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정영목 옮김 / 검은숲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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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내가 너무를 기대를 한 것인지... 가급적이면 나도 책에 대해 이것저것 떠들고 싶긴 한데 이상하게도 이 작품을 읽고 나서도 큰 감흥이 일거나 하진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분량이 이렇게 길 필요가 있었는가 정도? 물론 그 특유의 추리 스타일 - 아리스가와 아리스와 노리즈키 린타로 등 일본의 신본격 추리소설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 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대단했다. 도저히 관심을 가질래야 가질 수 없는 사소한 구두에 초점을 둬서 추리의 실타래로 대치시키는 건 모든 추리소설가 지망생들의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요즘 괜찮다가 다시 불거지고 있는 난독증 탓인지 - 나만 그런 건가, 문체가 은근히 눈에 잘 안 들어온다. - 몰라도 크게 눈길을 끄는 부분이 적긴 했다. 엘러리 퀸의 연역적 추리 작품들이 그렇듯 논리에 치중하다 보니 의외의 범인, 결말과는 거리가 있어 그런가 싶지만... 설명이 되지 않으리 만큼 감흥이 일지 않았다. 엘러리 퀸이 아닌 드루리 레인이 등장하는, <X의 비극>을 읽어야겠다. <Y의 비극>과 비슷하다면 그건 그래도 괜찮을 듯한데.

죽은 자의 구두를 기다리는 자는 맨발로 다니게 될 위험이 있다. - 1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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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 아저씨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10
진 웹스터 지음, 김양미 옮김, 김지혁 그림 / 인디고(글담)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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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흔히 정체를 알 수 없는 후원자의 관용어 정도로 익숙한 키다리 아저씨는 본래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에서 따온 것이다. 고아인 주디가 정체불명의 후원자 존 스미스에게 문장력을 인정 받아 후원을 받으면서 대학 생활을 하게 되는 내용으로 서간형식하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번역 작업을 거치느라 빛 바랜 감도 있겠지만 촉촉하기 이를 데 없을 정도로 밝게 써내려진 편지의 문체는 실로 사랑스러움 그 자체였다.

 존 스미스라는 가명인 티가 팍팍 나는 이름 대신 임의로 키다리 아저씨라 부르며 시작되는 주디의 편지들은 서간형식 소설의 진수를 보여준다. 1인칭, 3인칭, 2인칭 소설과도 다른 매력을 엿볼 수 있다. 한 번 뱉으면 주워담을 수 없는 말처럼 편지도 한 번 보내면 회수할 수 없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지금의 카카오톡처럼 바로 바로 전달되는 시스템과 달리 편지는 내용의 길이와 깊이, 이외에도 서두, 본론, 결말까지 아우르는 등 이야기를 만드는 센스와 문장력이 있어야 비로소 풍성해진다. 생각 이상으로 정성을 들여 써야 하는 만큼 감성도 느낄 수 있고 그래서 그런지 요즘 시대에 와서도 편지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내 인생에서 편지를 가장 많이 써본 때는 군대에 있을 때다. 자대 시절엔 전화가 있어 쓰진 않았지만 신교대에 있을 적엔 편지지만 붙들었던 기억이 난다.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오직 편지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때 쓴 편지와 받은 편지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그때 느꼈던 감성이 다시 피어올랐다. 또 어렸을 때 어린이판으로 한 번 읽어본 작품인데 그때는 보이지 않던 부분도 볼 수 있어서 반갑기도 했다.

 사람마다 평가가 갈리겠지만 나는 주디의 대학 생활이야말로 - 대학보다는 고등학교에 가까운 듯하지만 100년도 더 전 얘기니 그렇겠구나 싶었다. - 이상적인 학창 생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졸부라는 단어가 흔히 비아냥거릴 때 쓰는 말이듯 사람이 갑자기 부유해지면 전보다 거만해질 법도 한데 그런 기색 없이 키다리 아저씨와의 약속을 지키는 지키는 주디가 기특했다. 공부도 하고 친구도 사귀느라 바쁠 텐데 답장도 않는 후원자와의 약속을 지키는 모습이 어여뻤다. 반대로 생각하면 주디에게 키다리 아저씨에게 보내는 편지란 약속을 넘어서 자신의 속마음을 여과없이 드러낼 수 있는 창구이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일기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는데 뭐가 됐든 간에 글을 쓰는 일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님을 생각하면 비록 소설이라 할지라도 대단한 일이다. 나도 키다리 아저씨처럼 주디의 편지를 받는 입장이었다면 정말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지지 않았을까.


