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먼트
혼다 다카요시 지음, 이기웅 옮김 / 예담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9.3






 죽음은 수많은 창작물에서 다뤄져서 진부하긴 해도 진지하게 마주하면 한없이 두려운 미지의 개념이다. 이 세상 살아가는 그 누구도 '죽어본 적' 있는 사람은 없다. 죽음에 이를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사람은 많았지만 결국 죽지 않은 걸 보면 죽음은 상상 이상의 영역의 개념인 듯하다.

 나 역시 죽음이란 무척 추상적이고 솔직히 진지하게 사색해본 적도 없는 대상이다. 아직 어리기도 하거니와 나와는 거리가 먼 개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크나큰 오만이다. 당장 오늘 내가 조조 영화를 보러 가는 길에 버스를 타다 사고를 겪을 수 있지 않은가. 이처럼 죽음이란 느닷없이 마주칠 수 있는 - 이 작품에선 이런 종류의 죽음은 다루지 않지만 - 것치곤 너무 막연하게 여겨온 경향이 있는데 이 작품을 읽고 약간이나마 생각할 시간을 가졌던 게 어딘가 싶다.


 처음으로 접한 혼다 다카요시의 작품을 7년 만에 읽는다는 설렘은 예전만큼 감동을 느끼지 못해 빛이 바랬다. 하지만 당시, 소설을 읽는 재미를 늦게라도 깨달은 나에게 가네시로 가즈키와 이사카 코타로보다 먼저 스타일리쉬한 문체를 선보인 작가라서 상당히 반가웠다. 다시 읽으니 7년 전처럼 참신하진 않았지만 특유의 분위기에 다시금 취할 수 있었다.

 양심적인 차원의 '어떤 빚'을 청산하려는 주인공 간다는 - 주인공 이름이 '간다'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봐; - 평소에는 병원 청소부, 죽음을 거의 마주한 사람에겐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는 필살 청부업자로 병원 내에서 소문이 나 있다. 책은 간다에게 의뢰를 하는 환자들과의 에피소드로 구성됐으며 추리/미스터리 소설의 묘미가 짙은 반전과 어정쩡하지 않은 사색이 적당히 균형을 이룬 작품이다. 위에서 말했듯 감동이 예전에 읽은 것만 같지 않았지만 처음 읽는 사람에겐 기대 이상의 작품일 것이고 두 번 읽어도 몇몇 포인트에서 여전한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수작이다.


 이래저래 평이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게 이 작품의 매력이다. 모든 단편이 완성도가 고른데 특히 첫 번째, 두 번째 단편만 읽었을 때는 퍽 신선하기만 할 정도다.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을 떠올리면 꼭 착하고 밝은 이미지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런 이미지들을 철저히는 아니지만 비웃으며 꼬집는 게 신선했다. 또 명중률이 높진 않지만 간혹 튀어나오곤 하는 유머나 독특한 개성의 캐릭터나 그에 관련한 자잘한 에피소드 덕에 한쪽으로 치우칠 법한 분위기가 환기된 것도 적절했고 무엇보다 이 모든 요소들이 예상치 못하게 이어진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추리소설은 아니지만 전개상 유사한 부분이 있어서 은근히 뒤가 궁금하다.

 추리소설에서 죽음이 으레 도구로 소모되는 것에 질렸다면 이 작품의 낯간지러우리만큼 짙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죽음에 이르기 전에 어떻게든 하고 싶은 일이란 게 이토록 예측불허하고 또 사람마다 다 다르게 처신하는 걸 보면 어떤 때는 소름이 돋고 어떤 때는 경악스럽고 어떤 때는 울컥하고 어떤 때는 또 기가 막힌다. 도무지 어쩔 수도 없이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이루고 싶은 일이란 건 생각해 보면 무척 궁금한 일이기도 한데 그 안에 담긴 속내들이 작가적 상상이 결합됐음에도, 그리고 죽음을 한 번도 진지하게 마주본 적 없는 나임에도 어째 공감하게 된다.


 육체적 죽음과 더불어 극한의 고통으로 추정되는 마음의 죽음, 그를 잠깐이나마 상상할 수 있는 상상력과 공감 능력이 자연스레 요구되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누구도 넘보지 못한 소재이고 그건 작가도 마찬가지인 듯 꼭 기교를 부려가며 묘사한 감이 있지만 한편으론 가감없고 솔직한 속내란 것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만큼 전형적이지 않고 입체적이라서 자꾸 생각난다. 그 복수가, 분풀이가, 일탈이, 결심들이. 그리고 한없이 오지랖에 가까운 간다의 여정도.

 생각하기에 따라서 가볍고도 진중하게 다가오는 작품이었다. 느끼는 바가 많던지 작품 말미에서 한 걸음 나아간 간다가 그랬을 듯 나도 삶과 죽음이 마냥 무관하다고 여기지 못하게 됐다. 역자 후기에 인용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 '죽음은 생의 대극으로서가 아니고, 생의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이 삶의 결말이면서 중간 과정에서도 적잖은 존재감을 과시했던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그랬으니까. 죽음이 밀접하다 못해 목적의식의 일부로 자리하고 있는 건 비단 일부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테니까.

하지만 사람이 살아간다는 게 그런 거잖아요? 그 사람이 살아 있지 않았더라면, 저 역시 그 사람과 알게 될 일도 없었고 얘기할 일도 없었고 호의적인 감정을 가질 일도 없었겠죠. 살아 있기 때문에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자신에 대한 호의와 악의, 선의와 미움 같은 감정이 생기겠죠. 그렇기 때문에 제 호의에는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데 일정 부분 책임이 있습니다. 자기만의 사정으로 멋대로 죽고 싶다면 자신과 관련된 모든 사람의 동의를 구해야죠. - 313p




무엇에 의지하여 살아가는가, 라는 질문을 받으면 누구나 각자 나름의 대답을 준비하리라. 일, 또는 거기서 실현되는 충실감과 만족감, 가족, 그리고 그 안의 애정과 관계 그 자체. 하지만 무엇에 의지하여 죽어가는가, 라는 질문이 날아왔을 때 쉬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최소한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

비아냥거림이 아니라, 내가 종교를 신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생과 사를 모두 포함한 일련의 압도적인 픽션을, 설령 픽션이라 할지라도 신봉할 수 있다면, 그러한 삶은 풍요롭지 않겠는가. 허나 안타깝게도 나는 신앙을 갖고 있지 않다. 앞으로도 가질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그렇기에 나는, 죽음이란 존재를 살아가는 동안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내 안에 구축해야만 한다. - 329~3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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