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이야기, 제22회 양성평등미디어상 우수상 수상작
이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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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은 명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성 차별의 흔적과 세간에 덜 알려진 여성 화가,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 화가들의 일종의 '시대적 한계'라고 볼 수 있을 여성을 향한 차별 행위를 집대성한 책이다. 강렬한 제목과 표지도 인상적이고 내용도 다양하면서 유명한 얘기들만 다루고 있지 않아서 상당히 유익하게 읽혔다. 여성 화가라고 하면 꼭 언급되는 젠틸레스키 말고도 여러 굵직한 화가들을 소개한 것, 특히 표지의 그림을 그린 중국 화가 판위량을 알게 된 게 좋았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거나 약간 거부감이 있더라도 미술에 관심이 있고 새로운 화가를 소개받는 것을 반기는 사람이라면 펼쳐보기 좋은 책일 것이다. 

 책에 소개된 여성 화가들이 대부분 모르는 화가였는데 젠틸레스키도 여러 미술책을 읽으며 많이 접해봤기에 아는 것이지 그조차 없었다면 책에 언급된 여성 화가 전부를 처음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개된 화가들의 그림을 보니 당대 남성 화가들과 비교해도 딱히 부족할 것도 없고 오히려 여성에 대한 교육이 열악함을 넘어 전무하다시피 했던 시절에 그 정도 수준의 그림을 그려냈으니 더 화제가 됐거나 사람들이 우러러봤을 법하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오히려 평단이건 대중이건 할 것 없이 재능을 시기하거나 외모로 특정 고위층 남성에게 예쁨을 받아서라거나, 그렇지 않으면 못생겼다면서 그림과 무관한 이야기를 동원해서라도 어떻게든 깎아내리는 등 고단한 대우에 대해 작가는 일목요연하게 열거하고 비판한다. 


 뿐만 아니라 유명 남성 화가들이 저지른 만행도 적잖이 비판했는데, 그 분야의 대표 주자라고 해도 좋을 피카소나 고갱은 물론이거니와 자코메티와 오노레 도미에 등 재능과 동시에 작품의 주제의식에서 엿볼 수 있던 인성과 무관하게 여성에 대해서만큼은 지금 기준으로 후진적이고 아쉬운 일면을 조명시켜준 것도 뜻깊었다. 개중에는 화가 개인에게 실망하게 되는 경우도 많아 마치 연예인의 사생활을 알면 알수록 TV를 못 보게 된다는 말처럼 내가 좋아했던 화가들의 그림이 달리 보이게 돼 참 기분이 씁쓸했다. 

 마녀사냥을 비롯해 여성을 저잣거리에서 팔거나 잔소리가 심한 아내한테 모욕적인 가면을 씌워 조리돌림을 하는 등의 기록이 담긴 그림들을 유명 화가나 작자 미상 관계 없이 소개한 것도 씁쓸하긴 매한가지였다. 그 그림의 내용보다도 오히려 당시 그런 그림이 그려지고도 문제시되기는커녕 어떤 의미에서 칭찬을 받는 것 같은 기이함에 더 혀를 차기도 했다. 내가 요새 페미니즘에 회의적이게 됐어도 진짜 원시나 다름없던 과거의 여성 차별 사례를 접하다보면 작금의 페미니즘에 깃든 공격성이나 극단성에 일말의 긍정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 모든 억지를 다 받아주자는 얘긴 아니지만, 만약 페미니즘이 괴물이라면 그 괴물은 혼자 갑자기 튀어나온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물든 것인지는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늘 그런 생각이 든다. 어떤 현상이든 밑도 끝도 없이 발생한 것은 없다고. 


 그밖에도 조지아 오키프처럼 여성이란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그냥 자기자신으로서 평가받길 원했던 화가들도 소개했는데 이 대목에서 SF 소설가 옥타비아 버틀러 자신이 흑인이란 이유로 자기가 쓰는 작품을 흑인이 쓴 작품이란 굴레에 넣지 말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지금 시대는 작가의 성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은 시대일까? 국적이나 인종이면 몰라도 예술가의 성별에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는 내가 알기론 거의 없는 것 같다. 성별의 차이에 따라 작품의 성향이 다를 수 있다고 하지만 예외의 경우를 많이 봐서 성별의 구분 같은 것이 뭐가 중요한가 싶다. 