 100년도 더 옛날에 발표된 작품은 지금 읽어도 감탄스러운 이상적인 여성상도 보였다. 당시엔 여성에겐 투표권도 없던 만큼 아무래도 여성의 역할이 무척 한정적이었을 텐데 소설 내용만 보면 그런 기색을 찾기 힘들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쓴 것인지, 있는 집안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가 배경이니 그 특성이 십분 반영된 탓인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분명 시대를 관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신데렐라 구조이기도 하나 열심히 공부한 주디가 장학금을 받거나 후에 글을 통해 돈을 벌어 키다리 아저씨에게 돈을 갚으려는 모습, 자신과 같은 처지의 고아를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어 자기가 나온 존 그리어 고아원을 인수하겠다는 구체적이고 목적의식을 갖고 있는 점이 출간 당시에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러한 작품들 덕에 후대가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겠다.

 한 여학생의 시시콜콜한 편지들로 치부될 수도 있으나 그 안에 담긴 감성, 사랑만큼이나 영롱하게 굴러간 주디의 성장이 그 무엇보다 주목이 됐다. 당돌하리만큼 거침없이 편지를 써내려간 것처럼 결혼 이후에도 잘 지내기를. 듣자하니 후속작이 있다는데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고 싶다. 주디가 결혼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아갈까 궁금하니 말이다.

"성서가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은혜로운 약속은 ‘가난한 자들이 항상 너희와 함께할지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동정심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유용한 가축이나 마찬가지라는 소리잖아요? 제가 어엿한 숙녀였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예배가 끝나자마자 주교님께 달려가 제 생각을 말씀드렸을 거예요. - 46p




하지만 존 그리어 고아원에서는 상상력의 싹이 조금만 보여도 당장 짓밟아 버려요. 오로지 의무감만을 강요하지요. 전 아이들이 그런 단어의 뜻은 몰라도 된다고 생각해요. 의무감이란 불쾌하고 혐오스런 단어예요. 아이들은 무슨 일이든 스스로가 좋아서 해야 한다고요. - 146p




그 둘은 갓난쟁이 때부터 많은 걸 누리고 살아서 행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요. 자신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세상이 빚지고 있다고 생각하죠. 어찌 됐든 세상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빚을 갚으려고 하는 것 같구요. 하지만 세상은 저한테는 빚진 게 아무것도 없고, 처음부터 그 사실을 분명히 밝혔죠. 전 외상으로 원하는 것을 빌릴 권리가 없어요. 언젠가는 세상이 제 요구를 거절할 날이 올 테니까요. - 213~2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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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마지막 잎새 - 내 인생을 위한 세계문학 006 내 인생을 위한 세계문학 6
오 헨리 지음, 이미정 옮김 / 심야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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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는 읽어봤지만 다른 작품은 읽어보질 못했다. 듣기로는 '미국의 모파상'이라고 불릴 정도라는데... 고전이고 자시고를 떠나 최고의 단편소설가 중 한 명으로 기억하는 모파상이 비교 대상으로 거론될 정도라니 사뭇 기대됐다. 또 일전에 감명 깊게 읽은 <3일간의 행복>에서도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자주 인용됐던 만큼 명성의 실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알다시피 나는 고전 문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누차 말했던 것 같지만 고전 문학하면 떠오르는 역사성과 시대적 배경이 거슬리기 때문이다. 간혹 이러한 요소에 의해 특정 부분에서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는 게 너무 귀찮은 것이다. 모든 고전 소설이 다 그렇진 않지만 대다수의 작품이 그런 경향이 있어 그렇게 찾아 읽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오 헨리의 단편들이 더욱 빛이 났다. 작품마다 기껏해야 20페이지 정도의 분량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안에 담긴 애수나 유머가 상당했다. 무려 100년도 더 된 작품들이라 문체가 예스럽긴 했지만 스토리 전개나 반전은 지금 살펴봐도 훌륭했다. 특히 몇몇 반전의 경우에는 예상 가능한 것도 있긴 했지만 이는 오히려 많은 후세의 작가들이 오 헨리에게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 외의 몇몇 반전은 여지없이 인상적이었는데 정말이지 소설의 끝맺음에 있어서 일가견이 있는 작가라며 감탄했다.

 감옥살이를 할 때부터 주목 받는 창작 생활을 했다는 작가답게 짧지만 임팩트 있는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오 헨리의 작품은 서민의 애환을 달랜다고 평가 받는데 그 '서민의 애환'이랄 것이 우리네 현실과도 딱히 차이가 없어 읽어나가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가난한 부부가 서로의 선물을 마련하는 이야기나 가난에 못 이겨 감옥에 들어가려고 발버둥치는 이야기 등 특별히 20세기 초 미국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서 정말 즐기면서 읽었고 상술했던 작가의 끝맺음에서 또 감탄했다. 어떻게 오 헨리의 작품을 이제야 읽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앞으로 자주 찾아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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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단편소설 35 - 중고생이 꼭 읽어야 할
김동인 외 지음, 성낙수 엮음 / 리베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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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6.0







 중고생이 꼭 읽어야 한다니... 적어도 10년은 늦게 읽은 것이구나. 책장 한 켠에 자리해 먼지만 쌓인 책들을 그만 방치하고 집어든 책이었는데 분량이 상당해서 깜짝 놀랐다.

