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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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송강호, 강동원 주연의 <의형제>가 그랬고 김수현이 출연한 웹툰 원작의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도 마찬가지고 곧 개봉될 예정인 영화 <공조>도 간첩 얘기를 그리고 있다. 그러고 보면 간첩이란 소재는 잊을만 하면 꼭 다뤄지는 것 같은데 대체로 다루는 양상이나 주제가 크게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그건 이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김영하의 작품이라서 개인적으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읽는 내내 지루함과 싸웠다. 설정 자체만으로 봤을 때 평범해도 좀처럼 있을 법하지 않은 얘기라서 그래도 신선하게 읽힐 법 했는데 새삼 신선함과 지루함은 정반대의 개념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간첩은 화려한 액션을 동반한 임무 수행 장면을 보이기 일쑤지만 김영하의 <빛의 제국>에서의 간첩은 다르다. 아직 보진 않았지만 김명민 주연의 <간첩>이란 영화와 크게 비슷할 듯하다. 소시민에 가정을 두고 북쪽에서 존재조차 잊었는지 완전히 현지에 적응해버린, 아예 완연한 현지인이 된 간첩을 만나볼 수 있다. 어처구니 없지만 참 재밌는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두 개의 세계를 가졌다가 이윽고 바뀐 세계의 주민이 된 형용 불가한 스토리를 간직한 인물의 심정이 내 짧은 상상력으로는 감도 잡히질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기 전에 내 짧은 상상력을 보완해주리라고 기대했던 것 같다.

 소설은 대게 추상적인 이미지를 활자화한 상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굳이 간첩이라는 소재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네 삶의 군상을 그린 이 작품은 분명 나쁘지 않았다. 학생 운동을 했건 간첩을 했건 뭘 했건 지금은 소시민으로서, 사회의 톱니바퀴로서 사는 주인공의 인생을 그린 것이 퍽 나쁘지 않았다.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그 어떤 간첩 이야기보다도 특별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찌 됐든 간에 참 지루한 이야기임엔 변함이 없다.


 간첩으로 하여금 많은 이야기를 풀어낸 건 좋았는데 반대로 굳이 간첩을 들먹이면서까지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주인공만 이야기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아내나 딸까지 집어넣으니까 이야기는 풍성해졌지만 전체적으로 늘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늘어짐은 거의 배신에 가까울 수준이라서 솔직히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다.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 표지의 그림이 바로 <빛의 제국>이다. - 에서 본뜬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서로 반대되는 것이 공존한 환상적인 세계를 주인공의 내면과 잘 일치시키긴 했는데 그게 다일 뿐이다. 북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나서 24시간 동안 방황하는 간첩의 일상이 궁금해서 읽었는데 이야기 구조며 사유며 하는 것들이 살면서 이미 떠올렸거나 한번쯤 떠올려 볼 법한 것들이라서 그렇게 인상적이진 못했다. 결국 작가도 분명하게 내제되지 않았으면서 간첩을 그저 소재로써 사용했을 뿐인가 싶어 심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옮겨다 심은 사람‘이었으므로 적응이야말로 최우선의 과제였다. 변화를 거부하거나 방기할 자신감과 배짱이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은 이곳에서 태어나 살아온, 원주민들의 특권이었다. - 84~85p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는 없지만 오늘 어제와도 달랐고 어제 이전의 그 어떤 날과도 달랐다. - 4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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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각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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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일본 추리소설계에서는 신고전주의(=르네상스)를 의미하는 '신본격'이란 말이 있다. 서구권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자취를 감춘 본격 추리소설의 고전미를 지향하면서도 뭔가 새로운 것을 첨가시킨 작품의 성향을 일컫는 용어인데 80년대 후반에 여러 신인들이 이런 신본격 작품을 내면서 하나의 트렌트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신본격 운동의 선두에 섰던 작가가 바로 아야츠지 유키토인데 이 작품 <십각관의 살인>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올렸다고 평가받는다.

