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마지막 잎새 - 내 인생을 위한 세계문학 006 내 인생을 위한 세계문학 6
오 헨리 지음, 이미정 옮김 / 심야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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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는 읽어봤지만 다른 작품은 읽어보질 못했다. 듣기로는 '미국의 모파상'이라고 불릴 정도라는데... 고전이고 자시고를 떠나 최고의 단편소설가 중 한 명으로 기억하는 모파상이 비교 대상으로 거론될 정도라니 사뭇 기대됐다. 또 일전에 감명 깊게 읽은 <3일간의 행복>에서도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자주 인용됐던 만큼 명성의 실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알다시피 나는 고전 문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누차 말했던 것 같지만 고전 문학하면 떠오르는 역사성과 시대적 배경이 거슬리기 때문이다. 간혹 이러한 요소에 의해 특정 부분에서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는 게 너무 귀찮은 것이다. 모든 고전 소설이 다 그렇진 않지만 대다수의 작품이 그런 경향이 있어 그렇게 찾아 읽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오 헨리의 단편들이 더욱 빛이 났다. 작품마다 기껏해야 20페이지 정도의 분량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안에 담긴 애수나 유머가 상당했다. 무려 100년도 더 된 작품들이라 문체가 예스럽긴 했지만 스토리 전개나 반전은 지금 살펴봐도 훌륭했다. 특히 몇몇 반전의 경우에는 예상 가능한 것도 있긴 했지만 이는 오히려 많은 후세의 작가들이 오 헨리에게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 외의 몇몇 반전은 여지없이 인상적이었는데 정말이지 소설의 끝맺음에 있어서 일가견이 있는 작가라며 감탄했다.

 감옥살이를 할 때부터 주목 받는 창작 생활을 했다는 작가답게 짧지만 임팩트 있는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오 헨리의 작품은 서민의 애환을 달랜다고 평가 받는데 그 '서민의 애환'이랄 것이 우리네 현실과도 딱히 차이가 없어 읽어나가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가난한 부부가 서로의 선물을 마련하는 이야기나 가난에 못 이겨 감옥에 들어가려고 발버둥치는 이야기 등 특별히 20세기 초 미국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서 정말 즐기면서 읽었고 상술했던 작가의 끝맺음에서 또 감탄했다. 어떻게 오 헨리의 작품을 이제야 읽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앞으로 자주 찾아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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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단편소설 35 - 중고생이 꼭 읽어야 할
김동인 외 지음, 성낙수 엮음 / 리베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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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중고생이 꼭 읽어야 한다니... 적어도 10년은 늦게 읽은 것이구나. 책장 한 켠에 자리해 먼지만 쌓인 책들을 그만 방치하고 집어든 책이었는데 분량이 상당해서 깜짝 놀랐다.

 교과서에서 한 번쯤 읽었던 작품이나 듣기만 하고 읽어보지 못했던 작품들을 읽을 수 있었는데 언급하는 게 귀찮을 정도로 익히 알려진 작품들이라 낯익으면서도 또 낯설었다. 사실, 교과서에 실려있어서 수업 시간에 공부한 작품들이 대다수였는데 내가 그 작품들에 대한 일종의 반감 같은 게 있어서 그닥 즐겁게 읽진 못했다. 설령 정규 교육을 이미 다 수학한 지금일지라도 거부감이 들긴 매한가지였던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저 '중고생이 꼭 읽어야 할' 이란 수식어는 인정할 수 없다. '한국 근대사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읽으면 도움이 될' 이라고 고쳐 쓴다면 또 모를까.

 나는 두 가지 편견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고전은 반드시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과 또 하나는 교과서 수록 작품은 무미건조하다는 것이다. 미리 언급했듯 나는 이걸 편견이라 했지만 마냥 틀린 편견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고전 문학은 시대가 흘러도 읽힐 수 있는 시대 초월적이고도 보편적인 주제의식이나 혹은 역사적인 가치를 가진 문학이라 생각한다. 그런 고전 문학은 권장되어야 마땅하지만 필수가 되어선 안 된다. 당장 우리들의 얘기를 담아낸 현대 문학이 있잖은가. 비록 현대 문학이 고전 문학에 비해 작품성이 검증되지 않았고 고전 문학 특유의 역사성과 가치도 떨어지지만 그렇다곤 해도 고전보다 게을리 읽어선 안 된다. 기왕 읽는다면 현대 8, 고전 2의 비율이 적당하지 않을까. 고전 문학이 은근히 명성에 비해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까다로운 작품이 많은 것을 고려하면 필수란 수식어가 함부로 붙여져선 안 될 것 같다.