 그리고 이 말은 이제 예술가만이 아닌 다른 직업군에도 해당돼야 한다는 게 바로 이 책을 쓴 저자가 말하고 싶던 바라고 본다. 일차적으로 여성 미술에 대해 얘기했지만, 지금 우리 시선에서 봤을 때 여성 화가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한 사례에 부조리함을 느끼는 것처럼 지금도 비슷한 일이 여기저기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을 것이라 얘기하면서 주제의식을 자연스럽게 확장하고 있다. 미술과 역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 못지않게 필력도 감탄스러워서 작가의 다른 책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이 책을 집필할 때 참고한 책들도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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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 - 양장본
마크 해던 지음, 유은영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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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우영우를 보다가 바로 연상된 <한밤 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은 내가 읽은 몇 안 되는 자폐 스팩트럼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제목 그대로 한밤 중에 죽은 이웃집 개를 누가 죽였는가 파헤치는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의 소설이며 실제로 작중에서도 주인공이 '수사'를 진행하는 틈틈이 지도 교사의 도움을 받아 이 소설을 쓰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중간에 수사가 중단되기도 하고 이 소설을 압수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사건의 진상은 알게 됐고 소설도 완성했는데, 당초 주인공이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결말이 나와 읽다가 어안이 벙벙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자기 한계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훌륭한 성장소설이자 예상치 못한 사건의 진상을 논리성이 극도로 발달한 자폐 스팩트럼 주인공이 논리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추리소설의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추리소설의 성격이 강할 뿐 대놓고 추리소설이라 부르기 주저되는 이유는 범인의 정체가 너무 뻔하고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는 것이 논리적이긴 하나 이와 같은 긴장감은 모두 주인공이 자폐 스팩트럼 때문에 생각과 행동 반경이 좁은 탓에 비장애인에게 너무나 쉬운 일도 극히 까다롭게 처리하는 기질에서 비롯된다 볼 수 있다. 한마디로 특수 설정이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변칙적인 추리소설이라 보는 것이 적합하기에 아무런 수식어 없이 추리소설이라고만 부르는 것은 조금 망설여진다. 정작 주인공은 자신이 겪은 일련의 사건을 다룬 소설을 추리소설로 부르긴 하지만 말이다. 


 전에 읽은 지 10년 가까이 지나고 다시 읽으니 새롭게 다가오는 지점이 있었다. 10년 사이에 장애인들과 같이 일을 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강해지는 경험을 한 탓에, 우영우를 볼 때도 그랬지만 장애에 대한 무비판적인 긍정이 그리 달갑지 않게 읽혔다. 1인칭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스스로의 논리적 재능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데 그 재능은 분명 그가 자폐인이란 이유로 부정당해선 안 될 만큼 뛰어난 재능이다. 허나 자신의 재능에 초점을 두거나 자신의 관심사를 나열하는 것에 비해 정작 가족을 비롯한 주변인에 대한 묘사는 자폐인답게 사무적으로 이뤄지는데, 이처럼 이기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장애의 특성은 제3자의 시선에도 곱게 보이지 않았다. 당장 동행하는 사람이 없으면 기차 하나 탑승하기 힘들어하고 온갖 자신만의 규칙에 갇혀 쉬운 길을 멀리 돌아가거나 자신의 요구를 위해 떼쓰는 모습을 보노라면 미안한 얘기지만 장애인이고 어린아이고 어쩌고 논하기 전에 그의 재능이 과연 주변 사람들이 인정하고 헌신할 정도인가 하는 반감마저 들었다. 

