복종한 자. 그들은 독재자와 공범이다. ...

모든 권력은 자발적 복종을 바친 인간들이 건네준 권력이다.

...복종을 멈춰라!-30쪽에서

 

 

드 라 보에시의 글을 옮길 의사는 조금도 없다. 16세기 절대왕정의 시대와 달리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뼛속에는 자유와 노예에 대한 의식이 그나마 상당부분 증식되어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서 어느 상태가 생존에 더 적절한지 알지 못하는, 즉 예속과 자유를 구별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게 된다. 1990년대 이전의 비민주적 독재행태가 횡행하던 한국사회를 겪어보지 못했던 세대는 예속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느껴지지 않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 시절 기회주의적으로 비겁함과 굴종의 몸짓에 능숙했던 이들에게도 예속은 그리 와 닿지 않는 개념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동시성의 비동시성이라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언어를 빌어 권위주의적 전근대적 시간을 향수하는 지역과 사람들을 언급한 적이 있다. 여기에는 21세기 지금도 노예근성을 천성으로 아는 촌부들과 이들에게 해라라고 명령하는 권세가들이 살고 있다. 사실 이들 촌부들만이 자발적으로 복종하며 사는 것은 아니다.

 

조선 유교의 엄격하고 냉혹한 계급의 분별과 일제와 오랜 군사독재 시절에 걸친 수백 년간 이 땅의 인간들에게 주입된, 처음에는 강요되었으나 세월이 지나고 그 강요된 세상을 모르는 세대로 이어지며 굴종이 습관이 되어온 까닭이기에 많은 수의 인간들은 종속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이제 종속이 일상화된 상태를 받아들이는 환경에서 성장한 오늘의 상당수 한국인들은 자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선출된 한 인간 나부랭이, 대체로 가장 비겁하고 나약한 인간에게 휘둘리며, 그 포악함을 견디고, 함부로 부리는 횡포에 어떠한 투쟁의 열의도 결기도 일어나지 않는다.” 분명 불의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바로 그 상황을 바꾸고자 하는 아무런 갈망도 끓어오르지 않는다. 노예의 삶을 받아들였는데 그 무엇이 절실할 수 있겠는가?

 

서울의 서쪽 한 지역에서 범죄사실로 유죄 처벌을 받은 인간을 채 6개월도 지나지 않아 사면권을 자의적으로 행사하여 범죄의 악취가 코를 쥐게 하는데도 후보로 내세워 다시금 치러진 보궐선거가 있었다. 그 투표 결과인 39.37%가 이 오물에게 투표했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 않다. 이 철저한 권력에 대한 자발적 충성, 이 몽매성에 도사린 맹목적 굴종의식을 보는 안타까움이었다. 역자 목수정의 지적처럼 누가 힘이 센가, 강자의 편이라야 안심이 되는 투표를 하는 작태일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한국 민주주의의 실상이다. 그 납작 엎드린 자발적 굴종의 몸짓들, 정신적 노예화가 육체까지 번져 변형된 이 기형성이 한국사회의 발목을 끈질기게 잡아당기고 있다.

 

책은 이렇듯 복종에 익숙해진 인간들을 일깨우는 비수같은 언설을 쏟아내고 있다. 민중이 권력이 요구하는 굴종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 권력은 스스로 무너진다. 드 라보에시는 바로 이렇듯 자유를 거부하고 복종의 달콤한 고통으로부터 안락을 취하는 인간의 선천적 욕망에 도사린 재앙적이고 비극적 사건에 경종을 울려댄다. 인간은 어째서 복종이 자유라도 되는 양 굴종을 하기 위해 안달을 하는 것일까? 절대 권력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망상에 매몰되어 권력자가 손에 쥔 권력이 자신이 헌납한 것임을 망각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이들은 고통스럽지 않게 비굴모드를 취하고 자기 존엄과 자존을 함께 내다버린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알지 못한다. 자발적 복종의 그 게으른 편의라는 보상이 만족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이러한 인간들에게는 완강한 종속에 대한 지향성이 오래전부터 의식의 내면에 뿌리를 내려 마치 자유가 인간 본성이 아닌 것처럼 여길 정도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독재 하에서는 인간들은 쉽사리 비겁해지고 나약해진다. 마치 관습처럼 굴종이 거부감 없이 삼키게 되는 *미트라다테스의 소량의 점진적 독약 복용처럼 습관이 되어 구별능력을 상실한 무감각의 인간이 되어버린다. 이미 시민대중과의 소통능력을 상실한 작금의 미디어매체들이 쏟아내는 영상들에서 보여지듯 굴종하는 비겁한 인간들이 권력의 똘마니가 되어 나대는 꼴로 가득 채워져 있지 않은가. 이러한 장면들이야말로 권력은 어떻게 대중을 지배하는가?”라는 물음의 답일 것이다.