 또 나는 수학이나 영어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 국어 교육의 접근법도 참 많이 글러먹었다고 생각한다. 국어와 문학을 공부한다, 한마디로 정답을 찾아내야 하는 그 인식이야말로 문학을 죽이는 첫 번째 요인이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읽고난 뒤에 자연스레 배움을 얻게 되는 문학, 이 경우가 바람직하지 작품의 주제의식이니 당시의 사회상을 파악하는 것에 주력을 다하는 - 사실 요즘 국어 수업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지만 나 공부할 적엔 그랬다. - 주입식 작품 감상은 독서를 멀리하게 되는 지름길이나 다름없다.

 그런 맥락에서 봤을 때 국어 교과서의 작품들은 무미건조하지 않은가 싶다. 물론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와 검증된 작품성, 문학사적 가치 등 여러 기준에서 교육을 위해 엄선된 작품이란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문제는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교과서란 어쩜 이렇게 재미 없는 작품만 골라 수록했는지 늘 불만스러울 따름이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달라 평가가 다 다르겠지만 내가 봤을 땐 이것저것 재며 엄숙히 골라낸 작품들이다 보니 너무 딱딱하고 신선하지 못한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독서가 완전히 취미로 정착된 다음 찾아 읽어본 책들의 경우엔 교과서 문학엔 없던 다양함과 신선함이 있어 괜시리 배신감을 느꼈을 정도였다.


 여기 작품들은 크게 언급해야할 만큼 가치를 못 느꼈고 대신 이렇게 여러 편 읽다 보니 새삼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그 지난했던 국어 수업을 용케 버텼구나 싶어 기분이 얼떨떨했다. 오랜만에 읽는 작품도 있어 살짝 반가운 마음도 없지 않아 들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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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가족놀이 스토리콜렉터 6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로드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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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한때 미야베 미유키란 브랜드를 싫어했던 적이 있다. 그 감정을 지금도 일부분이나마 가지고 있는데 아무래도 워낙에 다작의 작가라서 모든 작품이 완성도 일정치 않은 탓이다. 국내에 출간되는 일본 추리소설들 중 히가시노 게이고와 더불어 양대산맥으로 불릴 만큼 정말 다수의 작품이 출간됐는데 그 많은 작품이 다 재밌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당장 히가시노 게이고만 하더라도 요즘 출간되는 작품들이 변변치 못하다는 얘기를 듣는 판국에 미야베 미유키라고 또 오죽할까. 그렇기에 이번에 재출간된 이 작품도 기대보단 우려가 됐다.

 2011년에 출간된 <R.P.G>가 새단장을 하고 서점가에 찾아왔다. 2011년에도, 지금에도 어딘가 시대착오적일 소재임엔 마찬가지지만 어쨌든 이 짧디막한 소설은 우리 곁에 다시 찾아왔다. 그래도 인터넷 익명 시스템 문제가 작금의 사회상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된 만큼 삐딱하게 바라볼 것도 없지만 작중 등장인물들이 인터넷이라는 '신문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상당히 예스러워 괜히 닭살이 돋을 정도다. 당시에 읽었더라면 또 몰라도.


 닭살이 돋느니 뭐니 했지만 인터넷 채팅에서 만난 사람끼리 가상의 가족을 구성하며 논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라도 소름이 돋을 법한 내용이기도 하다. 사건의 피해자가 생전에 빠져있던 인터넷 속의 가상가족놀이. 그림으로 그린 듯한 단란한 가정을 현실에서 못 찾은 유저들이 인터넷에서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가족놀이를 한다는 것은 적잖이 씁쓸한 일이지 않은가. 무척 과장된 이야기일 것 같지만 더한 일이 인터넷 속에서 판을 치는 세상을 떠올렸을 때 그래도 미야베 미유키가 자기 스타일대로 잘 풀어냈다는 생각이 든다.

