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탱고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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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Das Schloss에서 인용된 그러면 차라리 기다리면서 만나지 못하렵니다.”라는 아주 영묘()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간결하고 지적인 문장에 이야기 전체의 의미가 함유되어있음을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야 불현 듯 깨닫게 된다. 결코 기다리는 구원의 존재는 나타나지 않을 것임을, 그 환상에 매여 사는 사람들에게 우주의 이치를 깨우쳐 주려는 듯 말이다.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블라디미르가 기다리는 고도(Godot)처럼.

 

이 헝가리 작가의 소설이 발표된 해가 1985년이다 보니 마침 동구 공산권이 붕괴된 1989년에 비추어 몰락의 끝에 선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잔인성과 황폐함, 그 기만성과 무기력의 세계를 지펴냈다는 해설이 따라붙곤 한다. 하지만 작품은 모든 인간사회에 내재한 실존적 불안에 대한 사색으로서 이렇게 제한된 텍스트로 읽을 이유가 없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가상의 공간에 빠져드는 무력감과 소외가 지배하는 사회인 현재에 가까운 것인지 모르겠다.

 

소설은 대낮의 빛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추적추적 내리는 보슬비와 쏟아붓는 폭우의 빗소리, 안개 자욱한 시월의 밤이라는 어둠의 배경이 장악하고 있다는 인상이 지배하고, 기이한 종소리에 한 남자(후터키)가 이웃 여자(슈미트 부인)의 침대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농장 사람들이 8개월간 죽도록 일한 품삯을 받으러 떠났던 여자의 남편(슈미트)은 혼자 돈을 차지하고 도주할 생각으로 예정보다 빨리 집에 도착하지만, 낌새를 챈 후터키에 의해 좌절된다. 소설은 똑 같이 닮은 절망으로 마주한 얼굴이라고 두 인물을 묘사한다. 사실 이들은 너절하게 쓰레기 더미만 남은 해체된 집단농장이지만 머물러 살 용기도 떠날 용기도 없는, 모든 가능성을 상실한 인간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또 다른 이웃인 여자(헐리치 부인)가 농장을 떠난 후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그네들의 옛 리더였던 이리미아시가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죽은 자의 부활’, 그는 절망의 덫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자로 인식되고, 도주와 탈출의 의지는 온데간데없이 기다림의 시간으로, 새로운 삶의 기대로 바뀐다. 하지만 독자들은 이러한 기대가 허망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소설의 구성이 시간적 흐름의 배치가 아니라, ‘되돌아 본’, 혹은 다른 방향에서 본것과 같은 서로 다른 등장인물들의 상황이나 관점에 의해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리미아시와 파트너인 페트리너는 정부의 말단 정보 끄나풀인 파렴치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임무에 대해 진지하지 못한 태도를 보여 소위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바, 소환되어 다시금 정보제공의 압박을 받는다. 이때 이리미아시 발길의 방향을 결정하는 판단은 이 인물의 목적은 물론 농장에 남아있는 사람들에 도사린 심리를 선명하게 들려준다. “여전히 주인 잃은 뼛속까지 노예일 뿐인 사람들의 어리석은 자기기만적 기다림의 확신이 집단농장으로 향하게 한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 소설의 전체적인 틀을 거머쥐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12개의 장()으로 나뉘어 서술되고 있는 소설의 구조에서 2개의 장을 홀로 차지하고 있는 의사의 시점이다. 황폐하게 해체된 농장의 인간 군상들과 동일 집단에 포함되어있음에도 철저한 국외자로서 자신을 격리시키고, 은둔한 실내의 바깥을 적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인물이다. 이 인물이 토해내는 언어들은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는 물론 이야기의 구조적 틀까지 장악하고 있는 은유와 상징과 암시로 그득 차있다.

    

주변의 외적인 몰락에 맞서 자신의 기억력을 지켜내기 위해,

돌이킬 수 없는 음험한 몰락에 자신의 기억으로 맞서기 위해 (P 87)”

 

사람들, 그곳의 모든 곳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자의 역할이 부여되고 있다. 이 인물이 읽는 것으로 벤더 박사라고 하는 사람이 쓴 지질학서와 전쟁지역 르포사진이 실린 잡지가 등장하는데, 전자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때로는 현재 시제로 쓰고 때로는 과거 시제로 쓴 어설픈 서술 때문에 혼란이 와서, ....

자신이 읽고 있는 것이 인류가 멸망한 이후의 예언적 묘사인지 아니면 현재 그가 살고 있는

지구의 지질 역사에 관한 과학적 기술인지 알 수 가 없었다.(P 92)”

 

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이 인물이 쓰고 있는 마을사람들의 관찰 기록이,  소설 자체의 예언적, 혹은 현재적 모호성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또한 후자는 잡지사진 왼쪽 구석에 모습을 드러낸 군사용 감시 장비를 보면서 탁월한 인간적 추적 관찰이라 하며 매혹되는 장면으로 전체주의의 주도면밀한 자기방어 체계가 지닌 은밀성과 폭력성의 은유일 것이다.

 

이러한 은유는 소설 전체에 흩어져 교활하게 빛을 내고 있는데, 쓰레기같은 마을을 더욱 추하게 만드는 매춘으로 살아가는 여자의 어린 딸의 학대와 방치다.

 

문 가까이에 있으면서 어디 멀리 가 있는 일을 소녀는 할 수 없었다. ....두 가지 명령을

동시에 따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결국 아무도 살 수 없는 나라에서 사는 셈이었다.(P 161)”

 

어린 소녀 에슈티케의 입을 빌어 불가능한 삶의 세계를 발설케 하는가 하면, 소녀가 고양이를 죽임으로써 인간의 승리에 대한 욕망은 물론, 패배할 가능성이 없는 싸움의 승리에 도사린 수치 또한 발견케 함으로써 전체주의의 본성을 다시금 공박하기도 한다.