 

본문 94쪽에서


드 라 보에시는 항시 역사의 경험에는 독재 권력을 떠받들고 있는 대여섯 명의 인간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바로 이들, 독재 권력의 귀 노릇, 잔악한 짓을 공모하기 위해 모인 자들, 독재자의 쾌락을 위한 동반자이고, 욕심을 채우기 위한 뚜쟁이며, 재산 축적을 위해 국가와 시민의 재산을 약탈하는 짓도 마다하지 않는 공범이라고 말한다. 독재자 본연의 악랄함을 넘어서 자신들의 악함까지 모두 삼키게 하려고 독재자를 제대로 길들이는 인간들이다. 이들은 수하에 조력자를 거느리고 그 조력자들은 다시 수하에 똘마니들을 두어 자신들의 엄청난 물욕과 잔인한 행각으로 나라 전체를 장악한다. 이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권력의 비호 아래 법의 심판과 징벌로부터 놓여나고 다시 그 아래 단계로 처진 대규모의 그물망으로 탈취를 자행한다. 다분히 사기행각의 성향을 띤 다단계 파라미드 영업망을 닮은 이러한 구조가 민중과 나라를 지배하게 된다. 정말 코미디같지 않은가? 이 희극같은 비극이 공연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한국 사회이다.

 

연신 굽신거리며 그지없는 복종의 모습을 취하는 나라의 모든 쓰레기들, 그 천박한 것들이 독재자 주변으로 모여든다. 변변찮게 어슬렁거렸던 좀도둑들이 들끓는 야욕과 재물에 대한 욕심을 주체하지 못해 전리품 배분에 끼어들고자 독재자 주변에 모여들어 떠받들며 난리를 처댄다. 장물의 핵심을 차지하거나 적어도 떡고물이라도 차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들여다보라. 이것들이 모인 사회에는 동료는 없고 음모만 생겨난다. 서로 의심하고 겁낸다. 서로 친구가 아니고 공범인 까닭이다. 또한 독재자에 복종하는 것만으로는 언제든 떨려날 수 있기에 독재자의 사소한 눈짓과 표정의 변화에도 유의하며 독재자의 생각을 미리 읽고 준비해서 환심을 사야한다. 자기에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인간, 타인에게 자신의 평안과 자유, 몸과 삶까지 온전히 맡긴 이 비굴한 것들보다 더 천박한 것이 있을까? 왜 복종할까? 오직 단 한 가지 이유라고 드 라 보에시는 지적한다. 재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독재자 주변을 얼쩡거리며 야비함과 단순함을 간교하게 악용해가며 쉽사리 출세가도에 오르고, 부를 축적했기에 이 자들은 언제 처단될지 모를 두려움과 불안에 더욱 악랄하게 반대편의 사람들에게 극악한 폭력을 자행한다. 그토록 사회적 문제가 되어 시정을 지적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갑질 사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수인의 하수인, 그 하수인의 하수인으로 이어지는 그물망의 한 단계에 있는 인간들은 자신들의 굴종으로 인한 모욕을 감당할 대상을 저보다 약해 보이는 인간에게 배출해 내기 때문이다. 바로 한국 사회는 대표적인 굴종 사회라는 증거이다.

 

더구나 이 굴종이 일상화된 사회는 의심과 배반의 사회이기도 하다. 환심을 위해 밤낮없이 그 텅 빈 대가리를 조아려야하고 동시에 섬기는 자를 세상 누구보다 더 의심해야 그나마 자리를 지킬 수 있기에 이 인간들의 눈깔은 연신 사방을 휘저어대기 바쁘고, 발걸음은 서성댄다. 함정은 어디에 있는지, 공격은 어디서 날아올지, 경쟁자의 안색은 어떤지, 배신이 혹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짜 미소를 지으며 두려워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극심한 분열로 치닫고, 통합과 연대는 불가능한 지경으로 나라는 더욱 퇴락으로 가라앉는다. 굴종은 결코 인간의 관습이 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 된다. 굴종이라는 비열한 몸짓은 인간 사회의 온갖 불의와 부패, 부정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복종은 거의 대부분이 자발적 복종으로 인한 것이다. 노예의 삶을 자처하는 삶은 곧 자유와 평등의 포기, 인간 존엄의 품격을 내던지는 것이다.

 

툭하면 사람들은 먹고 살아야 하니 더러워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흔해빠진 변명을 대곤 한다. 과연 주인이 던져주는 돈을 챙기려고 발길질을 견디고 모욕을 당연시하며 자신의 영혼을 팔고, 나라를 팔고, 몸을 팔며, 그 까짓 존엄이란 개나 줘 버려!라고 하는 말이 등식이 성립하려나? 그 납작 엎드린 굴종의 몸짓, 그것은 비열함과 배신의 은폐요, 폭력과 권위주의의 선전이며, 시민 대중에 대한 예속을 요구하는 독재자의 음흉한 위선이다. 드라 보에시는 치졸한 영혼을 가진 자들, 무지한 자들만이 독재 권력에 복종한다. 이것이 지배 원동력이다.”라고 한다.

