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나는 타이어
이케이도 준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9.9







 중고 서점이 활성화된 후로 정말 고마운 마음으로 자주 이용하고 있다. 책을 팔 수도 있고 읽고 싶던 책을 싸게 살 수 있는 중고 서점의 이점은 내 독서 생활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의 만만치 않은 가격이나 늘어가는 책의 보관 같은 성가신 제약들에서 자유로워진 것이 새삼스럽지만 늘 반갑다.

 이러한 반가운 시스템은 다름아닌 중고 서점에 책을 파는 고객들에 의해 성립된다. 나 역시 책을 많이 팔았는데 대체로 두 번 읽을 정도로 재미는 없는 책, 혹은 어떤 식으로든 참고할 가치가 없는 책들을 팔았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기준을 들어 책을 파는지 모르겠는데, 간혹 중고 서점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대어를 발견할 때도 있다. 도대체 이 책을 판 사람은 누굴까 하며.

 서두가 너무 뜬금 없었는데... 이 책 <하늘을 나는 타이어>는 중고 서점에서 무려 1/3의 가격을 주고 구한 책이다. 싼 가격치곤 상태도 너무 좋아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놀라울 지경이다. 심지어 내용도 나무랄 데가 없으니 정말 말 다했다.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의 원작 소설을 쓴 것으로 유명한 이케이도 준의 몇 안 되는 국내 출간작 <하늘을 나는 타이어>를 읽었다. 수상작이 없던 136회 나오키상 후보작 중 하나였고 드라마로 2차 창작되어 원작엔 없던 상복을 가진 듯 드라마 관련 상을 거의 휩쓸다시피 했다고 한다. 이 작품과 더불어 방금 언급한 <한자와 나오키>와 나오키상 수상작인 <변두리 로켓> 등 이케이도 준은 드라마화된 원작을 다수 보유한 작가인데 어느 하나라도 접하면 도대체 이런 작품을 드라마화하지 않으면 뭘 드라마화할까 싶다. <한자와 나오키>에서 느낀 쾌감과 전율이 어디 가지 않았구나.

 책을 짧게 짧게 읽는 내게 이례적으로 새벽 3시까지 손을 못 떼게 만드는 흡입력을 이끌어낸 작품이었다. 억울해 미치겠는 사연의 주인공이 맞이할 결말은 물론이거니와 그 빌어먹을 호프자동차의 최후를 목도하는 것을 도무지 뒤로 미룰 수 없었던 것이다. 해피엔딩이 아니면 가만둘까 보냐는 심정으로 전에 없이 분노에 불타며 책장을 넘겼던 새벽의 시간은 돌이켜보면 무척이나 즐거운 기억이었다. 여담이지만 난독증 증상이 왔을 때 읽으면 딱 좋은 소설일 듯하다. 어쩜 이렇게 가독성이 있는지 히가시노 게이고, 오쿠다 히데오 못지않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람 미치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누명이 아닐까 싶다. 특히 타인이 잘못했는데 그게 나한테 불똥이 튀거나 아예 내 소행으로 오인된다면 그것만큼 열받게 하는 것도 없다. 하지만 그런 억울한 사정을 해명하려고 해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들이 없어 더 화가 난다. 오히려 그렇게 목에 핏줄 세워가며 하소연할 시간에 참는 법을 배우라는 일갈이 날아올 정도니 사람 참 절망스럽게 만든다.

 남의 억울한 심정 따위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의 비웃음 섞인 충고는 많은 사람들에게 참고 넘기는 것만이 원만히 해결법인 줄로 여기게 만드는 체념을 심어준다. 물론 체념은 현명한 처신이자 꼴사납지 않으며 심지어 양심적인 자세로까지 받아들여져 사회생활, 나아가 세상살이를 위해 눈 딱 감고 취해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누명의 내용이 도를 넘은 것이라면 얘기는 달라져야만 한다.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심정으로 분명히 잘잘못을 가려야 하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졸지에 '타이어 살인자'가 된 주인공 아카마쓰가 바로 그렇다. 사장인 그가 운영하는 아카마쓰 운송의 트럭이 주행 중에 바퀴가 빠져버리는 사고가 발생한다. 하늘을 나는 타이어는 정말 운 나쁘게도 근처에서 아들의 손을 잡고 걷고 있던 여성의 등을 덮쳤다. 아들의 바로 옆에서 타이어에 맞아 숨진 여성의 사고 소식은 뉴스로 전파되고 이후 아카마쓰 운송의 운명은 나락의 길을 걷게 된다.

 뉴스도, 경찰도, 이웃들도 사고의 원인을 아카마쓰 운송의 정비 불량으로 단정 짓는다. 뿐만 아니라 아카마쓰 운송은 거래처와 거래 은행에서도 지원이 끊기게 된다. 하루하루가 절벽 위에 놓인 것 같은 중소기업에겐 그야말로 죽음을 선고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 죽음을 타인의 잘못 때문에 선고받은 것이라면? 어떻게 봐도 완벽하게 정비된 트럭임에도 불구하고 타이어가 빠진 것이라면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 것일까? 혹시 이 사건의 배경에는 트럭의 출처인 호프자동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을 잃을 처지에 놓인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대결은 한숨이 나오리만치 답도 없는 것이다. 그 이전에 자신의 죄를 인정 않고 발버둥을 치는 썩어빠진 중소기업의 행태로 비춰져 말그대로 아군도 없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상황 속에서 호프자동차의 부정과 맞서다니... 작중에서 기자가 말하길 유일하게 트럭 사고에 납득하지 못한 아카마쓰답게 그는 자신과 회사의 명예는 물론이고 날아간 타이어에 죽은 어머니를 추억하는 소년이 나오지 않게 실로 고군분투한다.

 실제로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소설은 세상에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리콜 은폐 사건의 내부를 낱낱이 드러낸다. 온실 속의 화초같은 대기업의 테두리 안에서 군림했던 전근대적이고 안일하고 몰상식한 몇몇 인물들의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다. 대기업의 정치로 인해 버젓이 무시된 양심이 어떤 식으로 파장을 불러일으키는지 화끈하게 경고해 속이 시원했다.


 올곧게 누명을 벗으려는 사람, 사내 정치에 휘말려 양심을 시험받는 사원, 사태를 조망하는 제3자, 일상이 무너져내린 주인공의 일상 등 아주 방대한 내용이 들어찬 소설이었다. 그러면서도 지루하지 않았고 오히려 드라마를 보는 듯 심리 묘사가 눈에 시원하게 그려져서 위에서 말했듯 누구라도 한 편의 드라마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다. 하나의 사건으로 말미암은 다양한 드라마를 부족함 없이 감상할 수 있어 좋았고 특히 인간의 양심과 올곧은 정의감, 신념을 절대 저버리지 말 것을 다짐하게 만들어 그 무엇보다도 뭉클했다. 정의라는 것이 이미 낯간지럽게 들리는 만큼 빛이 바랜 가치들이긴 하지만 그 가치를 등졌을 때 무슨 일이 초래하는지는... 굳이 확인해야할 것들이 절대 아니지 않은가.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면 안 돼. 당신 회사의 경우, 그건, 소비자야. - 196p




혐의를 부인해서 더 불쾌하게 만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납득할 수 없는 혐의를 인정하는 게 오히려 더 무책임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 225p




호프자동차는 대기업입니다. 잘 들으시죠. 그런 회사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리콜이 아닙니다, 부정이지. 알겠습니까? - 570p




그보다 사건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법이나 돈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 59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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