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거리 추정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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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정말 오랜만에 '고전부' 시리즈를 읽었다. 시리즈 작품의 후속작이 나오는 긴긴 텀을 미약하나마 흉내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군대에서 당직을 설 때 올레 티비로 애니메이션을 보던 것이 작년 일이다. 소설로는 첫 휴가를 나오기 전에 읽은 것으로 기억하니까 무려 3년 전이 된다. 별 걸 다 자세하게 기억하는 내 자신이 지금 신기할 따름인데 어쨌든 감개무량하다. 여담을 조금만 더 하자면 이 책을 작년에 샀는데 지인한테 빌려줬다가 1년 만에 되돌려 받아서... 그래도 돌려받은 게 어디야.

 2학년에 막 올라간 호타로 등의 고전부 일행이 신입 부원을 받는 시기를 그리고 있다. 신입 부원이 들어오지만 가입 확정일 직전에 느닷없이 입부를 거절한 신입생의 진의를 호타로가 추리하는데 이 과정이 장관이었다. 실제로 이렇게 추리할 수 있을까 싶은 추리력과 그를 뒷받침하는 기억력도 놀랍지만 추리하는 상황 자체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마라톤을 하면서 추리하는 이야기는 또 처음 본다.


 학교 행사 때문에 전에 없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이 안쓰럽고 장하기까지 했다. 너무 호타로에게만 포커스가 잡히는 게 아닌가 싶지만 회상으로 다른 캐릭터도 적절하게 등장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극적 긴장감을 제대로 심어주는 설정이라 주인공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꽤 즐기면서 읽었다.

 일상물, 특히 학교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 일가견이 있는 작가다웠다. 특히 작가의 장기라고 볼 수 있는 묘하게 쓴 맛이 나는 결말 처리 방식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나온다. '에너지 절약주의'를 관철했던 주인공이 점차 적극적으로 변하는 과정을 탐정의 추리극으로 풀어내는 것도 절묘했다. 처음엔 주인공이 이렇게 고생해야 하나 싶을 만큼 사건의 양상이 소소해 보였지만 끝자락에는 상상 이상의 것이 등장한다. 그 이후에 서술된 호타로의 성찰도 인상적이었지만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겠다. 일단 다른 것부터.


 추리극은 다소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작품이 연작 형식을 띄며 과거를 회상하는 식으로 전개되는데 일상적인 작풍임에도 비일상적인 면이 강했다. 트집일 수 있지만 복선이 감도 잡히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뿌려진 것도 난이도가 높았는데 호타로가 그걸 사진기로 포착하듯 기억을 떠올리니 거리감이 느껴진 것이다. 원활한 전개를 위해 현실성을 등지고 과장할 수는 있겠지만 이쯤 되면 비상함을 넘어 무서울 정도였다.

 한마디로 추리를 위해 탄생한 듯한 캐릭터 같아서... 노리즈키 린타로 같은 시행착오를 겪는 탐정에게 아무래도 더 몰입하게 되는 것 - 이런 스타일도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 같다. 이번 작품은 어째 '만들어진' 추리극을 보는 기분이었달까. 물론 추리극이란 것이 철저한 계획 하에 만들어지는 창작물이긴 하다. 그렇지만 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게 배제하면 그건 그것대로 어색할 수 있다는 걸 볼 수 있었다. 처음 이야기가 딱 좋았는데. 호박이 왜 놓여있나, 아주 흥미로웠는데 말이다.


 그래도 작품 말미에 나온 호타로의 성찰 덕에 거리감이 있던 작품은 공감의 영역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 호타로가 가진 고민이 내가 막 성년이 됐을 때 가진 심정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갇혀있는 기분이 들었다면, 내가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어딘가에 가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멀리도 나갈 수 있는데 소심해서 멋대로 타협한 나머지 좁디 좁게 살아오지 않았을까 싶던 게 떠오른 것이다. 차츰 세상의 넓이에 눈길을 돌린 소년의 시선이 사뭇 인상적이었다.