 

때문에 이를 벗어나기도 단순하고 쉽다. 시민대중의 권리와 자유를 압류했다고 착각하는 권력에게 굴종하지 않으면 된다. 지금이라도 그 비굴한 몸짓을 철회하면 권력은 그 순간 무너져 내리고 만다. 제발 스스로 복종하지 말자. 굴종을 비추는 미디어를 규탄하라. 그리고 그 장면의 등장인물들을 잊지 마라. 반드시 정의가 처단할 쓰레기들이니까. 대중의 자유와 존엄을 짓 밞아 대는 썩은 내 진동하는 이것들에게 이 사회의 훼손된 건강성의 댓가를 따져 물어야 하니까 말이다. 복종하지 않고 존엄을 지키며 시민대중의 삶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네들에 경의를 보내며, 다소간의 분노를 이 책을 통해 가라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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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32~63,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소아시아의 대왕으로 면역력을 얻고자 평소에 독약을 조금씩 복용했던 습관; 즉 지속적인 독의 소량 주입으로 독에 대한 내성이 생겼다는 것으로서, 복종 또한 습관처럼 내성이 된 노예근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됨을 비유하는데 사용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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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방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42
김미월 지음 / 민음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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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꿈이 자라났던 방은 몇 번째 방인가요? 순응만을 가리키는 

세상을 벗어나기 위해 꿈이 부정되고 악몽이 되지 않는 세상을 생각하며....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 아니, 평범해 보인다.....”

 

나는 외모도 성격도 삶의 이력도 어느 하나 특별한 구석이 없다.

가장 평범한 사람을 뽑는 대회에 출전한다면 못해도

장려상은 탈 만큼의 우수한 평범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 28, 29 쪽에서

 

 

나는 소설 속 두 청년의 삶의 시선과 세상과의 부딪힘을 읽으며 기성세대로서의 무기력과 무능함을 다시금 고통스럽게 느낀다. 평범(平凡)과 비범(非凡)을 구분하고,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평범하다 여기도록 훈육되어, 그러한 질서체제를 당연한 삶의 토대로 생각하게 만든, 그 순응의 세계에 이의를 제기치 않도록 세뇌한 기성질서를 변화시키지 못한 책임의 일원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말이다.

 


병역을 마친 스물다섯 청년 오영대는 부모의 무릎아래를 벗어나 삶의 주체로서 세상에 나아가기 위해 월세 10만 원 짜리 대각선으로만 누울 수 있는 그야말로 오직 잠만 잘 수 있는 방을 얻는다. 그곳에는 가져가겠다고 방치된 앞서 살던 이가 남겨둔 이삿짐 꾸러미가 놓여있고, 그 속에서 두툼한 스프링 노트를 발견한다. 이 노트를 쓴 인물은 김지영이라는 서른 살의 여성이다. 이 작품은 지영이 쓴 일기가 소설 속 소설의 역할을 하는 소위 액자소설의 형식을 하고, 일기를 읽는 영대와 일기 속 지영이라는 두 청년의 삶을 교차하며 청년들이 마주하는 고뇌와 번민을 체험하게 한다.

 

영대는 네 꿈이 뭐야?”라는 물음의 앞에서면 그만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는, “꿈 없이도 지난 25년간 아무 문제없이 잘 살아 왔으며, 그것도 금방 포기해 버리는청년이다. 본인은 이러한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인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특별히 이에 대해 어떤 시도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한편 동해 쪽 바닷가 서점집 딸인 지영은 대학 진학을 위해 스무 살에 삼촌네 문간방에서 시작된 서울 살이가 십여 차례에 걸친 이사의 필연 속에 치러진 서른 살에 이르기까지의 10 년의 일기를 통해 끝없는 꿈의 추구, 자기 안의 특별함을 찾는 걸음이 쓰여 있다.

 