 반면 주인공이 자신의 세계에 빠져 수학과 과학에 관한 자신만의 '알쓸신잡'을 펼치는 구간은 흥미로운 내용들로 가득했다. 주인공 스스로 말했듯 은유엔 젬병이라 정작 이 

'알쓸신잡'이 소설 본편과 무슨 상관인지 한 번에 와 닿지 않는다는 것과 그래서 가독성을 떨어뜨린다는 점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읽는 맛 자체는 상당했다. 수학, 과학 도서를 자주 읽지 않아서 더 흥미로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과연 그 내용들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인공을 비롯해 여러 등장인물들, 주로 주인공의 가족들은 어찌 보면 주인공의 왜곡된 시선으로 인해 그들의 행동이 알다가도 모르게 비쳐졌는데, 특히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주인공의 덤덤한 반응 탓에 꽤 막장스런 인물들의 행보도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가 하는 아리송한 의문을 낳게 해 다 읽은 지금에 와선 참 신기한 기분도 든다. 작은 사건으로 시작해 예상치 못한 진실과 마주하고 세상의 부조리함을 깨닫고 돌파해나간다는 전형적인 성장소설의 구조 자체는 참 인상적이었는데 은근히 편파적인 주인공의 문장과 객관성을 파악하기 힘든 상황 묘사 때문에 다 읽고 나서 굉장히 오묘한 기분이 든 기억도 난다. 

 상당히 좋은 기억을 갖고 있던 작품이었는데 다시 읽으니 기대와는 다른 감상이 남아서 인상적인 시간이었다.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연극을 볼 때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연극은 자폐인 주인공의 내면 세계를 무대에 효과적이고 감각적으로 재현해 보는 맛이 있었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의 문체는 그때 그 감탄스런 연출에 미치지 못해 상대적으로 심심하고 답답하게 다가온 것 같다. 요새 가장 핫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흥행 요인으로 박은빈 배우의 매력적인 연기를 결코 빼놓을 수 없음을 생각해보면, 참 씁쓸한 얘기지만 장애인이 등장하는 창작물은 비장애인에게 어필될 만큼 매력적인 장애인이 등장하지 않는 한 외면당하거나 흥미가 떨어지기 십상이란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런 깨달음을 확인해볼 요량으로 이 작품을 다시 읽은 것은 아니었는데... 10년 전에 못 느낀 감상을 적다 보니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떤 의미에서건 나도 참 많이 변했구나 싶다.  

소수는 모든 규칙들을 지우고 났을 때 남는 수다. 나는 소수가 인생과 같다고 생각한다. 소수들은 매우 논리적이지만, 당신이 한평생 생각하더라도 소수가 만들어지는 규칙은 결코 알아낼 수 없다. - 28~29p



색에 대한 편견은 어리석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 사람들은 많은 결정들을 하게 되고, 만약 어떤 것도 결정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여러 일들 중에서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 택하느라 시간을 소모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것을 왜 싫어하고, 또 어떤 것을 왜 좋아하는지 이유가 있는 것이 좋다. - 155p



그리고 나는 책까지 썼다. 그 말은 내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뜻이다. - 3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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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 : 저승편 3
주호민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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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문득 다시 읽고 싶어져서 <신화 함께: 저승편>을 다시 읽어봤다. 왜 다시 읽고 싶어졌을까 책장을 펼치는 와중에도 알지 못했는데, 이 작품이 꽤 그럴싸한 형식의 법정물임을 알게 되고서 단번에 이해됐다. 최근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덕분에 그동안 추천받았거나 이전에 접했던 장애인 창작물, 법정물을 찾아 읽고 있는데 <신과 함께: 저승편>도 일종의 법정물로 내 머릿속에 아른거렸던 것 같다. 

 죽은 사람이 49일 동안 한국 신화 속 저승관을 바탕으로 생전에 지은 죄를 재판을 받는다는 획기적인 설정의 이 작품의 제목을 못 들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명의 영화 때문에라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참고로 나는 그 영화가 너무나 신파적이란 얘길 듣고 보지 않았다. 무엇보다 원작에서 제일 중요한 진기한 변호사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 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변호사는 어찌 보면 부조리로 가득한 저승의 법정에서 의뢰인한테 신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은 활약을 펼치니까 말이다. 


