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토 루즈 1
와타나베 준이치 지음, 전경빈 옮김 / 창해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9.9  






 전에 <O 이야기>의 서평을 둘러보다가 어떤 사람이 그 작품과 <샤토 루즈>를 비교하는 글을 읽었다. 짧게 언급했지만 적잖이 관심이 가 어렵사리 찾아 읽었다. 알라딘 중고서점을 통해 간신히 구한 이 작품은 잊히다 못해 없어지기 일보 직전인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게 해줬다. 아내와 섹스는커녕 정상적인 의사소통도 않는 주인공이 프랑스의 비밀스런 '성性 학습소'인 샤토 루즈로 보내버린다는 이 엽기적이고 역겨운 이야기는 거의 절대다수의 독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론 마음에 쏙 드는 소설이었고 어렵사리 구해 읽은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야해서? 분명히 말이지만 야한 걸 기대하고 읽으면 오히려 실망할 확률이 높은 책이다. 물론 그런 부분을 기대하고 읽었다는 걸 부정하지 않겠다. 허나 이 소설은 주인공이 거액을 들여 자기 아내를 납치해 사실상 성고문하는 것에 동참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내에게 어처구니없이 복잡미묘한 심리를 갖는 것을 묘사하는 것에 주력하는 작품이다. 덕분에 기대보다 야하진 않았지만 기대와는 전혀 다른 부분에서 감명 깊게 읽을 수 있었다. 감명? 이상한 표현이지만 결말까지 읽으니 감명이란 표현을 쓰는 게 그렇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더 오해할까봐 이 소설이 내 마음에 쏙 들었던 이유를 말하겠다. 이 소설은 아내에게 한 짓을 주인공 스스로 미화하기보단 자신의 성욕을 인정하고 말 그대로 아내와의 원만한 성생활을 위해서 라는 자기중심적인 이유를 솔직히 시인하고 있고, 그토록 자기중심적인 주인공이 끝에 가선 원하는 것은 그 무엇도 얻지 못하고 좌절하면서, 한편으론 자신의 결점을 극복할 모종의 실마릴 얻는 듯하며 결말이 난다. 물론 이 결말조차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연출이나 문체 덕분인지 더없이 인상적이었다. 

 난 이렇게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부정당한다고 해도 자신이 생각한 바를 솔직히 말하는 주인공들이 마음에 든다. 그렇기에 얼마든지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다. 이딴 식으로 살지 말아야지 생각하다가도, 혹시 나에게도 이런 일면이 있지 않은지 반성해보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인물조차 일련의 사건을 겪고 변하거나 변하게 되리라 기대를 품게 만드는 결말도 마음에 들었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고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는 소설은 그 나름대로의 여운을 안겨주는 법이다. 이것이 내가 매력적인 등장인물이 가득한 소설 못지않게 결점으로 범벅인 등장인물이 나오는 소설도 즐겨 읽는 이유다. 


 <O 이야기>와 비교하자면, 그 작품에 대해서 내가 예술로 시작해 외설로 시작했다고 말했는데 <샤토 루즈>는 설정의 유사성은 있지만 다행히도 이 작품은 외설로 시작해 예술로 끝난다. 예술로 끝이 난다는 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주인공이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며 외설로 시작한다는 건 역시나 그놈의 설정 때문이겠다. 하지만 이조차도 <O 이야기>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다. 일단 주인공의 아내가 70일 동안 갇혀 있던 샤토 루즈는 강도 높게 그녀의 성감을 개조시키려 했고 기어코 성공했지만 그 일거수일투족이 다 다뤄지지도 않았고 그보다 중점적으로 다뤄지는 건 아내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심리다. 자신에게 그토록 도도하게 굴었던 아내가 성적 접촉으로 인해 무너지는 모습에 경악하고 점점 성감이 발달해감에 따라 괘씸함을 느끼고 일취월장하는 그녀의 모습에 '과연 아내가 돌아와도 내가 만족시킬 수 있을까' 불안함을 느끼는 속마음 등이 아주 솔직하게 다뤄진다. 

