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추락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11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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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흔히 중국인은 무슬림과 더불어 가장 현지화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런데 한편으론 중국인은 그 수가 어마어마해 가장 일반화해선 안 된다고 보는 시선도 있다. 사회주의의 강력한 통제로도 20억에 근접한 중국인 모두가 한마음 한뜻일 리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차피 중국인들은 거기서 거기, 그놈이 그놈이라 단언하는 사람도 적잖다. 아니 대부분이다.

 <멋진 추락>을 집필한 작가 하진은 본래 미국에 유학 목적으로 입국했다가 자국의 천안먼 사태에 절망하고 그대로 타향살이를 하게 됐다고 한다. 작가의 다른 저서 <자유로운 삶>에선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겼다면 이 소설집에선 작가가 직간접적으로 접했을 다종다양한 중국인 이민자들의 애환이 그려져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에서의 애환은 미국이 이민자들한테 행하는 부조리가 아닌 같은 중국인들끼리 벌어지는 경우뿐이란 것이다. 중국 본토에 있는 가족이, 때론 같은 고향 사람이, 미국으로 함께 건너온 조부모나 시어머니가 중국인 이민자들의 가장 큰 적으로 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각각의 수록작에선 놀라울 만큼 미국보다 중국을 향한 부정적인 시선이 가득하다.


 수록작 대부분의 갈등이 기성 세대의 유교적 사고나 사회주의 국가 출신다운 쓸데없고 허황된 자부심에 아래 세대가 신음하면서 비롯된다.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한국 독자들한테도 공감 섞인 탄식을 유발할 만큼 꼰대들이 많이 나오는데 어떤 작품에선 블랙 유머로, 어떤 작품에선 비극적으로 갈등이 해소돼 묘한 여운이 남는다. 작가의 담백하면서 깊이 있는 문장력 덕분인지 해피엔딩조차 해피엔딩으로 머물지 않거나 새드엔딩도 마냥 새드엔딩이 아닌 경우가 있다. 확실한 건 타국에서 생존이 걸린 문제 앞에서 같은 국적, 고향의 사람은 동지이거나 원수이거나 둘 중 하나인데, 대체로 후자인 경우가 많고 특히 가족은 그보다 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내일의 희망도 갖기 힘든 노동자부터 승려, 창녀, 학비를 벌어야 하는 대학원생이나 가방끈 긴 학자 등 다양한 처지의 등장인물들이 뉴욕 퀸즈에 있는 플러싱을 배경으로 각각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4년 전 미국에 여행 갔을 때 마지막 숙소가 플러싱 근처여서 이번에 다시 읽은 <멋진 추락>의 분위기가 보다 실감나게 다가왔다. 그 동네는 작품에서 묘사된 것 이상으로, 정말 미국이 아닌 아예 중국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건물부터 공기까지 중국인 천지인 거리였다. 이처럼 폐쇄된 공간이기에 엄연히 기회와 자유의 나라인 미국 안에 있음에도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까지고 중국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란 인상을 지울 수 없었는데, 소설에서도 그때 받은 인상을 배신하지 않는 묘사가 일관적으로 나와 어딘지 뿌듯하면서도 씁쓸한 미소를 거두기가 힘들었다.


 나는 인구가 10억을 넘어가면 국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일 수도, 하나의 선입견으로 일반화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럼에도 중국인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선입견을 고수하는 사람이 많다. 어떤 중국인들은 그 선입견에 화를 내기보단 문제시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 선입견을 공고히 하고자 노력하기까지 한다. 어떤 중국인들은 외국에서 힘겹게 살아가지만 그래도 나는 중국인이다 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그들만의 망상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중국인은 자신의 출신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자신을 둘러싼 중국 본토와의 연결고리에서 벗어나고자 애쓰기도 할 것이다. <멋진 추락>은 많든 적든 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지닌 주인공들이 등장하며 작가 역시 본인이 직접 보고 들었을 부끄러운 중국인들의 면모를 솔직히 그려냈다. 이거야말로 멋진 추락이 아닌가. 표제작 '멋진 추락'에서 추락은 그런 의미로 사용되지 않지만 돌이켜보면 그 작품의 결말이 가장 희망적이라 표제작으로 선정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공통적으로 주인공들이 무엇이 됐든 '중국적인 것'에서 벗어나 결과적으로 의도와 무관하게 중국의 위신을 추락시키는 이미지가 강렬하게 그려져 책의 제목이 퍽 어울리지 않나 싶다. 추락이 어울리는 제목이라니,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중국만큼 추락이 절실한 나라가 없잖은가... 자존심을 세우느라 추해질 것인가 자존심을 세우지 않음으로 인해 비로소 멋있어질 것인가. 작품의 모든 수록작이 그렇게 단순한 주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지만 한 번쯤은 그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책의 악당들에게,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숭배해마지않는 중국이란 나라를 향해.


 이 작품의 이야기가 비단 중국 이민자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터지만 이번만큼은 중국에 박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건 어째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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