 미야베 미유키 스타일... 아무리 극악무도한 범죄를 그려도 빛이 바래지지 않는 그녀만의 스타일이 있다. 이 스타일 때문에 한동안 그녀의 작품을 읽기를 꺼렸던 것인데... 어쩌면 일일 연속극 드라마와 같은, 마치 성선설에 입각한 듯 한없이 평화로운 인물상과 시선이 바로 그러하다. 추리소설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제법 디테일하고 밀도 있게 풀어내는 게 사건의 동기에 주목하는 사회파 추리소설에 더없이 어울려 인정받게 된 작가가 미야베 미유키가 아닐까 싶다.


 그녀는 이 가상가족놀이를 자신의 전매특허인 따뜻한 시선으로써 풀어낸다. 왜 이런 불가해한 놀이를 한 것일까. 당장 사건 해결에 크게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 놀이는 다중 반전으로 하여금 놀라움과 씁쓸함을 안기는데 여담이지만 긴 분량으로 압도했던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비교적 담백하고 짧게 해결을 봤다는 게 참 신선했다. 아무튼 현대인의 가족 해체라는 젠체하는 말로는 다 설명해낼 수 없을 작품 속 기현상은 우리들의 보편적 심리에 의해 정석적이면서도 진지하게 파헤쳐진다.

 나의 경우에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을 만큼 가족에게 불만이 적은 편이라 짐작해보는 정도지만 이 세상은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단란한 가족이 정말 그림에만 있을 것 같은 세상이라 작품의 소재가 일단 납득이 됐다. 처음엔 가족이란 관계를 굳이 놀이를 해가며 만들어야 할 특별한 관계인가 싶었는데 이건 터무니없이 얕은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나만 몰랐지 꽤 복이 많은 삶이구나 하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가족의 부재, 단적으로 부모의 부재에서 오는 온갖 비참함은 최근에 관람한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서 낱낱이 볼 수 있었는데 그런 맥락에서 바라보니 가족애에 대한 갈망이 더욱 이해가 됐다. 내가 그랬듯 자신의 기준만을 들어 타인의 가치관을 재단하는 것도 참 답이 없는 독선이라 생각하는데 그러한 행위를 바로잡아주는 면에서 작가가 제 역할을 다해준다.

 기본적으로 가상가족놀이를 했던 사람들의 심정을 변호하지만 동시에 이 놀이의 본질적인 문제점도 꼬집어 인상적이었다. 혹시 놀이인 만큼 참여한 사람들이 무책임하지 않을까 하는 어림짐작이 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 어림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시연하는 작품이 속시원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한때 미야베 미유키란 브랜드를 싫어했던 적이 있다. 착하디 착한 등장인물들이 한바탕 부둥켜 안고 눈물이라도 쏟지 않을까 싶은 감동적인 연출이나 사건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가 더할 수 없이 오그라들었던 탓이었다. 그 굴레에서 이 작품이 완전히 자유롭다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 사실 읽으면 읽을수록 땀이 흐를 만큼 오그라든다;; - 과연 이름값 꽤 되는 사회파 추리소설가답게 사회 의식이 빛을 발해 읽을 가치는 충분했다. 작중의 묘사들은 예스럽지만 소재나 주제의식은 시대를 관통하는 맛이 있으니 그건 그것대로 음미할 부분이 그득했다. 적어도 작가의 이름을 빼면 볼 것 없는 그런 범작은 아니라서 참 다행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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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타이어
이케이도 준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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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중고 서점이 활성화된 후로 정말 고마운 마음으로 자주 이용하고 있다. 책을 팔 수도 있고 읽고 싶던 책을 싸게 살 수 있는 중고 서점의 이점은 내 독서 생활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의 만만치 않은 가격이나 늘어가는 책의 보관 같은 성가신 제약들에서 자유로워진 것이 새삼스럽지만 늘 반갑다.

 이러한 반가운 시스템은 다름아닌 중고 서점에 책을 파는 고객들에 의해 성립된다. 나 역시 책을 많이 팔았는데 대체로 두 번 읽을 정도로 재미는 없는 책, 혹은 어떤 식으로든 참고할 가치가 없는 책들을 팔았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기준을 들어 책을 파는지 모르겠는데, 간혹 중고 서점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대어를 발견할 때도 있다. 도대체 이 책을 판 사람은 누굴까 하며.

