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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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의 베스트 송 모음

 

소설가 한강은 몇 차례 작가와의 만남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적이 있다그때마다 나지막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어울리는 단아한 그녀와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무엇인가 결핍된 인물들 때문에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정확한 실체는 모르겠지만그녀가 창조한 인물예를 들면 <채식주의자>의 영혜나 <희랍어시간>의 주인공들인 말[]을 잃어가는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 등이 현실에서 한 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어쩌면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에 자신을 일부라도 투영(投影)한다는 말 때문에 그녀와 그녀의 작품 속 등장인물 간의 유사성을 찾고괴리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이 한때 내가 그녀가 한 라디오 프로그램 DJ로 활동하면서 엮은 산문집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2007)를 찾아본 이유가 아닐까책 소개에 따르면노래에 담긴 그리운 지난 시절의 기억을 되돌아본다고 하니 뭔가 좀더 감상적인 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또 그녀가 직접 만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른 10곡의 노래가 궁금하기도 했다불행히도 2010년대 초반에야 그런 생각이 떠올라서 종로에 있는 대형 서점 몇 곳을 둘러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당연히 절판이다!)

 

그런 아쉬움 때문에 우연히 들린 대형서점에서 한강의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보고집에 돌아와 주문을 했다시는 시인의 영혼을 담아 부르는 노래라고 생각했었고이 시집이 그녀가 20여 년간 여덟 권의 소설 단행본을 출간하는 틈틈이 쓰고 발표한 시들 가운데 60편을 추려 엮은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어떻게 보면 그녀의 베스트 송 모음집인 셈이다.

 

 

소리도빛도 없는 어둠을 넘어

 

새벽에 들은 노래

 

봄빛과

번지는 어둠

틈으로

반쯤 죽은 넋

얼비쳐

나는 입술을 다문다

 

봄은 봄

숨은 숨

넋은 넋

나는 입술을 다문다

 

어디까지 번져가는 거야?

어디까지 스며드는 거야?

기다려봐야지

틈이 닫히면 입술을 열어야지

혀가 녹으면

입술을 열어야지

다시는

이제 다시는 [pp. 12~13]

 

이 시는 혹시 <희랍어 시간>을 염두에 두고 지은 것일까? ‘번지는 어둠 틈으로 반쯤 죽은 넋 <희랍어 시간>의 남자처럼 시력을 잃어가는 것을혀가 녹지 않아 입술을 닫은 것은 같은 책의 여자처럼 모국어를 말할 수 없는 것을 각각 그린 것이 아닐까?

혹시 <희랍어 시간>과 아무 상관 없다면 왜 시인은 혀가 녹으면 입술을 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저녁의 소묘 4

 

잊지 않았다.

 

내가 가진 모든 생생한 건

부스러질 것들

 

부스러질 혀와 입술,

따뜻한 두 주먹

 

부스러질 맑은 두 눈으로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 하나가

검은 웅덩이의 살얼음에 내려앉는 걸 지켜본다

 

무엇인가

반짝인다

 

반짝일 때까지 [p. 85]

 

시인은 왜 내가 가진 모든 생생한 것이 부스러질 것들이라고 했을까이 또한 소설에서처럼 결핍을 나타내기 위해서일까? ‘부스러진 것이 아닌 부스러질 것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마치 죽음으로 가는 길을 암시하기 위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라는 제목을 보면서 처음 들었던 생각은 왜 저녁일까’ 였다서랍이 무엇인가를 넣어 두는 수납공간인 것은 맞는데아침도점심도 아닌 저녁을 넣어 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결국 이 책을 사게 만들었다.

 

새벽에 들은 노래’, ‘피 흐르는 눈’, ‘저녁의 소묘’, ‘거울 저편의 겨울’. 이 시집에서 실린 연작 시()들의 제목들이다뭔가 검은 아우라(Aura)가 살짝 어른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제목들이다뭔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노래하는 부분이 많다고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물론 이 책에 실린 시()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시()는 읽기 어렵다고등학교 국어시간도 아닌데 습관적으로 분석해보려는 마음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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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셴든, 영국 정보부 요원 열린책들 세계문학 251
서머싯 몸 지음, 이민아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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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출신 스파이서미싯 몸

 

