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의 에세(Les Essais)21

우리 행동의 변덕스러움에 관하여를 읽으며

 


Essais 2-1 에서


작금의 권력은 가장 흔하고도 명백한 악덕을 보여주고 있다. B.C. 1세기의 시리아 출신 그리스 희극작가인 푸블리우스는 재고(再考)할 수 없는 결심은 가장 나쁜 결심이다.”라고 말했으며, B.C. 4세기의 그리스 정치가인 데모스테네스는 모든 덕의 시작은 반성과 숙고이며, 그 끝과 완성은 확고부동이다.”라 말했다고 몽테뉴는 그의 생애 저술인 에세에 인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릇된 결심을 독단적으로 강행하고, 반성과 숙고란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권력은 악이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몽테뉴의 에세(Les Essais)21장인 우리 행동의 변덕스러움에 관하여를 읽으며 현실의 권력이 자행하는 행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기에 몇 자 적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진솔한 위대한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온갖 모순을 발견한다.

 

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2.28 ~ 1592.9.13



자기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기에게

또 자기의 판단력에서조차 그 같은 다변과 불일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고하고 단순하게 한 마디로 말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는 자신의 정신이란 온갖 잡다성과 모순이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공존하고 있음을 이해한다, 인간은 자기와 자기 자신 사이가 자신과 남 사이만큼 차이가 있음을, 즉 항상 같은 인간으로 있기란 불가능하며, 서로 모순되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일에는 반성과 숙고라는 깊은 사려를 통해 도출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런데 작금의 권력은 숙고를 통한 확고부동의 길을 알지 못하는 듯하다. 모든 정책에 어떤 지침이나 분명한 원칙을 발견할 수 없다.

 

모두 자의적이며 임기웅변의 권모술수만이 행해지고 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 범인의 흔해빠진 본성이며 명백한 악덕임을 벗어나지 못하는 행위로 국가를 통치하려든다. 어떠한 것도 확고부동할 수 없음을 안다면 잘못된 정책과 견해는 재고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반드시 바로잡아 시행되어야 한다. 사실 그 어느 정권보다 무능력한 폐쇄 집단 출신의 인간들이라면 더욱 자신들을 돌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이 강압적으로 추진하려드는 정책들에는 어떠한 원칙이나 질서도 없다. 때문에 정책 행위들에 아무런 일관성도 없으며, 모든 일들 사이에 빈틈없는 연관성과 질서가 있어 국민적 연대를 통한 추진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어디로 가려는지, 가려는 목적지는 있는지를 어떤 국민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정권에는 어떤 확실한 지침이나 명료한 국가 청사진이 없는 것 같다. 자신이 온갖 모순덩어리임을, 결국 인간에 불과함을 인식해야 한다. 종잡을 수 없는 잡다한 조각으로 구성된 미물에 불과함을 말이다. 어찌 재고가 없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마치 전지전능한 신권을 지녔다는 듯, 자신의 무오류를 주장하는 것이 바로 독재이다. 독재는 자신의 불의로 인해 민중의 언로를 자기 입맛에 맞추려 들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무오류가 오류투성이 임이 만천하에 드러나기 때문일 테니 말이다.

 

지금 권력의 정책들은 주소도 목적지도 없으니 길을 헤매고 혼돈으로 우왕좌왕, 좌충우돌로 정쟁으로 왜곡되기 일쑤고, 민생과 국가 발전의 길은 좌초되어 침몰하고 있다는 지표가 도처에서 경고등을 발하고 있다. B.C. 1 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주벽(酒癖)으로 취한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술의 위력이 스며든 인간의 지력 흐릿해짐과 험상궂은 눈, 그리곤 고함과 싸움질로 치닫는 거칠고 동물적 악덕 행위로 말이다. 한 국가의 리더가 자신의 주벽을 뻔뻔하게 시민들이 오가는 길에서 과시하는 파렴치함을 보일 때 그것을 루크레티우스의 경고와 결합시켜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허황된 자부심이 얼마나 인간을 지각없게 만드는가! 지금의 한국사회는, 그 시민들은 반성도 없으며, 숙고도 없고, 그 어떠한 확고부동하고 사려깊은 정책도 없는, 게다가 술잔치로 세월을 보내는 권력이 불안하며 그곳에 차가운 눈초리를 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나른해진 사지로 건들거리며 다리는 꼬여 비틀거리는 꼴을 보는 것은 국민적 자존감에 상처를 준다. 깊은 사유를 통한 끝에 도달한 명료한 목적이 없으니 구체적 행동들이 제어되지 않는 것,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모든 재난에 대한 대응의 실패와 회피, 외교적 무능과 실수의 연발, 왜곡된 언론관에 의한 국민의 목소리에 대한 탄압적 폭력행위는 바로 이러한 자기반성과 숙고 없음, 불완전한 존재에 대한 겸허한 인간적 자기 인식 없음으로부터 출현하는 비정상적이고 뒤틀린 악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전체의 형태를 염두에 둘 수 없으니 부분들이 정돈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때문에 각 통치 기구의 상호 네트워크의 유연한 연결을 비롯한 거버넌스(governance)의 실패는 불가피한 것이다. 이것이 현 정부의 난맥상이다. 약간만 돌려보거나 조금만 다르게 봐도 온갖 모순이 발견되는 것이 인간이다. 하물며 국가의 그 복잡다단한 정책들은 어떠하겠는가?

