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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흩날리는 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4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7.5
기리노 나쓰오의 데뷔작 <얼굴에 흩날리는 비>를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탐정으로서 퍽 유능하지 않아도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는 무라노 미로가 첫 등장하는 작품이자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해 나름대로 이름을 떨친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작가의 풋풋함을 엿볼 수 있었으나 전매특허인 날카로운 칼날 같은 문장력이 아직 덜 벼려진 즈음이라 상대적으로 흡입력이 떨어졌다.
작품의 반전도 마찬가지다. 사실 반전이라기엔 다소 뻔한 측면이 없잖았으나 어쨌든 그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미로가 열심히 머릴 굴리고 발품을 팔았으니 반전이라 부르고 싶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읽고도 감흥이 덜한 건 참 아쉬운 일이다. 일이 크게 벌어진 것에 비해 실상은 여러 우연이 겹친 결과였고 진상에 접근하기 위해 지나치게 돌아가는 면이 있어 집중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미로의 친구 요코가 르포라이터로서 보인 행적이 어딘지 현실감이 떨어진 구석이 있던 탓인 것 같은데... 차라리 요코의 글을 원본으로 직접 읽을 수 있었거나, 아니면 가능한 한 많은 챕터를 할애해 요코의 시점에서 쓴 글이 병렬식으로 전개됐으면 내가 요코의 내면에 집중하고 공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통일된 독일의 혼란스런 상황이나 BDSM조차 귀엽게 보일 만한 엽기적인 취향(이라 쓰지만 병세로 판단하는 것이 타당함)을 가진 사람들을 작가가 묘사하는 방식도 그렇게 와 닿지 않았다. 다분히 흥미 위주의 무책임한 묘사는 아니었으나 엽기적인 결말을 위해 채택된 엽기적인 설정이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굳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고, 요코가 베를린에서 겪은 일은 흥미롭지만 분량이나 비중이 미묘해 궁금증이 생기다 말았다. 이 부분이라도 더 집중했더라면 작품 전체의 인상이 달라졌을 수도 있는데. 그럼 작품이 좀 더 무겁고 깊이 있게 다가올 수 있었을 것이다.
죽은 남편과의 과거가 발목을 붙잡고 있는 미로가 감정적이고 미덥지 못한 인물인 것은 작품의 흥미를 깎아먹는 요소라고도, 혹은 시리즈의 고유한 매력이라고 볼 수 있는 요소라고 볼 수 있겠다. 결과적으로 그대로 묻힐 뻔한 사건을 재구성해 해결하기까지 했으니 그만하면 유능하지 않나 싶겠지만, 하라 료의 사와자키나 다른 하드보일드 작품의 탐정에 비하면 프로패셔널함과는 어딘지 거리가 멀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봐야 했다.
이런 미덥지 못한 탐정 무라노 미로가 등장하는 작품은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물의 잠, 재의 꿈>, <로즈 가든>, <다크>까지 얼마 되지 않는데 일단 다 찾아 읽어볼 생각이다. 그녀가 이후 어떤 탐정으로 성장할는지 궁금한데 작품마다 평가가 들쑥날쑥해 불안하다. 뭐, 결국 직접 봐야 알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