 

아마 소설 중 재미의 요소라면 막장 드라마에 근접한 장면, 그야말로 소설 제목인 사탄 탱고가 동적으로 표현되는, 이리미아시를 맞이하기 위해 모여든 술집의 전경이라 하겠다. 이곳은 가히 이미 종말에 다다른 인간들, 더 이상은 패배도 가능치 않은 인간들의 퇴화된 결말의 증거라 할 것이다. 마비의 적나라한 모습으로서. 도발적인 추파, 이웃집 여자의 육체에 대한 갈망, 그 관능적 욕망만이 넘실대고, 끊임없는 술과 탱고의 향락이 땀과 열기로 끈적이는 소돔의 현장이 펼쳐진다. 이러한 시간에 소녀 에슈티케는 악의 종자랄 수 있는 오빠(서니)가 알려준 천사들에게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쥐약을 먹음으로써 자살하고 만다.

    

 

소녀의 죽음은 마을에 도착한 이리미아시의 저열한 목적의 도구가 되어 연설에 이용된다. 자신에게 궁핍과 절망으로부터의 구제를 기대하는 무기력한 인간들의 시선을 인식하며, 그네들의 허약함과 비겁함, 무기력을 질타하고, 죄의식을 주입한다. 그리곤 일격을 가하는데, “현재보다 합당한 여러분의 미래를 위한 희생자운운하며, 미래의 전망을, 희망, 가능성의 세계를 제시하고, 이 기만의 덫, 환상에 젖은 인간들은 죽도록 일해 받은 돈을 내놓는다. 이리미아시가 드디어 자신들에게 새롭게 도약하는 길을 찾아주었음에 감사하며.

 

결국, 술집에, 의사가 은둔하는 실내에, 매춘장소인 마을창고에, 금방이라도 무너질듯한 이들의 집 도처에 처진 거미줄’, 그 덫에 의사의 신랄한 묘사처럼 너절하고 무능한 무지렁이(yokels)은 자신들의 삶을 담보한다. 그리곤 살던 가재도구와 창틀과 문짝을 부수고 이리미아시와 약속한 장소로 떠난다. 하지만 희망 없는 사람들의 가망 없는 상황을 구제해 줄 목자가 아니라는 것은 이들의 마음속에도 이미 자리하고 있다. 이리미아시가 모는,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트럭에 앉아 ....갈림길이 나와도

어디로 갈지 결정하는 것은 그가 아니었고, 덜컹거리며 달리는 낡은 트럭이

자신의 생을 결정짓는 것을 다만 무력하게 받아들여야 했다.(P 355)”

 

전제주의 정부의 거미줄같은 정보 끄나풀의 한 지점이 되어 이들은 아무런 재산도 기약도 없이 전국으로 뿔뿔이 흩뿌려진다. 이리미아시가 군()정보당국에 제출한 정보원들의 삶에 관한 보고서의 소개로 이루어진 하나의 장()은 정말 가관이다. 너무 허접해서 다시 작성해야 하는 정보부서 기록자들의 목소리로 들려지는데, 일반적인 지적 수준의 저하에 관한 한 예라 한탄한다. 무지렁이들의 구원자인 이리미아시의 실체, 그 한계인 하찮음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리미아시가 기술한 사람들 면면에 대한 서술은 늙어빠진 창녀, 씻지 않아서 더러운 험담쟁이, 알코올에 절은 난쟁이, 바닥없는 난폭한 어둠의 구덩이에 교차하는 원시적인 둔감함과.....,, 열등한 지적 능력과 강한 자에게만 비굴한 태도....” 와 같이 애초에 그들에게 티끌만큼의 연민이나 동정, 도움의 의지라는 것은 존재치 않았음을 확인하는 대목이랄 수 있다.

 

하지만 예견 된 것이기도 하다. 모든 가능성을 도둑맞고 하나의 덫에서 빠져나와 또 다른 덫에 걸릴 것만 같은 예감이 없었던 것도 아니며, 썩은 문틀에서 온전한 나무 부분을 찾는 일이 헛수고라는 것을 알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람은 항상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하며, 체념을 인생에 도입할 수가 없다. 설혹 그것이 부질없는 것, 기만이고 환상인 줄 알지라도 말이다. 그들에겐 떠날 용기를 부추길, 단지 하나의 계기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소설은 가히 발칙한 상태에 도달한다. 모두가 떠난 마을에 의사는 기록을 되살피고 새로이 적어나간다. 그런데 종소리가 들려온다. 독자들은 소설의 첫 페이지에 기이한 종소리에 잠을 깨는 후터키를 기억한다. 의사 역시 지난번 종소리를 들은 기록을 찾지만 찾지 못한다. 작가의 술책이다. 아마도 기록하기를 잊었거나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고 의사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지만, 이건 거짓이다. 그는 주도면밀한 관찰과 기록을 하는 과도하고 병적인 질서 강박증에 있는 사람이다. 사실은 기록은 이제 시작된다는 의미의 선언일 것이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렀는데 시작임을 알리는 것이다.

 

더구나 그(의사)내가 정신을 어느 정도 집중하기만 하면 마을에서 일어날 일을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쓰기만 하면 일이 일어난다니.”라고 자신이 소유한 능력을 묘사하고, 어느 한도까지는 혼란스러운 사건들 배후의 메커니즘에도 간섭할 수 있었다! (P 387)”고 말한다. 그리곤 시작 페이지에 등장했던 완전히 똑같은 후터키의 독백이 써지기 시작한다.

 

마치 시간이 움직임 없는 영원의 원() 속에서 유희를 벌이고 혼돈의 와중에 귀신이

재주를 피우듯 기상천외한 망상을 진짜로 믿게 하려는 것 같았다. (P 14 P 396)”

 

끊임없이 현실의 탈출을 꿈꾸지만 이것의 벗어남은 어쩜 살아있는 자는 결코 알지 못하는 저 두려운 작별일지 모르며, 늪같은 삶의 구덩이에서 헤어날 수 있다는 믿음의 유혹이라는 도망은 환상, 아니 망상일 뿐일지도 모른다. 또한 제아무리 혼란스러운 세계일지라도 의미가 분명 있으리라 믿지만 결국 마주하는 것은 자신의 면상일 뿐,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남긴 인생은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와 같다. 시끄럽고 정신없으나 아무 뜻도 없다.(Life is a malicious tale, told by cosmic idiocy,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는 에피그램이 진실인지도 모를 일이다.