이안 플레밍(Ian Fleming, 19081964) 007시리즈에서 나오는 제임스 본드처럼 비현실적인 모험담 위주였던 당대 스파이 소설들과는 달리 서미싯 몸(Somerset Maugham, 1874~1965) <어셴든영국 정보부 요원>(1928)에서 하나의 직업으로서 스파이를 묘사했다이에 영향을 받은 존 르 카레(John le Carre; 1931~)는 <죽은 자에게 걸려온 전화(Call for the Dead)>(1961) 등 사실적 스파이 소설을 남겼다.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여기에 언급된 작가들은 모두 스파이 출신이다물론 <인간의 굴레> <달과 6펜스등 대부분 순수 문학작품을 남긴 서미싯 몸이 영국 정보부 요원 출신이라는 것이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그러나 그가 러시아 2월 혁명 후 멘셰비키의 알렉산드로 케렌스키(Aleksandr Kerenskii, 1881~1970)가 이끄는 내각을 지원하여 볼셰비키 혁명을 저지하라는 임무를 받고 1917 7월 러시아 페트로그라드로 파견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스파이로서도 만만찮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어쨌든 이 책에서 정보부 대령 R이 작가 어셴든에게 유럽의 여러 언어를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작가라는 직업이 첩보원이라는 신분을 위장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다는 얘기였다책을 쓰기 위한 직업이라는 구실이 있으니 괜한 시선을 끌지 않고도 어떤 중립국에든 갈 수 있지 않느냐” [p. 16]라고 설득했듯이 작가는 스파이들이 이용하기에 최적의 직업 가운데 하나다물론 이 경우 작가들도 스파이 체험을 소재로 이용할 수 있으니 서로가 Win-Win 이겠지만.

 

재미있는 것은 스파이 활동을 했던 이들이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작품을 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앞에서 언급한 007시리즈의 이안 플레밍,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등을 쓴 존 르 카레, <레드 스패로우> 쓴 제이슨 매튜스(Jason Matthews; 1951~ ), <자칼의 날> <오데사 파일>을 쓴 프레드릭 포사이스(Frederick Forsyth, 1938~ ) 등이 그렇다아마도 자신의 행적에 대해 침묵해야 하기 때문에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답답한 마음을 풀고 자기 자랑을 한 것이 아닐까이는 번역가 김석희는 타고난 스파이습관적으로 자신을 위장하는 사람이 경험을 제거할’ 필요가 생겼을 때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자문(自問)한 뒤 소설을 쓴다고 자답(自答)했다.1)라는 얘기로도 짐작할 수 있다그래서인지 스파이 소설을 남기지 않고, <찰리와 초콜릿 공장>, <멋진 여우씨>, <마틸다등 아동을 위한 작품을 쓴 로알드 (Roald Dahl, 1916~1990)과 같은 경우가 예외적인 사례로 보인다.

 

 

작가 출신 스파이어셴든

 

이 소설에서 작가출신 스파이로 나오는 어셴든은 작품 구상을 핑계로 스위스프랑스이탈리아러시아 등 각국을 오가며 첩보 활동을 펼친다. <어셴든영국 정보부 요원>이라는 책 자체가 어셴든이 스파이 임무 수행 중에 겪게 되는 일화를 다룬 16편의 단편을 모은 것인데일종의 연작(連作소설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첫 단편인 [R]은 정보부 대령 R이 작가 어셴든을 스파이로 스카우트하는 얘기를 프롤로그처럼 간략하게 다룬다.

두 번째 단편인 [가택 수색]에서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정보를 입수해 어셴든이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프랑스에 있는 첩보국 본부에 전달하러 간다이 부분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경험할 수 있는 일인데뭔가 긴급하고 중요한 정보라고 생각해서 상사에게 보고하면상사가 ……. 그래그런데 우리가 뭔가 손을 쓰기에는 너무 늦었군’ 혹은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야라고 답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물론 그가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스위스 경찰이 가택 수색을 한 부분은 어셴든이 스파이였지 하고 되새기게 하지만.

네 번째 단편인 [대머리 멕시코인]에서 여섯 번째 단편인 [그리스인]까지는 멕시코의 우에르타 반란군 장군 출신임을 주장하는 살인 청부업자와 동행하여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오스만 제국이 독일 제국으로 보내는 기밀 서류를 입수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벌어지는 일화를 다루고 있다.

