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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복종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지음, 심영길 외 옮김 / 생각정원 / 2015년 2월
평점 :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는 더럽고 비굴한 욕망을 까발린 이 책은 서른세 살 이른 나이에 요절한 ‘에티엔 드 라 보에시’가 열여덟 청년시절에 쓴 인간 존엄과 자유의 회복을 위한 언설(言說)이다. 그의 죽음 원인이 전염성 복통이라 알려져 있는데, 일종의 독살로 추정될 수 있는 의심을 거둘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스물네 살인 1554년, 보르도의회 재판관으로 임명되었을 만큼 출중했던 이 젊은 지성은 1548년 전제군주가 벌인 시민에 대한 잔혹한 진압을 목도하며 절대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된 매서운 통찰을 담아내고 있다.
그는 유언으로 친구 몽테뉴(Esse를 쓴 미셸 드 몽테뉴다)에게 자신의 모든 원고를 맡기고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나 이 책의 원고는 그의 사후 11년이 되기까지 출간되지 않았다. 몽테뉴는 이 원고를 위험하다고 여겼기에 간직하고만 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절대왕정에 반대하던 모나르코마크란 인물에 의해 비로소 1574년 세상에 그 사유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전하려는 의미가 인간 세상에 폭넓게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200년이 지난 프랑스혁명(1789년) 즈음해서였던 것 같다. 이후 그 이름만 들어도 의지가 전해지는 시몬베유, 빌헬름 라이히, 미셸 푸코, 질 들뢰즈 등으로 계승되며, 드 라 보에시가 제기한 문제는 21세기 오늘 한국사회에서도 그 의미를 역동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사실 500년 남짓 전에 써진 이 책이 거듭 소환되어야 하는 사회만큼 암울한 일도 없을 것이다. 매양 역사의 시간 속에서 반복되는 이러한 말을 하고 있는 나의 어리석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다시금 이 젊은 저항의 에너지, 이성의 열정을 여타의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대신 나만이라도 상기(想起)하려는 뜻에서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은 읽기를 반복하였다. 대체 굴종의 몸짓과 스스로 기어들어가 복종하는 인간들이 망령처럼 살아나 부쩍 증가하는 까닭은 무엇인지,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들이 온몸으로 과시하는 저 추하고 천박한 행태의 의미를 확인키 위함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이 분노를 다스리고자하는 무의식적 행위였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책이 쓰여 질 때에는 거의 모든 민중이 절대 권력을 의심하지 않는 시대였을 것이다. 2023년 10월 12일 지방 보궐선거 결과에서 드러나듯 여론 조사에서 항시 36~7%를 맴도는 그것으로 감소하였으니 민중의 의식에서 자발적 복종이라는 의미는 상당부분 와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 비율이 한 나라의 자유와 정의를 어떻게 갉아대는지는 너무도 중대하다. 바로 그것에 권력을 위임하는 자신들의 자유를 맡겼으니 말이다.
책의 번역자 한 명인 목수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 생뚱맞게 유신을 추억하고 반공을 맹세하는 노예집단들이 간판을 내걸고 설쳐대고 있다. 가장 변태스러운 권력의 꼬붕이 되어, 이 혐오그룹의 선봉에 서려는 일베들이 그 추한 낯짝을 백일하에 드러내고, 급기야 국가각료에 임명되는 황당한 일이 거듭되고 있다.”고. 이들 양아치 집단에 맞서면 존재하지 않는 죄를 뒤집어씌우고 언론공작으로 공개처형을 가하고는, 압수와 수색, 그리고 자의적으로 남용되는 기소로 인간 존엄을 구렁텅이에 쑤셔 박으려 온갖 몹쓸 짓을 서슴지 않는다.