 

잔인성의 표본인 로마의 네로도 한 인간을 사형에 처하는 서명을 하여야 하는 것이 너무 가슴 아퍼 내가 글씨를 쓸 줄 몰랐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간의 정신이란 이처럼 변덕스럽고 모순으로 뭉쳐있음이다. 제아무리 지혜롭다한들 인간이다. 지혜란 인간 본연의 조건들을 이길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에 몽테뉴를 빌어 쓴소리를 끄적이게 됐다. 세네카가 말했다.항상 같은 인간으로 있기란 매우 어려운 일임을 알라.”고 말이다. 반성하고 숙고하며 그 완성으로 확고부동한 정책을 펼치는, 다른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의 믿음을 재고할 수 있는 권력으로 쇄신(刷新)하는 인간이기를, 또한 권력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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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 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홍상희.박혜영 옮김 / 책세상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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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던 그 첫 시간이 그것을 거두기 시작했다

(Prima, quae vitam dedit, hora, carpsit)” 

- 세네카, 아우구스트, 몽테뉴 ,장켈레비치, 죽음, La mort에서

 

도래하지 않은 먼 미래의 사건으로서 노쇠를 자신에게는 오지 않을 비현실로 여기는 인간적 시간 사유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으로 책의 감상을 시작하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책의 서론에 적절한 이야기가 있는데,   한 농부는 자기의 늙은 아버지를 가족과 격리시켜 놓고 조그만 여물통 속에 음식을 담아 먹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어린 아들이 나무판자를 짜 맞추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어린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건 아빠가 늙었을 때 쓸려고 만드는 거야.’


필요한 것을 조달할 능력이 없는 노인은 언제나 짐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알고 싶지 않아도 노인에게 설정하는 조건이 바로 자기 자신의 내일의 인간의 조건임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일 것이다. 절대 자신에겐 노쇠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여기지만 그 누구도 이를 피한 인간은 없다.(젊어서 우연한 질병이나 사고에 의해 죽지 않고서는)

 

시몬 드 보부아르가 노년에 관한 에세이인 이 책을 준비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참 이상한 생각도 하셨군요!”라고 비아냥거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말한다. 이 말에는 대다수의 인간이 노인이 된다는 사실, 즉 삶의 이 자명한 큰 변화를 사전에 직시하는 사람이 거의 없음을 의미한다. 저런 일은 내겐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망상은 늙는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만 관계있는 것으로 몰아간다.

 

이 책은 노년에 이른 사람들의 운명이 어떠한가를 밝히는 것을 본질적 목표로 한 에세이다. 그것은 시공을 넘어 민족지학적, 인류사적 자료들의 탐색, 문학과 사회학적 각종 지표들과 저술들, 정치경제적 국가별 정책들을 아우르며, 노년을 대하는 사회와 개인의 이해를 생물학적 현상을 넘어 문화적 현상을 포함하는 총체적 조망을 한 770여 쪽의 묵직한 노작이다.

 

사람들, 우리네 사회는 노년에 대해 상당히 이중적이고 모순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마치 평등성이라는 윤리를 으스대듯 모든 차원에서 젊은 사람들과 똑같이 취급한다. 그러나 막상 경제적 지위나 욕구와 감정들에 대한 판단으로 다가서면 아주 차별적인 분류로 범주화하고 이질적 종류의 인간으로 취급한다. 이 사회는 노인들이 예전에 가졌던 인간의 자질과 결점들을 고스란히 가졌음을 모른 체하며 노인이 똑같은 욕망과 감정, 요구들을 표명하면 빈축을 사게 된다. 노인이 사랑하는 것은 추하며, 성행위는 혐오스러운 것이 되고, 무엇보다 노인은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는 존재이기를 요구한다.

 

노년기란 모든 인간의 직접적인 가능성의 일부라는 것을, 자신들의 내면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음을 생각지 못하는 이러한 가치관과 관점들은 마치 자신들은 결코 늙지 않을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노년은 이렇게 단순하게 인간의 신체적 감각의 본질에서 비롯되는 문제만은 아니다.

 

사실 노년기에 접어드는 분명한 연령 계층이란 것이 존재치도 않는다. 시작되는 순간은 명확히 정의되어 있지도 않을뿐더러, 시대와 장소, 사회적 계층에 따라 엄청난 차이와 변화가 있다. 잘나가는 시인, 고위 정치권력 계급, 축적된 상당한 부를 지닌 은퇴자 등 사회적 부와 권력이라는 지위를 지닌 자들은 노인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노년이란 나이가 많은 특정 개인에 대한 보편적 호칭이 아니다. 이들 계층은 무덤에 들어 갈 때까지 사회적 지위와 행세를 하며 노년을 인식하지 않은 채 죽는다. 어쩌면 장켈레비치의 말처럼 이러한 자들은 영원히 산 존재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죽음이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이니 말이다.

 

OECD 노인 자살률 1위를 놓치지 않고 유지하는 국가가 바로 한국이다. 고려장이란 옛날 고대의 풍습이라며 마치 지금 한국사회는 그 같은 문명이전의 비윤리적 야만성과는 거리가 먼 사회라고 자기기만을 떨어대지만 이 지표는 사실 세계에서 가장 냉혹하고 반도덕적인 차별사회임을 쉽게 반박하기 어렵게 한다. 노인에 대한 사회안전망은 지극히 취약하고, 생활에 필요한 것을 조달할 능력이 없는 노인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말년의 불행이 휩쓰는 사회, 그것은 지금 살고 있는 사회가 착취제제임을 강경하게 고발하는 하나의 표징이라 할 수 있다.

