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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9.2
치매에 걸린 연쇄살인마가 주인공이라. 그 설정만 들었을 때는 자못 독특했다. 김영하의 작품이고 게다가 설경구와 설현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됐다니 더욱 읽고 싶어졌다.
김영하란 이름은 아직 내게 그렇게까지 익숙한 이름은 아니다. 군대에서 전역하기 직전에 그의 작품 <퀴즈쇼>와 전역한 직후에 데뷔작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어본 게 다다. 나이는 분명 우리 엄마랑 동갑인데 작품 내용은 적어도 한국 문단에는 파문이 일 만큼 신선하고 공감이 가능한 것들로 이뤄져서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읽은 김영하의 이 작품은 독특해 보이는 소재치곤 꽤 보편적인 이야기를 선보인다. 독특하면서도 재밌는 필력이 가세해 이 보편성을 잘 가려줬다. 짤막 짤막하게 이어지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는 개인적으로 <가위남>에 등장하는 가위남에 비견될 만큼 매력적이었다.
분명 매력적이긴 해도 상술했듯 이 작품은 보편성이, 그러니까 어딘지 식상한 전개 또한 갖추고 있었다. 연쇄살인마가 자신의 딸이 또다른 살인마에게 살해당하는 걸 알츠하이머도 불사르고 막겠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솔직히 중반부 이후부터는 못내 지루해졌고 점점 시큰둥해지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충분히 예상할 수도 있었는데도 끝내 반전에 의해 충격을 받고야 말았다. 정말 충분히 예상할 법도 했는데 교묘히 오독을 유도해서(통상적인 의미의 서술 트릭은 아니다) 이끌어낸 결말이 정말로 절망적이었다. 우리에겐 수많은 종류의 절망이 있지만 이런 종류의 절망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게 아닐까 싶었다. 제 3자인 내가 느끼기에도 이 정돈데 당사자는 어떨까? 그 생각만 하면 잠시 동안이라도 정말 가슴이 무너지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체감할 수 있다.
끝에 해설에서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온다. '이 책의 소중한 글'에 내가 가장 마지막에 옮긴 대목이 그것이다. 성숙한 '남성'으로 압축해서 풀어내는 건 좀 거슬렸지만 어쨌든 내용만으로 따졌을 땐 참으로 와 닿는 이야기다. 여기서 첨언을 하자면 이 무기력한 퇴물이 어떻게 주저하고 마는지를 실감나고 느낌 있게 포착한 작품이 바로 <살인자의 기억법>일 것이다. 영화가 이를 어떻게 표현해낼지 궁금하다. 설현이의 연기도 개인적으로 궁금하고. ...영화화 되는 거 맞는 거지?
살인은 시라기보다 산문에 가깝다. 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살인은 생각보다 번다하고 구질구질한 작업이다. - 8~9p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쓰는 마음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마음이 다르지 않다. - 38p
세상의 모든 전문가는 내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 말할 때까지만 전문가로 보인다. - 42p
인간을 틀 몇 개로 재단하면서 평생을 사는 바보들이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좀 위험하다. 자신들의 그 앙상한 틀에 들어가지 않는 나 같은 인간은 가늠조차 못 할 테니까. - 51p
어리숙한 남자들만이 혼자서 심각한 체하다가 미끼에 속아서 뭔가를 잔뜩 기대하며 부풀어놓고는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인생을 저주하다가 얼마 안 가 다시 미끼를 문다. 그런 자들은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사이에 무기력한 퇴물로 늙어간다. 성숙한 남성이 보기에, 인생은 어떤 심오한 계획도 감추고 있지 않고 어떤 믿음직한 약속도 해주지 않는다. 인생은 우리에게 그저 섬뜩하거나 짓궂은 농담을 던질 뿐이다. 인생은 농담을 던지고, 남자는 웃음으로 응수한다. 순수하게 유쾌하지만은 않은 그 웃음을 웃을 수 있는 자가 성숙한 남성이다. - 1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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