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입니까 반올림 24
김해원 외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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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최근에 <불량한 주스 가게>로 청소년 문학 엔솔로지를 맛보고서 흥미가 생겨 이것 저것 알아봤더니 꽤나 저변이 넓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그걸 떠나서 내가 옛날에 산 책 중에도 그에 속하는 작품들도 몇 있었는데 기왕 흥미가 생긴 김에 더 읽어보게 됐다. 출판사 바람의 아이들에서 펴낸 바람단편집의 6번째 출간작인 <가족입니까>. 예전에 인상 깊게 읽은 <열일곱살의 털>의 저자인 김해원 씨를 포함해 총 4명의 작가가 참여했는데 작가들의 개성까지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지만 릴레이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으니 이것 참 신선하다는 느낌은 물씬 들었다. 제목 그대로 가족에 관해 묻는 4개의 단편이었는데 주제를 드러낼 소재를 명확하게 잘 잡아서 읽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자라는 건 나무토막이 아니다!' 김해원

 

 <열일곱살의 털>을 쓴 김해원 씨의 작품으로 연기자를 꿈꾸는 여자애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배우가 되는 것을 꿈꾸는 엄마를 둔 여자애가 주인공이다. 이는 큰 차이가 있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인해 꿈을 꾸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래서 주인공은 자신의 처지가 불편하다. 극성인 엄마도 불편하지만 자신을 위해 희생한다는 그 의심의 여지 없는 진실한 마음 때문에 섣불리 내칠 수도 없다.

 가족애를 드러내는 핸드폰 광고에 지원하지만 오디션에서 떨어지고 만다. 아쉬워하는 엄마와 기쁜지 아쉬운지 모르겠는 자신의 갈팡질팡한 마음, 그리고 깨달음. 그렇게 일반적인 소재는 아니지만 분명히 이 세상에는 주인공과 같은 처지에다가 비슷한 엄마를 둔 나머지 극성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를 캐치해 가족에 휘둘리거나 혹은 가족에 휘둘리도록 무기력하게 가만히만 있던 소극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그를 떨쳐내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구조가 신선했다.



 '지금 하세요!' 임태희


 위의 작품에서 나온 핸드폰 광고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 그 과정이 드러난다. 광고를 기획한 주인공은 고객의 의견에 맞게 가족애가 담긴 광고를 만드는데 아빠, 엄마, 딸, 아들을 연기할 배우가 필요하게 된다. 문제는 유명 배우를 쓰기에는 돈이 많이 드니 일반인 중에서 연기자를 뽑아야 하는데 주인공이 엄마 역할로 캐스팅되고 만 것. 마흔 가까이 독신으로 산 주인공이 배우도 아닌데 당연히 엄마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광고는 찍어야만 한다.

 결국 촬영 당일을 맞았고 연기가 도저히 풀리지 않던 주인공은 조언에 따라 약간 데면데면한 자신의 엄마와 통화하며 연기의 실마리를 잡게 된다. 그와 동시에 일에 치이느라 자발적으로 가족으로부터 외톨이가 되어야 했던 자신의 삶과 가족이란 울타리의 온기를 느끼게 된다.

 '가족'이란 테마를 떠올렸을 때 당연히 청소년이 주인공인 줄 알았지만 이렇게 성인 주인공이 나오니 신기하다. 신체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성인이 됐지만 우리는 아직 누군가의 자식이고 새로 가족을 만들기 이전에 어느 가족에 소속돼 있음을 상기시켜주는 따뜻한 이야기였다. 단순하지만 제법 효과적으로 의미가 전달된 작품이라 생각한다.



 '관계자 외 출입급지!' 김혜연


 이런 부류의 갈등이 내가 학교 다닐 때도 많긴 했지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손톱만큼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비단 나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애들이 핸드폰에 껌뻑 죽는 것은 공감할 만하지만 그래도 한 달에 요금이 24만원 나오는 게 말이 되는가. 어쨌든 주인공은 지도 지가 잘못된 걸 알지만 적반하장격으로 자신을 꾸짖는 엄마에게 반항해 가출을 하는 되먹지 못한 녀석이다. 엄마도 말이 심했지만 그걸 감내하지 못하는 걸 보면 확실한 어린애란 생각이 든다.