열 번째 단편 [배반]에서는 조국을 배반하고 독일의 스파이가 된 영국인 그랜틀리 케이퍼를 회유하거나 제거해야 하는 임무를 맡아 스위스의 루체른에 간 어셴든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어셴든이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고도 정보부 대령 R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모습을 보면상사의 장기말이 되어 버린 조직원이 떠올라 씁쓸했다.

 

짧은 단편들의 모음이라서 그런 것일까이 책에서는 우리가 스파이 소설이라고 할 때 기대하는 쓰릴 넘치고 긴박한 모습을 찾기 힘들다오히려 스파이 소설적인 요소가 묻은 건조한 회사원의 느낌이 짙었다저자가 괜히 서문에서 정보부 기관원이 하는 일은 대체로 단조롭기 짝이 없다많은 부분 쓸모 없는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사실이고소설의 소재로 쓰려 해도 단편적이고 무의미한 것이 대부분” [p. 11]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007시리즈와 같은 빠른 전개긴박감반전 등을 기대하는 이라면 이 책이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이고, <팅거테일러솔저스파이>를 즐겁고 재미있게 읽은 이라면 한 번 읽어 볼 만하다.

 

 

옥의 티

 

p. 206

한편으로는 멘델스존의 <무언가(無言哥)>와도 같은 ~ ⇒ 한편으로는 멘델스존의 <무언가(無言歌)>와도 같은 ~

무언가 Lieder ohne Worte의 번역이므로 한자 표기는 無言哥가 아닌 無言歌가 맞다.



1) 문갑식, “[방랑자의 인문학 <8>]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와 옥스퍼드-런던-베를린의 뒷골목”, <월간조선 19 5>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F&nNewsNumb=201905100044&page=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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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프 푸셰 -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전면 새번역 누구나 인간 시리즈 2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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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조제프 푸셰?

 

조제프 푸셰(Joseph Fouche, 1759~1820, 이하 푸셰’)라는 인물은 우리에게 상당히 낯선 인물이다그러나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프랑스 혁명기에 테르미도르의 반란을 계획하여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de Robespierre, 1758~1794)와 그 일파를 축출하고1제정시기 경찰장관으로 2인자로 군림하다가 백일천하 후 나폴레옹 1(Napoléon Bonaparte, 1769~1821)의 퇴위를 주도했다그 후 임시정부의 수반이 되어 루이18세를 왕으로 맞아들이고 경찰장관이 되었다가

하지만 그 프랑스 혁명나폴레옹의 출현과 몰락왕정복고가 이어지는 전환기를 대부분 양지에서 즐기며 살았던 정치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의 이완용(李完用, 1858~1926)처럼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프랑스의 모든 역사가들 역시 왕당파든공화주의자든보나파르트주의자든 상관없이 푸셰라는 이름에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타고난 배신자보잘것없는 모사꾼미끌미끌한 파충류 같은 인간변절을 밥 먹듯 하는 놈경찰의 비열한 기질이 몸에 배인 놈한심하기 짝이 없는 악당…… 다들 온갖 모욕적인 언사를 거리낌 없이 푸셰에게 퍼붓고 있지만 아무도 그의 성격을 밝혀 내려고 진지하게 노력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놀라울 만큼 일관성 있게 지조 없이 살았다는 사실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pp. 4~5]

그러나 이완용과 달리 푸셰라는 인물은 상당히 모순적인 존재인데그의 삶을 살펴보면 극과 극으로 널뛰듯 자신이 속한 진영을 바꿔왔다예를 들면, “1790년에는 수도원의 교사였던 사람이 1792년에는 교회를 유린했고, 1793년에 공산주의자였던 사람이 5년 후에는 백만장자가 되었으며, 10년 후에는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오트란토 공작이 되었다.” [p. 9]

삶 그 자체로만 따져보면푸셰는 평생 2인자로 지내면서도 절대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영원한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끝임 없이 변신을 했다는 점에서 5개 왕조의 12명 황제 밑에서 승상을 지냈던 풍도(馮道, 882~954)에 더 가까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숭고하면서 비열한 역할

 