 비록 씁쓸한 기분을 불러일으키지만 미처 못 보고 지나쳤을지 모를 깨달음을 제시하기에 여운 또한 가시지 않는다. 청춘의 우울함을 그려온 요네자와 호노부의 시발점이기도 한 '고전부' 시리즈의 명맥을 잘 잇는 결말이었고 과연 인상적이었다. 또 언제 나올진 모르겠지만 후속작이 기대된다. 어떻게 시리즈가 이어질지 몹시 궁금하다.


 p.s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은 아직 애니메이션화 되지 않았다. 2학년 시리즈가 완결이 돼야 나올 것 같은데 그게 언제 될런지...

지금이라도 만회할 수 있을까. 이 이십 킬로 미터 동안에? 그냥 뛰기에는 너무 길다. 하지만 타인을 이해하는 데 충분한 거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 34p




떠난자는 날이 갈수록 멀어진다는 뜻일까. 아니면 나는 역시 조금 쌀쌀맞은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 267p




남몰래 의심하다 보면 사람이 귀신으로 보이기도 한다. - 273p




실감으로는 사토시 말이 맞는다. 중학생 시절, 가부라야 중학교가 내 눈에 보이는 전부였다. 고등학생인 지금은 가미야마 고등학교 바깥에 관여할 수 없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아무 일도 없이 순조롭게 학교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이 년 뒤 가미야마 고등학교를 뒤로할 것이다. 대학에 간다 해도, 이 역시 순조롭다면 육 년 뒤에는 학교라는 장소를 떠나게 된다. 만약 그때까지 학교 밖으로 손을 뻗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산다면 느닷없이 황야에 내동댕이쳐져 어쩔 줄 모를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게 아닐까. 지탄다가 다양한 사교에 참여하듯, 누나가 전 세계를 여행하듯, 손을 어디까지고 뻗을 터. - 29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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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우울한 날들에게
마이클 킴볼 지음, 김현철 옮김 / 갤리온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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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8.2





 저번 학기 때 자신의 일대기를 쓰는 과제를 해본 적이 있다. 무척이나 어려웠다. 처음엔 왜 쓰란 건지도 모르겠고 막막하기만 했는데 막상 써내려가니 자꾸 떠오르는 게 많아 정리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떠오르는 기억들이 다 행복했던 기억 뿐이라면 좋았겠지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소위 '흑역사'라 불릴 것도 많았고 무덤 속에 같이 안고 들어갈 것도 많아서... 아무튼 그렇게 내 일대기를 쓰다 보니 설명할 수는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소설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가끔 한 인물의 일대기를 쓰는 소설이 있는데 소설로서의 몰입도나 흥미는 조금 떨어져도 - 대게 이런 전개는 그 인물의 미래를 독자에게 이미 보여준 경우에 펼쳐지더라. - 사람의 마음을 참 먹먹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게다가 작가의 노고도 대단하다. 그렇게 디테일하게 누군가의 삶을 그린다는 것은 빈말로라도 쉬운 작업은 아니다. 기억을 떠올리는 게 어쩌면 더 쉬운 일일 수도 있다. 이번 작품의 조너선이 실제 작가의 분신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쓴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자기 스스로 생을 마감한 전 기상 캐스터 조너선이 편지 형식으로 자신의 일대기를 남겼다. 그걸 동생인 로버트가 읽어나가는 내용인데 제목에서 말하듯 우울했다. 우울한 사람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라는데 그 말을 단적으로 증명하니 말이다. 피임의 실패로 태어난 조너선이 아버지의 냉대, 폭력과 가정의 불화로 인해 상처를 받는다는 걸 더없이 잘 보여주기까지 한다.