 


노동인구로 활동하여 획득한 소득의 많은 부분이 최상위 계층의 주머니에 들어감으로써 사회안전망의 자원이 되어야 했던 것들이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사적 부가 되는 자본주의의 착취적 속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윤에 종속된 문명은 인간이라는 도구도 이익을 가져오는 한에서만 관심의 대상이므로 늙은 여자와 남자는 사회적 관심에서 배제된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마치 노년을 항해를 다 끝마치고 도착한 항구의 감미로운 즐거움을 떠벌려 예찬하는 책들이 염치없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실제 대부분의 수많은 노인들에게 사회가 부과하는 생활수준은 너무도 비참해서 늙고 가난한이라는 표현은 이제 중복 표현에 불과할 정도이다. 천박한 극우집단의 정치적 앞잡이가 된 자유주의 수구 경제학자는 이렇게 지껄인다. 노년의 그 많은 여가시간에 뭐라도 창의적이고 생산적 활동을 하지 않는 게으름 탓이라고 말이다. 여가시간이 많다고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이 해방되는 순간 그 자유를 활용할 수단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작금의 이 사회의 정책이 소수의 특권층만을 위한 것이다보니 대다수인 인민을 위한 정책이 극성스럽게 훼손되거나 사라지고 있다.

 

인간은 절대로 자연 상태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 노년기에도 한 개인의 지위는 그가 속한 사회가 그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노년기라 생산 활동에서 배제시키고선 그 배제됨을 비난하는 특권층의 악의가 날로 기승을 부린다. 지금도 고독과 권태 속에서 그럭저럭 목숨을 부지하며, 인수를 거절당한 불량품으로 살아가는 노인들이 즐비하다. 이 사회의 문명적 실패의 징후이다. 아니 야만의 실체적 표지이다. 한국 사회는, 특히 현재의 정치지배 권력은 이러한 현상에 대한 이해도 없으며 오히려 노년의 비인간화를 윽박지른다. 개인은 사회가 그에게 취하는 실제적이며 관념적인 태도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이 책을 통해 우리사회의 현실을 판단할 수 있다. 무수히 노정되는 사회적 난점을 해결하기 위한 처방들과 사회가 책임져야 할 몫이라는 것이 무언지를 말이다. 이 사회의 중산층의 신화는 점점 노년을 타자화하며 자신들과는 무관한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노화란 변화의 한 유형이다. 불가항력적이며 불리한 변화, 이러한 변화를 우리는 노화라 부르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숙기 이후 뚜렷해져서 마침내는 확고부동하게 이르는 불리한 변화의 점진적 과정이다. 이를 피할 수 있는 인간은 그 어느 누구도 없다. 모두 노년기를 거치며 늙는다. 다만 노년을 맞게되는 방식이 계층에 따라 다를 뿐이다. 그 다름은 10%90%의 두 다름이다. 90%의 대다수 노인은 결코 황금인생이라거나 풍부한 경험을 지닌 예지의 인간이 아니다. 늙은 여자, 늙은 남자,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노인을 단지 비경제 활동 인구로서의 짐이라 인식한다면 우리 모든 인간의 미래 역시 비경제 활동인구가 될 것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을 부양할 책임을 맡음으로써 자신들의 미래를 오히려 확고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볼 일이다. 동물적인 생존, 그것은 죽음보다 못하다.”고 했다. 우리 사회가 노년의 인간들에게 죽음 보다 못한 인간으로 내치고 있는 중임을 각성해야 할 때이다. 노년은 다른 연령층처럼 사회적 목소리를 지니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노인일 뿐이다. 설혹 그들의 목소리가 잡음으로 들려올지라도 그것은 결코 귀 기울여 들을 주제로 인식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욱 다가가 들으려 애써야 겨우 들을 수 있다. 이러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문명인, 윤리적 인간이기를 멈추는 것이 될 것이다. 20, 40세에 자신이 노인이 된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마치 타인을 생각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타인인 그 미래의 노인을 어루만질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우리는 인간이기를 너무도 많은 부분에서 놓치고 있다. 아니 놓으려 하고 있다.

 

책은 노쇠에 대한 어떤 환상적 수사로 기만적 찬사를 하는 엉터리를 말하지 않는다. 단지 노년의 모습 그대로, 그 자체를 삶의 한 순간으로 어떻게 지혜롭게 관리해 나갈지 개인적 태도의 사유를 돕고 있으며, 또한 사회, 문화적 정책과 기능, 역할에 대해 보다 총합적인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는 사례와 방법론들을 제공하고 있다. 노인을 인간 조건의 영역 밖에서 생각할 줄 모르는 인간의 오래된 한계를 자각하는 깨어남의 시간이 된다. 노화라는 불행의 표적이 된 삶을 어떻게 견디느냐에 대한 유익한 문화 산책의 시간도 될 것이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나이듦의 의미에 대한 이 위대한 저술을 모든 인간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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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3-08-04 17: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대한노인회 회장이 ˝손찌검을 하면 안되니까 내가 사진이라도 뺨을 한대 때리겠다˝며 김은경 위원장의 사진을 때리는 장면을 보면서 경악했습니다

어제 오늘 머리속에 노년.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 존경받는다는 것. 천박해지지 않는다는 것.. 이런 생각이 머리속에 가득하네요

필리아 2023-08-04 18:51   좋아요 2 | URL
이런 자들이야말로 노년을 예찬하는 사기꾼들이죠. 이들은 권력에 심취해 노년을 자기이익을 위한 선전물로 이용하는 파렴치한 그 이상이 아닐겁니다. 이들로 인해 다수의 약자인 노인들을 소외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이들은 결코 노인이 아닙니다. 이들은 노인을 착취하는 권력일 뿐이죠.
 