지영의 서른 살은 인류가 결국은 달에 착륙했듯 나도 어느새 서른의 표면에 깃발을 꽂고 말았다. 원치 않는 정복이었다.”, 원치 않는 정복이라 표현하듯 지영의 스무 살에서 서른 살의 시간은 그녀의 거듭되는 이사가 지상에서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일기가 발견된 사람이 눕기조차 불편한 좁아터진 지하의 잠만 잘 수 있다는 방이듯 꿈의 실현과는 멀어 보인다. 그런데 두 인물이 공히 유사한 요소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그저 이웃집 담장을 타고 넘어 온 바람을 따라 춤을 추, 내가 스스로 춤추고 있는 것인 줄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남의 장단, 세상이 가리키는 것 만에 맞춰 춤추는 순응성, 자기 의지를 요구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이렇게, 남의 장단에만 맞추어 살 것을 요구했던 질서가 그들이 세상에 나설 때면 이러한 아이들을 특색없음, 특별한 구석이라곤 없는 인물이라며 내친다. 영대의 자기 인식도 그리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궁금해 한 적도 없고 잃어버린 것들을 아쉬워해 본적도 없었다. 무언가에 사무쳐 본 적도 없으니 뼛속 깊숙이 희열에 젖거나 분노에 떨었던 적도 당연히 없었다.”는 것이다. 부모가 당연히 내주는 학비들, 게다가 기죽이지 않겠다고 주어지는 용돈, 사거나 하고자 하는 어지간한 것들을 부모가 모두 해결해주는 삶, 세상 질서가 가리키는 길을 그저 따라가면 되는 삶에 꿈이란 것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음은 어쩌면 그에게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영의 대학 생활이란 것은 내내 봄만 있는 왕국서 온 공주처럼 언제나 밝고 생기 넘치는, 학과 동기 진주와 함께 찾아가게 된 인문학 읽기 동아리 황무지로부터 싹튼 자기 삶에 대한 자각으로 읽힌다. 진주와 황무지 동아리 선배들과의 어울림을 위해 삼촌집 문간방을 나서 하숙집으로 옮기는 행위는 세상의 오의(奧義)를 체득한 듯 삶의 전부처럼 인식되고 그러한 삶에 매몰되어 자기 삶이라는 거대한 책의 주인공임을 망각했음을 보여준다. 목소리에 호소력이 있다는 복학생 선배를 따라 민중가요를 열심히 따라 부르며, 자신의 미덕을 발견해준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동아리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지만, 선배가 진주의 연인임을 알게 되고 지영은 비로소 이들은 결코 주인공과 영원히 함께하는 것이 아닌 등장인물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다. 타자가 가리키는, 타자에 의해 삶이 좌우되는 삶을 피하고 자신의 꿈, 자기만의 삶을 일궈야한다는 각성이다.

 

이 소설이 문학계간지 세계의 문학2008년 연재되어 2010년 단행본으로 간행되었으니, 지금과 시차가 10여 년이 지났음에도 지영이 묘사하는 시대의 배경에 등장하는 실감나게 제작된 전쟁영화의 세트장같다는 살풍경한 재개발 강제철거의 폭력과 통곡하고 저항하는 이들의 모습은 사실 변한 것이 없음을 발견하며, 내 기억도 소설의 시간 속으로 이입되었다. 운동권 학생인 지영의 어린 시절 친구 을 시위현장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인데, 비록 지영이 자신의 내면인식의 편협성을 후일 발견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운동권 학생에 대한 못마땅함의 견해가 고작 평범한 학우들에게 부채감과 죄의식을 던지는 불편함이요, 학생운동을 집단 속에 익명으로 숨고 싶어서라 매도하는 인식은 지나친 사회정의를 일개인의 보신과 현실도피라는 터무니없는 일반화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것은 관이 무당의 아들이라는 콤플렉스, 다시 말해 사회에서 보내는 분별의 시선이 지영에게도 내재하고 있어, 관이 포르투갈의 파두(Fado)에 대해서, 그리고 그 한()의 정서와 저항의 음악에 대해서 말할 때 무당의 아들이 월드뮤직이라니, 그 이질적 조합 앞에 당황하는자신을 발견하는 것에서 그녀의 인식경계가 드러나기도 한다. 사실 이 작품에서 나는 지극히 체제 내적 욕망만을 읽게 되는데, 그것은 지영이나 영대가 쫓는 꿈이 단지 질서가 요구하는 그 내부에 안착하지 못한 외부에서의 방황에 머물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도통 세상의 기성 질서에 대해서는 한 번도 분개해본 적 없다던 영대가 친구 석의 입을 통해 신의 직장은커녕 인간의 직장에도 못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인간의 자식도 아니라는 증거임을 반복하거나, 샹들리에가 매달린 카페의 천장에 시선을 박고는 어릴 적 꿈을 순간적으로 기억해내는데, 그것이 천장이 높은 회사, 즉 넥타이 매고 감청색 정장을 입고 출퇴근하는 대기업 사원이 되는 것이었다는 회상이다. 꿈 없음은 어쩌면 순응성과 기호만 다른 동의어 아닐까?

 

물론 현실적 삶이라는 마주해야 할 삶의 세계란 것이 이처럼 체제와 질서가 가르쳐 온 그 세계임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고, 그를 위해 자기만의 세상을 열기위해 노력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이러한 삶의 가능성을 기성세대들이 후세에게 말하지 않았다. 꿈은 없고 얕은 욕망만 있었다.”는 영대의 작은 자각처럼, 욕망의 주입만을 이 세계가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치와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러하니 이들은 냉혹한 경쟁질서가 지배하는 세상과 마주했을 때, 불길한 예언만 가득한 참서(讖書)을 읽는 기분을 피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지영의 일기 말미에는 이제 내 고향 바닷가 마을에는 서점이 한 군데도 없다. 엊그제 30년간 버티고 서 있었던 해변서점이 결국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라고 그녀의 의지처(依支處)였던 부모가 더 이상 삶의 방향등이 되지 못함의 상징처럼 적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거대한 책에서 자신과 함께 하리라 여겼던 중요한 등장인물 관이 어린시절 서점 다른 위치에 숨겨놓았다던 책을 끝내 본래의 자리에 돌려놓지 못한다. 아마 영대가 일기의 주인공 지영에 대해 의문을 지니는 그녀는 어쩌다 이렇게 잠만 자는 방에까지 흘러 들어오게 되었을까.”는 이 궁극의 물음은 자신의 친구가 그에게 되돌려주는 너 아직 살아 있잖아라는 말과 어울려 흐릿한 꿈의 가능성을 남긴다.

