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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의 밤 산책자 - 나만 알고 싶은 이 비밀한 장소들
이다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3월
평점 :
밤 산책의 즐거움
흔히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주로 낮의 풍경을 즐기려 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저자의 교토[京都] 여행은 조금 다르다. <교토의 밤 산책자>라는 제목처럼 저자에게 교토는 햇볕이 쨍한 낮보단 해질녘 늦은 오후의 교토이고, 여행은 붐비는 인파 속에 사람에 치여 더딘 걸음이 아닌 느긋하고 여유롭게 즐기는 밤 산책이다.
사실 약간의 조명만 있다면, 초저녁부터 시작된 벚꽃 흩날리는 봄밤의 산책은 낭만적일 수 밖에 없다. 하늘하늘 춤추며 눈처럼 바닥에 쌓이는 벚꽃의 왈츠를 누구의 방해도 없이 즐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황홀하지 않을까?
“산책 코스로는 지온인[知恩院]까지 갔다가 큰길을 따라 야사카진자[八坂神社] 앞으로 와서 시조 거리[四?通り]를 거슬러 올라오는 방법이 하나, 아까 간 길을 시라카와[白川]를 따라 거슬러 올라오는 방법 또 하나가 있다. 일행이 있을 때보다 혼자 이 길을 걷는 게 더 좋은 이유는 쓸쓸하고 운치 있는 밤 산책에 딱 어울려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시끄러울 때 그 소리를 잠재우기 좋은 산책로다. 너무 길지도 않고, 너무 외지지도 않으며, 언제든 꺾어 돌아갈 수 있는. 조명 자체가 적당히 낮은 조도를 유지한 밤의 기온 뒷골목을 걷다 보면, 정말 달밤에 단추를 줍는 기분이 든다. 단추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나 자신에 대한 애틋함을 느끼는 것은 이런 밤의 시간에나 잠깐 허용될 뿐이다. 해가 뜨면 그런 감정은 소맷부리에 집어넣는다. 누군가는 버리는 것이지만 나는 버릴 수 없다. 나는 나를 버릴 수 없다.” [pp. 117~120]
여행자의 게으름을 만끽하는 순간
이 책은 4부분으로 나눠 ‘시간의 미감, 교토의 꽃과 계절’, ‘혼자여도, 섞여도 좋은 교토의 정원과 산책로’, ‘마음과 취향을 알아주는 가게와 볼거리’, ‘치장하지 않아 더욱 완벽한 교토의 음식’을 소개했다. 단지 그뿐이다. 어떤 여행 코스를 소개하거나 추천하는 것도 아니고.
길을 가다 골목을 잘 못 들어가서 헤매는 작은 실수 정도는 가볍게 웃고 지나갈 듯한 분위기가 풍긴다. 덕분에 집 주위 혹은 회사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커피숍에 가서 무언가를 마시거나 디저트 가게에서 간단한 디저트를 사는 것처럼 부담감없이 저자의 시선을 따라갈 수 있었다.
출처: <교토의 밤 산책자>, pp. 82~83
각 장의 시작에는 위와 같은 지도가 있다. 그리고 한 장소를 소개하기 전에 꼭 시나 소설을 인용한다.
예컨대, 기타노텐만구[北野天滿宮]의 매화를 소개하기에 앞서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매화>의 일부를 소개하는 것처럼.
“눈이 아닌 줄 멀리서 아는 것은[遙知不是雪]
그윽한 향기 덕분이리라 [爲有暗香來]” [p. 24]
중간에 저자의 생생한 경험담도 있고,
“나는 벚꽃 구경도 단풍 구경도 많이 다녔는데, 그러다 생긴 요령이라고 하면 ‘낮을 포기하는 것’이다. 꽃과 단풍이 난리인 교토의 성수기(3월과 9월)는 특히 악명 높은데, 일단 숙박비가 평소의 두 배가 되고 그나마도 빈 방을 찾기 어렵다. 유명하다는 관광지는 사람에 치여 죽을 것 같고 뒷사람에 밀려 원치 않아도 앞으로 앞으로 이동하게 된다. 밥 한번 먹으려면 맛집은 고사하고 어느 식당이든 일단 줄을 서야 하는 일이 다반사고, 절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버스는 당연 만원.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행인 점이라면 교토의 절은 관람 경로를 잘 만들어서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벚나무를 찍을 때 사람들이 바글바글 하게 찍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진에는 나무 홀로 요요히 서 있는 것처럼 나와도 실제 상황은 아수라장이라는 말이다.” [p. 41]
시센도[詩仙堂]라고 불리는 오우토쓰카[凹凸?]를 소개하는 글에서는 가라오케에 함께 간 일행 중 하나가 부른 우에무라 카나[植村 花菜, うえむら かな, 1983~ ]의 <トイレの神樣(화장실의 여신)>(https://youtu.be/Z2VoEN1iooE) 덕분에 떠올린 할머니에 대한 추억과 더불어 짧은 조언을 곁들인다.
“소중한 것을 잃어간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전부였던 시절을, 믿고 사랑했던 것들을 잊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야 앞으로 나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가끔은, 거기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찾아오는 때가 있다. 그런 장소가 있다. 시센도에 걸려 있는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사진처럼 더 이상 그렇지 않은, 슬픔으로 끝난 관계들이 가장 반짝거렸을 때를 상기시키는 장소가 있다.
그 사람과 같이 방문하지 않았음에도 그런 것들을 깨닫게 하는 장소가 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장소 찾기의 중독자들이다. 나에게는 시센도가 그런 곳이다. 처음 방문했던 때는 혼자가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분명 당신에게도 그런 장소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아직 찾지 못했다면 찾기를 포기하지 마시길.” [p. 147]
또한, 하나의 장소에 대한 소개를 마칠 때마다 해당 장소의 교통편, 요금, 입장정보를 제공한다. 때때로 숨은 그림 찾기처럼 나타나는, 다혜's PICK(또는 TIP)을 통해 저자만의 여행정보를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교토를 처음 방문하는 여행자에게 도움이 되는 여행 가이드의 성격도 띄고 있다.
무심코 읽다보면 몸은 서울에 있는데, 마음은 교토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얼마 전에 읽은 하야시야 다쓰사브로 [林屋辰三郞, 1914~1998]의 <교토>도 그렇고,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니 언젠가는 꼭 교토에 가야만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