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53회 나오키상 수상작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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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독방이란 갇힌 젊은이를 괴롭히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바람조차 허락 없이는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8월 중순에 예정된 대만 여행을 기다리면서 대만과 관련된 책을 찾아 읽다가 이 작품도 접하게 됐다. 위 문장은 주인공이 영창을 묘사한 문장 중 하나인데, 아주 효율적이면서 간결하게 상황의 참담함을 전달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런 식의 폭발적이며 생생한 문장이 <류>에선 처음부터 질주하듯 구사된다. 그런 문장이 전개되는 모든 상황과 주인공의 심정을 어루만져 정말 오래간만에 소설 읽는 맛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었다.


 대만계 일본인 작가 히가시야마 아키라의 나오키상 수상작인 <류>는 작가의 유년 시절의 대만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낸 작품이다. 대만은 우리나라 사람에게 가깝고 익숙한 나라지만 실상 그 나라의 역사까지 아는 사람은 무척 적은 편이다. 나 역시 그랬고 그렇기에 대만은 어떤 나라고 중국과 어떤 관계인지 알고자 여러 책을 읽고 있는데, 역시 역사 서적이나 인문 서적도 좋지만 소설만큼 전달력이 강한 매체도 또 없는 것 같다.

 대륙에서 공산당에 맞서 싸웠던 주인공의 할아버지는 자신의 지난날을 이렇게 회상한다. 이념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고 밥을 주거나 의형제들이 있는 곳에서 손에 피를 묻혀 가며 싸웠을 뿐이다. 그는 스스로 어떤 최후를 맞이할지 어렴풋이 예상했었을까? 결말까지 읽은 독자들은 이 질문에 비슷한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은 원래부터 대만에 살았던 '본성인'과 공산당에 패해 대만이란 낯선 섬으로 쫓겨나 살아가는'외성인'이 - 주인공의 가족들이 외성인에 해당 - 아직 제대로 섞이지 못했던 과도기를 배경으로 두고 있다. 마오쩌둥이나 박정일 같은 위상을 가진 장제스가 죽은 다음날 할아버지가 죽고, 하필 할아버지의 시체를 주인공이 발견해버리면서 일종의 트라우마, 그리고 미스터리를 안고 일생 동안 방황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주인공이 입시에 실패하거나 폭주족과 패싸움을 벌이고 입대해서 개같이 고생하는 등의 모든 이야기가 촘촘하고 치밀하게 얽혀있지 않지만 문장의 위력과 70년대의 대만이란 시공간이 주는 절대적으로 독특한 분위기가 한몫해 대체로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그리고 후반부에선 드디어 주인공이 할아버지를 죽였다고 추측되는 범인을 찾아 본격적으로 떠나는 여정이 시작되는데, 이 부분의 연출은 정말 압도적이었다. 더 이상 이 소설의 장르를 규정하거나 몇몇 이야기가 가독성이 떨어졌거나 하는 건 부수적인 문제에 불과하고 진범과의 클라이막스에 다다른 순간 나도 모르게 숨소리를 죽이게 됐다. 한 문장도 놓치고 싶지 않고 이 여운을 오래도록 만끽하고 싶던 결말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다음달에 대만에 가지 않았더라면 이 작품은 한참 나중에 읽게 됐을 텐데, 지금 이 순간에 내게 필요한 이야길 읽은 기분이라 절묘하기까지 했다. 어떤 글을 써야 하고 내 글에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늘 고민하지만 지금 이 작품처럼 날 뒤흔든 작품은 흔치 않은 것 같다. 나는 치밀한 전개를 우선했고 문장은 소홀히 하는 감이 있었는데 그런 내 가치관에 완벽히 대척점에 있는 작품을 읽었더니 사고가 확장되는 느낌을 받았다.

 훗날 내가 어떤 글을 쓰고 그 글이 어떤 결실을 맺을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작품 <류>를 읽은 순간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듯하다. 아마 올해 읽은 최고의 책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운이 좋다면 더 멋진 작품을 접할 수도 있겠지만 당분간은 <류>의 여운에 젖어있고 싶다.


단순한 불량과 시적인 불량에 차이가 있다면, 단순한 불량은 눈앞에 있는 적만 보지만, 시적인 불량은 자기 내면에도 적이 있다는 점이다. - 71p


우리는 서로에게 눈길을 피하지 않고 공격과 타협 그리고 도망칠 길을 암시하는 모든 조짐을 필사적으로 찾았다. 놀랍게도 싸움을 걸어온 레이웨이조차 도망칠 길을 찾고 있는 듯했다. 사람을 죽일 때만 성욕이 치솟는 짐승이 아니라면 누구나 이런 상황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어쩔 수 없이 자기는 아닌 척한다. 세상은 그렇게 우리를 길들였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 76p


우리 마음은 늘 과거 어딘가에 붙잡혀 있지. 억지로 그걸 떼어내려 해봤자 좋을 게 없단다. - 27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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