모든 열정이 다하고 쏜살 문고
비타 색빌웨스트 지음, 임슬애 옮김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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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너희는 옷을 걱정하느냐

들판의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아라.”

- 마태복음628절에서

 

 

1대 슬레인 백작, 인도총독과 대영제국의 총리를 지낸 아흔네 살의 헨리 라이얼프 홀랜드가 죽었다. 자식들은 미망인이 된 여든여덟 살의 레이디 슬레인을 자기만의 의지가 없는”, “한평생 자애롭고 온화했으며 전적으로 가족의 의지에 따르는 일종의 부속물로 인식한다. 큰 아들 허버트는 어머니는 잘났다고 설치는 다른 여자들이랑 다르잖아.라고 떠벌리며, 슬레인 경의 책상에 놓인 신문처럼 어머니를 치워버려야할 존재로 취급한다. 아버지가 죽자 자식들은 부모의 집인 엘름 파크 가든스의 매각처분과 어머니의 연금을 빼앗기 위해 자신들이 돌아가며 수개월씩 모신다는 데 뜻을 모은다. 어머니의 의지와는 무관하다는 듯이.

 

아버지의 장례도 치러지기 전이다. 자식들은 이러한 뜻을 어머니에게 전한다. 마치 자신들이 통보하면 그대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듯이. 그러나 레이디 슬레인은 이들의 제안을 물리친다. 런던 교외 햄스테드에 보아 둔 집에서 혼자 살 계획임을, 태어난 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까운 사람들만 곁에 두고 살고 싶구나.”, 레이디 슬레인은 조용히 맏딸 캐리와 맏아들 허버트의 간섭을 저지함으로써 그들의 탐욕을 궤멸시킨다. 그리고는 자신이 지녔던 보석 모두를 허버트 내외에게 미련없이 주어버린다. 기쁨을 숨긴 허버트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자식들은 혼자 살겠다는 어머니를 비난한다. 그리곤 자신들은 어머니에게 모실 것을 제안한 효심있는 자식이라고 도덕적 기만, 알량한 양심에 만족스러워한다. 남편 헨리의 죽음은 급작스레 레이디 슬레인에게 자유를 선사해 주었다. 70여년의 세월을 남편의 야망을 보조하는 역할, 그 대가로 보호받고 무지를 강요받고, 분리되고 억압당했던 세월에서 해방된 것이다. 여든여덟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화가가 되기를 꿈꾸었던, 성의 기쁨과 권리를 포기하고 꿈을 실현하는 존재가 되기위해 변장하고 도망을 꿈꾸던 열일곱 살 데버라 리가 세상이 그녀에게 걸었던 기대를 실현하는 대단하고 즐거운 미덕으로서 홀랜드와 약혼함으로써 인생의 목적이 중지되었던 것이다. 이제 여든여덟의 레이디 슬레인은 분투하는 삶을 살기 위한 그녀 안의 여자를 벗어나 사색하는 삶, 그녀 안의 예술가, 그녀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삶을 선택 한 것이다.

 

소란과 경쟁은, 한 사람의 야망이 다른 사람의 야망을 찍어 누르는 상황은 지긋지긋했다. 빈집으로 흘러드는 존재들과 하나가 되고 싶었다.”  -67

 

그녀는 다짐한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은 평온과 사색을 위해 살리라고. 분투하고 계획에 얽매이고 애써야 하는 삶은 거부하리라고.” 그런 거짓된 삶으로 낭비하지 않으리라고. 햄스테드의 집주인이자 중개인 영감 벅트라우트와의 매주 화요일의 친밀한 차 한 잔의 담소, 언덕 위로 갈색 나무와 탁 트인 푸른 하늘이 어우러진 지극히 아름다운 햄스테드 히스의 산책, 그녀가 원하는 잔잔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간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데버리 리이자 레이디 슬레인은 남편을 위해 살았던 삶을 결코 희생이라 말하지 않는다. 사치스러운 여성주의적 사고관을 탐닉하기에는 너무나 현명한여성이었기에 그녀는 자신의 본질과 운명 사이의 간극을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사이의 간극으로 이해하려 애쓴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상황이 악화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당대 가부장적 권위와 남편의 사회적 지위로 인한 총독의 부인, 총리의 부인이라는 부속적 수식어의 삶이 불가피했으며, 그녀는 그러한 역할을 그 누구보다 잘 수행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그런 삶을 원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녀는 이러한 삶이 자신의 소망을 질식시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잘 살아냈으며 그 삶 또한 언제나 안락했음이 진실이었음을 인정하듯 그녀는 지난 삶을 압축된 하나의 단어로 규정짓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이 소설을 노년의 삶에 대한 이해를 위해, 죽음에 등을 기대고 삶을 곱씹을 수 있는 무색의 풍경을 읽는 시간으로 삼는데 오히려 주력했다. 그래서 나이 많은 한 여인의 시선이 자신의 유년기와 젊음의 시기를 관통하고 인생의 윤곽을 그려보는 작업에 공감하고 동참하며 읽어나갔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부유하다가 죽음이 그녀를 부드럽게 쫓아내고 문을 닫으면 그것으로 끝이기를 바랐다.”는 문장에 나는 시선을 박고 한동안 머물렀다. 이런 평온을 얻으려한다고 모두 얻는 것은 아니겠지만 무엇을 표현하든 상징밖엔 사용할 수 없는 노년의 마지막 소박한 소망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망의 실현조차 세상은 결코 그대로 놓아두질 않는 모양이다. 새로이 그녀의 늙은 친구가 되었던 수집가인 백만장자가 죽으면서 그녀, 레이디 슬레인에게 남긴 엄청난 유산으로 다시금 불가피한 소문에 휩싸인다. 이때 장녀 캐리가 형제자매들을 모아놓고 어머니가 젊었던 옛 시절을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배신, 존재하지도 않는 불륜의 추문으로 더럽히면서까지 자신들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막대한 유산에 대한 욕심을 부린다. 레이디 슬레인은 상속받은 예술품을 국가에 기증하고 돈은 병원에 기부해버린다. 이때 자식들은 미쳐 날뛰고 온 세상이 들썩인다. 그러나 정작 레이디 슬레인은 무덤덤하게 통과해버린다.