여기까지만 보면 그는 세상에 흔한 비열한 기회주의자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그것도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 1890~1976)의 소설 <커튼>에 나오는 스티븐 노튼이나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희곡 <오셀로>에 나오는 이아고처럼 배후 조종자 혹은 흑막(黑幕)의 역할을 고수하는 존재였다, “조제프 푸셰는 결코 눈에 보이게 권력을 행사하지는 않지만 권력을 온전히 가지고 있으며 모든 끈을 손에 쥐고서 조종하지만 결코 책임자로 거론되지는 않는다항상 누군가를 일인자로 만들어 방패로 내세우고 그의 뒤에 서서 그를 앞으로 몰아가다가 그가 지나치게 앞으로 나갔다 싶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거침없이 등을 돌리고 마는 것바로 이것이 푸셰가 가장 좋아하는 역할이다정치사를 통틀어 가장 노련한 모사가인 푸셰는 공화국과 왕정과 황제의 제국을 무대 삼아 펼쳐지는 숱한 에피소드에서 스무 번이나 의상을 바꿔 가며 한결같은 명배우의 솜씨로 이 역할을 연기한다.” [pp. 32~33]

 

그런데 저자는 푸셰와 동시대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알퐁스 드 라마르틴(Alphonse de Lamartine, 1790~1868)의 말을 빌려, “한편으로는 다시 살아난 전제정치와 새로이 싹트는 자유 사이에 끼여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조국을 희생시킨 나폴레옹과 단 한 사람 때문에 도살당하지 않으려는 프랑스 사이에 끼어 있어서 운신의 폭이 좁았다황제를 압박했고 공화주의자들의 비위를 맞추었고 프랑스 국민을 진정시켰으며 동시에 전 유럽에 인사를 건넸고 루이 18세에게 미끼를 던졌고 각국의 조정과 담판을 벌였고 탈레랑과 가식적인 편지를 주고 받았다.

(이렇게그는 백 개의 얼굴을 요구하는 어려운 역할을 소화했다숭고하면서도 비열한 역할이었고 어마어마한 역할이었다하지만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이 역할에 제대로 주목하지 않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그가 비록 고귀한 영혼을 가지지는 않았어도 애국심과 영웅다운 용기를 지니고 있었기에 신하의 신분으로 주군과 같은 높이에 서고 장관의 신분으로 통치자 위에 서서 제정과 왕정복고와 자유사상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pp. 293~294]라고 평가한다.

 

도대체 푸셰의 어떤 점이 그런 평가를 하게 만들었을까?

이 책을 다 읽어도 잘 모르겠다다만저자가 아래에 말한 것처럼 나폴레옹 전설이 그에 대한 악명을 높여주었을 것이라는 것은 이해했다영웅의 배신자만큼 악당이 되기 좋은 포지션은 없을 테니까.

50년 후 1,000만 명의 시체가 이미 썩어 없어지고, 불구가 된 사람들도 묘지에 묻히고, 폐허가 되었던 유럽이 회복된 후 나폴레옹 전설이 시작되면서 푸셰는 이전보다 더욱 가혹하고 부당한 평가를 받게 된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영웅의 전설은 항상 역사의 후방 지대에서 만들어진다. 후방에 있는 사람은 몸소 겪어본 적도 없고 겪을 리도 없는 온갖 덕행을 전방에 있는 사람에게 요구한다. 영웅전설도 다를 바 없다. 영웅 전설은 제대로 겪어 본 적도 없고 겪을 리도 없는 온갖 덕행을 당연한 것처럼 요구한다는 점에서 후방에 있는 사람들과 흡사하다. 영웅 전설은 무수한 인명을 희생하라고 요구하며 영웅이 광기를 부릴지라도 그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장렬히 죽으라고, 아무 소용이 없어도 충성을 다하라고 요구한다. 나폴레옹 전설은 초지일관 흑백논리를 택하고 있기에 그 안에는 영웅에게 충성한 자와 영웅을 배신한 자만이 존재한다. 더구나 이 전설은 초반기의 (조국에 평화와 질서를 가져다 준) 통령 나폴레옹과 후반기의 (권세욕을 채우기 위해) 폭주하는 독재자 나폴레옹을 구분하지 않는다.” [pp. 294~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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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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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의 의의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는 중국의 루쉰[魯迅, 1881~1936]나 한국의 이광수(李光洙, 1892~1950)처럼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첫 소설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지만마쓰야마[松山]의 중학교로 전근해서 겪은 경험을 소재로 쓴 <도련님>으로 더 유명하다.