 

서로의 꼬리를 물고 윤회하는 듯한 이 닫힌 구조의 이야기는 몰락의 닫힌 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몰락의 상태에 갇혀끊임없이 헤매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것처럼 느껴진다. 오히려 성경에 계시된 시대가 도래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하지만 차마 발설하지 못하는, 광신자인 헐리치 부인이 결연히 중얼거리는 어째서 불속에 이 모든 것을 처넣을 최후의 심판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지라며 계시록을 뒤적이는 손길, 그 분노와 우려와 증오의 눈길이 더욱 매섭게 파고든다. 내겐 완성되어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폐쇄되어 있는 세계, 그 한정된 세계의 직시를 요청하는 것으로 다가온다. 망상을 버려라. 결국 세계의 질서는 지질의 변동처럼 들고 날 뿐 이다. 돌고 돈다. 그 밖에 아무런 뜻도 없다. 새로운 시작은 단지 거기서 시작될 수 있을 뿐이라고. 요한 계시록주석집들을 읽어봐야 할 것 같다.(끝)

 

 

P.S. 또 다른 결론을 생각해보며 : 가능성의 새로운 시작

 

만일 의사에게 종소리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시작과 끝이 맞닿는 이 해괴한 기록의 문장은 과거가 사라지게 하며, 이제 시간과 공간의 모든 제약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선언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농장 사람들의 삶의 세계, 즉 허무와 무력감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상황들이 타원형으로 서로에게 흘러들어가면서, 오래 전에 빼앗겼던 결과의 개방성을 다시 획득하게 될 터이고, 이제 완전히 새로운 결합을 제시하며 삶의 여분의 가능성이 되돌아 올 것임을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닥 희망의 가능성, 새로운 세계의 도래에 대한 가능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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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이르러 오늘의 약탈적 자본주의 이후의 미래사회에 대한 구상들이 곳곳에서 논의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자본주의의 내재적 속성인 착취 및 약탈 대상의 현저한 축소와 고갈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경제 성장이 거의 멈추는 선진국들, 즉 기존의 산업국가들은 더 이상 새로운 착취대상인 국가와 영토의 식민화 가능성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자원채굴을 비롯해서 수요와 시장 확보가 여의치 않아졌으며, 신흥공업국들의 도약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은 전혀 새로운 가치관을 지닌 정부들을 탄생시켰는데, 바로 도널드 트럼프가 이끄는 민족주의적 신자유주의라는 것이다. 안으로는 국가의 안보불안, 인종적 갈등을 부채질하며 애국주의의 결집을 호소하며 보호무역의 벽을 두르고, 밖으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외치며 자신들의 획일화된 경제정책의 지배에 복종할 것을 강제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같은 현상이 하나의 상대국으로서 한국이라는 우리에게 중대한 의미일 뿐 아니라, 작금의 자본주의가 처해있는 현실의 적나라한 반영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는 점이다. 유엔 볼리비아 대사와 대외무역장관을 지낸 파블로 솔론이 마치 이 같은 상황을 예견한 듯이 지적한 말이 있다.

 

"성장의 한계에 직면한 미국의 경우 이를 타개하기 위해 계획된 분쟁을 일으켜 개입하고,

든든하지 않은 동맹국들의 의지를 실험하기 위해 빈번하게 흔들어대는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 자국의 영향력 확대를 통해 상실된 성장의 자원을 충당하여야 하는 압박에 시달릴 것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북한의 핵문제는 한계에 이른 미국의 자본에게 안성맞춤의 레버리지로서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물질적 토대와 단절된 성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끝없이 성장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성장 없이는 자기실현을 할 수 없다는데 그 이유가 있다. 결국 자본 자신을 위해 인간에 대한 착취, 무제한적인 자원의 발굴과 생산주의의 강화가 요구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이에따라 트럼프 행정부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것이다. 즉 자유무역협정의 재협상이나 상대국의 무역정책에 직접적 간섭(관세부과 등)을 통해 위기에 처한 자신들의 자본 팽창을 위한 투기시장의 확대 및 금융화를 촉진시키는 방법이다. 둘째는 케케묵은 군사주의적 세계주의를 부활하는 것이다. 즉 군산복합체(軍産複合体)를 통한 성장축을 확보하는 방법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쟁 대상국이 필요하다. 불꽃놀이 비용을 충당할 자원이 있는 한국의 경제력과 북한의 자원은 성장이라는 자본의 물적 토대를 조달하는데 최고의 먹잇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느슨한 동맹국인 한국의 입장으로 인해 미국이 과거처럼 강행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클 것이다. 차선책은 다양한 정치 군사 외교적 수단 - 협박, 위협, 유화 등 - 을 통한 무혈입성으로 새로운 자원식민지를 확보하는 방안이다. 따라서 지금 진행되는 많은 장애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나 미국의 대북 협상은 필연적인 방향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일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을 비롯한 북한과 미국, 중국과 미국 사이에 벌어지는 요동치는 정황은 자본주의가 지닌 태생적 내재성에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행성 지구의 자원은 유한하다. 무한한 성장이라는 물적 토대가 없는 자본은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자본은 남은 한 방울까지 쥐어짜내야 하는 길목에 서있다. 탄소배출권처럼 자연을 서비스화하고 상품화하는 소위 녹색주의까지 동원하여 자본의 순환로를 만들어내야 하고, 급기야는 합성생물학, 로봇공학,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등 신생기술을 동원한 기술진보를 이용하여 물적 성장에 전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도 무한한 부조리와 불평등과 부패와 부당함과 황폐와 파괴, 멸종이라는 비가역적인 양상과 마주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을 자본주의 위기의 만성화라 부른다. 일자리는 점진적으로 감소하며, 자연의 약탈과 착취는 최후까지 지속될 태세다. 인간은 소외되고 생태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지며, 극단적인 부의 양극화는 새로운 계급사회로의 이행을 예고하며, 권위주의의 부상과 민주주의의 퇴행을 재촉한다. 자본주의를 비롯한 인간중심주의, 가부장제, 생산주의, 금권정치, 채굴주의 등 오늘의 우리들을 지배하는 이러한 논리는 지구 시스템의 위기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마침 자본주의는 물론 인류의 삶을 옥죄는 양식들을 극복하기 위한 포스트 자본주의에 대한 논의들이 시선을 끈다. ‘탈성장’, ‘탈세계화’, ‘여성생태주의어머니 지구의 관리’, ‘커먼즈’, ‘비비르 비엔탈자본주의를 위한 이념들과 실천방안을 제시하는 다른 세상을 위한 7가지 방안이라는 새로운 가치체계에 대한 탐색과 논의의 저술이 현재의 우리들에 체화된 가치의 전환을 모색케 한다. 자본의 야만성을 떨치고, 자연의 순환을 존중하고, 인간 개체와 공동체와 자연이 공존하는 전체로서의 균형이라는 새로운 전망을 생각게 한다. 또한 권력의 논리에 매몰되지 않는 자율적인 대항 권력으로서의 공동의 자기관리 조직인 커먼즈(Commons)와 재생산과 돌봄의 주체인 여성과 자연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자극하며 각 전망들의 사안들을 폭넓게 사유하는 터전을 제공한다.