 

그래, 세상은 정글같으며 결과와 업적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세상에서 재물의 유혹에 무심한 채 자기만의 뜨거운 열정으로 은밀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을 세상은 참지 못한다. 그들은 이른바 쓸모없는 존재로 간주되어 무능한, 무력한, 무지한, 게으른, 배제되어야 할 비난의 대상으로 몰아붙이기 일쑤다. 레이디 슬레인의 이름을 물려받는 증손녀 데버라는 마치 그녀의 생의 의지를 닮은 듯 예술가를 꿈꾸며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면에 돌처럼 견고한 솔직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음에도 세상은 쓸모없는 존재로 간주한다고 자신이 마주한 딜레마를 말한다. 이때 레이디 슬레인은 효모(leaven)같은 존재들이야. 세상에 생명력을 불어넣지.”라며 그들도 쓸모있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여기서 구태의연하게 진부한 도덕적 인생론을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삶의 모습이야 천태만상 아니겠는가? 다만 나는 레이디 슬레인이 바라는 제 기력으로 살 수 있는 그런 평온과 사색의 삶, 젊음의 분투가 온몸에 새겨진 소란만큼은 피한 암묵적이고 상호배려로 가득한 관계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고 싶어진다. 그리곤 언젠가 조용히 죽음이 나를 쫒아내 주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어본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노년 (La Vieillesse)에서 이렇게 썼다.


인간의 노쇠는 언제나 사회 안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노쇠는 그 사회의 성격과 그 사람이 그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와 밀접한 종속 관계에 있다. ...노인의 조건은 결코 생물학적 여건들에만 달려있지 않다. 거기에는 문화적 요인들이 개입되어 있다....노인들에게 지정되는 자리는 어떤 것이며, 사람들이 어떤 노인상()을 품고 있는가에....”

 

레이디 슬레인의 자식들, 세상과 분투하며 자기 이익에 몰두하는 인간들은 자신의 시선이 위치한 자리를 망각하기 일쑤인 것 같다. 노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들, 지금의 사회가 가진 노인상은 노인을 한낱 물질, 하나의 종속적 양태로 여기는 듯하다. 그들이 하나의 동일한 인간 존재임을 잊는 한 진정한 화해는 불가능할 것이다. 끝까지 세상에 굽히지 않았던 인간, 모든 것을 누렸지만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것들이었으며, 들판의 백합이기를 바랐던 한 인간의 마지막 삶의 기록이 아름답게 흐르는 작품이다. 정말 열정이 다 할 때까지 더 기민한 정신과 깨어있는 감각으로 살아 갈 수 있기를, 그러한 마지막 시간을 꿈꾸어 보게 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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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7-31 1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타 색빌웨스트의 글이 궁금했는데... 보고 싶네요.

필리아 2023-07-31 18:22   좋아요 1 | URL
편견과 관습적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들에 예민한 경계를 보인, 그리고 자신에게 진실하려 했던 생의 신념을 고수한 인물이랍니다. 소설 속 노년의 레이디 슬레인에게서 이러한 전념의 열정이 보인답니다. 생전에 10편의 시집과 12편의 장편, 무수한 단편과 산문을 남겼으며 계관시인으로 거명되었던 작가였음에도 우리에게는 고작 버지니아 울프와의 관계정도로만 소개되고 있는 것이 아쉽지요. 즐겁고 건강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그레이스님~
 
악마는 잠들지 않는다 - 일상화된 재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법
줄리엣 카이엠 지음, 김효석.이승배.류종기 옮김 / 민음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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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은 해로움 때문에 주의를 끌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사회와 제도의 실체를 비추기 때문에 

관심을 끈다. 재난은 이미 잘못된 것을 드러낸다.”

 -본문 56쪽에서

 

 

지금 한국사회는 짧은 시간에 너무도 많은 재난을 겪고 있다. 이 재난은 바로 그 사회의 제도와 정책, 관리들, 사회구성원의 민낯을 드러내 윤리적, 정치적 실체를 까발린다. 딱 그 정도의 수준과 위치임을, 젊은이들의 어처구니없는 죽음, 예견된 재난에 대한 무대책과 방관이 야기한 불필요한 죽음들이 마치 불가피하고 대비 불능했다는 듯이 일탈적인 예외적 사건으로 치부되고 책임을 회피한다. 책임져야 할 정부는 외면을 넘어 터무니없는 변명과 정쟁으로 시선을 왜곡하기까지 한다. 때문에 재난이 야기된 원인에 대한 조사도 애초에 하지 않게 되고, 재난은 반복되고 더 빨리 재앙이 되어 돌아온다. 그 피해는 온전히 시민대중이 반복적으로 뒤집어쓰게 되는 결과만 초래한다.