 이런 어린애가 어떻게 성장하는지가 작품의 관건이었다. 가출한 녀석이 보금자리로 삼은 곳은 이모의 집으로 아직 독신이고 자신을 편하게 하는 구석이 있어 염치 불구하고 찾아갔다. 이모는 주인공을 흔쾌히 맞이하지만 조건이 있다고 한다. 자신이 기획한 핸드폰 광고에 아들 역할을 연기해달라고.

 이 작품은 부모 자식 간의 화해를 그리고 있다. 그 장면이 내가 바란 대로 시원시원한 맛이 없어 좀 실망이었지만 으레 화해란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는 것이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등의 소재가 하나도 이해는 안 가지만 실제로 이런 이유로 문제가 생기는 걸 주위에서 한두 번 본 게 아니니까 현실성은 충분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르고스의 외출' 임어진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가장 공감이 안 갔었다. 제목도 좀 뜬금없는 것 같고 주인공 나름의 가족관이나 갈등이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자신이 퇴근했을 때 비어있는 집에 불만을 갖는 아저씨들이 많다는 것은 익히 들어왔지만 이해가 안 가기는 매한가지다. 일종의 이기심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 아저씨가 핸드폰 광고의 아빠 역할을 맡는다는 그 연결고리하고는 접점이 그다지 많은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서 어색함이 많이 느껴졌고 별개의 이야기라고 상정하고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줄곧 깨금발을 딛고 높은 곳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구나. 그래서 앞으로 혹은 뒤로 넘어질까 봐 무척이나 겁을 냈구나. 난 혼자니까 모든 걸 잘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 모르는 게 있어서도 안 되었고 아파서도, 지쳐서도 안 되었어. 외로움은 나약한 것,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믿어 버렸지. 하지만 외로운 사람들이 자꾸만 눈에 밟히는 것은 왜일까. 엄마의 마음이 곧 내 마은인 것철머 느껴진는 것은 왜일까...... 어쩌면 나는 이제껏 엉뚱한 곳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던 게 아닐까? - 111~1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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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 - 추정경 장편소설
추정경 지음 / 놀(다산북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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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아무리 재기 발랄하게 문단에 데뷔해도 두 번째 작품에서 미끄러지는 신인은 정말 많다. 극히 일부의 소설가가 아닌 한 이 '이야기의 홍수' 속에서 안착하기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매우 냉정한 이야기지만서도 말이지.

 이 작가는 <내 이름은 망고>로 제4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했다. 캄보디아를 배경으로 한 그 성장 소설은 군대에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래서 두 번째 작품도 사뭇 기대하게 됐다. 그래서, 신작이라고 하기엔 벌써 3년 전에 출간됐지만 어쨌든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을 드디어 읽게 됐다. 이미 다수의 독자들에게 찬사를 받아서 나름대로 기대가 팽배해진 상태에서 말이다.


 그렇게 기대감이 드높아진 상태에서 읽은 이 작품은 못내 실망감을 안겨줬지만, 한편으론 작가가 던지는 출사표가 느껴졌고 무엇보다 모든 것을 만회하는 기막힌 반전이 등장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발상 자체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제목에 나오는 저 벙커를 무의식이 피하는 자신만의 공간쯤으로 묘사한 것이나 그 장소에서 이야기의 대부분을 전개시킨 것은 고루해서 내가 지금 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 의문을 줄 정도였지만 분량이 워낙 짧아서 그냥 한 번 참고 읽어봤다. 그런데 결말에서 아주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뒤집는데 그게 아주 신선해서 다시 보게 됐다.


 나 또한 이런 생각을 많이 해봤다. 내가 나 아닌 다른 누군가였으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을 말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현상황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을 때 그런 상상이 더욱 잘 가동됐던 것 같다. 이런 상상을 비단 나만 한 것은 아닐 텐데 이를 캐치해서 작품에서 줄곧 얘기했던 상처받은 아이들의 이야기에 접목시켜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안겨준 것은 제법 파격적이었다. 개인의 파괴가 다름 아닌 세상의 파괴라니. 바로 전에 읽은 <영원의 아이>가 장장 1500페이지에 걸쳐 디테일하게 푼 이야기를 아주 짧고 효과적으로 표현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결말도 뒷맛이 개운하면서도 희망적인 여운도 짙어져서 나쁜 기억은 죄다 사라지고 말았다.