 제목을 워낙에 많이 들어서 읽지 않았음에도 익숙한 작품이었다. <이니시에이션 러브>에서도 언급되고 당대 추리소설가, 현재의 추리소설가들한테도 전설적인 작품으로 꼽히나 본데 그 진면목을 드디어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을 여행하는 중에 기차를 오랜 시간 탈 일이 있었는데 기차에는 뭐니뭐니 해도 본격 추리소설이란 생각에 가져가봤다.


 외딴 섬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클로즈드 서클 연쇄 살인을 다룬 대놓고 본격적인 추리소설이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많이 오마주했는데 팬심이랄지 풋풋함이랄지 이런 오만가지 것들이 중첩돼서 피식거리며 읽게 된다. 십각형으로 된 저택, 외부와 단절된 섬, 나카무라 세이지라는 기묘한 건축가의 이야기 등 분위기 하나만큼은 발군이었는데... 까놓고 말하면 작가의 미숙함이 선명하게 드러난 작품이었다.

 당시의 경향을 생각하면 확실히 대담하고 재기 넘치는 작풍이긴 했다. 등장인물들이 추리소설을 동경해 황금기의 추리소설가의 이름을 닉네임으로 삼질 않나 추리소설의 미학에 대한 의견이 오가질 않나 적당히 마니악하면서도 진지한 구석도 있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추리소설적 기교를 놓고 봤을 때 매력적인 분위기가 무색하게 사건의 전개나 캐릭터의 매력, 반전 등이 다소 긴장감이 부족하고 느닷없으며 복선은 미비해서 사뭇 놀라운 반전마저도 퇴색된 경향이 있다. 더구나 캐릭터를 너무 소모적으로 등장시키고 범인의 동기를 설명하는 부분도 세련되지 못해서 전체적으로 추리소설의 단점이 잘 부각되기까지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리즈의 진정한 주인공인 나카무라 세이지의 존재감이나 전형적이지 않은 탐정의 활약이 오히려 소설 본편보다 신선하고 - 이런 굴욕이 있을 수가. - 재밌었다. 평단과 팬들 사이에서도 저택물치곤 물리 트릭 외의 요소로 승부를 보는 이상한 시리즈라고 얘기하던데 나 또한 그들이 느낀 배신감에 동의한다. 이런 걸 보면 신본격의 특성이 한 번에 이해되기는 했다. 신본격이 뭔지를 물으면 이 작품을 권해도 괜찮을 듯하다. 나라면 이 작품 말고 다른, 이를테면 더 재밌는 작품을 권하겠지만.

 아야츠지 유키토나 '관' 시리즈를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처음에 읽은 <미로관의 살인>은 정말 괜찮았는데 다른 작품은 나랑 영 안 맞는 것 같다. 그래도 개성만큼은 확실한데 개인적으로 뭔가 되다 만 느낌이 들어서... 이 작가의 작품을 앞으로 또 읽을 날이 올라나?

나는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 이런저런 논리를 내세우는 탐정 따위는 꼴도 보기 싫어. - 1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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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피트 - Wheel of Fortune
이누이 구루미 지음, 서수지 옮김 / 북스피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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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지난 번에 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를 봤다. 타임슬립을 연애소설식으로 풀어낸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이번에 내가 읽은 <리피트>는 같은 소재인 타임슬립을 추리소설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이니시에이션 러브>로 강렬한 반전을 선사한 이누이 구루미의 또 하나의 국내 출간작이기도 하다. 국내에 딱 두 작품만 출간했는데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이대로 묻히기엔 너무 아쉬운데.

 사실 처음 이 작품의 소재를 들었을 땐 그렇게 흥미가 일진 않았다. 타임슬립이란 소재가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보긴 하지만 그런 만큼 다뤄지기도 많이도 다뤄져서 진부하기도 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미래를 예고하는 시간여행자가 주인공 앞에 나타나면서 대놓고 시간여행 설정을 드러내는데 그 이후가 평범하리만치 신선했다. 이렇게 현실적인 시간여행이 있을 수 있나? 오히려 지금까지 접한 시간여행자의 이야기들이 와닿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주인공은 과거에 크나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미치도록 후회하는 일도 없고 과거를 바꿔서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다. 주인공에게 시간여행을 제안한 '리피터'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특별한 사명감이 아닌 단지 심심해서 주인공과 여러 사람들을 시간여행에 초대했으니 정말 말 다했다. 어느 날, 어느 장소에 가면 10개월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데 현재까지 무려 9번을 돌아간 리피터는 자신과 함께 인생을 '리피트'하지 않겠느냐고 사람들에게 제안한다.