 당사자끼리 해결할 부부의 성생활 문제를 주인공이 타인, 그것도 정체도 잘 모르는 집단에 맡겨놓고 혼자 안절부절못하면서 그런 아내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면서 자위하는 등 자기중심적이다 못해 찌질함의 정점을 보여줘 은근히 흥미로움과 안쓰러움도 유발하는 것이 바로 <샤토 루즈>라는 작품의 묘미였다. 반면 <O 이야기>는 성노예로 전락하는 여성 O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이며 독자는 그녀가 '사랑'이라는 만능 단어로 철저히 이용당하는 것을 앎에도 당사자는 의심하긴커녕 오히려 남자들 입맛대로 성노예로서의 본분을 철저히 내제화하는 과정을 그저 바라만 보게 만드는 일종의 무력감을 안겨준다. 무엇보다 그 모든 성적 능욕 과정이 여성의 입장에서 그려져서 처음엔 흥미롭다가도 갈수록 노골적이고 이해불가해져 외설스러움이 극에 달하는 작품이다. 


 <샤토 루즈>에서 성노예로서의 처지를 내제화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주인공의 아내다. 작중에서 샤토 루즈가 어떤 공간인지 단편적으로만 묘사됐고, 아내의 시점은 마지막에 주인공한테 남긴 편지에서만 드러날 뿐이라 실제로 그녀가 O와 비교했을 때 정확히 어떤 상태일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샤토 루즈가 <O 이야기> 속 루아시보다 묘사상으로 더 괜찮아 보인다 하더라도 똑같이 대책없이 성에 탐닉하는 장소임엔 큰 차이가 없고 자신의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이번엔 자기 의사로 샤토 루즈로 가게 되는 아내의 모습은 섬뜩하며 안쓰럽다. 

 그녀는 남편에게 '만약 아니라면 죄송하지만, 당신이 날 샤토 루즈로 보낸 것이 아닐까 싶은데, 지금에 와선 고맙다고 생각한다'고 편지에 썼다. 이 말인즉슨 그녀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자신의 변화에 혐오감을 느끼는 단계도 이미 넘어섰다는 얘기다. 그래서 자기 발로 샤토 루즈로 떠난 것이리라. 하지만 성욕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욕구다. 반면 우리의 육체는 늙고 매력도 점점 떨어진다. 그리고 성욕은 한 번 맛을 들이면 꼭 상대가 있어야 해소가 가능한 욕구다. 그녀는 주체적으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샤토 루즈의, 아니 성욕의 노예로 전락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이야 성욕의 노예로서 여러 남자들한테 예쁨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 예쁨을 영원히 누릴 수 있을까? 육체는 점점 늙는데? 샤토 루즈가 그녀로 하여금 어떤 확신을 품게 해줬기에 해방된 지 반년이 지났음에도 다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만들었는지 몰라도, 성욕을 해소해서 얻을 수 있는 쾌감은 극히 휘발적이라 그녀의 지나친 변화가 제3자 입장에서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아내에게 몹쓸 짓을 내고도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주인공의 못난 모습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 한 가지를 말하자면 그가 샤토 루즈가 보내준 아내의 영상을 보고 도리어 샤토 루즈에게 질투를 느끼고 그들의 저의에 의심하는 것이었다. 샤토 루즈가 여성의 몸에 행하는 압도적인 기술들에 질투를 느끼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자신을 비웃으려고 영상을 보낸다고 의심하는 건 대체 무슨 심보란 말인가. 주인공은 자신의 심리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자각함에도 그 의심을 쉬이 떨치지 못한다. 심지어 그 영상도 본인이 보내달라 부탁한 것임에도 말이다. 자신이 한 짓이 워낙에 미친 짓이고 어지간히 자존감이 떨어지지 않고서 저지를 수 없는 짓인 걸 알기에 그 찌질하다 못해 어두운 심정을 중언부언 끝도 없이 쏟아낸다. 