 서두가 너무 뜬금 없었는데... 이 책 <하늘을 나는 타이어>는 중고 서점에서 무려 1/3의 가격을 주고 구한 책이다. 싼 가격치곤 상태도 너무 좋아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놀라울 지경이다. 심지어 내용도 나무랄 데가 없으니 정말 말 다했다.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의 원작 소설을 쓴 것으로 유명한 이케이도 준의 몇 안 되는 국내 출간작 <하늘을 나는 타이어>를 읽었다. 수상작이 없던 136회 나오키상 후보작 중 하나였고 드라마로 2차 창작되어 원작엔 없던 상복을 가진 듯 드라마 관련 상을 거의 휩쓸다시피 했다고 한다. 이 작품과 더불어 방금 언급한 <한자와 나오키>와 나오키상 수상작인 <변두리 로켓> 등 이케이도 준은 드라마화된 원작을 다수 보유한 작가인데 어느 하나라도 접하면 도대체 이런 작품을 드라마화하지 않으면 뭘 드라마화할까 싶다. <한자와 나오키>에서 느낀 쾌감과 전율이 어디 가지 않았구나.

 책을 짧게 짧게 읽는 내게 이례적으로 새벽 3시까지 손을 못 떼게 만드는 흡입력을 이끌어낸 작품이었다. 억울해 미치겠는 사연의 주인공이 맞이할 결말은 물론이거니와 그 빌어먹을 호프자동차의 최후를 목도하는 것을 도무지 뒤로 미룰 수 없었던 것이다. 해피엔딩이 아니면 가만둘까 보냐는 심정으로 전에 없이 분노에 불타며 책장을 넘겼던 새벽의 시간은 돌이켜보면 무척이나 즐거운 기억이었다. 여담이지만 난독증 증상이 왔을 때 읽으면 딱 좋은 소설일 듯하다. 어쩜 이렇게 가독성이 있는지 히가시노 게이고, 오쿠다 히데오 못지않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람 미치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누명이 아닐까 싶다. 특히 타인이 잘못했는데 그게 나한테 불똥이 튀거나 아예 내 소행으로 오인된다면 그것만큼 열받게 하는 것도 없다. 하지만 그런 억울한 사정을 해명하려고 해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들이 없어 더 화가 난다. 오히려 그렇게 목에 핏줄 세워가며 하소연할 시간에 참는 법을 배우라는 일갈이 날아올 정도니 사람 참 절망스럽게 만든다.

 남의 억울한 심정 따위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의 비웃음 섞인 충고는 많은 사람들에게 참고 넘기는 것만이 원만히 해결법인 줄로 여기게 만드는 체념을 심어준다. 물론 체념은 현명한 처신이자 꼴사납지 않으며 심지어 양심적인 자세로까지 받아들여져 사회생활, 나아가 세상살이를 위해 눈 딱 감고 취해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누명의 내용이 도를 넘은 것이라면 얘기는 달라져야만 한다.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심정으로 분명히 잘잘못을 가려야 하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졸지에 '타이어 살인자'가 된 주인공 아카마쓰가 바로 그렇다. 사장인 그가 운영하는 아카마쓰 운송의 트럭이 주행 중에 바퀴가 빠져버리는 사고가 발생한다. 하늘을 나는 타이어는 정말 운 나쁘게도 근처에서 아들의 손을 잡고 걷고 있던 여성의 등을 덮쳤다. 아들의 바로 옆에서 타이어에 맞아 숨진 여성의 사고 소식은 뉴스로 전파되고 이후 아카마쓰 운송의 운명은 나락의 길을 걷게 된다.

 뉴스도, 경찰도, 이웃들도 사고의 원인을 아카마쓰 운송의 정비 불량으로 단정 짓는다. 뿐만 아니라 아카마쓰 운송은 거래처와 거래 은행에서도 지원이 끊기게 된다. 하루하루가 절벽 위에 놓인 것 같은 중소기업에겐 그야말로 죽음을 선고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 죽음을 타인의 잘못 때문에 선고받은 것이라면? 어떻게 봐도 완벽하게 정비된 트럭임에도 불구하고 타이어가 빠진 것이라면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 것일까? 혹시 이 사건의 배경에는 트럭의 출처인 호프자동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을 잃을 처지에 놓인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대결은 한숨이 나오리만치 답도 없는 것이다. 그 이전에 자신의 죄를 인정 않고 발버둥을 치는 썩어빠진 중소기업의 행태로 비춰져 말그대로 아군도 없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상황 속에서 호프자동차의 부정과 맞서다니... 작중에서 기자가 말하길 유일하게 트럭 사고에 납득하지 못한 아카마쓰답게 그는 자신과 회사의 명예는 물론이고 날아간 타이어에 죽은 어머니를 추억하는 소년이 나오지 않게 실로 고군분투한다.