 엄밀히 말해 조너선의 연대기는 디테일하고 감수성 풍부한 것을 견디지 못한다면 읽어나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결말은 정해진 이야기이고 어느 정도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등 강약 조절은 하고 있지만 작풍은 시종 구름이 껴있다. 치우친 발언일 수는 있지만 정말 '일본인 못지 않게' 감성적이라서 조금이라도 이야기에 몰입이 안 된다면 겉돌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하면 크게 재밌는 작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묘하게 와닿는 작품이었다. 우울함과 외로움을 단 한 번도 겪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고 가정하고서 말하건대 이 소설은 그런 마음을 잘 어루만진다. 일대기 형식을 통해 그 근원을 가족과 환경에서 찾은 것도 익숙하지만 진중한 접근이었다.

 누군가의 일생을 엿본다는 것은 가벼운 마음으로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내가 힘들게 썼듯이 누군가도 힘들게 썼을 것이다. 비록 이 작품의 경우에는 창작이었지만 어지간한 일대기 못지않은 깊이가 있었다. 스스로의 손으로 죽음을 맞이한 한 인물의 일생을 짧게나마 접하는 것은 역시 울림을 준다.


 감상에 사로잡히는 것은 경계해야 마땅하지만 가끔은 아닌 경우도 있다. 내가 내 일대기 작성을 일단 어느 정도 끝마쳤을 때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의 말마따나 한 사람의 인생 또한 우주에 가깝기에 그를 돌아보는 것에는 경이로움이 뒤따른다. 이 경험은 쉽지도 않고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해볼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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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속의 소녀들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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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7.5






 내 개인적으로 올 해 읽은 소설 중에, 그야말로 '발견'에 가까운 놀라운 작품이 몇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톰 롭 스미스의 데뷔작인 <차일드44>다. 단순히 작품 내적으로뿐만 아니라 외적인, 이를 테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라든가 소설 집필에 아주 유용한 팁을 얻는 등 많은 도움을 받은 작품이었다. 정말 좋은 작품이었고 그래서 그 작품을 미처 다 읽기도 전에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이 책이 있는 걸 보고 주저 않고 샀다. 난 본래 책을 사는 건 좀 신중히 하는 편인데 그때는 신중하고 자시고도 없었다.

 책을 신중히 사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일단 사고 싶다고 다 살 수 있을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도 아니고 - 내 부모님은 책을 소비하는 걸 전혀 아깝다고 여기시지 않지만 정작 나는... - 산 책을 놓을 자리도 부족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놓고 읽지 않아 읽어야 될 책들이 많아서 무분별한 소비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까다롭게 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난 모든 책에 반드시 사서 읽을 만한 가치가 없다는 강한 확신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책마다 완성도가 천차만별이니 나의 이 확신을 무를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더욱 확신이 강해지기만 할 뿐. 작가가 같은 경우에도 그러는데 뭘.


 이 작품은 <차일드44>에서 내가 겪은 그 모든 것이 결여된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쎄, 이 작품을 먼저 접했으면 혹시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가정은 무의미하다. 적어도 이 작품이 나에겐 재미없었다는 것만이 중요하다.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질문을 성인 버전으로 푼 잔혹 동화다. 사실 저 질문은 매우 유치하지만 이 작품에선 결코 그렇지 않다. 정신병원에 들어갈 만큼 엄마가 미쳐버렸다고 전화한 아빠, 이 모든 게 아빠의 모함이며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는 엄마의 전화. 주인공의 멘탈 붕괴를 시작으로 이 작품은 주인공의 엄마의 호소로 장기간에 걸쳐 이야기를 쏟아낸다. 엄마가 말하는, 이방인인 자신이 겪어야 했던 그 모든 역경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가 관건인 이 작품은 가족간의 신뢰와 붕괴를 시사하는 부분에선 인상적이긴 했다. 하지만 소설로선 몰입도가 좋았냐고 물으면 '글쎄, 그건 좀 좀 아니올시다' 였다.