 굳이 추측을 해보자면 주인공한테 영상을 보낸 샤토 루즈 입장을 해석해보자면, 자신들의 노하우를 보고 배우라는 일종의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이지 않았을까 싶다. '느끼지 못하는 여성은 없다, 다만 느끼게 해주는 남성이 적을 뿐이다' 라고 단언할 만큼 여성의 성감은 향상되고 개조될 수 있음을 자신하는 그들이기에 그토록 성실하게 영상을 보냈으리라 생각한다. 글쎄, 사람마다 성욕이 제각각이라 '느끼지 못하는 여성은 없다'는 말은 약간 의심스럽게 들리지만... 아무튼 작중에서 묘사되는 것을 생각하면 딱히 도를 넘은 행동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성감 자극에만 집중했던 그들이 대단히 가학적인 존재로 비춰지지 않았기에 더더욱 주인공의 심정은 자격지심에 불과하다고 여겨졌다. 만약 주인공이 자격지심을 덜 느끼고 영상의 기술을 습득하려 노력했다면 아내가 샤토 루즈로 다시 떠나는 최악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참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아내는 자신을 납치했던 곳으로 성노예가 되기 위해 떠나고, 남편은 아내를 잃고 아내에게 자신의 단점, 예를 들면 자기중심적이고 찌질하고 인간적으로 정을 줄 수 없는 성격 등을 지적당한다. 아무리 사랑 없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체면을 위한 부부 관계였다고 하지만 이런 식의 이별은 다소 안타깝게 느껴졌다. 애당초 샤토 루즈 같은 정체불명의 조직은 끼어들 필요 없이 둘만이서 해결하거나 끝장을 낼 수 있던 관계 아니었나. 납치에 관해선 전적으로 남편의 잘못이라 할 수 있지만 납치 전에 부부로서 대화를 피했던 아내에게도 책임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갈등을 솔직한 대화로 풀 생각 없이 동을 돌린 두 남녀의 모습은 너무나 미숙하게 보였다. 

 이 소설에 뒷장에 '진정한 남녀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란 문구가 있는데 처음엔 이게 뭔 소리인가 했다. 이건 그냥 엽기적인 이야기 아닌가? 하지만 결말에 이르니 적절한 문구라는 생각이 든다. 섹스나 샤토 루즈는 단지 평행선을 달리는 부부의 모습을 드러내는 하나의 소재였을 뿐, 관계 개선이나 관계를 끝내는 것 모두 샤토 루즈라는 타인의 손을 빌려 해결하려는 남편과 아내의 모습은 반면교사로 삼기에 딱이었다. 이런 식으로 살지 말아야지. 꼭 부부 관계가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 직장에서도 솔직한 심정을 어필하며 깨지든 바라지 않는 사태로 번지든 할 수 있는 한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해야지. 그래야 최소한 주인공처럼 어처구니없는 자기 연민에 빠진 채 후회할 일은 생기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주인공이 아내가 편지에서나마 바랐듯 자신의 결점을 깨닫고 자신이 바라는 괜찮은 여자와 재혼해 잘 살았으면 좋겠다. 샤토 루즈로 간 아내, 아니 쓰키코도 - 내 기억이 맞다면 아내의 이름은 나왔지만 주인공의 이름은 드러난 적이 없다. 주인공의 모습이 곧 세상 대부분의 남성을 대변하기도 한다는 작가의 가치관이 반영된 연출인 걸까? - 자신이 택한 길인 만큼 자신이 바랐던 것처럼 주체적인 성생활을 그 안에서 잘 이뤄가길 바란다. 아주 열린 결말이다 보니 가능성이 적더라도 그들에게 행복한 삶을 염원해주게 된다. 열린 결말을 접하면 대체로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면 작가가 평범한 결말을 거부하며 파격적인 연출로 끝을 내서 나라도 무난하더라도 행복한 결말을 상상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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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빨개지는 아이
장 자끄 상뻬 글 그림, 김호영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5월
평점 :
절판


9.7 





 아무 이유 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와 아무 이유 없이 재채기를 하는 아이의 우정 이야기. 서로의 결점은 둘을 외톨이로 만들기도, 그래서 서로를 각별한 친구 사이로 만들기도, 긴 시간이 흘러 성인으로 자란 뒤에도 서로를 한눈에 알아보게 만들기도 한다. 남과 다른 자신의 개성을 결점으로 여기다가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자신의 결점을 사랑하는 이야기는 흔하지만 훗날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는 대목에선 감탄했다. 작가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엿볼 수 있었다. 