 교과서에서 한 번쯤 읽었던 작품이나 듣기만 하고 읽어보지 못했던 작품들을 읽을 수 있었는데 언급하는 게 귀찮을 정도로 익히 알려진 작품들이라 낯익으면서도 또 낯설었다. 사실, 교과서에 실려있어서 수업 시간에 공부한 작품들이 대다수였는데 내가 그 작품들에 대한 일종의 반감 같은 게 있어서 그닥 즐겁게 읽진 못했다. 설령 정규 교육을 이미 다 수학한 지금일지라도 거부감이 들긴 매한가지였던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저 '중고생이 꼭 읽어야 할' 이란 수식어는 인정할 수 없다. '한국 근대사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읽으면 도움이 될' 이라고 고쳐 쓴다면 또 모를까.

 나는 두 가지 편견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고전은 반드시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과 또 하나는 교과서 수록 작품은 무미건조하다는 것이다. 미리 언급했듯 나는 이걸 편견이라 했지만 마냥 틀린 편견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고전 문학은 시대가 흘러도 읽힐 수 있는 시대 초월적이고도 보편적인 주제의식이나 혹은 역사적인 가치를 가진 문학이라 생각한다. 그런 고전 문학은 권장되어야 마땅하지만 필수가 되어선 안 된다. 당장 우리들의 얘기를 담아낸 현대 문학이 있잖은가. 비록 현대 문학이 고전 문학에 비해 작품성이 검증되지 않았고 고전 문학 특유의 역사성과 가치도 떨어지지만 그렇다곤 해도 고전보다 게을리 읽어선 안 된다. 기왕 읽는다면 현대 8, 고전 2의 비율이 적당하지 않을까. 고전 문학이 은근히 명성에 비해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까다로운 작품이 많은 것을 고려하면 필수란 수식어가 함부로 붙여져선 안 될 것 같다.


 또 나는 수학이나 영어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 국어 교육의 접근법도 참 많이 글러먹었다고 생각한다. 국어와 문학을 공부한다, 한마디로 정답을 찾아내야 하는 그 인식이야말로 문학을 죽이는 첫 번째 요인이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읽고난 뒤에 자연스레 배움을 얻게 되는 문학, 이 경우가 바람직하지 작품의 주제의식이니 당시의 사회상을 파악하는 것에 주력을 다하는 - 사실 요즘 국어 수업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지만 나 공부할 적엔 그랬다. - 주입식 작품 감상은 독서를 멀리하게 되는 지름길이나 다름없다.

 그런 맥락에서 봤을 때 국어 교과서의 작품들은 무미건조하지 않은가 싶다. 물론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와 검증된 작품성, 문학사적 가치 등 여러 기준에서 교육을 위해 엄선된 작품이란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문제는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교과서란 어쩜 이렇게 재미 없는 작품만 골라 수록했는지 늘 불만스러울 따름이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달라 평가가 다 다르겠지만 내가 봤을 땐 이것저것 재며 엄숙히 골라낸 작품들이다 보니 너무 딱딱하고 신선하지 못한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독서가 완전히 취미로 정착된 다음 찾아 읽어본 책들의 경우엔 교과서 문학엔 없던 다양함과 신선함이 있어 괜시리 배신감을 느꼈을 정도였다.


 여기 작품들은 크게 언급해야할 만큼 가치를 못 느꼈고 대신 이렇게 여러 편 읽다 보니 새삼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그 지난했던 국어 수업을 용케 버텼구나 싶어 기분이 얼떨떨했다. 오랜만에 읽는 작품도 있어 살짝 반가운 마음도 없지 않아 들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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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가족놀이 스토리콜렉터 6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로드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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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한때 미야베 미유키란 브랜드를 싫어했던 적이 있다. 그 감정을 지금도 일부분이나마 가지고 있는데 아무래도 워낙에 다작의 작가라서 모든 작품이 완성도 일정치 않은 탓이다. 국내에 출간되는 일본 추리소설들 중 히가시노 게이고와 더불어 양대산맥으로 불릴 만큼 정말 다수의 작품이 출간됐는데 그 많은 작품이 다 재밌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당장 히가시노 게이고만 하더라도 요즘 출간되는 작품들이 변변치 못하다는 얘기를 듣는 판국에 미야베 미유키라고 또 오죽할까. 그렇기에 이번에 재출간된 이 작품도 기대보단 우려가 됐다.