 <차일드44>가 실제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한 소설이면 이 작품은 좀 더 자전적인, 그러니까 작가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그래서 더 절절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있는데 이번엔 너무 단순하게 접근했다. 치밀하게 구성 하에 썼다기 보단 실제 자신이 격은 일에 살만 적당히 추가한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스웨덴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래도 나름 독특한 맛이 있긴 하지만 과거 회상식의 이야기가 맞지 않으면 상대적으로 집중이 안 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나같은 사람이 그렇다. 이야기 구성상 어쩔 수 없긴 했지만 그래도 현재의 사건이 더욱 집중이 가는 나로선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만이 극중의 긴장감을 낳게 되는 단조로운 구성은 시시하기만 했다.

 그래서 작품에 대한 감상은 중반을 넘어서기 전부터 대부분 이끌어졌는데 아직도 페이지는 많이 남아서 읽느라 지칠 수밖에 없었다. 후반부와 결말에서 느낌있는 무언가가 시도됐지만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것이라서 특별히 기억에 남거나 하진 않았다.

 이거 아무래도 '차일드44' 연작의 후속작을 읽던가 해야겠다. 너무 기대를 했는지 이 작품은 지루하게 읽혀버렸네.

어쩌면 넌 한 번도 이 진실을 제대로 인시갛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건 위험한 거야. 사람의 정신을 사란하게 하고, 집착하고 설레게 만드는 대상이 된다는 거 말이다. 그것보다 더 위험한 건 없어. - 104~10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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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탄생 진구 시리즈 3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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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장중한 제목에 비해 3류 드라마 같은 소재를 들고 온 도진기의 신작.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유산 상속을 둘러싼 싸움을 읽고 있자니 이게 정말 도진기 작가님의 작품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좀 지루했고 중심이 되는 사건 없이 떡밥만 계속 던지니까 몰입감이 꽤 떨어지긴 했다.

 어둠의 변호사 고진말고도 도진기 작가님은 진구라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캐릭터를 선보였었다. 옛날에 진구가 활약하는 작품을 재밌게 읽어서 신작이 언제 나오나 궁금했는데 이렇게라도 읽으니 반가웠다. 그런데 생각보다 흡입력이 떨어져서 실망스러웠는데 중반부부터 도진기 작가님의 실력이 발휘됐다. 아, 참고로 진구만이 아니라 고진도 등장하는데 생각보다 활약은 적지만 그래도 비중은 남다르다.


 도진기 작가님은 놀랍게도 현직 판사시다. 판사 업무를 처리하는 것도 바쁠 텐데 추리소설을, 그것도 멋들어진 추리소설도 쓰신다는 것이다. 어쨌든 정말 대단하기 그지없는데 한편으론 판사면서도 은근히 법 이야기를 잘 다루지 않고 본격 추리소설만 쓰셔서 약간 아쉬운 감도 없지않아 있었다. 직업적 특성을 작품 속에 녹이면 대단한 작품이 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 나의 바람을 거의 완벽하게 이뤄준 게 바로 이번 작품이었다. 순전히 돈으로만 연결된 이 막장 가족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단죄하는 통쾌한 작품이었다. 솔직히 초중반부가 너무 통속적이고 묘사도 세련되지 못해서 슬슬 바닥이 드러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걱정도 들었는데 그건 정말 기우였다. 모든 부분에서 재밌을 순 없지만 어쨌든 후반부에서는 실망감을 잘 만회해준다. 분량만 어떻게 좀 줄였으면 좀 더 괜찮을 법도 했는데 말이야.


 뜬금없긴 했어도 <정신자살>에서 모두를 충격과 공포에 빠뜨린 이탁오 박사가 다시 등장한다. 법의 허점을 돌파한 말도 안 되는 범죄를 진구가 깨뜨리는데 이후에 진구, 이탁오, 그리고 고진 변호사가 어떤 식으로 조우할지 정말 기대된다.