왜냐하면이 작품으로 나쓰메 소세키는 이미 봉건주의를 넘어 산업사회에 기반을 두고 사실주의를 구현한 찰스 디킨스의 선험적인 시선을 장착한 듯하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도련님>은 그런 의미에서 유학 후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나쓰메 소세키의 첫 소설로 보아 무방하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어떤 문학적 호기심의 시도로 출발한 것이라면 <도련님>은 근대 작가가 매달렸던 체험적 소재를 통한 사실주의의 실현이 녹아 든 동양의 첫 작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p. 177]

 

 

도련님의 좌충우돌

 

도련님이라고 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귀하게 자라나서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였다부족함 없이 자라서 돈에 얽매이지 않는그냥 바라만 봐도 귀티 나고 훤칠한 부잣집 도련님 말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고 나서 처음 번역한 이가 제목을 잘 선택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은 저자인 나쓰메 소세키가 대학을 졸업하고 도쿄 고등사범학교 교사를 거쳐일본에서도 오지라고 불리는 시코쿠[四國에히메[愛媛현에 있는 보통중학교로 전근해서 겪은 경험을 소재로 쓴 글이라고 한다그러니까 학교 선생님들 이야기인 셈인데왠지 욱하는 도련님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그렸다는 느낌이 든다.

 

사회의 물이 덜 든 애송이이기에 주인공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쉬쉬하며 덮여버리던 일들과 타협하는 대신 우직하게 충돌한다처음 숙직하는 선생의 이불 속에 메뚜기를 집어넣는 기숙사 학생서화나 골동품을 강매하려는 하숙집 아저씨나 끝물호박[고가영어교사]을 멀리 보내고 그와 결혼을 약속한 마돈나[도야마네 딸]를 수중에 넣으려는 빨간 셔츠[교감등과의 갈등은 어쩌면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하일라이트는 중학교 학생과 사범학교 학생간의 패싸움을 말린 일 때문에 산미치광이[훗타수학교사]가 부당하게 면직당하자주인공이 교장에게 가서 사직 의사를 밝히고 이력 같은 거야 아무래도 좋습니다이력보다 의리가 더 중요합니다.” [p. 165]라고 외친 일이 아닐까?

직장인의 필살기가 사직서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쉽게 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주인공의 도련님 같은 면모를 더 두드러지게 부각시키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짧은 교직 생활에 대한 스케치와 같은 이 소설이 그렇게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이 소설 여기저기에 내비치는 주인공의 도련님다운 행위일지도 모른다.

현실에 존재하기 힘들기에 역설적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그런 도련님이 아닐까그래서 이 책의 해설을 쓴 소설가 백가흠도 도련님은 외롭다정직하기 때문에솔직하기 때문에관대하기 때문에순응하기 때문에 외롭다지금의 세상은 정직하면 손해 보는 곳이고솔직하면 비난받는 곳이고관대하면 무시당하는 곳이고순응하면 빼앗기는 곳이다도련님은 세상에서 손해 보고비난받고무시당하고빼앗기면서도 관대하다이는 전혀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 것의 다른 마음이다인간을 윤리나 도덕예의 안에서 믿지 않기 때문이다허나 이는 슬픈 일이면서 망가진 세상에서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p. 183]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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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백년 가게
이인우 지음 / 꼼지락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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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여행사에서 주도하는 단체여행 외에 개별적인 배낭여행이나 유학 등의 이유로 해외에 거주하는 이들의 일상 블로그 등을 통해 도쿄나 교토 같은 일본의 유서 깊은 도시나 유럽의 오래된 도시에 숨어있는 듯 드러난 노포(老鋪)도 많이 소개되고 있다이런 노포들을 볼 때마다 부러운 생각이 드는데이는 이들 노포들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오히려 시간의 풍파 속에서 숙성된해당 가게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가게들이 위치한 골목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다시 말해사람이 살지 않아 껍데기만 남은 유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문화재로서 해당 지역을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래된 수도인 서울에도 그런 가게가 존재하지 않을까이 책에서 소개하는 가게들이 바로 그런 가게라고 할 수 있다.