 이번에 다시 읽으니 본작의 저승에서 벌어지는 일곱 번의 재판이 참 부조리하단 생각이 들었다. 죽은 것도 서러운데 갑자기 피고인으로 부르질 않나, 악덕 회사 때문에 술병에 걸려 죽은 사람 보고 부모보다 먼저 죽었으니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고 하질 않나, 지갑을 주워 돈만 챙기고 파출소에 맡긴 걸 지적하며 똥통에 튀겨야 하는 자로 판결을 내리려고 하질 않나, 어째 재판이 뒤로 갈수록 연좌제처럼 죄인 여부를 가르는 기준이 느슨해지거나 이상해지는 등 의구심이 남는 설정이 많았다. 당장엔 재판을 받는다는 방식이 참신하고 이승에서 소심하고 착한 사람이 보상을 받는 일종의 권선징악적 전개가 마음에 들어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 쓸데없이 엄하고 전근대적인 가치관을 가진 재판부가 저승에 온 사람을 재판하니 억울하게 영원한 고통을 받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반면 억울하게 죽어 원귀가 된 유성연과 그를 잡으러 동분서주하는 저승차사의 이야기는 갈수록 흥미로웠다. 이 세계관의 방식대로 유성연을 죽인 악인을 처벌한 것도 나름대로 통쾌했고, 누가 <짬>의 작가 아니랄까봐 군대 이야기를 적절하게 잘 녹여낸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아마 예상하기로 영화화가 이뤄지면서 유성연의 서사에 적잖이 신파를 더했을 듯한데, 사연이 사연인 만큼 각색하는 입장에서 더 신파으로 만들자고 마음 먹어도 이상하지 않은 비극이란 생각이 들었다. 


 김자홍과 그의 변호인 진기한 변호사의 저승 재판, 원귀 유성연과 그를 쫓는 저승 차사의 이야기가 병렬되며 전개되는 이 작품은 전자의 파트는 뒤로 갈수록 느슨하고 후자의 파트는 극적으로 치닫는다. 재밌는 건 어느 정도 코믹하게 묘사된 저승은 세계관이 판타지적인 탓인지 현실적으로 어설프고 부조리하게 다가왔고 후자는 현세를 배경으로 했기에 마찬가지로 부조리하게 묘사됨에도 무게감 있게 읽혔다. 현세가 저승 파트의 문제를 보완하는 것 같은 이 모양새는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현세에서 어떤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고민해보게끔 해 제법 의미심장한 연출이지 않은가 싶었다. 저승 간 다음에 착하게 살 걸 하고 후회해도 늦다, 진정 착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세계관 설정의 미묘한 구멍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좋은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각인된 비결이 아니었을까. 

 이번에 읽으면서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을 소개하며 후기를 마치도록 하겠다. 내 기준에선 참 이상한 기준의 재판이었지만, 아무튼 연좌제를 바탕으로 생전에 좋은 사람과 가까이 했는지 살펴보는 재판에서 피고 김자홍은 나쁜 친구를 사귀기는커녕 오히려 그 성정 덕분에 남들에게 김자홍 본인이 '좋은 친구'로 기억에 남을 것이란 극찬을 듣는다. 세상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님을 날마다 느끼는 내게 있어 참 가슴을 울리는 장면과 대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내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해봤다. 난 남들에게 '좋은 친구'로 기억될 만한 사람인가? 이 말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하긴 참 쉽지 않을 것 같다. 비록 연좌제로 가중 처벌을 하려는 본작의 저승 재판의 논리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 장면은 정말 묵직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네 가족과 친구들이 죽어서 여기까지 오게 되는 날에는 그들 너로 인해 많은 가산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먼저 간 네 생각을 하겠지.