 

지금 교육계는 부모들의 극한 이기심이 폭력성을 띠고 꿈이 부정된 이 사회의 진면목인 욕망만이 날뛰는 불편한 세계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15년 전 이 소설의 주인공들과 같은 아이들이 변함없이 양산되고 있음의 실증일 것이다. 이 소설이 지금에도 여전히 영향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이 사회의 병증이 지속되거나 오히려 더욱 악화되고 있음의 반증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나는 몹쓸 방과 방을 떠도는 사이 내 존재는 점점 비루해지고 더 보잘 것 없어졌다.”는 지영의 자조적 말이 꽤 오랫동안 내 가슴에 남아있을 것만 같다.

 

지영과 영대, 그 누구에게도 끄트머리만 허락하는 세상이 아닌, 누구나 동등한 출발점에서 시작할 수 있도록 작은 힘이라도 지속적으로 경주해야만 할 것 같다. 지영과 영대처럼 20대를 통과하는 청년들에게는 응원을, 그리고 이 시절을 이미 통과한 이들에게는 아릿한 추억을 떠올리는 읽기가 되어 줄 터이다. 회한과 고통 없는 말끔한 시절이 어디 있겠는가? 인생이란 고해(苦海)라 하지 않았던가? 원망과 갈망과 함께 형체 없는 꿈과 함께 흘러가버린 시간이지만 아마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조금은 더 지혜로운 인간으로 성숙하였을 것이다. 사는 사람의 육신과 정신이 깃 든 곳, 일상이 스며있는 방, 우리들 추억 속의 방들, 나는 그 중 몇 번째 방에 나의 꿈이 남아있을까라는 물음을 떠올리며 곰곰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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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오페라 - 아름다운 사랑과 전율의 배신, 운명적 서사 25편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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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배경이 되는 화려한 무대들, 그리고 테마와 관련된 가수들의 복식, 아리아와 합창이 울려 퍼질 때 극장의 관객은 감동으로 전율합니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을 나설 때도 그 여운이 좀체 사라지지 않고 배역이 열창한 사연들에 이입되었던 감응이 남아 맴돌던 기억을 지금에도 방구석에 앉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꽤 오랜 시간 공연장을 찾지 않았던 것 같네요. 책의 저자인 예술 큐레이터인 저자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접했던 공연의 혼돈과 감동을 전하고 있는데요, 이후 그의 끝없이 감동의 우물을 찾아다녔던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인 듯합니다.

 

책은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곡인 <피델리오(Fidelio)>부터, 헨델이 런던 무대를 위해 특별히 만들었다는 이탈리아 오페라 <리날도(Rinaldo)>, 모차르트와 계몽주의 작가 디 폰테가 만들었다는 보마르셰 원작의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이탈리아 오페라의 거장 베르디의 <나부코(Nabucco)>, 영어 오페라인 조지 거슈인 작곡의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 그리고 <마탄의 사수 (Der Freischutz)>, <살로메(Salome)>, 비운의 오페라 작곡가 비제의 카르멘 (Carmen)>에 이르기 까지 엄선된 25편의 작품이 주제별로 구성되어 그 놀라운 감동을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작품의 줄거리와 QR 코드가 붙어있는 주요 곡의 가사, 오페라 전문용어, 그리고 간략한 인문학적 해석이 곁들여져 있는 그야말로 오페라가 실린 방구석에 접하는 오페라 입문 가이드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부분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접했던 아리아들을 품고 있는 익히 잘 알려진 오페라들인데요, 가수의 아리아에 실려있던 옛 감동을 떠올리기도 하고, 제겐 낯선 오페라의 경우에는 당대의 극장에 있음직한 관객들을 그려보기도 하며 줄거리와 가사를 음미해보기도 합니다.

 


제게 인상 깊게 다가온 작품은 혁명지도자인 플로레스탄이 왕당파 교도소장 피차로에 의해 감금되자 그의 아내 레오노레가 피델리오란 남성으로 변장하여 남편을 구출하는 이야기인 <피델리오(Fidelio)>의 오프스테이지(Offstage)에서 향수와 회상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트럼펫 선율의 애절함을 상상해 봅니다.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가 베버의 낭만적 오페라 <마탄의 사수 (Der Freischutz)>와 함께 가장 중요한 오페라 작품으로 여겨진다는 점에 괜스레 뿌듯한 마음이 들기까지 합니다.