 

이와는 달리 메뚜기와 꿀벌이라는 약탈과 창조의 은유를 통해 자본주의의 두 얼굴을 성찰하는 저술은 자본주의의 극복이 아닌 인간친화적인, 인간의 삶을 중심에 둔 자본주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 논리에는 녹색산업이라는 소위 자연의 상품화를 자본주의의 미래적 대안 요소라 설명하는가 하면, ‘성장개념을 효율성이나 기업가 정신을 통해 인류를 위해 더 나은 창조적 모색이 가능하다고까지 주장한다.

 

아마 효율성이란 말처럼 허망한 말도 없을 것이다. 생산과 소비 효율성이 증가하면 총생산 규모가 순식간에 증가해서 자원의 소비는 바로 상쇄되고 만다. 이건 이미 19세기 경제학자 제본스리바운드 효과(rebound effect)'로 입증된 것이며, 오늘날 실제로 자동차의 에너지 효율 향상이 전체 생산력 증가로 너무도 빠른 시간 내에 상쇄되어 버리고 있음이 증명하고 있다. 질적 성장이라고 하는 기술진보에 의한 자원의 무한한 조달이 가능하다는 망상에 입각한 공상적 유토피아가 아닌가 의심이 든다. 아무튼 자본주의의 내적 속성인 파괴약탈적 측면을 인식하고 자본주의의 미래 구상을 제시하였다는 측면에서 의미를 지닌 저작이라 하겠다. 우리들 모두 조화롭고 안온한 삶을 꿈꾼다. 자원의 절제, 소박함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의 돌봄자로써 새로운 가치를 위한 대안 건설을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국면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참고 도서*

(1)다른 세상을 위한 7가지 대안, 파블로 솔론 外 共著 (2018, 착한책가게 )

(2)메뚜기와 꿀벌, 제프 멀건 (2018, 세종서적 )

(3)권력의 포르노그래피 테러, 안보 그리고 거짓말, 로버트 쉬어 (2009, 책보세 )

(4)노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오미 클레인 (2018, 열린책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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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잠을 찾아서 - 세상의 모든 달콤하고 괴로운 잠 이야기
마이클 맥거 지음, 임현경 옮김 / 현암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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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끄면 침대의 반이 세상의 전부다. 마침내 우리는 항복한다. 내일의 존재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고 잠이 드는 순간, 세계는 다시 무한히 확장된다.”  (P 291 에서)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것 같다. 잠의 가치를 폄훼하는 커다란 사회의 목소리들이 잠이 부족해 피로를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잠으로부터 멀어질 것을 은근히 종용하기까지 한다. 마치 잠자는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는 통제력을 지닌 인간만이 삶의 질을 향유할 수 있다는 듯이. 반면에 사람들은 과도한 각종 소음에 불가항력적으로 노출된 현실, 상실이나 슬픔, 깊은 마음의 상처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대낮처럼 빛나는 도시의 밤이 호시탐탐 인간의 잠을 암살하고, 사람들은 이루지 못한, 부족한 잠으로 잃는지도 모르는 체 기억의 능력이 쪼그라든다.

 

이 책을 집어 든 이유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맞서 잠이 인간에게 주는 긍정의 역할을 발견하려는 목적이랄 수 있다. ‘왜 자야하는지에 대한 필연성으로서의 잠에 대한 근거로서. 또한 언젠가부터 불면증에 시달리는 고통에 대한 위로의 말을 발견하기 위해서. 굉장한 사회학적, 혹은 의학적, 철학적 담론의 발견이 아니라 그저 이와 같은 소박한 의도를 부분적이라도 해갈시켜주는 그런 것이면 족하다는 생각에서.

 

마침 저자 마이클 맥거는 오랜 수면무호흡증에 시달린 전직 신부요, 현직 교사로서 자신의 경험과 겸허한 식견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언어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의 피로와 사회적 의미, 그리고 소소한 문학적 기반을 통해 잠의 역할을 정말 소박하게 설명하고 있어 정신의 과도한 소비 없이 이완된 상태에서 읽어 나갈 수 있게 하여준다.

책은 토막잠을 자며 수면 부족은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며 밤을 환하게 밝힌 전구 발명자인 에디슨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신경쇠약으로 사망했다. 맥베스처럼 잠을 살해하려했지만 사람을 죽였을 뿐이다. 그가 아니어도 전구는 발명되었을 터이다. 잠을 멸시하는 자의 욕심이 인간에게서 빼앗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게 한다.

 

잠의 존중과 폄하는 그리스와 로마, 문화와 법률의 차이로 구별되는 오디세이아아이네이스』,  두 작품으로  그 차이를 들려주는데, 전자가 집, 안식처로 돌아오는 이야기인 반면에 후자는 집을 떠나는 이야기란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사회는 아이네이스처럼 사람을 밖으로 떠미는 문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적 동기 찾기를 독려하며, 집이라는 균형과 조화,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는 자신의 침대와, 크고 넓은 세상에서 삶의 목적을 찾아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해 침대를 벗어나는 것의 가치 투쟁이랄 수도 있겠다. 과연 무엇이 인간적 진실일까?