착하게 살아줘서 고맙다고... - 3권 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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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의 어릿광대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7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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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1장 '현혹하다'와 2장 '투시하다'는 딱 전형적인 이 시리즈다운 작품들이라 할 말이 그리 많지 않다. 이미 시리즈 1편부터 특수한 장치를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거나 기이한 현상을 낳는 일을 천재 물리학자가 경찰의 요청으로 해결한다는 시리즈의 전형적인 전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투시하다'에선 요새 독자에겐 고리타분하거나 요상하게 느껴질 작가의 특정 직업군에 대한 가치관 내지는 환상이 거슬리기까지 해 오랜만에 접한 시리즈임에도 흥미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다만 '들리다'부터 작가가 나름대로 독특한 시도를 하기 시작해 눈길이 갔다. 항상 유가와에게 도움을 청해 모양 빠졌던 구사나기가 막상 사고를 당해 입원해 출연을 하지 못하게 되니 시리즈의 근간이 흔들리는 느낌을 안겨줬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구사나기라는 이상적인 수사관 대신 편협하고 찌질한 사고방식의 소유자가 수사에서 주체적인 역할을 맡자 우츠미의 날카로운 감과 물리학자로서의 유가와의 전문적인 의견은 귀기울여지지 못한다. 구사나기를 대신한 그 인물은 아무리 내용이 그럴싸하더라도 본청의 햇병아리 여자 수사관과 수사권도 없는 일반인에 불과한 남자의 의견을 듣고 움직인다는 것이 자신의 가치관에 따르면 심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답답한 전개는 유가와의 지극히 학자다운 직설적인 말로 불완전하게나마 해결된다. 사실에 근거해 진리를 추구하는 학자는 편협한 사고로 수사를 진행시키지 못하는 형사의 면전에다 게으름뱅이라 일축한다. 담겨진 내용을 떠나서 형사의 세계에선 뺨을 맞을 수도 있을 만큼 직설적인 말이었지만 때론 이토록 상대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말은 문제를 일사천리로 해결해주기도 한다. 물론 대다수의 무능한 인물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기어코 난장판을 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빠르게 전개시킨다. 나중에 이 인물은 본인과 비슷한 성향의 범인의 면전에다가 본인이 유가와에게 당했던 것 이상으로 한 방 먹인다. 

 이름도 까먹을 정도의 조연 형사긴 하지만 아무튼 3장에선 그의 내면의 성장을 짧지만 임팩트 있게 그려냈다. 이후의 수록작도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특수한 장치보다 과학자의 시선이나 자세로 하여금 미묘한 인간의 문제를 일목요연하게 해결하거나 그러한 문제에 일종의 답답함이나 한계를 느끼는 작품들이 수록됐는데, 시리즈 최고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용의자 X의 헌신>이나 <성녀의 구제> 정도는 아니더라도 인상적인 스토리와 시도가 있어 제법 즐겁게 읽었다. 6장에서의 어떤 인물의 동기나 과거사는 이 작가의 미흡한 묘사력이 그대로 드러나 읽는 게 답답했지만 전체적으로 아이디어는 빛나는 단편집이었다. 이전과 같은 스타일이 답습됐다면 지루했을 텐데 그 기우가 어느 정도 빗나간 것이 다행이었다. 여담이지만 6장 '위장하다'와 비슷한 느낌의 작품으로 미쓰하라 유리의 <열여덟의 여름>의 마지막 수록작 '이노센트 데이즈'를 추천한다. 그 작품과 비교하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문장력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책의 수록작 중에 드라마화된 것이 많고 몇 년 전에 이미 시청했었는데, 개인적으로 7장은 드라마와 원작이 완전히 다른 결의 작품인 점이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원작의 반전이 더 좋았고 그게 배우라는 직업군에 속한 사람에게 그나마 더 개연성 있고 납득 가능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래서 더 소름돋기도 하고. 이 단편은 반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심리 묘사에 더 중점을 뒀으면 훨씬 흥미로운 작품으로 거듭나지 않았을까 싶다. 

 4장과 6장은 트릭보다 드라마가 강조된 수록작들인데 이 작가 특유의 드라마가 취향에 맞는다면 만족스럽게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이다. 5장은 유가와의 물리학자라는 위치가 주는 낚시가 흥미로웠는데 이 또한 이전까지의 특수한 장치라든가 과학적 아이디어가 아닌 인간의 심리의 맹점을 꼬집었기에 어떤 의미에서 이 책에서 가장 이질적인 수록작란 생각도 든다. 


