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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의 어릿광대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7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1년 12월
평점 :
8.7
1장 '현혹하다'와 2장 '투시하다'는 딱 전형적인 이 시리즈다운 작품들이라 할 말이 그리 많지 않다. 이미 시리즈 1편부터 특수한 장치를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거나 기이한 현상을 낳는 일을 천재 물리학자가 경찰의 요청으로 해결한다는 시리즈의 전형적인 전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투시하다'에선 요새 독자에겐 고리타분하거나 요상하게 느껴질 작가의 특정 직업군에 대한 가치관 내지는 환상이 거슬리기까지 해 오랜만에 접한 시리즈임에도 흥미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다만 '들리다'부터 작가가 나름대로 독특한 시도를 하기 시작해 눈길이 갔다. 항상 유가와에게 도움을 청해 모양 빠졌던 구사나기가 막상 사고를 당해 입원해 출연을 하지 못하게 되니 시리즈의 근간이 흔들리는 느낌을 안겨줬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구사나기라는 이상적인 수사관 대신 편협하고 찌질한 사고방식의 소유자가 수사에서 주체적인 역할을 맡자 우츠미의 날카로운 감과 물리학자로서의 유가와의 전문적인 의견은 귀기울여지지 못한다. 구사나기를 대신한 그 인물은 아무리 내용이 그럴싸하더라도 본청의 햇병아리 여자 수사관과 수사권도 없는 일반인에 불과한 남자의 의견을 듣고 움직인다는 것이 자신의 가치관에 따르면 심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답답한 전개는 유가와의 지극히 학자다운 직설적인 말로 불완전하게나마 해결된다. 사실에 근거해 진리를 추구하는 학자는 편협한 사고로 수사를 진행시키지 못하는 형사의 면전에다 게으름뱅이라 일축한다. 담겨진 내용을 떠나서 형사의 세계에선 뺨을 맞을 수도 있을 만큼 직설적인 말이었지만 때론 이토록 상대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말은 문제를 일사천리로 해결해주기도 한다. 물론 대다수의 무능한 인물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기어코 난장판을 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빠르게 전개시킨다. 나중에 이 인물은 본인과 비슷한 성향의 범인의 면전에다가 본인이 유가와에게 당했던 것 이상으로 한 방 먹인다.
이름도 까먹을 정도의 조연 형사긴 하지만 아무튼 3장에선 그의 내면의 성장을 짧지만 임팩트 있게 그려냈다. 이후의 수록작도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특수한 장치보다 과학자의 시선이나 자세로 하여금 미묘한 인간의 문제를 일목요연하게 해결하거나 그러한 문제에 일종의 답답함이나 한계를 느끼는 작품들이 수록됐는데, 시리즈 최고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용의자 X의 헌신>이나 <성녀의 구제> 정도는 아니더라도 인상적인 스토리와 시도가 있어 제법 즐겁게 읽었다. 6장에서의 어떤 인물의 동기나 과거사는 이 작가의 미흡한 묘사력이 그대로 드러나 읽는 게 답답했지만 전체적으로 아이디어는 빛나는 단편집이었다. 이전과 같은 스타일이 답습됐다면 지루했을 텐데 그 기우가 어느 정도 빗나간 것이 다행이었다. 여담이지만 6장 '위장하다'와 비슷한 느낌의 작품으로 미쓰하라 유리의 <열여덟의 여름>의 마지막 수록작 '이노센트 데이즈'를 추천한다. 그 작품과 비교하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문장력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책의 수록작 중에 드라마화된 것이 많고 몇 년 전에 이미 시청했었는데, 개인적으로 7장은 드라마와 원작이 완전히 다른 결의 작품인 점이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원작의 반전이 더 좋았고 그게 배우라는 직업군에 속한 사람에게 그나마 더 개연성 있고 납득 가능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래서 더 소름돋기도 하고. 이 단편은 반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심리 묘사에 더 중점을 뒀으면 훨씬 흥미로운 작품으로 거듭나지 않았을까 싶다.
4장과 6장은 트릭보다 드라마가 강조된 수록작들인데 이 작가 특유의 드라마가 취향에 맞는다면 만족스럽게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이다. 5장은 유가와의 물리학자라는 위치가 주는 낚시가 흥미로웠는데 이 또한 이전까지의 특수한 장치라든가 과학적 아이디어가 아닌 인간의 심리의 맹점을 꼬집었기에 어떤 의미에서 이 책에서 가장 이질적인 수록작란 생각도 든다.
국내엔 아직 이 시리즈의 작품이 많이 출간되지 않았던데, 늦게라도 차근차근 번역 출간되고 있으니 후속작을 접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진 않는다. 아무렴 작가의 이름값이 어마어마하니 출판사 입장에선 얼마간 값을 치뤄서라도 꼭 출간하려고 할 테니... 개인적으로 이 다음엔 시리즈의 장편을 접하고 싶은데 과연 어떤 작품이 출간될까? 이 책에서의 크고 작은 다양한 시도를 접하니 후속작도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