 어렸을 적 사귀었던 친구와 다시 만나도 바로 알아보는 경우는 흔치 않다. 생김새도 많이 바뀌었고 성격이나 가치관도 예전 그대로일 확률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바뀌면 바뀐 모습대로 나름대로 재밌지만 못 알아볼 정도로 바뀌면 속으로 실망해버리곤 한다. 물론 평생에 걸쳐 전혀 바뀌지 않는 사람도 어떤 의미에선 무서운 사람이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 작품에선 그렇게 심각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뜻밖의 이별로 서로를 그리워한 두 친구가 성인이 되어 한눈에 알아본 뒤 예전처럼 허물없는 친구가 되는 이야기에 작가는 과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생각은 든다. 내겐 저렇게 알아보는 것만으로 반색할 만한 친구가 있을까? 


 시게마츠 기요시의 <친구가 되기 5분 전>이란 작품에선 '평생에 기억될 친구는 단 한 명이라도 충분하다'는 말이 나온다. 그 말에 해당하는 사람이 <얼굴 빨개지는 아이>에 등장인물들일 텐데, 나는 어떨까? 지금 친구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어렸을 적 친구라면 대답하기 조금 애매하다. 어렸을 적 친구란 그런 존재인 것 같다. 그립긴커녕 사실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설령 알아봐도 어색할 뿐일 터다. 오히려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친구'였'다면 그렇게 거북할 리 없겠지만 만약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난다고 한들 엄청 반갑진 않을 듯하다. 확실히 이런 걸 보면 내가 다소 삭막한 인생을 살아온 감이 없진 않은 것 같다. 뭐, 지금이라면 경우는 다르지만 예전엔 친구 소중한 줄 잘 모르고 지냈던 것 같달까? 

 가볍고 따뜻한 작품을 읽었는데 나는 왜 자꾸 무거운 이야길 꺼내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작중 인물들이 부러워서 주저리주저리 얘기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내게도 그립고 헤어짐이 아쉬웠던 친구가 있었더라면... 그리움을 갖고 있는 것이 꼭 좋은 일은 아니지만 반대로 그런 감성을 느낄 여력이 없는 삶도 꼭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별 이상한 걸 다 부러워한다는 생각도 들지만, 작품 이야기가 워낙 따뜻하고 흐뭇한 나머지 내가 느끼는 부러움의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봤던 것 같다. 어쨌든, 나로 하여금 부러움을 느끼게 하다니, 짧지만 강렬해서 괜히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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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여자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8.7 





  <종이 여자>는 백지 공포증에 빠진 작가인 주인공이 자신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의 도움으로 다시 글을 쓰게 된다는 이야기를 기욤 뮈소가 로맨스 작가다운 상상력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최근 어둡고 심각하고 속에 안 좋은 이야길 내리 접했더니 급격하게 밝고 가볍고 통통 튀는 소설이 땡겨 다시 읽었다. 기욤 뮈소의 책은 그 바람에 더없이 적합했는데, 이 책을 처음 읽은지 자그마치 10년이 훌쩍 지났기 때문일까, 그야말로 고등학생 시절에 읽기 딱 좋을 정도로 가볍디 가벼운 소설이란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상처와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전개를 띈 이야기의 무게감이나 책 속의 등장인물이 현실 세계로 튀어나왔다는 설정 등 흥미로운 요소들이 한가득이었지만 그놈의 미칠 듯한 가벼운 문체와 사유로 인해 좋은 요소들이 100% 발휘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쉬운 소설은 흔히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는 것 같다. 문체가 좋지만 설정이 별로인 경우와 설정은 기발한데 문체가 구린 경우다. 기욤 뮈소의 작품은 전적으로 후자에 속하며 더 큰 문제는 이 작가의 책이 대부분 설정이 다 다름에도 항상 비슷한 느낌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팬들에게 물어보면 이 작가의 책 중 가장 재밌게 읽은 책은 '가장 처음에 접한 책'이라고 하며 나 역시 처음에 접한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가 제일 재밌었다. 작품을 접하면 접할수록 식상함이 느껴진다니 참... 최근에 이 작가 책을 전혀 안 읽어서 잘 모르겠지만 이래저래 내공이 애매한 것에 비해 독자들의 사랑은 듬뿍 받는 복에 겨운 작가구나 싶었다. 