    

 

 

수천 년 동안 자란 올리브나무 그루터기를 그 자리에서 깎아 만든 오디세우스의 부동의 침대인가, 아니면 화염에 휩싸여 재가 되어버리는 아이네이스가 떠난 침대인가? 인간이 지향하는 것은 안식인가? 영원한 안식이란 없다는 것인가? 21세기 오늘, 우리들의 가치는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대립은 잠을 늦게까지 자던 르네 데카르트와 멸시하던 데이비드 흄의 철학에까지 이어지는데, 비몽사몽의 데카르트가 아직도 자신이 자고 있는 건 아닌가해서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깨어있음의 증명이 연유했다는 우스개에서, 수천 번의 연결고리가 이어진다 해서 곧 인과관계가 함의한다고 추론할 수 없다며,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고 확실성에 대한 의심론을 전개한 흄을 보면서, 잠이란 삶에 대한 피해갈 수 없는 철학적 주제임을 생각하며 미소를 짓게도 된다.

 

그럼에도 저자는 잠을 자지 못하게 하는 현실의 조건들에 회의적인 시선에 무게를 두는 듯, 수면 부족으로 발생하는 인간의 무수한 변화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발을 신고자는 아이, 한 밤중 거리를 배회하는 아이들로부터 그네들 삶의 이면에는 항시 혼란스러운 잠자리가 있었다는 교사로서의 증언에서 시작되어, 수면 부족이 감정적 결핍을 동반하는 중독이라는 나쁜 친구와 어울리는 경향에 대해서, 환자가 죽기를 바라는 수면부족의 만성적 피로에 시달리는 외과의사의 고백에 배어있는 도덕성의 약화를, 변덕과 예민함을 증가시키고, 기억력 손상과 반응속도를 현저히 늦추며 인지장애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일화와 사례들을 역사적 사건이나 문학 작품들을 곁들여 보여준다.

 

어쩌면 가장 주목할 대목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내부 생체시계인 24시간 주기 리듬인 서캐디언 리듬(Circadian rhythm)’이란 것이다. 이것은 교대제 노동자들의 고통을 우선 떠올리게 한다. 낮과 밤을 뜬 눈으로 보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꿈도 꾸지 못할 사치임에도 장거리 여행의 시차에서 느끼는 몽롱한 효과에 매양 젖어 있게 만든다. 인간을 기계적 도구화한 현대사회의 가장 잔인한 생태계로 빈번하게 지적되는 지점이다. 만성적인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사람들, 그래서 불면증으로 고통을 겪는 것이 이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상화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으며, 수면제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제약 산업들이 휘파람을 불고, 잠 못 자고 거리로 밤거리를 헤매며 소비하는 사람들을 자본은 더욱 즐긴다. 밤이 실종된 사회를 강권하는 자본의 세계.

 

이제 사람들은 잠을 너무 자지 않아 돈키호테처럼 뇌가 바짝 마르고 싱싱함을 잃어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는 능력을 잃고자기 내면의 빛을 차단한다. 그래서 언어와 기억을 빼앗긴 세상의 이야기인 조지 오웰1984는 다시금 우리 현재에 대한 보고(報告)로 소환된다. 기억능력과 언어 능력은 자는 동안 형성된다고 한다. 제대로 자지 못하게 하는 문화는 어휘를 잃게 하고 빈약한 소통만을 남긴다. 또한 인간의 예술인 기억은 사라지고 경영기술의 한 형태인 보관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사람들은 잡다한 자극에 지치고 정작 자신들에게 필요한 주의를 기울일 힘을 상실해간다.

 

나는 두 시간 이상을 지속하여 잠들지 못하고 있다. 불면증이다. 서너 차례 깨다 잠들다를 반복하는 매일 당면하는 두려움과 짜증이 고통스럽다. 새벽빛이 부옇게 밝아오면 각성을 위해 카페인을 찾는다. 이런 흥분제가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사회에 포섭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은 정말 우울한 일이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커피 속 카페인은 뇌에게 속도를 늦추고 잠잘 준비를 하라고 말해주는 억제성 신경전달 물질인 아데노신을 통제하고 피로는 그대로 둔 채 그저 브레이크 장치만 잘라버린다고 한다. 증상을 잠시 숨긴다는 것이다. 이제 태평양과 대서양의 물고기들도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카페인이 하수구에 배출되고 있을 만큼 오늘 우리는 정신의 마비 속, 환상의 세계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스마트폰과 노트북의 불빛, 책 속의 까만 잉크를 읽는 것은 뇌에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게 한다고 한다. 전자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생성시키는 반면에 후자는 서캐니언 리듬을 통제하고 중추 신경계의 과부하를 막도록 돕는 멜라토닌을 생성시킨다고 한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는 것과 스마트폰을 보는 것은 신체적으로 완전히 다른 경험이란 것이다. 잠을 쫓아내려는 사회, 아이네이스의 등 떠미는 사회에서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한 내 발버둥은 이처럼 독서에서도 계속되어지는 모양이다. 제대로 깨어있다는 것, 제대로 잠을 잔다는 것이 올바른 세상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일깨우는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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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추적 내리는 비()의 어떤 처연(悽然)함은 마치 제임스 조이스가 부동의 자세로 응시하며 그려낸 더블린 사람들의 불안과 마비의 전경 같다는 생각을 하게한다. 의식의 밑바닥에 두껍게 가라앉은 익숙하고 고정된, 집요한 안착의 느낌이라 할까?

 

색 바랜 낡은 의자에 앉아 어, 세상이 왜 이 모양이지 하고 의아해하며 의심에 가득찬 시선을 보내면서도 무언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마침내는 무엇인가에 속았다고 외치는 어리석은, 아니 어쩔 수 없이 펼쳐져야만 하는 그런 장면을 떠 올리게 된다.