 

저는 모차르트 작곡의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에 남다른 애정이 있는데요, 어쩌면 파리 초연에서 루이 16세와 귀족들이 부르르 치를 떨며 분개하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토리는 영주의 신혼 초야권이라는 터무니없는 계급의 횡포에 대한 시민적 분노를 집약한 작품으로 로맨스와 정치적 긴장감을 유연하게 녹여낸 작품이랍니다. 당대 신분제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익살과 풍자극이었으니 이 작품이 오늘날 여전히 시민대중의 각광을 받는 것은 그 역사적 배경 탓에 더욱 즐겁습니다. 모차르트는 그의 피아노 연주와 작곡에서의 천재성과 함께 사회적 약자들의 정의에 관심을 가졌던 인물로 보다 가까이 다가옵니다.

 


이와 더불어 그가 생계에 곤란 겪을 때 돈을 벌기위해 마지막으로 대중적 흥행 감각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는 <돈 조반니(Don Giovanni)>에 얽힌 사연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내용은 희대의 바람둥이 돈 조반니에 희생된 기사의 묘비인 흰 석상의 유령 이야기로 장르가 다른 여타 작품들에 즐겨 인용되어서 익히 알고 있던 작품입니다. 대중성을 고려한 권선징악이라는 뻔한 테마임에도 이 엄숙하고 비극적인 오페라는 작곡가의 생애와 관련하여 새로운 곡으로 다가옵니다. 또한 주인공의 아리아가 없는 작품으로 만든 모차르트를 한층 고결한 인물로 떠올리게 합니다.

 

한편 대본으로 사용된 원작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Salome)로 인해 더욱 유명세를 얻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곡의 오페라 <살로메>는 순수와 타락을 넘나드는 모습으로 그려진 살로메로 인해 더욱 문제적이었다는데요, 쟁반에 받쳐 든 요한의 죽은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낭자한 피와 거기에 입 맞추는 살로메는 그야말로 광기와 폭력성이 넘쳐흐릅니다. 뉴욕 초연 후 곧 바로 공연이 금지되었으며, 영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비난이 이어졌다는군요. 이성의 도덕적 갈등을 초래하는 이 논쟁적 드라마를 한 오페라는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정말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마침 대구국제 오페라 축제에서 이 작품을 공연했다는군요.

 

이제 이 책의 감상을 맺어야겠습니다. 오페라보다는 아리아의 한 곡인 섬머타임(summertime)으로 보다 더 알려진 조지 거슈인 작곡의 3막 영어 오페라인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는 영화화되기까지 했다는데 이제야 그 원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솔로로 끊어질 듯 다정하게 영혼을 다독이는 섬머타임의 노래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대중음악은 물론 오페라도 역시 대중을 향한 사회적 소통의 매체입니다. 그 음악의 희극적이거나 비극적인 선율과 함께 가수들의 노래와 무대 배경까지도 민중에게 시사(示唆)하려는 것이 있었습니다. <마탄의 사수>처럼 사랑을 위해 영혼을 거래하는 지고한 이야기에서부터 <카르멘 (Carmen)>과 같이 노동자와 하층민의 척박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은폐된 진실을 환기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바빌론 유수와 같은 고대 역사를 복원해 인종과 민족적 차별의 부당함을 호소하기도 하고, 반면 가부장적 권위나 귀족과 왕의 지배권을 옹호하는 작품도 있습니다. <카르멘>의  '사랑은 반항하는 정신(L'amour est un oiseau rebelle)'을 부르는 엘리나 가랑카(Elina Garanca)의 열정적 아리아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물론 예술 작품을 이념적 가치로 단순히 규정할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은 이 걸작으로 꼽히는 오페라들로부터도 끊임없이 메시지를 전달받습니다. 아무튼 이 스물다섯 편의 오페라 안내서는 모처럼 잃었던 감각을 깨워 메마른 제 정서를 조금은 되돌아보게 해 주었습니다. 극장을 다시 찾아 오페라를 감상하기 전 간략한 참고 자료로도 유용하고, 입문자들에게는 오페라에 대한 장벽을 허물고 친근하게 다가가는 경로가 되어 줄 것 같습니다. 내친김에 공연 일정을 찾아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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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잡설 - 박상륭 꼼꼼히 읽기
채기병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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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독자들은 문학작품을 읽고 저마다 다양한 감상을 갖게 된다. 그것은 감동과 공감의 감응이기도 하고 이질성과 낯섦, 혹은 도덕적이거나 취향의 거부로 부정과 비판의 소회를 남기기도 한다. 그런데 순순히 읽히지 않거나 이해에 어려움을 주는 작품에는 더더욱 작품과는 다른 엉뚱한 찬양이나 비판이 가해지곤 한다. 대개는 당해 작품을 구성하는 언어, 문장, 사상 등에 대한 결여나 적대하는 무엇이 방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읽나? 무언가 낯선 세계를 그 책을 통해 알고 싶어서가 아닐까? 만일 뻔히 알고 있는 인간들과 세계만을 보려한다면 무엇하러 책을 읽겠는가. 결국 내 밖에 있는 것을 내 안에 수용하기 위한 포용의 일환이 책 읽기 아니겠는가? 작고(作故)한 소설가 박상륭은 항상 내 서가의 한 쪽에 자리잡고 거듭 읽힐 것을 준비하는 하나의 정신적 중추이다. 그럼에도 늘 흐릿한 아쉬움이 남아있는 글이었다. 엔간해서는 한 작가의 작품을 읽기위해 다른 이의 도움을 피하지만 박상륭의 작품을 모두 읽지 않은 내겐 그것은 항상 어슴푸레한 이미지들로만 맴돌았다. 해서 박상륭의 문학을 조명하는 밑그림을 그려주는 저자 채기병 선생의 노고에 도움을 받기로 했다. 변명이 길어졌다.