 실제로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소설은 세상에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리콜 은폐 사건의 내부를 낱낱이 드러낸다. 온실 속의 화초같은 대기업의 테두리 안에서 군림했던 전근대적이고 안일하고 몰상식한 몇몇 인물들의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다. 대기업의 정치로 인해 버젓이 무시된 양심이 어떤 식으로 파장을 불러일으키는지 화끈하게 경고해 속이 시원했다.


 올곧게 누명을 벗으려는 사람, 사내 정치에 휘말려 양심을 시험받는 사원, 사태를 조망하는 제3자, 일상이 무너져내린 주인공의 일상 등 아주 방대한 내용이 들어찬 소설이었다. 그러면서도 지루하지 않았고 오히려 드라마를 보는 듯 심리 묘사가 눈에 시원하게 그려져서 위에서 말했듯 누구라도 한 편의 드라마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다. 하나의 사건으로 말미암은 다양한 드라마를 부족함 없이 감상할 수 있어 좋았고 특히 인간의 양심과 올곧은 정의감, 신념을 절대 저버리지 말 것을 다짐하게 만들어 그 무엇보다도 뭉클했다. 정의라는 것이 이미 낯간지럽게 들리는 만큼 빛이 바랜 가치들이긴 하지만 그 가치를 등졌을 때 무슨 일이 초래하는지는... 굳이 확인해야할 것들이 절대 아니지 않은가.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면 안 돼. 당신 회사의 경우, 그건, 소비자야. - 196p




혐의를 부인해서 더 불쾌하게 만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납득할 수 없는 혐의를 인정하는 게 오히려 더 무책임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 225p




호프자동차는 대기업입니다. 잘 들으시죠. 그런 회사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리콜이 아닙니다, 부정이지. 알겠습니까? - 570p




그보다 사건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법이나 돈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 59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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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먼트
혼다 다카요시 지음, 이기웅 옮김 / 예담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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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3






 죽음은 수많은 창작물에서 다뤄져서 진부하긴 해도 진지하게 마주하면 한없이 두려운 미지의 개념이다. 이 세상 살아가는 그 누구도 '죽어본 적' 있는 사람은 없다. 죽음에 이를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사람은 많았지만 결국 죽지 않은 걸 보면 죽음은 상상 이상의 영역의 개념인 듯하다.

 나 역시 죽음이란 무척 추상적이고 솔직히 진지하게 사색해본 적도 없는 대상이다. 아직 어리기도 하거니와 나와는 거리가 먼 개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크나큰 오만이다. 당장 오늘 내가 조조 영화를 보러 가는 길에 버스를 타다 사고를 겪을 수 있지 않은가. 이처럼 죽음이란 느닷없이 마주칠 수 있는 - 이 작품에선 이런 종류의 죽음은 다루지 않지만 - 것치곤 너무 막연하게 여겨온 경향이 있는데 이 작품을 읽고 약간이나마 생각할 시간을 가졌던 게 어딘가 싶다.


 처음으로 접한 혼다 다카요시의 작품을 7년 만에 읽는다는 설렘은 예전만큼 감동을 느끼지 못해 빛이 바랬다. 하지만 당시, 소설을 읽는 재미를 늦게라도 깨달은 나에게 가네시로 가즈키와 이사카 코타로보다 먼저 스타일리쉬한 문체를 선보인 작가라서 상당히 반가웠다. 다시 읽으니 7년 전처럼 참신하진 않았지만 특유의 분위기에 다시금 취할 수 있었다.

 양심적인 차원의 '어떤 빚'을 청산하려는 주인공 간다는 - 주인공 이름이 '간다'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봐; - 평소에는 병원 청소부, 죽음을 거의 마주한 사람에겐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는 필살 청부업자로 병원 내에서 소문이 나 있다. 책은 간다에게 의뢰를 하는 환자들과의 에피소드로 구성됐으며 추리/미스터리 소설의 묘미가 짙은 반전과 어정쩡하지 않은 사색이 적당히 균형을 이룬 작품이다. 위에서 말했듯 감동이 예전에 읽은 것만 같지 않았지만 처음 읽는 사람에겐 기대 이상의 작품일 것이고 두 번 읽어도 몇몇 포인트에서 여전한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수작이다.