 

내게 소설 더블린 사람들(Dubliners)피네간의 경야를 향한 여정의 중간 기착지라 할 수 있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들의 초상부터 무수히 점화되는 에피파니(顯現)에 대한 익숙함과, 율리시즈아이올로스에피소드나 이타카의 장면에 등장하는 더블린 사람들의 편린들, 피네간의 경야에 지속되는 시간의 순환과 직선적 사유의 오래된 인간적 사유의 갈등에 이르기까지 그 시원의 줄기를 어렴풋이나마 지녀보자는 의도에서 이다.

 

더블린 사람들에 수록된 14편의 단편과 1편의 중편(‘死者혹은 죽은 사람들’)은 그 묘사에 있어 가히 꼼꼼한 비속성의 문장으로 그려냈다는 작가의 말처럼 지형적, 연대기적 사실의 정확성, 외모에서 의상에 이르는 추오와 부조화 등 초상화적 기법과 당대 사람들의 관습과 행동, 사상 등 그들의 억눌린 심리적 표현까지 가히 정교함 그것이라 느낄 수 있다. 다만, 사회적, 직업적 언어의 다양성에 대한 묘사는 내 언어적 이해의 불비로 만끽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1. 소년기, 청년기의 작품들

 

작품의 배열순서는 작가의 의도대로 소년기, 청년기, 성숙기, 대중 생활이라는 4개의 구분된 14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지막 작품인 死者혹은 죽은 사람들이라는 중편 1편은 악곡의 마침부문처럼 종곡(coda: 終曲)으로서 소설집 전체의 주제를 총괄한다.

 

늙은 신부의 죽음을 소재로 소년의 눈에 비친 망자의 여동생들인 두 노파의 속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매, 발전소 구경을 위해 학교를 빠진 채 길을 나선 두 소년의 보잘 것 없는 하루의 풍경에 기성세대의 고착된 반복적 사고의 비루함과 관계의 편협성을 무심히 그려나간 듯한 만난 사람, 그리고 작은 설렘조차 발산 될 수 없는 매몰된 생활의 세계에 고뇌와 분노를 터뜨리는 소년의 이야기인 애러비, 이렇게 3편을 통해 아이들, 아일랜드의 미래에 대한 무관심의 현실을 고발한다.

 

청년기에 속한 작품은 이블린을 비롯하여 경주가 끝난 뒤에」 「두 부랑자」 「하숙집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백화점 점원으로 동생들과 아버지를 부양하고 가사를 책임져야 하는 열아홉 살 처녀의 짓눌린 삶으로부터의 도피라는 갈등을 세밀하게 포착한 단편, 이블린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는 창 커튼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오랫동안 집안을 보살피겠다고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심해지는 아버지의 폭력적 위험, 동생들의 뒷바라지, 생활고 등 자신을 감금하는 삶으로부터의 도주를 고민하는 내면의 목소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그녀에게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새 삶을 시작하자는 연인 프랭크의 유혹은 번민을 더욱 깊어지게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쨌든 집에 있으면 먹을 것과 잘 것은 걱정 없다. 그리고 나면서부터 사귀어 온 사람들이 있다.”고 망설이며, 결국 부에노스아이레스 행 밤배를 타는 프랭크의 손을 잡지 않는다. 그녀는 왜 떠나지 않았나? 에 대해 해외 영문학자들의 많은 해석이 있다.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프랭크는 여자를 팔아넘기는 포주였기 때문이라는 급진적 해석부터 미지의 공포에 대한 몸의 부동으로 정체된, 변화에 저항하는 아일랜드 현실의 비판적 은유라는 분석도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소설의 형식적 측면에서 열린 결말을 도입한 선구적인 작가로서 제임스 조이스를 위치케 하였다는 점이다. 해석이야 독자들 마음일 것이다!

 

빠른 속도, 평판, 이라는 당시 더블린 중산층을 장악하던 의식의 속물성을 빗댄 자동차 경주대회에 참가한 프랑스, 영국, 미국, 독일인 등 선진국에 대한 맹목적 경외를 이야기하는 경주가 끝난 뒤에, 재산 있는 청년을 유혹하여 성적 관계를 성사시키기 위하여 딸과 청년의 행위를 모른 체하며 이를 미끼로 활용하는 하숙집 여주인과 열아홉 살 딸의 암묵적 음모의 천박성을 다룬 하숙집, 하녀를 꾀어 돈을 갈취하며 살아가는 젊은 세태의 비열한 속성을 그린 두 부랑자역시 아일랜드 무기력의 저변을 이루는 저열함과 속물성, 식민지 의식의 통렬한 까발림이라 할 것이다.

 

2. 성숙기, 대중생활의 작품들

 

성숙기의 작품은 구름 한점(작은 구름)」 「분풀이(짝패)」 「진흙」 「끔찍한 사건(참혹한 사건)4편을 이루고 있다. 자기 삶의 무책임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패링튼이란 인물의 비루한 속성이 전편을 이루는 분풀이(짝패), 옛 시절의 감상을 노래하는 진흙, 도덕성, 예술성 등 사회의 저변을 형성하는 중산층에 냉소를 보이는 중년 남자의 외곬성과 타인의 고독에 대한 이해조차 형성시키지 못했던 뒤늦은 자기 발견을 이야기하는 끔찍한 사건(참혹한 사건)을 통해 아일랜드의 정신적 성숙을 표상하는 계층의 실상이란 이러한 것, 이처럼 하찮은 유아적이고 보수적이며, 정체되어 있고 또한 감상에 머물러 있음을 응시하고 있다.

 

내 살기를 꿈꾸었네 대리석 궁궐에서

시종과 하인을 양 옆에 거느리고

이 궁에 모인 만 사람 중에

나야말로 희망이요 자랑이었네

라고 세탁소 직원인 장년의 여성 마리아가 노래하는 진흙의 장면은 옛 시절의 영화에 멈추어버린 당대 기성계층의 고착된, 즉 마비되어버린 사유의 전형적 비유처럼 보인다.