 


이 책은 저자(채기병)가 머리말에서 명시하듯 소설가 박상륭의 작품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도록 그 윤곽에 접근 할 수 있도록 하려는 연구보고서 혹은 독서 노트라 할 수 있다. 특히 저자의 생각이나 다른 여느 평자의 글을 일체 반영하지 않고 오직 박상륭의 작픔 속 문장으로만 그 사유체계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오랜 노고를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박상륭의 방언과 시적 문체, 그리고 선() 수행 같은 일견 자폐적인 형이상학적 담론의 세계를 좋아한다. 그럼에도 박상륭이 발표한 열두 권()잡설(雜說;박상륭은 자신의 소설을 이렇게 부른다)’에 두루 편재하여 하나의 궁극을 말하려는 것을 손에 잡을 수 있을만큼 모두 읽지 못했다. 때문에 내가 눈치 채지 못하는 무엇에 대한 도움은 간절한 것이었고, 이 책은 이러한 흐릿함에 빛을 비추어주는 맞춤의 책이었다고 해야겠다.

 

박상륭의 소설은 실은 기성의 여타 소설들과 다르다. 소설과 경전의 사잇글이라는 작가 자신의 정의처럼 신과 인간, 종교에 관한 고도의 형이상학적 담론을 펼친다. 즉 일종의 법륜(法輪)굴리기의 연속인 탓에 혹자의 비난처럼 자신만의 꿀을 맛보려 토굴 속으로 들어간 자폐자의 웅얼거림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평자들은 인간에게 던져진 이 유일한 가능성에 대한 치열한 탐구로서 문장은 아름답고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는 신기한 기분이었음을 토로하기도 한다. 이러한 양극단의 감상은 박상륭의 잡설 한 편 한편이 이르고자 하는 마음의 우주, 자아의 완전한 폐기인 위대한 자유의 성취인 해탈을 향한 편린들이기에 큰 그림을 그려낼 수 없는 까닭일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박상륭의 작품을 지식 폭력의 한 전형’, ‘무의미하고 자폐적인 흉물’, ‘교감없이 자신 안에 매몰된 타자부재의 자기탐구 도구일 뿐이라는 비난이 가능해지거나, 그의 시적, 토속적 향취어린 문체의 아름다움과 몽롱한 형이상학의 세계에 매몰되어 감상적 찬양만을 하게 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평가들의 면면은 분명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을 것이다. 이들이 지적하는 요소가 박상륭의 잡설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는 그가 토해내는 글의 우주론(혹은 세계관)이나 상징과 비유들, 다분히 세심하고 정교하게 의도된 방언의 사용이나 ~입지, ~구나으?, ~다는다?, ~~라랐. ~입메? 와같은 사용치 않는 종결어미의 사용, 우리말 어법이 파괴된 복합문장, 새로운 합성문자 등의 낯섦이 주는 인식의 거북함과 몰이해 탓이지, 작품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발견하지 못했던 문장들이 지닌 의미를 비로소 파악하게 되고, 또는 명확하게 와 닿지 않았던 달걀모양의 양극을 갖는 타원형(죽음의 한 연구)”이라는 이미지화된 문장의 의미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으며, 작가가 지속적으로 표명하는 마음의 우주가 인신주의(人神主義)와 어떻게 연결되는 개념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작가의 우주론에 모두 공감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에는 무분별할 정도로 무수한 종교와 신들이 무차별적으로 하나의 궁극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여 서로 조력한다. 이를 작가 스스로는 () 종교주의자라 칭하며, 각 종교는 신에 대한 태도가 다를 뿐 지향점은 같기에 종교는 많을수록 좋다는 종교개방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 모든 종교에 개방되었다는 것은 종교가 더 이상 개별 종교의 고유 의미를 잃었다는 뜻이고, 결국은 종교란 없다는 의미와 그리 멀지 않다는 얘기이다. 다만 이들 종교를 통해 이라는 것의 독자적 특성을 차용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고 내겐 이해된다. 인간의 껍데기를 입어야만 했던 기독(基督)신조차 프라브리티의 차원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필요였음을.