 기본적으로 밝은 분위기의 데뷔작과는 확연하게 다른 작풍의 소설이었는데 자신의 글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할지에 관한 포부를 보다 확실히 선포한 작품인 것 같아서 흡족하며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다음 작품도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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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의 오월 이삭문고 1
윤정모 지음, 유승배 그림 / 산하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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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우리나라 역사 중에 슬픔의 의미가 절대로 퇴색되어서는 안 되는 사건이 몇 있을 것이다. 가장 최근의 비극으론 아무래도 세월호 사건이 꼽히겠고 일제 강점기의 치욕은 지금까지도 옆 나라가 사과를 하지 않는 통에 슬픔이 가실 길이 없다. 내가 이번에 읽은 작품은 5월을 '슬픔의 달'이라고 불리게 했던 광주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소설이다.

 어, 솔직히 말하면 80년대에 벌어진 이 사건은 그 십 년도 뒤에 태어난 우리 세대에서 있어서는 '약간 지난' 축에 드는 사건이다. 이것 말고도 삼풍 백화점이나 성수 대교 붕괴, IMF 등 엄청난 사건이 있었고 또 사건의 당사자가 이제는 일선(현장? 어떻게 표현해도 의미가 좀... 어쨌든) 물러나서 크게 와닿지 않았고 교과서에서만 접하는 사건 정도로 이해될 뿐이었다. 더군다나 광주는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사건의 비참함을 짐작하기가 약간 어색한 감도 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번에 나는 작품에게 꽤나 큰 빚을 진 기분이 든다. 주인공이 자신의 친누나를 추억하는 이 짧은 성장 소설은 분량이나 주인공의 한정된 시각 탓에 광주 민주화 운동을 효과적으로 들여다봤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이것만 해도 나의 무관심했던 주의를 환기시키기에 충분했다.

 초반에 주인공의 동급생 두 명이 치고 박고 싸운 걸 갖고 담임의 대처를 광주 민주화 운동의 비극성과 의의에 연동시켜 풀어낸 것은 대단한 솜씨가 아닐 수 없었다. 선뜻 그 의미를 전달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단순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쓰니 대번에 이해가 됐다. 또한 청소년 소설로서도 청소년의 입장에서 그들의 언어와 사고에 맞게, 한마디로 살아숨쉬는 것 같은 역동적인 캐릭터를 내세웠는데 청소년 소설이 흔히 범하고 마는 오글거림이나 현실과의 부조화는 느껴지지 않아서 참 좋았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위에서도 말했듯 짧은 분량과 주인공의 연령대다. 분량이 200쪽도 안 되는데 누나와의 추억을 어린 시절부터 되새기는 것은 정말 좋았지만 이 정도 필력이면 충분히 더 쓰고도 남았을 텐데 너무 금방, 느닷없이 끝나서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가뜩이나 이야기도 주인공이 너무 어려서 운동의 실질적인 여파가 그렇게 많이 체험하지 못했기에 더 내밀한 현장의 분위기를 느끼기엔 부족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말이다.

 기획 취지는 상당히 좋았고 이야기도 저자의 필력이 상당해서 이야기 속에 부족함 없이 빨려 들어갈 수 있었으나 복선 없이 금세 당도한 결말, 그리고 취지가 무색되리만큼 주인공의 운동과 딱히 상관없는 추억 회상에 공들인(그 자체로는 매우 좋았지만) 탓에 안타까움이 배가된다.


 그렇다 해도 너무 사건을 들여다보는 것에 국한하지만 않으면 충분히 서글픔과 아픔을 잘 전달한 이야기라는 것엔 틀림없다. 그래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좋은 인상을 받은 채, 오히려 작품 속에선 묘사가 부족했던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는 배운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 배운 사람들이 더 무서운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너희들처럼 배운 언어를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 15~16p