 


이 책은 재난에 대한 인식제고를 통해 어떻게 재난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지, 더 성공적으로 이겨 낼 수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전략과 지표, 척도를 제시한다. 재난의 본질이란 재난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는 결코 완전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데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또한 재난은 어떤 일회적 일탈적 사건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늘 함께하는 일상적 표준으로 인식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경고의 목소리. 재난조차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덧씌워 쟁점을 흐리거나 정치화하여 일개 괴담놀음거리로 만들어대는 권력의 선전장으로 전락하는 작금의 현실은 너무도 안타깝기만 하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아무런 짓도 하지 않은 주무처 장관에게 헌재(憲裁)는 면제부를 쥐어줬다. 과연 이러한 권력의 시선으로 국민을 재난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까? 아마 잠자지 않은 재앙은 끊임없이 무대책과 무방비로 일관하는 권력으로 인해 시민대중에게는 각자도생의 길을 찾는 험한 길만 주어진 것 같다. 이 책은 위에서 언급했듯 재난에 대한 인식과 대비를 위한 깊이 있는 지식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주목하게 것은 재난에 대처하는 지방 및 중앙 정부의 주무관리들과 그 수뇌부들이 응당 해야만 하는 책무와 태도이다. 때문에 시민의 시선에서 이들 행정권력 기관에 대한 재난 정책에 대한 감시 역량을 높이는데 분명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된다.

 

내가 있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 지역의 수장은 재난 상황의 실시간 상황인식의 엄중성을 부정하는 말을 감히 내뱉으며 책임을 외면하는 현실에서 국민은 이들에게 강력하고 엄격한 명령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재난은 지나가지만 그 과정에서 사회의 정체성과 문화, 무시해 온 문제들을 드러낸다. 오송 지하차도 침수로 인한 인명 피해는 예견된 집중폭우에 대한 그 흔한 대비가 전무했음을 드러낸 여실한 사건이다. 재난에 대한 사전 대비 없음도 문제지만 실시간 상황에 대한 상황보고 체계도 작동하지 않았으며, 이를 통합 지휘해야하는 도지사는 마치 자신과는 무관한 재난이 펼쳐진 것처럼 자신을 예외지대로 두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책은 리더의 상황 인식과 상황지휘 체제를 중요한 재난관리 요소로 다루고 있다. 특히 사고지휘체계(ICS)는 모든 리더가 이해하고 있어야 할 대응체계로서 현장 정보를 보고, 분석, 의사결정하여 신속한 재난 대응 처리를 위한 필수책무로 강조하고 있다. 재난의 실시간 상황보고와 상황인식은 지역의 수장, 중앙기관의 리더, 최고통치권자에 이르는 자들이 왜 재난 현장을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의 중대한 앎을 제공한다. 결과 추이에 따른 문제 최소화를 위한 즉각적 조치뿐 아니라 후일 반복되는 재난에 대처하는 방식에 효과적 지식으로 축적되기 때문이다. 이를 회피한 자들은 재난에 대해 결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뿐 아니라, 재난의 실체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의심할 여지없이 절대적으로 대응이 필요한 위협을 위기(risk)라고 말한다. 이 위기가 적절히 해결되지 않고 끔찍한 결과가 발생할 때를 재난(disaster)이라 부르며, 이 재난이 미숙하게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것을 재앙(catastrophe)이라 한다. 금의 한국사회는 위기의 단계에서 처리되는 것이 없다. 위기가 발생하면 모두 재앙에 이르고 있는 현실은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모두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다는 말과 같다. 재난 불감증에 걸린 권력은 배워야 하지만 배우려 하지 않는다. 국정을 장악한 현 권력들은 한결같이 실존적 결정을 돌아보길 거부하면서 학습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때문에 아무런 학습이 되지 않으며 실패의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신속하고 정직하게 배워야 될 절실한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외면 혹은 무능을 자처하기에 이 사회의 재난은 항시 재앙으로 귀결될 것이다.



예견되는 재난에 대비하는 계획을 유비무환이라 하여 전통적인 사전 대비책도 재난관리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재난이 닥쳤을 때 재난이 진행 중인 상황을 관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시대에 우리는 진입해있다. 상황인식은 재난관리에 있어 더욱 중요해졌으며, 그래서 정부(중앙 및 지방) 수장의 현장관리는 재난의 최소화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책은 재난의 예견에 따른 준비 및 재난 차단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나 더욱 중점을 둔 분야는 재난이 발생한 이후의 관리에 보다 역점을 두고 있다. 지진이 발생한 후 정부 리더와 원자력발전을 비롯한 당해 기관의 위기관리자 역할에 따라 재앙이 되기도 하고 재난의 최소화로 방어 할 수 있기도 하다. 재앙으로 귀결된 사례들로부터 우리들은 상당한 교훈과 지침, 윤리적 책임의식 등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무시하고 은폐하고 거짓말로 기만적으로 넘어갔던 재난은 재앙으로 반드시 그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위기가 코앞에 닥쳤는데도 외면하는 현상을 타조의 역설이라 부른다. 근시안, 낙관주의, 기억상실, 타성, 단순화, 자기 이익과 무관함 등이 서로 얽혀 다가오는 위기를 받아들이는 것을 꺼리는 태도이기에 이들에게 재난의 닥침은 곧 재앙으로 무참히 연결될 뿐이다. 특히, 서울의 상습적 침수는 배수관로에 대한 전반적 점검 및 개량을 필요로 한다, 즉 예산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수장은 이 예산을 전면 삭감하였다. 자원낭비라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이들에겐 재난 대비 예산은 본질적으로 바보같은 짓이며, 신경쇄약자의 과잉반응으로 간주된다. 그리고는 재난이 닥치면 다시는 안 된다(never again)'는 진부한 문장으로 짐짓 결연한 기만적 태도로 자신감을 내보이곤 한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으며, 재난은 반복된다.