 

그러나 4편의 소설 중 단연 압권은 구름 한 점(작은 구름)이다. 오늘의 21세기 여느 현대소설의 의식흐름 묘사를 능가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또한 이 작품은 조이스의 후기 작품인 율리시즈피네간의 경야의 하나의 질료로서 그 흔적을 남겨주는 빼놓을 수 없는 사유의 시작점이라는 중요한 작품적 지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설의 제목은 성서』 「열왕기상편 1844, “그가 말하기를 보라, 사람의 손만큼 작은 구름이 바다에서 솟도다.”에서 차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인간행동과 사유의 오랜 갈등, 지금도 우리네 관념의 충돌을 지배하는 시간의 순환과 직선적 흐름, 고정과 변화, 보수와 진보, 자기만족과 타인의 배려 등 예언자 엘리아와 바알신 예언자들의 투쟁에 기초를 둔 인간 삶의 경이로운 대립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런던의 신문기자로 성공하여 더블린에 잠시 들른 8년 만에 만나는 친구와의 약속장소를 향한 걸음의 의식에서 시작된다. 유명 법률회사 직원으로 전형적 중산계급인 일명 꼬마 챈들러(토미)’에게 약속장소인 콜레스 요리집은 한 번의 눈길도 던지려 하지 않았던 고급 식당이며, 이곳에서 성공한 친구 갤러허를 만나게 된 것에 자신의 자부심까지 상승한 것으로 여긴다. 더구나 가는 길에 드러난 강가에 옹기종기 초라하게 일그러진 채 모여있는 서민들의 집과 낡아빠진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그를 더욱 강박적으로 더블린이라는 현실 삶으로부터의 이탈을 꿈꾸게 한다.

 

이 환상적인 희망은 런던 신문기자인 친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좌절된 꿈인 시()의 발표를 이뤄냄으로써 자신 또한 런던으로 좀더 가까이 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이다. 두 사람은 살아온 - 결혼, 아이, ... - 이야기들을 유쾌하게 나눈다. 갤러허는 돈과 미모를 갖춘 여성들이 자신의 주변에 넘쳐나고 있음을 자랑하며 결혼을 폄하하면서도 토미의 결혼과 아이의 출산에 대한 뒤늦은 축하를 보낸다. 토미의 집으로의 초대는 거절되고, 아내가 부탁한 커피 구입을 잊어버린 채 집으로 돌아간다. 상점으로 나간 아내 대신에 아기를 안지만 아기는 울음을 터뜨린다.

 

이 좁은 무덤 속에서 그대의 몸은 잠들고, 한때는 그 몸에도....나는 종신(終身) 갇힌 몸이다. 노여움으로 두 팔이 부르르 떨리며, 갑자기 아기의 얼굴 쪽으로 몸을 숙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아기는 애처롭게 울기 시작하더니...”

돌아온 아내는 그의 얼굴을 노려본다. 아기를 빼앗아 들고 아가야! 우리 아가야! 놀랐어? ....” 아기의 울음은 잦아들고, “꼬마 챈들러는 부끄러워서 두 뺨이 빨개지는 것을 느끼고 ... 그리고 뉘우침의 눈물이 그의 두 눈에 괴어들었다.”

 

갤러허의 독신 생활과 대조되는 꼬마 챈들러의 가정적 평형을 이루는 이 장면은 정말 통렬한 아이러니를 시사한다. 엘리아와 바알, 진정 무엇이 올바른가? 아니 우리들은 이 둘 모두의 저울대 위를 끊임없이 서성거리는 존재일 밖에 없는 것 아닌가? 끝없는 내적 갈등에 시달리는 존재로서.

 

한편 대중생활을 기록한 106일 위원실(위원실의 담쟁이 날)」 「어머니」 「은총, 3편은 정치, 경제, 사회문화, 종교에 만연한 대중의 허름하기 그지없는 위선과 무지와 부조리와 무기력을 각기 민중의 지도자였던 파넬의 기념일과 영국왕의 방문, 어떤 정체성조차 지니지 못한 오합지졸들 선거판의 잡설들에 끼워 식민성과 자본의 교환을 말하고,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의 이면에 놓여있는 편협성과 초라한 이기심을 드러내는가하면, 술에 취해 나자빠져 있는 한 인간의 잘 난체 하는 정신이란 것에 들어앉은 정말 하찮은 신념의 구조를 목격하게도 한다.

    

 

 

 

 

 

 

 

 

 

 

 

 

 

 

 

 

 

 

 

 

 

 

 

 

 

 

 

 

 

 

3. 중편 죽은 사람들(死者)

 

죽음의 또 다른 언어로서 더블린 사람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마비와 불안이라는 단어로 정의되는 이 소설집의 전체 주제를 아우르는 작품이다. 소설의 배경은 케이트와 줄리아 두 자매가 가족들과 이웃 친지들을 초대하여 서로의 추억과 우정을 나누고 감사하는 크리마스 연례파티의 소박한 묘사와 두 자매의 조카인 가브리엘과 그의 아내 그레타의 어긋나는 의식의 묘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첫째는 시시콜콜한 피아노 연주와 노래의 장면이나, 마련된 음식들의 나열과 서빙, 분위기라는 전형적인 아일랜드인들(더블린 사람들)의 관습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형태를 보여주면서, 자연스레 옛날 가수의 향수에 목말라 하는 세대들의 젊은 가수들에 대한 가치 폄하와 같은 신구의 묘한 갈등 양상을 드러낸다. 행사의 주관자인 이모 두 사람을 비롯한 참석자들을 향해 가브리엘이 하는 감사의 말에 이 배경의 주요 주제의식이 모여 있다고 해도 그리 벗어난 이해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원칙에 자극 받은 한 세대가 자라나고 있으며, 비록 그것이 그릇되더라도 진정한 것으로 믿고 싶다고 말하며, “저는 과거에 집착하려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가브리엘의 연설이다. 그럼에도 단서를 다는데 지난날의 유산이었던 자애와 환대와 유머같은 것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라며, 성대한 시절이었던 옛날을 소중히 간직하자고 주장한다. 사실 진부하기 그지없는 뻔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럴듯하게 뻔지르르한 신구의 균형 있는 자세를 표방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누구나 말 할 수 있는 구태의 반복적 발언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다음의 배경으로 연결시키는 절묘한 장면이 등장한다.