민주주의를 우선하는 그런 사람이 된다면, 그런 사회를 만든다면 이 민주 묘역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니다. 그렇다. 광주의 오월, 이 오월이 슬픔으로 남느냐, 아니면 명예의 훈장이 되느냐는 바로 여러분들에게 달렸다. 선생님은 믿고 있다. 10년, 20년 뒤 여러분이 성인이 되었을 즈음이면 이 묘역은 반드시 영광의 성지가 되라라는 것을..... - 42~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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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문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김주영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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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이 책은 '비행기 납치, 밀실 살인, 판타지의 수수께기 3종 세트!'라는 선전 문구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에 이끌려 읽은 사람들은 '이도저도 아닌 난잡함과 산으로 가는 막장'을 선사했다고 입을 모으던데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그 근거가 궁금해서 읽게 됐다. 무슨 청개구리 심보냐고 내 자신도 의아했지만 때론 이런 것도 도움이 되는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면 남이 가지 말라는 길도 한 번쯤 걸어볼 만한 것 같다.

 '스승님'을 구하기 위해 비행기를 납치하는 3명의 납치범. 나름 순조롭게 납치극이 진행되는 중에 벌어진 이해불가한 밀실살인. 그리고 납치범들의 진의. 기대 이상으로 즐길 요소가 많았고 내 개인적으로는 각각의 요소 자체만으로도 재미를 느꼈고 이들의 연결고리 또한 자연스러웠다고 느꼈다. 기대를 안 하고 읽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시모치 아사미의 작품 중에 제일 재밌었다.


 사실 이런 종류의 대형 납치극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많이 본 것이라 크게 기대되진 않았다. 이런 비행기 납치의 목적은 대체로 답도 없는 인질 교환(납치범의 경우엔 조직의 두목이나 교단의 교주 정도?)이나 거액의 돈, 아니면 묻지마 류의 쾌락 범죄가 대부분이라 이 책의 납치범들도 이 중 한 부류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처럼 그 진의가 쉬이 파악되지 않는 납치극은 처음이었다.

 결연하면서도 때론 경건한 분위기마저 풍기는 이 3명의 납치범의 저의에 대한 궁금증이 처음부터 끝까지 극을 이끌어 간다. 물론 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나는 괜찮았지만 참을 수 없을 만큼 질색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궁금증을 제시하고 끌고 가는 능력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추리소설의 원초적인 재미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런 전개를 펼쳤다고 생각한다.


 밀실살인도 마찬가지다. 납치극엔 어울리지도 않고 정말 밑도 끝도 없이 발생해서 도대체 작가가 무슨 생각으로 집어 넣었는지 궁금해 계속 읽어나가게끔 만든다. 독자인 우리들만큼이나 등장인물들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인데 이때 사건을 해결할 탐정역으로 선출되는 인물인 '자마미 군'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오키나와의 자마미 섬이 프린팅된 티셔츠를 입고 있어서 붙여진 별명의 이 남자는 의도치 않게 추리력을 선보였다가 반강제적으로 밀실 살인을 풀어야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닌 자마미 군은 그를 빌미로 납치 사건을 들쑤시려 드는데 이런 대담무쌍한 인물은 난생 처음 봤다.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 우스이 유카라는 탐정이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자마미 군이 훨씬 매력적이었다. 아마 더 이상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을 텐데 비교적 단순했던 밀실살인의 트릭보다도 이 캐릭터와 티격태격하는 납치범 마카베와의 케미가 난 더 기억에 남았다. 탐정을 비롯해 캐릭터의 매력이 어째서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도 이 밀실살인이 그렇게 필요한 장치였는지는 의문스럽긴 하다. 맥락상 꼭 필요했다기 보다는 오로지 재미를 위해 첨가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하지만 차마 사족이라고까지 매도하지 못하겠는 이유는 일단 추리 과정이 정말 재밌었고 밝혀지는 동기가 작품의 판타지한 세계관을 제대로 드러내는데 크게 일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동기는 정말 산으로 가버렸다는 의견이 다분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개성이라 생각한다. 믿고 안 믿고, 설득 당하고 말고는 차치하고서라도 어쨌든 그를 믿은 작자들이 그들 나름의 논리로 이런 일을 벌였다, 이런 것이라면 추리소설로 성립하기에 부족함이 없지 않나 싶은데 이 작품이 딱 그런 경우였다. 솔직히 작가가 창조한 판타지적 세계관이나 그에서 비롯된 동기들은 하나도 이해 안 가지만 어쨌든 그 안에서 나름의 논리성을 구축하고 있어서 지나친 반감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여러가지 걸리는 점은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장점도 크게 돋보여 도무지 나쁘게 읽히지 않았는데 그래도 이해가 안 갔던 부분이 한 가지 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최대 문제는 판타지한 요소가 아닌 '스승님'이란 존재를 너무 우상화한 것이라 생각한다. 판타지를 사용하느냐는 그렇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고 대신 '스승님'이란 존재를 믿고 이런 사건이 벌어진 것이 이 작품의 관건이었는데 이때 '스승님을 향한 믿음'에 대해 설명이 충분하지 못한 건 많이 아쉬웠다. '스승님을 만나 보면 안다'라는 문장이 자주 나오는데 정작 스승님을 만나도 잘 모르겠는 것이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이런 엄청난 사태를 저지른 납치범들을 크게 꾸짖지 않는 스승님은 흔히 말하는 캐릭터 붕괴가 아닌가 싶어 한숨이 나왔다.