 물론 식상하고 가볍고 한없이 대중적인 작품을 쓰지만 그래도 장점이 많은 작가다. 다음을 궁금하게 만들고 순간순간 긴장을 유발하는 이야길 짤 줄 알며 캐릭터들이 확실히 개성적이면서 제법 인상적인 반전도 있어 그의 작품은 대체로 결말이 쉽게 잊히질 않는다. <종이 여자>의 경우 주인공이 작가인 것치고 내면 세계나 사용하는 어휘가 평범하기 그지없었지만 주변 인물들의 매력과 활약이 차고 넘쳐 그들에게 휘둘리면서 재밌는 그림이 많이 그려졌던 게 흥미로웠다. 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주인공의 친구 밀로와 캐롤의 활약도 만만치 않았다. 오로르는... 주인공과 그녀 사이의 에피소드가 다소 오글거려 내 개인적으로 작가의 밑천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부분으로 느껴졌다. 그래도 작가가 판단력은 있어서 그다지 흥미롭다고 여겨지지 않는 오로르와의 만남을 재빨리 다루고 끝내서 이후의 에피소드에 바로 몰입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소설의 반전이나 결말은 다 좋았다. 주인공이 처음에 경악하며 '속았다'고 화를 내는 것이나 운명의 상대 앞에서 망설이는 이유도 모두 개연성 있는 태도라 좋았고, 그럼에도 운명이 엇갈리지 않고 결실을 맺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로맨스 소설이 새드엔딩이면 유독 심적 타격이 큰데 내가 아는 한 기욤 뮈소는 그 정도로 잔인한 심보를 가진 작가는 아니다. 아무튼 뻔하긴 해도 해피엔딩으로 이끈 결말은 다시 읽어도 좋았다. 그리고 만약 이 작품에 반전이 없었다면 결말도 그저 그런 인상을 남겼을 텐데, 반전을 더욱 충격적으로 만들 복선이 약간 부족했던 것은 아쉬웠지만 반전의 내용과 그 안에 담긴 진정성만으로 이 소설은 그래도 작가의 작품 중 꽤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고 본다. 


 위에서 작가를 두고 내공이 어쩌니 하며 실컷 씹었지만, 그래도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그 후에>와 더불어 <종이 여자>는 제법 수작 반열에 드는 대중 소설이라 생각한다. 어린 독자들이 특히 열광할 만한 가벼운 무게감은 지금 내 나이엔 유독 거슬리긴 했지만 그래도 약 10년 전에 이 소설을 재밌게 읽었던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라 오랜만에 추억 여행도 해 나름대로 즐겁게 읽어내려간 작품이다. 작가의 다른 작품과 더불어 <당신~>과 <그 후에>도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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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없는 세상 - 제6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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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9.4 






 중의적인 제목 그대로 주인공이 자기 여자친구와 한 번 하려다 퇴짜를 맞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유머러스하게 진행된다. 이 유머러스한 톤은 그대로 진행되고 이 어린 커플의 다툼도 진지하되 풋풋하게 그려진다. 지금이야 많이 개방된 편이지만 이 작품이 신인상을 수상한 즈음인 20년도 훨씬 전에 용케 이 유쾌한 작풍이 인정을 받았구나 싶을 정도로 <동정 없는 세상>은 세월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 소설이다. 이상적인 어른과 짓궂어도 선은 넘지 않는 친구들, 속세에 속하지 않는 듯 대학 진학에 대한 욕구나 걱정이 전무한 4차원 주인공과 그 주인공이 유일하게 갖고 있는 목표인 '한 번 하고 싶은' 대상인 여자친구는 만만찮은 존재로 등장한다. 


 쉽게 말하자면 여러 우여곡절 끝에 여자친구와 실랑이를 벌이다 얼추 무드를 잘 잡아 거사를 치르는 뭐 그런 내용이다. 조금 어렵게 말하자면 정작 성관계보다 주인공이 인격적으로 어느 수준의 됨됨이를 갖춰 나가게 되는지가 더 눈길이 가던 성장 소설이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관계 뒤에 쪼그라든 주인공의 물건을 보고 여자친구가 귀엽다고 말하자 주인공이 영원히 쪼그라들어도 괜찮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아무튼 그 나이대 남성의 성욕을 유쾌하다 못해 시종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작가의 성관념이 그릇됐다라고 여길 만한 부분이 느껴지지 않아 끝까지 기분 좋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현대 문학에서 성에 대한 묘사를 과시하듯 자극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트렌드를 넘어 일종의 소양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 소설은 그중에서 성이란 관념을 가장 모범적이고 바람직한 시선으로 묘사하지 않았나 싶다. 