 

아무튼 이 책을 통해 나는 박상륭의 작품 속에 투영되고 있는 오두일체(五頭一體)를 이루는 독특한 시간관, --마음(이를 박상륭은 이라 한다)’을 토대로 하는 그의 인간 진화론적 틀의 규명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잠과 꿈, 해골과 신발 등의 상징어가 지닌 의미를 그의 작품 속 지나쳤던 문장이 설명하고 있었음을 깨우쳤다. 무엇보다 그의 소설집인 평심(平心)의 각 단편마다 등장하여 죽음의 한 연구』 『칠조 어론등 두루 편재하는 프라브리티(pravritti, 色界)와 니브리티(nivritti, 空界)의 잡히지 않았던 관념들을 제법 명쾌하게 이해하게 된 것은 한 정직한 지식인의 지극히 성실한 노력이 만들어 낸 이 책의 덕분이다.

 

프라브리티의 우주를 지속시키는 살욕(殺慾,파괴)과 생식욕(生殖慾,창조)의 이 상극(相剋)적 질서 체계가 바로 종교적 고행임을, 집 이뤄, 애써 살기의 도()를 닦기엔 열심인, 그것이야말로 참종교 아니었겠는가?”(평심, 두 집 사이-제일의 늙은 아해 얘기)라는 문장처럼, 이 현실의 몸을 지니고 의식을 표현하는 말을 하며 사는 현세적 존재의 비극이자 은총임을 그토록 증명하고 확인하고 싶어 했던 작가의 세계에 어렴풋 다가가게 된다. 사실 일생을 이 하나의 궁극을 위한 잡설 쓰기에 몰두했던 한 인간에게 안타까운 연민을 느끼게 된다. 이 연민이란 어쩌면 그보다는 나를 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프라브리티의 순환 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한 유정(有情)의 지난한 언어의 세계를 본다.

 

상극적 질서가 자연의 도()라면 도는 결코 인()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현세인 이승의 질서가 이런 것이라면 그의 잡설인 칠조 어론(七祖語論 3)의 문장처럼 다만 지나가야 되는 곳이지 머무는 곳이 아니다라는 말에 꾸벅일 도리밖에. 결국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은 고해를 헤쳐 나가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해서 박상륭의 잡설은 이 저주의 장소를 어떻게 극복하고 은총의 장소로 바꿀 것인가를 탐색하는 과정일 것이라 이해하게 된다.

 

박상륭이 그의 작품 속에서 초지일관 지속했던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구원의 문제임을 궁구(窮究)하는, 그의 작품 세계를 보다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도록 하는 성실하고, 정직하며 친절한 저술이다. 박상륭의 작품 앞에서 멈칫거리거나 읽기에 좌절했거나, 혹은 비난의 오독 속에 침잠해 있던 모든 독자들에게 이 텍스트의 활용을 추천한다. 아마 박상륭의 잡설이 하나의 위대한 소설문학 작품으로 다가 올 것임을 확신한다.

 

참혹한 상극의 세계가 노골적으로 펼쳐지는 작금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그 혐오스러움이 애꿎은 내 육신의 살아감을 분노하게 한다. 박상륭이 현실세계의 문제를 외면했다고 하는 지적들은 절반만 옳은 얘기 일 것이다. 물론 그는 이 프라브리티의 세계를 벗어날 궁리만 했으니 그 경계 내에서만 그러했다는 말이다. 때문에 그의 현실 진단은 자기중심적 독해에 머물기도 했다.

 

일례로 세납자들이 세금을 바쳐, 저들의 배를 채워주려면, 얼마나 뼈 빠지게 일을 했어야 했겠는가(평심, 로이가 산 한 삶)”라며 복지사회를 맹렬히 비난하기도 한다. 이는 바로 상극의 질서가, 즉 끝없는 투쟁이 있는 현세가 곧 종교적 고해라는 믿음을 지닌 그였기에 자아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라는 그의 진화론적 틀에서 그러한 것이지, 배곯으면 배고픔을 느끼는 실재하는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단편 작품들은 이러한 시선에 대한 응답이기도 할 것이다. 다채로운 고통에 직면한 인간들에 연민과 애틋함, 아픔을 자기의 것처럼 나눈다. 그러나 거기까지.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이것은 그의 글쓰기가 현실인식 능력을 상실한, 자폐적 공간에 함몰된 우아한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한다. 이처럼 문학예술에 대한 세간의 이해는 첨예하게 반목한다. 현실 인식을 투영하지 못하는 것은 문학이 아니라는 비평과 예술은 현실에 없는 것을 상상해 내는 것이라야 한다는 예술 그 자체의 지향성에 대한 옹호가 있다. 박상륭을 읽을지 말지는 그야말로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읽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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