 그의 미래 예언은 전부 들어맞지만 아무래도 미심쩍어 신중하게 되지만 결국 제안대로 리피트를 하는 주인공네들은 어느 날을 기점으로 10개월 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영락없이 10개월 전의 자신으로 돌아간 그들은 다시 돌아온 인생의 기회를 살리고자 미리 알아둔 경마 기록으로 돈을 벌고 사소한 실수를 만회하거나 아니면 미리 알게 된 세상사에 어떤 식으로 개입할 방법은 없는지 고심하면서 10개월을 다시 살게 된다.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는 시간의 흘러가면 절대 되돌릴 수 없는 성질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후회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남기 마련이지만 그 횟수를 줄이기 위해서 열심히 산다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른다. 그런데 시간은 절대 되돌릴 수 없다는 전제가 뒤바뀌면 우리네 삶의 방식에 큰 변화가 찾아올 것이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의 경우에는 리피트라는 확실한 기회가 있으니 게임을 하는 감각으로 살게 된다. 더욱이 앞의 결과도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는 만큼 공략법도 터득했으니 결코 첫 번째와 같이 살 수는 없게 된다. 그리고 그 여파는 반드시 당사자 이외의 세계에도 영향을 끼치고 만다.

 개인적으로 시간여행이란 순전히 인간의 희망에 불과하며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일단 과거로 간다 해도 내가 같은 시간대에 두 명이 있는지, 아니면 정신만 과거의 몸으로 돌아가는지 애매한 상황에서 과거를 바꿔 미래도 바꾼다는 이야기, 하물며 과거와 미래의 평행 세계에 관한 이론 역시 재미는 있지만 허무맹랑하게 여겨질 뿐이다. 그래서 사실 시간여행 소재를 그렇게 반기지 않았는데 이 작품은 좀 남달랐다.


 일단 한없이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점을 들 수 있다. 일체의 감상적 요소를 배제하고 어떻게 효율적으로 다시 살지 고민하거나, 혹은 남과 다른 인생을 살게 된 김에 어떤 식으로 세상에 기여할지 고민하는 게 실로 공감됐던 것이다. 물론 과거의 첫사랑을 만나러 가거나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어떤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그건 너무 극적이다. 더군다나 이 작품처럼 어정쩡하게 10개월 전으로 돌아간다면 극적인 연출이 마냥 쉽진 않을 것이다.

 이 10개월 전으로 돌아간다는 제약이 리피터들로 하여금 제법 차분하고 게임하는 기분을 이끌어내는가 보다. 흡사 '인생 게임'을 몇 번이고 하는 것처럼 자신의 10개월 간의 삶을 철저히 지배할 수 있는 재미를 안겨준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작품을 보는 내내 주인공네들의 행동거지가 어딘지 부러운 한편 너무 계산적이라서 질리기도 했다. 그런 내 심정에 부응한 걸까. 몇 번이고 반복하는 인생에 자꾸 변수를 두는 리피터들에게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은 게임에 참여했음을 여지없이 시사하고 있다.


 SF 문학이나 과학계에서 익히 다뤄온 시간 여행의 위험성을 따끔하게 지적하는 작품이었다. 이걸 또 추리소설적인 미스터리함과 반전으로 풀어내 의외성을 과시하기도 했는데 과연 <이니시에이션 러브>의 작가답구나 싶었다. 그 작품에서의 놀라움이나 복선이 있던 것은 아닌데 리피터들의 비인간성을 부각시키는 반전인지라 적잖이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이후에는 막장에 가까운 전개가 펼쳐지면서 주제의식이 심화되니 그것 참 볼만했다.