돈만 있다면 굳이 행복해질 필요 있어? - 28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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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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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2





 치매에 걸린 연쇄살인마가 주인공이라. 그 설정만 들었을 때는 자못 독특했다. 김영하의 작품이고 게다가 설경구와 설현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됐다니 더욱 읽고 싶어졌다.

 김영하란 이름은 아직 내게 그렇게까지 익숙한 이름은 아니다. 군대에서 전역하기 직전에 그의 작품 <퀴즈쇼>와 전역한 직후에 데뷔작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어본 게 다다. 나이는 분명 우리 엄마랑 동갑인데 작품 내용은 적어도 한국 문단에는 파문이 일 만큼 신선하고 공감이 가능한 것들로 이뤄져서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읽은 김영하의 이 작품은 독특해 보이는 소재치곤 꽤 보편적인 이야기를 선보인다. 독특하면서도 재밌는 필력이 가세해 이 보편성을 잘 가려줬다. 짤막 짤막하게 이어지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는 개인적으로 <가위남>에 등장하는 가위남에 비견될 만큼 매력적이었다.


 분명 매력적이긴 해도 상술했듯 이 작품은 보편성이, 그러니까 어딘지 식상한 전개 또한 갖추고 있었다. 연쇄살인마가 자신의 딸이 또다른 살인마에게 살해당하는 걸 알츠하이머도 불사르고 막겠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솔직히 중반부 이후부터는 못내 지루해졌고 점점 시큰둥해지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충분히 예상할 수도 있었는데도 끝내 반전에 의해 충격을 받고야 말았다. 정말 충분히 예상할 법도 했는데 교묘히 오독을 유도해서(통상적인 의미의 서술 트릭은 아니다) 이끌어낸 결말이 정말로 절망적이었다. 우리에겐 수많은 종류의 절망이 있지만 이런 종류의 절망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게 아닐까 싶었다. 제 3자인 내가 느끼기에도 이 정돈데 당사자는 어떨까? 그 생각만 하면 잠시 동안이라도 정말 가슴이 무너지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체감할 수 있다.


 끝에 해설에서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온다. '이 책의 소중한 글'에 내가 가장 마지막에 옮긴 대목이 그것이다. 성숙한 '남성'으로 압축해서 풀어내는 건 좀 거슬렸지만 어쨌든 내용만으로 따졌을 땐 참으로 와 닿는 이야기다. 여기서 첨언을 하자면 이 무기력한 퇴물이 어떻게 주저하고 마는지를 실감나고 느낌 있게 포착한 작품이 바로 <살인자의 기억법>일 것이다. 영화가 이를 어떻게 표현해낼지 궁금하다. 설현이의 연기도 개인적으로 궁금하고. ...영화화 되는 거 맞는 거지?

살인은 시라기보다 산문에 가깝다. 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살인은 생각보다 번다하고 구질구질한 작업이다. - 8~9p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쓰는 마음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마음이 다르지 않다. - 38p




세상의 모든 전문가는 내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 말할 때까지만 전문가로 보인다. - 42p




인간을 틀 몇 개로 재단하면서 평생을 사는 바보들이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좀 위험하다. 자신들의 그 앙상한 틀에 들어가지 않는 나 같은 인간은 가늠조차 못 할 테니까. - 51p




어리숙한 남자들만이 혼자서 심각한 체하다가 미끼에 속아서 뭔가를 잔뜩 기대하며 부풀어놓고는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인생을 저주하다가 얼마 안 가 다시 미끼를 문다. 그런 자들은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사이에 무기력한 퇴물로 늙어간다. 성숙한 남성이 보기에, 인생은 어떤 심오한 계획도 감추고 있지 않고 어떤 믿음직한 약속도 해주지 않는다. 인생은 우리에게 그저 섬뜩하거나 짓궂은 농담을 던질 뿐이다. 인생은 농담을 던지고, 남자는 웃음으로 응수한다. 순수하게 유쾌하지만은 않은 그 웃음을 웃을 수 있는 자가 성숙한 남성이다. - 1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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