 때문에 이 소설이 단편 드라마로 나왔다는 소식이 반갑기보다 불안하다. 보려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겠지만 원작의 풋풋함이나 적절한 수위가 드라마에서 제대로 구현됐으리란 기대가 잘 되지 않는다. 뚜껑은 열어봐야 아는 것이라지만 당장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만약 본다 해도 그 전에 작가의 대표작 <아내가 결혼했다>를 다시 읽고 그 소설을 원작으로 둔 영화를 찾아볼 듯하다. 아, 물론 작가의 다른 책도 찾아 읽어볼 생각이다.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다는 것은 모든 것에 관심이 있다는 얘기하고 비슷해. - 142p



무엇을 하건 간에 어차피 어른이 되는 것이라면 근사한 어른이 되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근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근사한 사람이 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근사하게 살아갈 것이다. - 181~18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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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발설 - 성매매 경험 당사자
성매매경험당사자네트워크 뭉치 지음 / 봄알람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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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20년 동안 성매매 여성이었던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풀어낸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에 이어서 이 책도 읽었다. 성매매 경험 당사자 네트워크 뭉치는 <성매매, 상식의 블랙홀>을 읽을 때부터 들어왔던 이름이라 그 단체에 소속된 여성들이 직접 풀어낸 책도 읽어보고 싶었다. '무한발설'이란 제목에 걸맞는 내용으로, 익명의 저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쏟아내는데 책의 디자인 덕분인지 지저분한 내용과 다르게 읽히기는 굉장히 감각적으로 읽혔다.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이 산문이면 이 책은 운문에 가까웠다. 어딘지 리듬감이 있었고 그렇기에 보다 성매매 경험 당사자들의 경험담이 매우 파괴력 있게 다가왔던 것 같다. 

 나는 성구매를 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 책에서 거론된 온갖 엽색 행각을 보노라면 앞의 내 생각에 '반드시' 라는 말을 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 질에 뭘 넣고 행위를 한 다음에도 불만족스러웠다고 값을 치르려 하지 않는다거나 신고한다거나 진상질은 있는 대로 하고... 뭔가 많이 읽은 기억이 나는데 하도 충격적이라 일부러 잊은 것도 있다. 어떤 부분에선 성애 소설 <O 이야기>를 능가하기도 하니 진짜 말 다했다. 역시 픽션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현실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은 나쁜 일에만 하게 되는 건지... 


 특히 섬에 데려가서 성매매를 시키는 건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런 일을 겪고도 살아남은 분들이 존경스러웠고 그런 일이 꽤나 비일비재한 것과 성구매자나 포주 등 가해자들이 처벌받지 않았음이 자명한 것도 한탄스런 일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살려둔 게 이상할 정도로 정신이 이상한 작자가 한둘 언급되는 것이 아닌 터라 그자들의 악행이 법적으로 정녕 제지가 안 되는 것인지 읽는 내내 답답해서 체할 지경이었다. 당사자분들이 겪은 고통에 비할 바는 당연히 안 되겠지만 짧은 책임에도 후유증은 상당히 컸다. 

 성매매 시장이 망하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성매매 경험 당사자 네트워크가 외치는 것만으론 계란으로 바위 치기 격일 수 있다.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는 말로도 역부족인 듯하다. <성매매, 상식의 블랙홀>엔 이런 말이 나온다. '남자는 짐승이고 성욕은 본능이니 성매매를 못 하게 하면 성범죄자가 된다는 말에 진정 분노하고 저항해야 하는 것은 누구인가.' 내가 봤을 때 이 말에 깊이 동의하는 남성들이 들고 일어나야 한다고 본다. '남자는 다 성구매자고 변태'라 싸잡는 일반화에 저항하는 사람도 동참해야 비로소 성매매 시장에 타격이 있을 듯하다. 당장 나부터 구체적인 실천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누굴 계몽시키고자 설치는 것이 어불성설이니 일단 나부터 뭔가를 해야겠다. 그 뭔가가 무엇인지는 아직 갈피도 잡히지 않지만, 성매매 경험 여성들의 이야길 몇 주 동안 듣다 보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의 일이라 치부하고 무시하기엔 그들은 나와 똑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똑같이 아파하고 슬퍼할 줄 아는 사람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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