 

혹여 행정기관의 재난에 대한 준비태도나 방법에 대한 시민적 오해가 있다면 그것에는 도사리고 있는 무수한 또 다른 방해 요인이 있을 것이다. 지식이나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거버넌스 구조의 책임 분산이 통합된 노력으로 대응하는 체제를 방해했거나, 예견되는 무수한 적색신호의 잡음에 대한 무시, 사적 이해관계가 얽힌 규제의 느슨함이거나 규제 특권이 부여된 예외지대의 탈법적 지대가 생성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최후 방어선이라는 함정에 빠져 최후의 안정장치에 의존하여 재난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수도 있다. 최후의 안전장치가 작동하지 않으면 안전장치는 사라지고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고 만다. 저자는 이와같이 재난에 대한 대비책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들, 리더가 필히 갖춰야 할 태도와 방법적 도구들, 그리고 심리적 태도들에 이르기까지 재난 대응책들을 촘촘하게 제시하고 있다.

 

재난 대비예산의 촉구와 대응책을 요구할 때 지금까지 잘 작동하고 있는데, 별다른 사고도 일어나지 않는데...’와 같이 변화란 없다는 듯한 반론을 곧잘 듣게 된다. 하지만 근본적인 것들은 항상 변하고 있으며, 더구나 인간도 변하고 있다. 과거와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만일 똑같았다면 모든 재난관리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을 것이다. 재난 관리란 끊임없이 울퉁불퉁한 바닥상태에 맞춰 안정되게 만들려는 세 발 의자와 같은 것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항공기 추락, 태풍과 홍수, 쓰나미와 같은 자연재해, 컴퓨터 네트워크의 해킹, 감염성 질병의 확산, 테러로 인한 재앙 등 유형별 재난 사례들과 함께 재난의 대비성이 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인가를 거듭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멜팅(melting) 사고, 911 테러, 보잉 737의 연속적 추락, COVID 확산,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제방 붕괴 등 지구촌 뉴스를 장식했던 재앙적 사건들은 성공적 예방으로 엄청난 인명 손실과 재산의 파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사전 대비가 가능했던 사건들이다. 사욕과 권위적 과시, 권력과 기업의 결탁, 규제 완화와 같은 공적 감시소홀로 재난을 촉진한 인재가 위기를 재앙으로 만들었음을, 즉 재앙의 거의 모든 중심에는 인간의 재난에 대한 이해의 결여, 미숙함, 회피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재난에 대한 이 전문적이고 밀도높은 저술은 재난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를 바꿔 놓는다. 지방 및 정부 관리들은 물론, 기업 위기관리자, 그리고 시민 대중 모두에게 재난을 바라보는 시선을 이 책은 분명 한 층 올려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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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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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나를 집으로 데려가는 대신 엄마의 고향인 해안 쪽을 향해 웩스퍼드 깊숙이 차를 달린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어린 소녀 의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왠지 체념과 감정의 억제를 익혀 체화된 아이가 보이는 듯하여, 아니 사랑을 겪어본 적 없어  버려짐에 대한 감정의 언어도 없는 이 문장이 벌써 가슴을 시리게 한다. 어린 소녀 에게 벌어지는 일에 대해 자신의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상황을, 전속력으로 날아가며 사라지는 작은 갈색 새 떼와 분필 칠을 칠한 듯한 구름을 바라보며 낯섦의 환경을 상상한다. 아이의 말은 극히 절제된 느낌과 정경만을 전함으로써 삶이라는 표면의 신비로운 이면, 그 공백에 어린 무수한 물음들을 생성하여 상상하게 하고 답하게 하려는 것만 같다.

 

다섯 아이와 집안의 허드렛일, 밭일 등 산더미같은 일에 찌든 엄마, 카드게임으로 집안의 큰 재산인 붉은 암소를 잃은 아빠, 건초 수확시기를 놓친 것을 거짓 허영으로 둘러대는 아빠로 표현되는 부모를 둔 아이다. 또 다시 배가 부풀어 오른 엄마의 출산 예정으로 아이는 먼 친척에게 맡겨진다. 소설은 결코 애정이 없는 엄마라던가 무능력하고 이기적인 아빠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의 생각은 말로 표현되지 않으며 무한한 여백을 만들어내며 독자를 상상의 지대로 밀어 넣는다.

 

나는 아이의 생각을 쫓으며 첫 문장에서 지녔던 단념에 익숙한 아이를 거듭 발견한다. 자신을 맡아줄 킨셀라 아주머니와 아저씨에 대한 상상, 가끔 엄마가 기분 좋을 때 하는, 가능성이 훨씬 낮은 따뜻함을 기대하지만 그런 희망은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낙망을 당연함으로 생각한다. 좀처럼 사랑이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며,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이라는 이 체념의 생각을 읽을 때 마음 한 곳이 허물어지는 슬픔이 나를 누른다.

 

아이의 머리는 온통 헝클어져 집시 아이처럼 지저분하고, 아빠는 짐도 안 내려주고 아주머니가 내 온 음식을 먹기가 바쁘게 내빼듯 가버린다.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없이,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는 말도 없이. 원하는 만큼 데리고 있으면 안 되나?”, “애들 먹이는 게 골치예요. ...얘도 마찬가지고요.....먹기야 많이 먹겠지만 대신 일을 시키세요.” 이것이 아이 아빠의 목소리다. 아이의 감정에 대한 어떠한 이해도, 수치심도 없는 어른을 떠올리게 한다.