또 한 역자인 심영길은 드 라 보에시를 읽으며 카뮈의 글을 떠올렸음을 쓰고 있다. 8년 전에 쓴 글이 바로 지금에도 한 치의 변함도 없이 적용될 수 있음에 수치를 느끼게 된다. “일본과 미국에 대한 굴종에 길든 관료와 수구 언론의 습성이 자신들과 다른 사고의 사람들을 종북,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구태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개 짖는 소리’를 내고 있다.”고 말이다. 1948년 카뮈는 파리 가톨릭 도미니크 수도원 초청 연설에서 스페인 정치범 처형장에서 사형집행에 신의 축복을 기원하는 주교의 행위에 대해 “더 이상 주교도 아니며, 기독교도도 아니고 인간조차도 아니라고, .... 그는 사형집행을 벌이는 권력자와 마찬가지로 ‘개자식일 뿐’이라고”신랄하게 비난한다. 종교를 빙자한 독재권력은 가장 가증스러운 독재 형상이라고 말이다.
“스스로 복종한 자. 그들은 독재자와 공범이다. ...
모든 권력은 자발적 복종을 바친 인간들이 건네준 권력이다.
...복종을 멈춰라!” -30쪽에서
드 라 보에시의 글을 옮길 의사는 조금도 없다. 16세기 절대왕정의 시대와 달리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뼛속에는 자유와 노예에 대한 의식이 그나마 상당부분 증식되어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서 어느 상태가 생존에 더 적절한지 알지 못하는, 즉 예속과 자유를 구별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게 된다. 1990년대 이전의 비민주적 독재행태가 횡행하던 한국사회를 겪어보지 못했던 세대는 예속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느껴지지 않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 시절 기회주의적으로 비겁함과 굴종의 몸짓에 능숙했던 이들에게도 예속은 그리 와 닿지 않는 개념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동시성의 비동시성’이라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언어를 빌어 권위주의적 전근대적 시간을 향수하는 지역과 사람들을 언급한 적이 있다. 여기에는 21세기 지금도 노예근성을 천성으로 아는 촌부들과 이들에게 해라라고 명령하는 권세가들이 살고 있다. 사실 이들 촌부들만이 자발적으로 복종하며 사는 것은 아니다.
조선 유교의 엄격하고 냉혹한 계급의 분별과 일제와 오랜 군사독재 시절에 걸친 수백 년간 이 땅의 인간들에게 주입된, 처음에는 강요되었으나 세월이 지나고 그 강요된 세상을 모르는 세대로 이어지며 굴종이 습관이 되어온 까닭이기에 많은 수의 인간들은 종속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이제 종속이 일상화된 상태를 받아들이는 환경에서 성장한 오늘의 상당수 한국인들은 자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선출된 한 인간 나부랭이, 대체로 가장 비겁하고 나약한 인간에게 휘둘리며, 그 포악함을 견디고, 함부로 부리는 횡포에 어떠한 투쟁의 열의도 결기도 일어나지 않는다.” 분명 불의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바로 그 상황을 바꾸고자 하는 아무런 갈망도 끓어오르지 않는다. 노예의 삶을 받아들였는데 그 무엇이 절실할 수 있겠는가?
서울의 서쪽 한 지역에서 범죄사실로 유죄 처벌을 받은 인간을 채 6개월도 지나지 않아 사면권을 자의적으로 행사하여 범죄의 악취가 코를 쥐게 하는데도 후보로 내세워 다시금 치러진 보궐선거가 있었다. 그 투표 결과인 39.37%가 이 오물에게 투표했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 않다. 이 철저한 권력에 대한 자발적 충성, 이 몽매성에 도사린 맹목적 굴종의식을 보는 안타까움이었다. 역자 목수정의 지적처럼 “누가 힘이 센가, 강자의 편이라야 안심이 되는 투표”를 하는 작태일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한국 민주주의의 실상이다. 그 납작 엎드린 자발적 굴종의 몸짓들, 정신적 노예화가 육체까지 번져 변형된 이 기형성이 한국사회의 발목을 끈질기게 잡아당기고 있다.
