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이야기, 제22회 양성평등미디어상 우수상 수상작
이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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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은 명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성 차별의 흔적과 세간에 덜 알려진 여성 화가,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 화가들의 일종의 '시대적 한계'라고 볼 수 있을 여성을 향한 차별 행위를 집대성한 책이다. 강렬한 제목과 표지도 인상적이고 내용도 다양하면서 유명한 얘기들만 다루고 있지 않아서 상당히 유익하게 읽혔다. 여성 화가라고 하면 꼭 언급되는 젠틸레스키 말고도 여러 굵직한 화가들을 소개한 것, 특히 표지의 그림을 그린 중국 화가 판위량을 알게 된 게 좋았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거나 약간 거부감이 있더라도 미술에 관심이 있고 새로운 화가를 소개받는 것을 반기는 사람이라면 펼쳐보기 좋은 책일 것이다. 

 책에 소개된 여성 화가들이 대부분 모르는 화가였는데 젠틸레스키도 여러 미술책을 읽으며 많이 접해봤기에 아는 것이지 그조차 없었다면 책에 언급된 여성 화가 전부를 처음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개된 화가들의 그림을 보니 당대 남성 화가들과 비교해도 딱히 부족할 것도 없고 오히려 여성에 대한 교육이 열악함을 넘어 전무하다시피 했던 시절에 그 정도 수준의 그림을 그려냈으니 더 화제가 됐거나 사람들이 우러러봤을 법하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오히려 평단이건 대중이건 할 것 없이 재능을 시기하거나 외모로 특정 고위층 남성에게 예쁨을 받아서라거나, 그렇지 않으면 못생겼다면서 그림과 무관한 이야기를 동원해서라도 어떻게든 깎아내리는 등 고단한 대우에 대해 작가는 일목요연하게 열거하고 비판한다. 


 뿐만 아니라 유명 남성 화가들이 저지른 만행도 적잖이 비판했는데, 그 분야의 대표 주자라고 해도 좋을 피카소나 고갱은 물론이거니와 자코메티와 오노레 도미에 등 재능과 동시에 작품의 주제의식에서 엿볼 수 있던 인성과 무관하게 여성에 대해서만큼은 지금 기준으로 후진적이고 아쉬운 일면을 조명시켜준 것도 뜻깊었다. 개중에는 화가 개인에게 실망하게 되는 경우도 많아 마치 연예인의 사생활을 알면 알수록 TV를 못 보게 된다는 말처럼 내가 좋아했던 화가들의 그림이 달리 보이게 돼 참 기분이 씁쓸했다. 

 마녀사냥을 비롯해 여성을 저잣거리에서 팔거나 잔소리가 심한 아내한테 모욕적인 가면을 씌워 조리돌림을 하는 등의 기록이 담긴 그림들을 유명 화가나 작자 미상 관계 없이 소개한 것도 씁쓸하긴 매한가지였다. 그 그림의 내용보다도 오히려 당시 그런 그림이 그려지고도 문제시되기는커녕 어떤 의미에서 칭찬을 받는 것 같은 기이함에 더 혀를 차기도 했다. 내가 요새 페미니즘에 회의적이게 됐어도 진짜 원시나 다름없던 과거의 여성 차별 사례를 접하다보면 작금의 페미니즘에 깃든 공격성이나 극단성에 일말의 긍정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 모든 억지를 다 받아주자는 얘긴 아니지만, 만약 페미니즘이 괴물이라면 그 괴물은 혼자 갑자기 튀어나온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물든 것인지는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늘 그런 생각이 든다. 어떤 현상이든 밑도 끝도 없이 발생한 것은 없다고. 


 그밖에도 조지아 오키프처럼 여성이란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그냥 자기자신으로서 평가받길 원했던 화가들도 소개했는데 이 대목에서 SF 소설가 옥타비아 버틀러 자신이 흑인이란 이유로 자기가 쓰는 작품을 흑인이 쓴 작품이란 굴레에 넣지 말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지금 시대는 작가의 성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은 시대일까? 국적이나 인종이면 몰라도 예술가의 성별에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는 내가 알기론 거의 없는 것 같다. 성별의 차이에 따라 작품의 성향이 다를 수 있다고 하지만 예외의 경우를 많이 봐서 성별의 구분 같은 것이 뭐가 중요한가 싶다. 

 그리고 이 말은 이제 예술가만이 아닌 다른 직업군에도 해당돼야 한다는 게 바로 이 책을 쓴 저자가 말하고 싶던 바라고 본다. 일차적으로 여성 미술에 대해 얘기했지만, 지금 우리 시선에서 봤을 때 여성 화가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한 사례에 부조리함을 느끼는 것처럼 지금도 비슷한 일이 여기저기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을 것이라 얘기하면서 주제의식을 자연스럽게 확장하고 있다. 미술과 역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 못지않게 필력도 감탄스러워서 작가의 다른 책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이 책을 집필할 때 참고한 책들도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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