 

킨셀라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집에 들어서자 빵을 굽는 냄새 외에도 소독약 냄새와 표백제 냄새가 살짝 난다.” 이것은 아이에게 쾌적함, 청결함을 느끼게 한 인상일 것이다. 아주머니는 아이의 더러워진 옷을 벗기고 따뜻한 욕조에 들어가게 하고 목욕을 시킨다. 아주머니 손은 엄마손 같은데 거기에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는 것도 있다.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지만 여기서는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아이가 겪어보지 못한 손길, 결코 받아보지 못한 느낌이기에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아이는 비로소 새로운 말, 감정에 대한 앎의 경지가 열린다.

 


아이는 킨셀라 아주머니, 아저씨와 함께하는 일상 속에서 인간에 대한 다정함과 믿음, 사랑을 경험한다. TV 뉴스 속 단식투쟁으로 사망한 자에 대한 연민, 비가 오면 빗물이 새는 마을 학교 지붕 교체 자선복권을 사는 행위, 미사 보러가기 전 날 네 옷이 생기면 정말 좋을 거야라며 새 옷을 사러갔을 때의 은근한 기쁨, 무릎에 앉히고 자신의 발을 느긋하게 어루만지며, 침대에 눕히고 머리핀으로 귀지를 파주는 아주머니로부터 사람의 감정과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마을 이웃의 장례에 이바지하러 킨셀라 부부와 불가피하게 함꼐 간 날, 아이는 동네 여인 밀드레드에게 잠시 맡겨진다. 그녀는 아이가 입은 옷이 킨셀라 부부의 죽은 아들의 옷이며 죽은 아이가 사용하던 방에서 네가 자고 있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 사연을 듣게 된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밀드레드가 묻고 해주었던 말을 킨셀라 부부에게 사실 그대로를 전한다. 이 집에는 비밀은 없으며,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라는킨셀라 아주머니의 말을 지킨 것이다.

 

아저씨 존 킨셀라는 나를 데리고 밤 산책을 나간다. 바닷가 모래 언덕이 있는 곳으로. 존은 나에게 말한다. 이상한 일이란 일어나기 마련이다. .... 에드나(킨셀라 아주머니)에게 나쁜 뜻은 없었어. 사람이 너무 좋거든. 남한테 좋은 점을 찾으려하는데 가끔은 다른 사람을 믿으면서 실망하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지.” 아이와 아내의 감정 상태를 보듬고 이해시키려는 충실한 노력이다. 아이의 인격을 한 인간으로 동등하게 존중하는 어른, 아마 사랑이리라. 프랑스 철학자 장 켈레비치천진난만의 지혜가 살아있으려면 염려하는 어른이 그 옆에서 생존과 안전을 신경 써줘야 한다.’고 말했다. 정신을 비옥하게 만들어주는 창조의 힘, 생성의 힘, 아마 사랑의 감정에 대한 경험의 교환일 것이다. 바다 저 멀리서 비치는 세 개의 불빛, 내가 아저씨 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끌어안는다.”

 

존은 단어 하나하나 손톱으로 짚으면서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며 책 읽는 것을 가르쳐준다. 자전거를 배우는 것처럼, 갈 수 있는 곳까지 자유롭게 가게 될 때까지, 어느 날 출산소식과 함께 아이를 데려다 달라는 엄마의 편지가 도착한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애쓴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정말 오랜 만이고 그래서...”, 어린 아이가 자신의 집에서 울음도 스스로 억압해야만 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또한 킨셀라 부부의 따뜻한 보살핌,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과의 작별에 대한 슬픔이다. 이러한 사랑의 전염은 아이를 수동적 인간에서 능동적 인간으로 바꿔 놓는다. 바쁜 아주머니를 돕기위해 양동이에 우물을 깃다가 빠져 오한이 들어 며칠을 앓는 사건은 체념과 실망, 혼돈의 슬픔에 지배되던 아이가 새로운 감정, 앎을 지니게 되었음의 메타포일 것이다.

 

아이는 킨셀라 부부와 함께 그녀의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를 반기는 그 누구도 없다. 집의 진입로 대문은 닫혀있고, 아저씨는 차를 세우고 문을 연 뒤 진입로로 들어서서 다시 대문을 닫아놓는다. 엄마가 출산한 새로운 아기와 무질서하게 엉킨 집안, 형제자매들의 낯선 눈초리의 어색함, 엄마와 아빠는 킨셀라 아주머니와 아저씨에게 고마움 전달하기는커녕 냉랭하기만 하다. 킨셀라 부부는 서둘러 갈 길에 나선다. 아이는 대문을 열기위해 멀어지는 아저씨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망설임없이 달려가 그 앞에 도착하고, 아저씨는 를 팔로 안아 든다...쿵쾅거리는 내 심장이 느껴지고...“ 옆에는 목구멍 속으로 흐느끼다 울다가를 반복하는 아주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어쩌면 작품 속 어린 소녀 의 말처럼 우리들의 세계에는 새로운 말이 필요한 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경험하지 못해 알지 못하는 그 무수한 감정들과 앎의 지대를 위해서. 소설은 절제된 표현들, 상상력이 직관을 자극하고 그 직관이 일격에 완성되어 비유와 은유가 시사하는 갑작스런 도약을 통해 형언 할 수 없는 앎의 지대를 재창조한다. 그것은 어떤 말보다 더 풍부하고 깊은 것, 사랑의 마술이라고, 그래서 여백 가득한 문장으로 채워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말 할 수 없는 것을 중언부언하며 말재간을 그 원천까지 고갈시켜버리는 그 메마름과 무지의 공허를 거닐지 않기 위해서. 따뜻함, 배, 사랑 따위의 말을 하지 않음에도 그 어떤 소설보다 뜨거운 감동에 젖어들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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