책은 이렇듯 복종에 익숙해진 인간들을 일깨우는 비수같은 언설을 쏟아내고 있다. 민중이 권력이 요구하는 굴종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 권력은 스스로 무너진다. 드 라보에시는 바로 이렇듯 자유를 거부하고 복종의 달콤한 고통으로부터 안락을 취하는 인간의 선천적 욕망에 도사린 재앙적이고 비극적 사건에 경종을 울려댄다. 인간은 어째서 복종이 자유라도 되는 양 굴종을 하기 위해 안달을 하는 것일까? 절대 권력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망상에 매몰되어 권력자가 손에 쥔 권력이 자신이 헌납한 것임을 망각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이들은 고통스럽지 않게 비굴모드를 취하고 자기 존엄과 자존을 함께 내다버린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알지 못한다. 자발적 복종의 그 게으른 편의라는 보상이 만족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이러한 인간들에게는 완강한 종속에 대한 지향성이 오래전부터 의식의 내면에 뿌리를 내려 마치 자유가 인간 본성이 아닌 것처럼 여길 정도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독재 하에서는 인간들은 쉽사리 비겁해지고 나약해진다. 마치 관습처럼 굴종이 거부감 없이 삼키게 되는 *미트라다테스의 소량의 점진적 독약 복용처럼 습관이 되어 구별능력을 상실한 무감각의 인간이 되어버린다. 이미 시민대중과의 소통능력을 상실한 작금의 미디어매체들이 쏟아내는 영상들에서 보여지듯 굴종하는 비겁한 인간들이 권력의 똘마니가 되어 나대는 꼴로 가득 채워져 있지 않은가. 이러한 장면들이야말로 “권력은 어떻게 대중을 지배하는가?”라는 물음의 답일 것이다.
【본문 94쪽에서】
드 라 보에시는 항시 역사의 경험에는 독재 권력을 떠받들고 있는 대여섯 명의 인간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바로 이들, “독재 권력의 귀 노릇, 잔악한 짓을 공모하기 위해 모인 자들, 독재자의 쾌락을 위한 동반자이고, 욕심을 채우기 위한 뚜쟁이며, 재산 축적을 위해 국가와 시민의 재산을 약탈하는 짓도 마다하지 않는 공범”이라고 말한다. 독재자 본연의 악랄함을 넘어서 자신들의 악함까지 모두 삼키게 하려고 독재자를 제대로 길들이는 인간들이다. 이들은 “수하에 조력자를 거느리고 그 조력자들은 다시 수하에 똘마니들을 두어 자신들의 엄청난 물욕과 잔인한 행각으로 나라 전체를 장악”한다. 이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권력의 비호 아래 법의 심판과 징벌로부터 놓여나고 다시 그 아래 단계로 처진 대규모의 그물망으로 탈취를 자행한다. 다분히 사기행각의 성향을 띤 다단계 파라미드 영업망을 닮은 이러한 구조가 민중과 나라를 지배하게 된다. 정말 코미디같지 않은가? 이 희극같은 비극이 공연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한국 사회이다.
연신 굽신거리며 그지없는 복종의 모습을 취하는 나라의 모든 쓰레기들, 그 천박한 것들이 독재자 주변으로 모여든다. 변변찮게 어슬렁거렸던 좀도둑들이 들끓는 야욕과 재물에 대한 욕심을 주체하지 못해 전리품 배분에 끼어들고자 독재자 주변에 모여들어 떠받들며 난리를 처댄다. 장물의 핵심을 차지하거나 적어도 떡고물이라도 차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들여다보라. 이것들이 모인 사회에는 동료는 없고 음모만 생겨난다. 서로 의심하고 겁낸다. 서로 친구가 아니고 공범인 까닭이다. 또한 독재자에 복종하는 것만으로는 언제든 떨려날 수 있기에 독재자의 사소한 눈짓과 표정의 변화에도 유의하며 독재자의 생각을 미리 읽고 준비해서 환심을 사야한다. 자기에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인간, 타인에게 자신의 평안과 자유, 몸과 삶까지 온전히 맡긴 이 비굴한 것들보다 더 천박한 것이 있을까? 왜 복종할까? 오직 단 한 가지 이유라고 드 라 보에시는 지적한다. “재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독재자 주변을 얼쩡거리며 야비함과 단순함을 간교하게 악용해가며 쉽사리 출세가도에 오르고, 부를 축적했기에 이 자들은 언제 처단될지 모를 두려움과 불안에 더욱 악랄하게 반대편의 사람들에게 극악한 폭력을 자행한다. 그토록 사회적 문제가 되어 시정을 지적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갑질 사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수인의 하수인, 또 그 하수인의 하수인으로 이어지는 그물망의 한 단계에 있는 인간들은 자신들의 굴종으로 인한 모욕을 감당할 대상을 저보다 약해 보이는 인간에게 배출해 내기 때문이다. 바로 한국 사회는 대표적인 ‘굴종 사회’라는 증거이다.
