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가족 1
사토 아이코 지음, 곽미경 옮김 / 강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11


 이 작품의 원제는 '바람의 행방'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추상적인 제목이다 보니 '도쿄 가족'으로 바꿔 출간한 듯하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도쿄 가족은 다소 평범하니 내 생각엔 절충안으로 '가족의 행방'으로 국내에 출간됐으면 어땠을까 싶다. 뿔뿔이 흩어지는 작중 요시미네 가족 구성원, 좁힐 수 없는 세대 차이로 인해 가까운 듯 멀어져가며 다시 가족이란 이름 아래 모이는 이야기에 잘 어울리는 제목이었을 것 같은데.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을 뽐내는 주인공들, 시대의 문제와 세대별 인물들의 심리를 어색하지 않게 묘사하는 작가의 통찰력과 필력, 그리고 이 인물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를 바라보는 작가의 인간미 넘치는 시선은 시간이 흘러 두 번째 읽음에도 빛이 바래지긴커녕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10여년 전에 읽었을 때도 좋았지만 조금 더 나이를 먹고 읽으니 더 좋았던 작품이다. 이런 작품이 나오키상을 받았어도 이상하지 않았겠는걸? 아, 작품의 저자 사토 아이코는 이미 1969에 나오키상을 수상한 베테랑 중에 베테랑 작가다. 1923년생이면 살아계시다면 올해로 100년은 넘게 사신 걸 텐데... 국내에 출간된 작품이 사실상 이 작품 하나밖에 없고 - <마흔, 이렇게 나이들어도 괜찮다>라는 자기계발서가 하나 있다... - 인지도가 워낙 없으니 앞으로도 작품을 접할 일이 요원해 보인다.


 부모가 이혼한 요시미가 그 자신도 알게 모르게 위축돼 학교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이 정말 남일 같지 않았던 것을 시작으로 교실에 벌어지는 왕따 같은 문제에 둔하고 외면하려는 쓰레기 같은 교사 아오야기, 왕따 주도자인 가노의 역겹고도 일그러운 언행, 요시미의 삼촌인 고지와 할아버지 조타로가 자신들의 직업인 교사로서의 책임감에 대해 고민하는 부분 등 내가 감정이입하고 생각해보게 만드는 요소가 한둘이 아니라서 적지 않은 분량인데다 이미 접한 내용임에도 마침 처음 읽듯 다음 내용을 궁금해하며 책장을 넘겼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문제, 이를 테면 왕따라든가 학력 만능 사회와 같은 분위기는 결코 하루 아침에 해결하거나 개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과연 이 소설이 나름대로라도 답을 낼 수 있을 것인지 기대하며 읽어내려갔다.

 작가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손자 등 여러 세대의 다양한 입장에 놓인 여러 인물의 심리를 자연스럽고도 능수능란하게 그려내지만 역시 작가 자신과 가장 비슷한 또래인 노부코와 그녀의 친구들의 이야기에서 두각을 보인다. 그전까지 노부코는 조타로에게 이혼을 요구했으면서 정작 조타로가 홀몸으로 시골에서 잘 살아가고 정작 자신은 혼자인 삶을 기대만큼 못 누리자 열폭한다거나, 아니면 아들과 손자와의 대화에서 겉돌거나 지레짐작하며 호들갑을 떨면서 새로운 며느리인 지카를 구박하고 그것도 모자라 전 며느리 미호와 만났을 때 뒷담화를 하는 등 이래저래 호감형 인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녀의 내면이 본격적으로 조명되자 노부코 세대에 속하는 여성 전체에 형언할 수 없는 동정심이 일었다. 남편에 복종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미덕인 시대를 살아온 탓에 습성이 그쪽으로 고정된 것이나 그럼에도 가족 내지는 삶에 대한 의지만은 꺾이지 않은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내가 그 세대의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진정으로 가까워지긴 힘들겠지만 내 윗윗세대의 고충을 엿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가슴 한편이 저릿해졌다.