 국내엔 아직 이 시리즈의 작품이 많이 출간되지 않았던데, 늦게라도 차근차근 번역 출간되고 있으니 후속작을 접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진 않는다. 아무렴 작가의 이름값이 어마어마하니 출판사 입장에선 얼마간 값을 치뤄서라도 꼭 출간하려고 할 테니... 개인적으로 이 다음엔 시리즈의 장편을 접하고 싶은데 과연 어떤 작품이 출간될까? 이 책에서의 크고 작은 다양한 시도를 접하니 후속작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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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성공시대 1 히틀러의 성공시대 1
김태권 글.그림 / 한겨레출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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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이 만화는 특이하게 히틀러가 독일 정치판을 장악하거나 몰락하는, 우리가 아는 전성기나 말년이 아닌 시절의 히틀러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막 이름을 알린 극우 정치인 히틀러가 어떻게 최고 통치자 '퓌러'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는지 그 '성공시대'의 비결을 엿보면서 오늘날에도 제2의 히틀러가 나올 수 있음을 경고하는 취지에서 이 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히틀러와 나치가 정점에 오를 수 있던 비결을 두고 작가는 만화 속에서 크게 두 가지 해석을 제시한다. 하나는 시대의 흐름을 잘 탄 행운아라는 것, 또 하나는 시대가 원하는 강경한 극우파 논리를 히틀러와 나치가 적극 주장했다는 것. 그런데 표를 모으기 위해 너무 많은 음모론을 접하다 보니 본인들이 그 음모론을 더 믿고 세상에 전파하며 유대인을 비롯해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학살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극우파의 표를 모으기 위해 극우파적인 발언을 했다'는 게 언뜻 앞뒤가 안 맞는 말처럼 들릴 수 있겠다. 이게 무슨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도 아니고... 하지만 히틀러는 선천적인 극우파였다기보단 일단은 타인과의 소통이 미숙하기 그지없는 '찌질이'이자 사회 구성원들끼리 소통하고 회의하는 민주주의에 반감이 들 뿐만 아니라 적응하지 못한 '찌질이'에 불과하다는 만화의 묘사를 보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 히틀러는 찌질이다. 여타 창작물에서 히틀러가 악마의 화신이며 그에 걸맞는 카리스마를 내뿜는 것에 비해 이 만화에선 처음부터 끝까지 찌질한 모습을 보인다. 나치의 2인자인 괴벨스도 마찬가지고 기타 나치의 부역자들이나 당대 우파에 속하는 여럿 등장인물 모두가 말이다. 

 진보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작가의 성향이 합쳐져 우파 등장인물 일색인 이 만화에선 모두가 찌질하고 우스꽝스럽게 묘사된다. 이러한 희화화는 작가의 환장의 아재 개그와 맞물려 극강의 유치함과 가독성 저해라는 역효과를 낳는데, 거기에 아울러 주제의식 전달도 미흡해져 여러모로 아쉬운 연출이 아닐 수 없었다. 히틀러가 찌질이라는 견해는 흥미로웠지만 그토록 찌질하고 비전도 답도 없는 사람이 나라의 정점에 오를 수 있던 비결에 운이 엄청 작용했다는 해석은 나치가 이끈 광기 어린 독일의 모습을 잘 납득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히틀러를 과소평가해 그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한 기득권의 오판과 히틀러가 생각보다 무능하지 않고 다가온 기회를 교묘히 악용할 잔머리가 있었음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대공황과 패전이 잇따르자 독일 국민들의 마음 속에 너그러움이 사라져 쉽게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필요했고 히틀러는 국민들의 등을 떠밀며 궤변과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만화 속에선 히틀러의 교활함조차 찌질이의 운으로 잔뜩 희화화하니 당초 작가의 기획 의도였던 '제2의 히틀러가 오늘날에 나올 수 있음을 경계하자'는 경각심이 생기기는커녕, 이런 찌질이가 폭주할 때까지 안일하게 대처한 당대 독일 사람들은 바보들인가 하는 조소 어린 의문이 피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의문을 낳게 하는 작품에도 의의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작가의 진지한 기획 의도를 떠올린다면 지나친 희화화는 때로 독이 된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이 만화를 읽으니 히틀러와 나치를 그린 다른 창작물이 보고 싶어졌다. 희화화도 좋지만 그런 거 없는 진지한 창작물이 무척이나 땡겼다. 작가한테 미안한 얘기지만 이 작품 때문에 희화화나 아재 개그에 두드러기가 날 지경이라 뭐가 됐든 진지한 창작물이 보고 싶어졌다. 



 p.s 만화 내용 중에 '어쩌면 민주주의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태극기 부대가 아닐까'라는 작가의 발언은 아주 공감했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의 어찌 손보기 힘든 단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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