 지금까지는 운명을 다소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이뤄야 하는 목표가 있어 시간여행이 미화된 반면, 이 작품에선 한낱 사사로운 고양감을 위해 운명에 손대는 이들을 단죄하고 있어 새삼 설정의 위험성을 진지하게 마주보게 된다. 비록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 혹시 미래에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난 믿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미래의 시간여행자가 몇 번이고 과거와 현재에 들락거릴 텐데... 어쩌면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 인생을 대하는 자세가 절로 달라지니 참 의미있지 않았나 싶다. 자신의 인생이 자신만의 것으로 여겨지지만 타인과 관계를 맺은 이상 타인의 존재도 부정할 수 없는 만큼 더욱 만만히 볼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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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S 원숭이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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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내가 아직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을 많이 못 읽어서 잘은 모르겠다. 그런데 누군가가 갈수록 이 작가가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얘길 하던데 조금씩 공감이 가려고 한다. 적어도 이 작품에 한해서는 수긍이 가기 때문이다. 거참, 당신도야?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을 접하면 분량에 상관없는 방대한 내용과 소재에 감탄한다. 이번만 해도 손오공과 서유기, 엑소시스트, 히키코모리 등 범상치 않은 소재들이 범상치 않은 연결 고리로 묶여 등장한다. 요는 바로 이 연결 고리에 있다. 이사카 코타로는 이에 관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솜씨와 센스를 지녔기에 이 많은 소재들을 도대체 어떻게 수습할지 한껏 기대가 됐다. 이번 연결 고리는 바로 인과관계였다.


 개개의 요소들을 보면 아주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손오공 이야기나 엑소시스트 이야기는 영 별로였지만 이가라시가 주축이 되는 이야기는 더없이 재밌었다. 이유의 이유의 이유를 집요하게 밝히는 괴인의 행동거지는 분명 읽는 맛이 있었던 것이다. 통상적인 이사카 코타로의 엉뚱함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유쾌하고 궁금한 맛이 있었다. 인과관계라는 것, 그 한없이 이어지는 연결 고리는 평상시 우리들도 자주 나누곤 하는 얘깃거리라서 이 작가가 어떻게 풀지 기대도 된 것이다. 그 부분은 나름 충족됐다. 이 작가의 집요함에서 비롯된 탁견은 그야말로 두말하면 잔소리니까.

 다만 이를 한 곳에 모아 정리하는 게 별로였다. 나름 작가답게 퍼즐식으로 처리하긴 했지만 쾌감이 덜했다. 어찌 되든 상관없을 정도로 이야기 구조와 근간이 단순한데 비해 너무 형이상학적인 수사로 채색이 돼서 이해와 몰입이 저해된 것이다. 의미 부여...라고 하면 섭섭하긴 하지만 너무 '소설 만들기'에 집착한 나머지 과해지지 않았나 싶다. 원래 이 작가 작품은 그런 맛에 읽는 것이지만 이번엔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작가의 작품 중에 읽은 것도 많고 읽고 싶은 것도 많고 그만큼 실망한 적도 많으니 대세엔 지장이 없지만 신작일수록 만족감이 덜할 것 같아 살짝 불안하다.

바람피운 남자가 그 여자가 나를 유혹했다, 그 여자는 악마다, 그런 말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수비가 약한 축구팀이 대량 실점을 해놓고 상대 팀의 공격이 대단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는 거나 마찬가지죠. - 1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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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9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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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작가 이름을 보고 읽은 것도 있지만 소재 때문에라도 꼭 읽고 싶었던 작품이다. AV(Adult Video), 한마디로 야동은 일본하면 떠오르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성姓문화가 없는 나라야 없지만 일본만큼 규모가 큰 나라도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일단 내 의견을 간단히 밝히자면 난 이 사업 일체에 찬성한다. 합의 하에 이뤄지기만 하면, 그리고 소비자 연령층이 온전히 성인이기만 한다면 하등 문제될 것이 없지 않을까. 여기에 남자로서 첨언을 하자면 야동은 범죄를 부추기기는 커녕 이따금 찾아오는 '성의 명령'을 - 나는 그렇게 부른다. - 잘 달래주며 억제하는 역할을 상당 부분 해내기에 긍정하는 편이다.