 작가 나름대로는 설득력있게 스승님의 매력을 그리려고 노력은 한 것 같지만 크게 와닿지 않았다. 밀실살인의 동기나 납치의 동기, 마지막에 터지는 사건의 동기도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근거는 갖추고 있어서 '참 특이한 동기도 다 있구나' 하며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이 동기의 근원인 스승님의 존재가 너무 초월적이어서 실망을 감출 길이 없었다. 탐정 캐릭터를 그렇게 잘 만든 것에 반해 스승님은 기대에 못 미쳐서 아쉬움만 남는다.


 그래도 이것만 제외하면 정말 재밌게 즐길 수 있던 추리소설이었다. 이색적인데 그 안에서 추리 과정은 꽤나 본격적인 것 등 하나같이 흥미진진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작가에 대한 흥미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는데 다시금 관심이 간다.

요즘 세상에 야심 없이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처럼 골치 아픈 존재는 없을 거야. - 249p




타인의 악의를 견뎌낸다는 건 타인에게 악의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 - 29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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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어제일리어의 사체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8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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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와카타케 나나미의 작품은 오랜만에 읽어본다. 옛날에 작가의 단편집을 연달아 읽고 그랬는데 최근엔 국내에 출간되는 작품 수도 줄어들고, 그래서 그런지 나도 덩달아 자연스레 관심이 시들지 않았나 싶다. 

 지금까지 읽은 작가의 작품과는 확연하게 이질적인 작품이었다. 45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분량의 장편소설이고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에서 풍기던 냉소적인 작풍 대신에 아기자기한 맛이 배가됐다. 흡사 온다 리쿠의 작풍과도 유사한 이 작품은 그 분위기에 취할 수만 있다면 치명적으로 재밌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딘지 김샐 수 있는 작품이었다.


 가상의 도시 하자키라는 작가 멋대로 창조한 세계관에서 다채로운 매력의 캐릭터의 향연이 펼쳐지고 그 안에 넘실거리는 대놓고 본격적인 살인사건도 구미가 당기기에 충분했는데, 왜 이렇게 읽을면 읽을수록 흥미가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른바 잔재미는 출중했다. 타고난 불행아인 주인공 마코토를 비롯해 연애소설 전문 헌책방 어제일리어의 존재나 이젠 좀 케케묵게도 느껴지는 명문가의 유산 상속 싸움에 얽힌 이해 관계나 코믹한 상황들은 적잖이 키득키득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전부 다 들어냈을 때, 과연 크게 볼 만한 요소가 있었나 하면 약간 의문이 든다.

 아, 말이 너무 심했나? 어떻게 보면 이런 잔재미 또한 작품의 개성인데 몰이해한 발언일 수 있겠다. 각각의 잔재미들의 조화로운 배치는 감탄스러웠던 걸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리소설 특유의 사건으로서의 흡입력 부분에선 약간 달리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글쎄, 내가 너무 삐딱하게 작가의 생소한 모습을 의식적으로 부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너무 기대를 했는데 그에 부합하지 못해서 투정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 스스로 좀 아쉽기도 했다. 언젠가 말한 적 있지만 나는 모든 책을 재밌게 읽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투자한 시간 대비 만족감은 꼭 얻고 싶은데... 그 길은 험난하기 그지없다. 순전히 작품 때문이라고 말은 않겠다. 여담이지만 내가 문제인 경우가 허다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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