더구나 이 굴종이 일상화된 사회는 ‘의심과 배반의 사회’이기도 하다. 환심을 위해 밤낮없이 그 텅 빈 대가리를 조아려야하고 동시에 섬기는 자를 세상 누구보다 더 의심해야 그나마 자리를 지킬 수 있기에 이 인간들의 눈깔은 연신 사방을 휘저어대기 바쁘고, 발걸음은 서성댄다. 함정은 어디에 있는지, 공격은 어디서 날아올지, 경쟁자의 안색은 어떤지, 배신이 혹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짜 미소를 지으며 두려워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극심한 분열로 치닫고, 통합과 연대는 불가능한 지경으로 나라는 더욱 퇴락으로 가라앉는다. 굴종은 결코 인간의 관습이 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 된다. 굴종이라는 비열한 몸짓은 인간 사회의 온갖 불의와 부패, 부정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복종은 거의 대부분이 자발적 복종으로 인한 것이다. 노예의 삶을 자처하는 삶은 곧 자유와 평등의 포기, 인간 존엄의 품격을 내던지는 것이다.
툭하면 사람들은 ‘먹고 살아야 하니 더러워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흔해빠진 변명을 대곤 한다. 과연 주인이 던져주는 돈을 챙기려고 발길질을 견디고 모욕을 당연시하며 자신의 영혼을 팔고, 나라를 팔고, 몸을 팔며, 그 까짓 존엄이란 개나 줘 버려!라고 하는 말이 등식이 성립하려나? 그 납작 엎드린 굴종의 몸짓, 그것은 비열함과 배신의 은폐요, 폭력과 권위주의의 선전이며, 시민 대중에 대한 예속을 요구하는 독재자의 음흉한 위선이다. 드라 보에시는 “치졸한 영혼을 가진 자들, 무지한 자들만이 독재 권력에 복종한다. 이것이 지배 원동력이다.”라고 한다.
때문에 이를 벗어나기도 단순하고 쉽다. 시민대중의 권리와 자유를 압류했다고 착각하는 권력에게 굴종하지 않으면 된다. 지금이라도 그 비굴한 몸짓을 철회하면 권력은 그 순간 무너져 내리고 만다. 제발 스스로 복종하지 말자. 굴종을 비추는 미디어를 규탄하라. 그리고 그 장면의 등장인물들을 잊지 마라. 반드시 정의가 처단할 쓰레기들이니까. 대중의 자유와 존엄을 짓 밞아 대는 썩은 내 진동하는 이것들에게 이 사회의 훼손된 건강성의 댓가를 따져 물어야 하니까 말이다. 복종하지 않고 존엄을 지키며 시민대중의 삶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네들에 경의를 보내며, 다소간의 분노를 이 책을 통해 가라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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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32~63년,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소아시아의 대왕으로 면역력을 얻고자 평소에 독약을 조금씩 복용했던 습관; 즉 지속적인 독의 소량 주입으로 독에 대한 내성이 생겼다는 것으로서, 복종 또한 습관처럼 내성이 된 노예근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됨을 비유하는데 사용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