 물론 필요악...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야동 때문에 잘못된 성적 관념과 취향이 생길 수도 있고 내용을 따라한답시고 재앙이 벌어지는 것 또한 분명 없다고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출연자와 연출자의 자발적인 합의에서 만든 내용물이라면 불법으로 단속하기엔 애매한 부분이 있지 않나 싶다.


 이 작품은 기리노 나쓰오가 탄생시킨 무라노 미로가 활약하는 두 번째 작품으로 이번엔 행방이 묘연한 AV 배우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맡게 된다. 강간을 컨셉으로 잡은 한 AV가 실은 합의가 아닌 강제로 촬영됐을지 모른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인권 단체 소속의 의뢰인이 해당 작품의 배우를 찾아 이야길 듣고 싶다고 한다. 내키진 않지만 경제 사정이 시원치 않던 미로는 의뢰를 받아들인다.

 솔직히 말하면 기대에 미치지 못한 작품이다.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에서의 강렬함을 확인하기엔 무라노 미로는 너무 허술하고 연약했던 것이다. 남성이 아닌 여성 탐정이 주체가 된 이야기는 흐름 자체엔 신선한 부분이 있었지만 어딘가 전편에서보다 화력이 줄어든 느낌이다. 주인공인 미로는 군데군데 내가 봐도 경솔하게 행동하기도 하고 일부분에서는 얘 왜 이러지 싶을 만큼 이해가 안 되는 행동거지를 펼치고 이를 작가가 두루뭉술하게 넘기는 것도 있어서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더욱이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 자체도 지루한데 아무래도 두루뭉술한 서술과 이해가 가지 않는 이음새가 포진해 있어서 몰입이 안 된 것도 있다.


 게다가 AV 사업에 대한 통찰이 깊게 이뤄지지 못한 것도 불만스러웠다. 그래도 나름 우리 시대의 그늘이라고 볼 수 있고 아무리 합의로 이뤄졌다고 해도 용인될 수 없는 부분도 존재하는 사업이기도 한데 말이다. 위에서 합의 하에 촬영이 이뤄지면 찬성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합의가 아니라면 단호히 단죄해야 한다는 - 의심할 여지가 없는 강간이니 - 말이기도 한데 이런 의견을 도출시킨 출발점은 매우 좋았다. 지루한 중반부도 그래서 참을 수 있는 정도라며 넘길만 했다.

 하지만 결말로 나아갈수록 사회적 이슈가 아닌 개인의 문제가 치부해야 될 맥빠지는 것들이 나오자 이게 다 무슨 짓인가 싶어 읽는 내가 다 의욕을 상실했다. 포부는 좋았지만 제대로 풀어나가지 못한 안타까운 경우가 아닌가. 심지어 전개도 뜬금없어 초반에 드러난 주제의식이 묻히고 말았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닌지...


 작가의 작품 중에 구미가 당기는 것이 많은데, 가령 <그로테스크>라든가 <부드러운 볼> 같은 것들... 재고해야 할 것 같다. 이거 실망스러운걸.

나도 요즘에야 깨달았는데, 성인비디오란 한마디로 남의 불행을 보고 즐기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 리나란 애는 불쌍하지만 자업자득인 셈이지. 다른 것도 마찬가지야. 남자들은 그런 여배우들을 보고 고작 돈 몇 푼 때문에 이런 데 나오는 멍청한 계집애라고 비웃으며 보는 거지.

멍청한 녀석들이라 생각하면서 보지. 나도 그렇고. 젊은 아가씨랑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은 죽어도 안 보겠지. 웬만큼 외롭고 불행하니까 보는 거야. 아, 나보다 더 멍청한 녀석도 있구나, 하면서. 안 그러면 칙칙하게 그런 걸 어떻게 봐! - 27p




남자의 구애를 받고 도취하는 게 뭐 어때서. 그걸 비웃는 사람이 훨씬 멍청해. 남자도 마찬가지잖아. - 2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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