 2011년에 출간된 <R.P.G>가 새단장을 하고 서점가에 찾아왔다. 2011년에도, 지금에도 어딘가 시대착오적일 소재임엔 마찬가지지만 어쨌든 이 짧디막한 소설은 우리 곁에 다시 찾아왔다. 그래도 인터넷 익명 시스템 문제가 작금의 사회상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된 만큼 삐딱하게 바라볼 것도 없지만 작중 등장인물들이 인터넷이라는 '신문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상당히 예스러워 괜히 닭살이 돋을 정도다. 당시에 읽었더라면 또 몰라도.


 닭살이 돋느니 뭐니 했지만 인터넷 채팅에서 만난 사람끼리 가상의 가족을 구성하며 논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라도 소름이 돋을 법한 내용이기도 하다. 사건의 피해자가 생전에 빠져있던 인터넷 속의 가상가족놀이. 그림으로 그린 듯한 단란한 가정을 현실에서 못 찾은 유저들이 인터넷에서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가족놀이를 한다는 것은 적잖이 씁쓸한 일이지 않은가. 무척 과장된 이야기일 것 같지만 더한 일이 인터넷 속에서 판을 치는 세상을 떠올렸을 때 그래도 미야베 미유키가 자기 스타일대로 잘 풀어냈다는 생각이 든다.

 미야베 미유키 스타일... 아무리 극악무도한 범죄를 그려도 빛이 바래지지 않는 그녀만의 스타일이 있다. 이 스타일 때문에 한동안 그녀의 작품을 읽기를 꺼렸던 것인데... 어쩌면 일일 연속극 드라마와 같은, 마치 성선설에 입각한 듯 한없이 평화로운 인물상과 시선이 바로 그러하다. 추리소설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제법 디테일하고 밀도 있게 풀어내는 게 사건의 동기에 주목하는 사회파 추리소설에 더없이 어울려 인정받게 된 작가가 미야베 미유키가 아닐까 싶다.


 그녀는 이 가상가족놀이를 자신의 전매특허인 따뜻한 시선으로써 풀어낸다. 왜 이런 불가해한 놀이를 한 것일까. 당장 사건 해결에 크게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 놀이는 다중 반전으로 하여금 놀라움과 씁쓸함을 안기는데 여담이지만 긴 분량으로 압도했던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비교적 담백하고 짧게 해결을 봤다는 게 참 신선했다. 아무튼 현대인의 가족 해체라는 젠체하는 말로는 다 설명해낼 수 없을 작품 속 기현상은 우리들의 보편적 심리에 의해 정석적이면서도 진지하게 파헤쳐진다.

 나의 경우에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을 만큼 가족에게 불만이 적은 편이라 짐작해보는 정도지만 이 세상은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단란한 가족이 정말 그림에만 있을 것 같은 세상이라 작품의 소재가 일단 납득이 됐다. 처음엔 가족이란 관계를 굳이 놀이를 해가며 만들어야 할 특별한 관계인가 싶었는데 이건 터무니없이 얕은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나만 몰랐지 꽤 복이 많은 삶이구나 하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가족의 부재, 단적으로 부모의 부재에서 오는 온갖 비참함은 최근에 관람한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서 낱낱이 볼 수 있었는데 그런 맥락에서 바라보니 가족애에 대한 갈망이 더욱 이해가 됐다. 내가 그랬듯 자신의 기준만을 들어 타인의 가치관을 재단하는 것도 참 답이 없는 독선이라 생각하는데 그러한 행위를 바로잡아주는 면에서 작가가 제 역할을 다해준다.

 기본적으로 가상가족놀이를 했던 사람들의 심정을 변호하지만 동시에 이 놀이의 본질적인 문제점도 꼬집어 인상적이었다. 혹시 놀이인 만큼 참여한 사람들이 무책임하지 않을까 하는 어림짐작이 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 어림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시연하는 작품이 속시원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한때 미야베 미유키란 브랜드를 싫어했던 적이 있다. 착하디 착한 등장인물들이 한바탕 부둥켜 안고 눈물이라도 쏟지 않을까 싶은 감동적인 연출이나 사건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가 더할 수 없이 오그라들었던 탓이었다. 그 굴레에서 이 작품이 완전히 자유롭다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 사실 읽으면 읽을수록 땀이 흐를 만큼 오그라든다;; - 과연 이름값 꽤 되는 사회파 추리소설가답게 사회 의식이 빛을 발해 읽을 가치는 충분했다. 작중의 묘사들은 예스럽지만 소재나 주제의식은 시대를 관통하는 맛이 있으니 그건 그것대로 음미할 부분이 그득했다. 적어도 작가의 이름을 빼면 볼 것 없는 그런 범작은 아니라서 참 다행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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