 이래저래 평이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게 이 작품의 매력이다. 모든 단편이 완성도가 고른데 특히 첫 번째, 두 번째 단편만 읽었을 때는 퍽 신선하기만 할 정도다.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을 떠올리면 꼭 착하고 밝은 이미지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런 이미지들을 철저히는 아니지만 비웃으며 꼬집는 게 신선했다. 또 명중률이 높진 않지만 간혹 튀어나오곤 하는 유머나 독특한 개성의 캐릭터나 그에 관련한 자잘한 에피소드 덕에 한쪽으로 치우칠 법한 분위기가 환기된 것도 적절했고 무엇보다 이 모든 요소들이 예상치 못하게 이어진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추리소설은 아니지만 전개상 유사한 부분이 있어서 은근히 뒤가 궁금하다.

 추리소설에서 죽음이 으레 도구로 소모되는 것에 질렸다면 이 작품의 낯간지러우리만큼 짙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죽음에 이르기 전에 어떻게든 하고 싶은 일이란 게 이토록 예측불허하고 또 사람마다 다 다르게 처신하는 걸 보면 어떤 때는 소름이 돋고 어떤 때는 경악스럽고 어떤 때는 울컥하고 어떤 때는 또 기가 막힌다. 도무지 어쩔 수도 없이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이루고 싶은 일이란 건 생각해 보면 무척 궁금한 일이기도 한데 그 안에 담긴 속내들이 작가적 상상이 결합됐음에도, 그리고 죽음을 한 번도 진지하게 마주본 적 없는 나임에도 어째 공감하게 된다.


 육체적 죽음과 더불어 극한의 고통으로 추정되는 마음의 죽음, 그를 잠깐이나마 상상할 수 있는 상상력과 공감 능력이 자연스레 요구되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누구도 넘보지 못한 소재이고 그건 작가도 마찬가지인 듯 꼭 기교를 부려가며 묘사한 감이 있지만 한편으론 가감없고 솔직한 속내란 것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만큼 전형적이지 않고 입체적이라서 자꾸 생각난다. 그 복수가, 분풀이가, 일탈이, 결심들이. 그리고 한없이 오지랖에 가까운 간다의 여정도.

 생각하기에 따라서 가볍고도 진중하게 다가오는 작품이었다. 느끼는 바가 많던지 작품 말미에서 한 걸음 나아간 간다가 그랬을 듯 나도 삶과 죽음이 마냥 무관하다고 여기지 못하게 됐다. 역자 후기에 인용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 '죽음은 생의 대극으로서가 아니고, 생의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이 삶의 결말이면서 중간 과정에서도 적잖은 존재감을 과시했던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그랬으니까. 죽음이 밀접하다 못해 목적의식의 일부로 자리하고 있는 건 비단 일부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테니까.

하지만 사람이 살아간다는 게 그런 거잖아요? 그 사람이 살아 있지 않았더라면, 저 역시 그 사람과 알게 될 일도 없었고 얘기할 일도 없었고 호의적인 감정을 가질 일도 없었겠죠. 살아 있기 때문에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자신에 대한 호의와 악의, 선의와 미움 같은 감정이 생기겠죠. 그렇기 때문에 제 호의에는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데 일정 부분 책임이 있습니다. 자기만의 사정으로 멋대로 죽고 싶다면 자신과 관련된 모든 사람의 동의를 구해야죠. - 313p




무엇에 의지하여 살아가는가, 라는 질문을 받으면 누구나 각자 나름의 대답을 준비하리라. 일, 또는 거기서 실현되는 충실감과 만족감, 가족, 그리고 그 안의 애정과 관계 그 자체. 하지만 무엇에 의지하여 죽어가는가, 라는 질문이 날아왔을 때 쉬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최소한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

비아냥거림이 아니라, 내가 종교를 신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생과 사를 모두 포함한 일련의 압도적인 픽션을, 설령 픽션이라 할지라도 신봉할 수 있다면, 그러한 삶은 풍요롭지 않겠는가. 허나 안타깝게도 나는 신앙을 갖고 있지 않다. 앞으로도 가질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그렇기에 나는, 죽음이란 존재를 살아가는 동안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내 안에 구축해야만 한다. - 329~3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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