 노부코 얘길 했으니 조타로 얘길 빼놓을 수 없지. 이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야말로 '걸작'으로, 이 시대에 다시 환생한 돈키호테이자 동시에 시대를 역행하는 '사나이'다. 일본은 전쟁에 패해선 안 됐다거나 여자는 그래서 안 돼 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철밥통이지만 그의 무식할 정도로 단순하고 거친 교육관이나 인생관엔 철학과 인간애가 있어 마냥 경멸하기엔 망설여지는 캐릭터였다. 개인적으론 아까 위에 언급한 쓰레기 같은 교사 아오야기나 왕따 주도자인 가노가 조타로에게 참교육을 당하는 전개를 기대했는데 그런 사이다 전개는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그런 전개는 조타로 못지않게 의협심이 강한 지카에 의해 자주 연출됐다. 뒷일을 좀스럽고 복잡하게 생각하기보다 말과 행동이 먼저 나가는 조타로와 지카는 주변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많은 반작용을 낳지만, 오늘날 세상이 지나치게 복잡해진 걸 생각하면 이처럼 단순한 인물들의 모습은 큰 울림을 준다. 그런 단순함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족의 행방을 한 곳으로 집결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요시미의 새엄마인 지카가 일반적인 창작물에서 묘사되는 계모상과는 아주 상반되게 철딱서니 없는 캐릭터인 것도 매력적이었고 오히려 요시미의 아버지 겐이치를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며 한심하게 묘사한 것도 재밌는 점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아버지가 아오야기나 가노보다 더 답이 없는 인물인데 이런 하찮은 남자가 잘도 요시미의 엄마인 미호와 결혼한 것이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의문인 지점일 정도다. 센스 있는 전처를 그리워하거나 손이 많이 가는 후처 때문에 고부갈등이 생기는 것을 지겨워하는 내면 묘사가 어찌나 한숨을 유발하던지 입이 안 다물어질 정도다. 이렇게 자기 철학이고 줏대도 없는 사람이 제일 문제다. 조타로가 아들한테 실망해 시골로 간 것도 이해가 간다. 조타로가 가족을 결집시키는 가장이라면 겐이치는 정반대다.


 요시미의 친엄마인 미호가 이혼 후에 겪는 사랑 이야기는 이 작품에서 가장 이질적인 이야기였다. 그녀는 요시미와 모자 관계라는 끈은 이어져 있지만 딱 거기까지일 뿐, 앞으로 요시미네 가족과 인연은 없을 것이니 선이 그어진 듯 전혀 다른 이야기가 풀어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와 같은 미호의 포지션이 참 현실적으로 묘사됐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아직까지 서양만큼 가족 관계를 쿨한 듯 따뜻하게 선을 지켜나가는 건 참 어색한 일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허물이 없는 관계를 지향하기에 이처럼 남인 듯 남이 아닌 관계, 결국 미호는 작품의 마지막 장면엔 함께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커리어 우먼으로 잘 살아갈 것이고 요시미와 모자관계는 전보다 소원해진다 하더라도 결코 단절되지 않을 것이다. 설마 그 이후에도 이상한 남자한테 휘둘리는 건 아니겠지? 만약 후속작이 나온다면 거기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궁금하다. 물론 다른 캐릭터들도.

 찾아보니 2022년에 작가의 작품 중에 <凪の光景>이라는 작품이 출간했는데 뜻이 '잔잔한 바다의 광경'이라고 한다. 설마 후속작인 걸까? 본작품에서 답을 내리지 못했지만 대신에 미래 세대를 향한 애정을 드러낸 만큼 후속작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후속작이 괜히 긁어부스럼을 만들 순 있지만 이 작가의 필력이라면 그런 일은 없으리라 단언한다. 딱 한 작품밖에 접하지 못했지만 이 책만 봐도 내공을 알 수 있어서 추후에 소개될 작가의 다른 책도 기대가 된다. 과연 더 소개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서로 고생한 걸 비교해봤자 별 도리 없어. 알아달라고 하는 쪽이 억지라고 생각해. 하지만 이 말은 하고 싶어. 너희들이 생각하는 고생이랑 우리가 겪어온 고생은 다르다고.
그런 건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 서로 알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지. 기대를 버리는 거야. 철저히 고독해지는 거야. 결국 악착같이 살아야 돼. - 2권 5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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