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4



 요시다 슈이치 작가 스스로 감히 대표작으로 단언할 만한 작품이며 나 역시 10년 전에 읽었을 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지금은 어떨까? 작가는 아직도 이 작품을 자신의 대표작이라 여길까? 나는 올해 1월 초에 이 작품을 다시 펼쳤지만 다 읽기까지 자그마치 2개월이 넘게 걸렸다. 여러모로 진행도 더뎠고 더 이상은 새로울 게 없고, 또 무엇보다 사건의 진상을 훤히 알고 있으니 이 작품의 사유를 다시 읽어내려가는 것이 더없이 지루하게 느껴진 탓이다. 이런 감상은 주로 트릭과 반전을 내세운 추리소설을 다시 읽을 때 들곤 하는데, 범죄를 다뤘을 뿐 추리소설이 아닌 작품인데 사유가 지루하다니, 한 번은 끊고 다시 읽어볼 수밖에 없었다.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모두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안쓰러우면서 환멸을 느끼게도 하는 입체성이 '가관'인 소설이었다. 평소라면 압권이라 표현했겠지만 이번엔 가관이라 표현하고 싶다. 사실상 피해자의 아버지를 제외하면 다들 너무 이해불가할 만큼 돌발적인 언행을 저지르는데 작가는 그에 대해 충분한 분량을 할애해 묘사하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이라고 무마하는 느낌이었는데, 도망친 것도 무고죄를 저지르려는 것도 자수하려다 만류하거나 도피를 하는 것도 외로움을 느껴 서로에게 다가갔다가 배신하는 전개 등 일련의 전개나 묘사가 완급 조절이 들쑥날쑥한 터라 상당한 집중력이 요구됐다.


 조금이라도 딴생각을 하면 전개를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참으로 예측불허했는데, 좋게 말하면 그만큼 등장인물들 하는 짓이 입체적인 걸 넘어 픽션치곤 대단히 현실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악인'은, 적어도 우리 상식으로 바라보면 꼭 법의 테두리 안팎의 여부로 깔끔하게 판별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적절한 연출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5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안에서 이리저리 가치관을 흔들어대는 터라 주제의식이나 내용이나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전에 읽었을 땐 외로운 과거사를 가진 유이치가 가여웠고 경박한 게이고가 역겨웠고 요시노는 살해당한 건 불쌍하지만 일종의 자업자득이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작품의 청승 떠는 것 같은 시선이 부담없이 흡수돼 무려 10점이나 줬으나 지금은 오히려 이 모든 캐릭터들의 언행이 불편하게만 다가왔다. 뿐만 아니라 유이치와 함께 도피 행각을 한 미쓰요의 경우 그녀의 과거를 내 기준에선 작가가 충분히 다뤘다고 느껴지지 않아서 모든 행동이 다소 작위적으로 다가왔고 때문에 최후반부의 대사도 아무런 여운을 안겨주지 못했다. 여운은커녕 약간 오그라들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가혹한 평이려나.


 과거와 달리 내가 이 캐릭터들보다 나이가 많아졌기 때문인 걸까? 내가 다 포용할 수 없을 만큼 어리석으며 감정적으로 행동하니 공감이나 동정보단 차갑게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고 반면교사로 삼게 됐다. 훗날 두 번째 읽고서 이렇게나 박하게 평하리라곤 10년 전엔 정말 상상도 못했다...

 이 작가의 <퍼레이드>와 <사요나라 사요나라>, 그리고 <요노스케 이야기>와 함께 정말 좋아한 작품인데 이 작품들도 지금 다시 읽으면 별로일까? 작가의 젊은 감각과 통찰력을 좋아했는데 이번엔 유독 젊기보단 얕게 느껴졌다. 한때 가장 좋아하는 작가였으나 나도 성향이 많이 바뀌었는지 아무리 두 번째 읽은 작품이라지만 인상이 많이 달라져 일종의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했다. 정말 영원한 팬심이란 없는 모양이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의 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밑변의 돌 한 개가 없어지는 거로구나 하는 - 439p

요즘 세상엔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이 너무 많아.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은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어버리지. 자기에겐 잃을 게 없으니까 자기가 강해진 걸로 착각하거든. 그래서 자기 자신이 여유 있는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뭔가를 잃거나 욕심내거나 일희일우하는 인간을 바보 취급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안 그런가? 실은 그래선 안 되는데 말이야. - 448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