 

파티 내내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지 않던 다아시라는 젊은 가수가 파티가 종료되어 모두 귀가하는 과정에서 비애감 넘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인데, 이것은 이중의 의미로 다가온다. 기성의 요구에 대한 저항과 단절의 표현이 하나이며, 죽음이라는 마비의 현상을 일깨우는 슬픈 가사의 의미가 그 둘이다. 이것은 아득히 들려오는 감성의 노래로서 가브리엘의 아내 그레타를 계단에 서서 추억에 잠기게 한다. 가브리엘은 어둠 속에서 그 노래를 듣고 서있는 아내의 우아한 자태에 빠져 화가가 되어 <먼 음악>이라는 이름의 그림에 그 모습을 담아내는 상상을 하기조차 한다. 부부는 호텔에 묵기 위해 마차를 달리고, 가브리엘은 아내에 대한 정념에 휩싸여 즐거움에 차 있지만, 아내의 표정은 이러한 가브리엘에는 무심한 다른 세계의 회상에 빠져있다.

 

따라서 가브리엘의 환상은 좌절되고 마는데, 다아시의 노래가 자신 때문에 죽은 것 같은 옛 연인을 생각나게 했다며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아내 그레타의 추억에 직면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간에도 어찌 할 수 없는 영혼의 고독을 깨닫게 될 때 죽음의 의미는 정말 새롭게 떠오른다. 그레타의 회상으로 그려지는 옛 사랑의 모습과 묘지의 전경은 가히 죽음에로의 편향이라 할 만큼 애절함으로 가득 들어찬다.

제임스 조이스가 옛 연인을 마음에서 지워내지 못했던 아내 노라 바나클을 생각하며 자신의 사랑을 초월적인 무엇으로 사유하려했던 한 푼짜리 시들(Poems Penyeach)에 수록된 아름다운 시가 변주되어 소설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라훈을 슬퍼한다

 

비가 라훈에 조용히 내린다. 조용히 내리고 있다.

나의 침울한 애인이 누워 있는 곳.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실로 슬프다. 슬프게 부르고 있다.

회색의 달이 떠오를 때.

 

사랑이여 그대는 듣느뇨.

얼마나 부드럽게, 얼마나 슬프게 그의 목소리가 여태 부르고 있는지를.

여태 대답도 없이 그리고 어두운 비가 내리고 있다.

그 옛날처럼 지금도.

 

우리의 심장도 또한 침울하게, 오 사랑아, 잠들리라, 그리고 차갑게.

그의 슬픈 심장이 누워 있듯이

회색 달빛, 쐐기풀, 파란 곰팡이

그리고 속삭이는 비아래.

 

조이스에게 전기적 의미를 지니는 이 시는 소설 죽은 사람들(死者)의 장면과 어울려 묘한 울림을 준다. “인간의 생과 사, 탐욕과 사랑, 과거와 현재의 갈등을 초월한 보편적 은총이라는 해외 평자들의 해석은 많은 서술적 부재로 시달리는 독자의 해석상 불확실성을 충당해준다. 설혹 네 시기의 형상으로 새로운 윤리사회를 제시하려 했던 제임스 조이스의 의도를 모두 읽어내는 데 미치지 못할지라도 인간에 대한 그의 응시로부터 1세기가 지난 오늘, 우리는 충분한 사유의 양분을 거둬들이게 된다. 한 신부의 죽음의 이야기(자매)로 시작된 소설은 이렇게 죽음의 이야기로 맺는다. 어쩌면 작가는 그가 발표한 작품들이 지닌 급진적 형식과 달리 바알, 즉 시간의 순환성에 더 매혹되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옛날처럼 지금도 내리는 비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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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8-05-12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블린 사람들을 보면 왠지 중국에 넘어가기 전 홍콩이 떠오릅니다. 아울러 장국영의 눈빛도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필리아 2018-05-12 22:07   좋아요 1 | URL
네, 영국의 식민지적 형국이었으니까요.
심리적 압박감에서 오는 무력감이 엄청났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꼬마요정‘님.

AgalmA 2018-05-13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임스 조이스 완독한 게 아직 <더블린 사람들>밖에 없는데요^^; 「죽은 사람들」넘 좋아서 제임스 조이스 다른 작품도 꼭 다 읽을테다! 해놓고 어언 10년이 흐른-_-;;;;;

필리아 2018-05-13 07:12   좋아요 0 | URL
잊었다가 어느 순간 다시 시선에 들어오고 그렇게 다시금 읽게되고 하는 것 같아요. ^^
 

[본 이미지는 도서출판 어문학사의 블로그 이미지를 차용한 것임]

 

언제부터인가 작은 꿈을 꾼다.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시야가 같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공간에 대해서. 세 집, 네 집, 혹은 열 집까지 함께 열린 마음을 나누며, 의지하는 그런 친밀한 공간을. ‘아르카디아와 같은 커다란 자연주의 이상향, 그런 공동체가 아닌, 취미생활이나 공동의 대지나 공간을 함께하는 그런 작고 소박한 둥지를.

 

웹사이트를 둘러보다가 마침 '코하우징(CO-Housing)'으로 불리는 주거 대안에 대한 설명이 눈에 띤다.

; 통상적인 주택에 비하여 보다 많은 공간과 서비스를 공동으로 사용하며 생활하는 주거단지로써, 공유공간을 사용하고 공동식사, 작업, 취미활동과 같은 공동 활동을 함께 나누고 싶어하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가족이 거주하는 주택(단독, 연립 형 등)단지를 일컫는단다.

    

[본 이미지는 도서출판 어문학사의 블로그 이미지를 차용한 것임]

 

그러고보니 내 소박한 꿈이 결코 낯선 것은 아닌 모양이다. 어문학사에서 출간된 코하우징 공동체라는 책도 있고, 캐나다, 스웨덴 등지의 사례도 꽤나 즐비하게 소개되고 있다.

집과 집사이의 도로위에 유리 천장을 덮어 공동의 공간을 창출하고, 마당도 함께 가구며, 책도 읽고 담소를 나누는 여유로운 공간의 사진들이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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