 

가보지는 못했더라도 이름은 귀에 익어 친숙한 학림(學林다방은 그 이름을 사용한 지 100년도 안 되었지만스토리텔링이 살아있는 제법 오래된 가게에 속한다. 1956년 학림(鶴林)’이라는 이름으로 이 다방을 시작했던 신선희가 이민을 떠난 후경영난 속에 자주 주인이 바뀌는 혼란기를 거쳐 1987년 현재의 주인인 이충렬의 손에 들어가면서 노포의 품격을 유지하고 있는 가게다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도 가장 먼저 소개하고 있다. “동숭동 대학로 ‘학림다방’은 서울에서(어쩌면 한국에서가장 오래된 다방이다그 이름을 얻은 지 63년째다. 1975년까지는 주로 서울대생들의 ‘살롱’이었고, 1980년대에는 이른바 ‘학림사건’을 통해 “학생과 노동자들이 혁명을 모의한 장소”로 이름이 났다한때는 경영난 때문에 레스토랑으로 ‘전락’했다는 소리를 들었고송강호전인권 등 현재 유명해진 배우와 가수들이 평범한 손님마냥 드나들던 때도 있었다. 21세기에는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덕분에 중국인들까지 찾는 관광 코스가 되었고커피 맛이 좋아 바야흐로 ‘학림커피’라는 브랜드의 꿈까지 익어가는 중이다.” [p. 13]

 

노포하면 떠올리는 대를 이어 음식 장사를 하는 곳도 여기에 소개되어 있다. 1932 20대 초반의 새댁 홍기녀가 창업한 추탕집 ‘용금옥(湧金屋)’은 그녀의 사후 막내 며느리 한정자에게 이어졌다그리고 지금은 큰아들의 손자 신동민이 맡은 다동 용금옥과 한정자가 맡은 통인동 용금옥으로 갈라졌다각자의 사정은 있겠지만 이미 각자 다음 대로의 가업 승계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아래에 소개된 것처럼 한 시대의 대명사가 될 정도의 노포라면 그 자체로 소중히 유지해야 할 문화재가 아닐까?

지금은 절판된 <용금옥 시대>(이용상서울신문사, 1993)라는 책이 있다해방 후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김일선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서 귀국해 서울에서 추어탕 한 그릇을 먹고 서울역에서 기차로 평양에 간 이야기가 담겨 있다수주 변영로와 공초 오상순 등 당대 기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행 기담도 수두룩하다책을 쓴 중국 항일유격대 출신의 시인 이용상은 이렇게 적고 있다. “8.15 해방이 되고 양풍이 불어 닥치고 우리 고유의 송편보다는 초콜릿으로 입맛이 변해가던 시대에도 끝까지 추탕으로 버티고 있는 노포 용금옥은 그 자체가 우리의 저항처럼 보인다때문에 나는 해방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용금옥 시대라고 구분 지은 것이다.” 한 개인의 회고담이라지만 일개 음식점이 한 시대의 대명사로 당당히 명명된 것은 영광이 아닐 수 없다.” [p. 47]

 

의외의 노포도 존재한다바로 대장간이다풍속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의 손으로 쇠를 다루는 대장간이 지금 이 시대에그것도 서울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다그런 대장간 가운데 역사성과 희소성을 평가 받아 서울 미래유산에 선정된 대장간만 해도 동광 대장간불광대장간형제 대장간동명 대장간 네 곳이나 된다이 책에서 소개한 곳은 그 중 하나로 천호사거리에 자리잡은 동명(東明대장간이다. 1956년 서울 동쪽에서 제일가는 대장간을 꿈꾸며 시작한 대장간은 벌써 3대째 이어가고 있다. 3대인 강단호가 건축회사를 다니다가 위암으로 고생하는 아버지를 보다 못해 가업을 잇기로 결심하지 않았다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짠한 느낌도 든다.

 

여기에 소개된 가게 가운데 개인적인 추억이 얽혀있는 곳도 있다대학 생활을 하면서 종종 약속 장소로 잡았던 신촌의 홍익문고’, 아버지와 몇 번 들렸던 안동국시 전문점 소호정’, 복학 전에 후배가 소개해 준 신촌의 사이폰 커피숍 ‘미네르바’ 등 별 생각 없이 들렸던 곳들이 백 년 이상 회자(膾炙)될 노포라니 왠지 기분이 묘하다.

 

무엇보다 이 책이 좋았던 것은 24곳의 가게를 각각 소개할 때마다 사진이 아니라 일러스트를 먼저 내세우고, 가게의 역사를 보여주는 가게의 과거 사진, 그리고 스토리를 잘 엮어 맛깔 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나도 지금의 코로나 사태가 지나가고 여행의 자유가 주어진다면 이 책에 실린 곳들을 한 번 방문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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