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 자본이 만든 메트로폴리스 1830-1871 현대의 고전 13
데이비드 하비 지음, 김병화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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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의 수도, 파리]는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2003)는 1830년부터 1871년까지의 파리의 근대적 도시화 과정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온전히 새로 쓰여진 글은 아니다.

 

2부에 나오는 파리 연구는 <의식과 도시 경험>에 실린 논문을 개정하고 확장한 것이다. 종결부인 ‘사크레쾨르 바실리카의 건설’은 원문에서 약간 개정되었다. 발자크의 연구는 <코스모폴리스의 지리학>(2002)과 <도시의 잔상>(2002)에 각각 실렸던 것을 개정하고 확장했다. 2장과 이 서문은 새로 쓴 것이다. [p. 42]

 

즉, 18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2부 형체를 갖다: 파리 1848~1870’[3장~17장]은 정통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방법론으로 도시문제를 분석한 <의식과 도시 경험(Consciousness and the Urban Experience)>(1985)에 실린 주요 논문을 개정, 증보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의식과 도시 경험>의 개정증보판이라고도 볼 여지도 있다. 하지만, <의식과 도시 경험>과는 달리 이 책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영향력이 짙게 배여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와 <의식과 도시 경험>은 비슷하지만 다른 책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파리 개조 사업’이라는 창조적 파괴 행위

 

저자는 서문에서 ‘근대가 그 이전과 근본적으로 단절된 시대라고 보는 것이 허구적인 신화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신화를 조장한 것이 파리 개조 사업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조르주외젠 오스만 남작(Baron Georges-Eugene Haussmann, 1809~1891, 이하 ‘오스만 남작’)과 그가 남긴 <회고록>이라고 말한다.

왜 오스만 남작은 그런 허구의, ‘근대 신화’를 만들고 배포했을까?

 

그는 근본적인 단절이라는 신화, 오늘까지도 살아남은 이 신화로 자신과 황제를 포장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예전에 시행된 것들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신과 루이 나폴레옹은 어떤 면으로도 이제 막 지나간 과거의 사고방식이나 관례에 얽매여 있지 않음을 보여야 했던 것이다. 이 부정은 그 이중의 의무를 달성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건국신화를 만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이 베푸는 자비로운 전제주의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판단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p. 22]

 

사실 파리 개조 사업 전후를 비교해보면, 오스만 남작이 과거와 단절된 근대를 얘기하는 것도 그럴 듯하게 보인다. 그는 파리의 시가지를 깔끔하게 정비하여 도시 위생을 향상시켰고, 상수도 설비를 완전히 갈아엎어 새로 만들었으며, 도시에 대규모 공원과 광장을 조성했다. 이때의 도시계획으로 파리는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파리의 개조 계획이 오스만 남작의 파리 지사 임명 이전에 이미 세워져 있고, 과거와의 근본적인 단절은 존재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오스만 남작이 파리의 도시계획에 기여한 정도를 평가절하하는 것도 아니다. 파리 개조 계획 자체는 오스만 남작이 시작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오스만 남작에 의해 ‘파리’라는 도시가 강제로 ‘근대’로 몰아 넣어졌다고 본다. 이는 파리 개조 계획이 자본주의가 새로운 부를 창조하기 위해 그에 어울리는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기존의 경제질서를 파괴, 재편하는 ‘창조적 파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스만 남작이 시행한 일련의 도시 개편 작업의 결과 파리의 근교화가 촉진되었고, 그에 따라 공장 지대와 노동자 거주 지역, 부유층 주거지가 격리되었으며, 그들 간의 의식적 단절은 극단적으로 심화되었다. ‘코뮌(Commune)’, 즉 파리 코뮌은 그 극단적인 단절이 낳은 결과물이다.

 

코뮌에서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이해 범위를 벗어난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제2제정 파리의 변형 과정과 그 영향에 뿌리가 있었다. [p. 539]

 

코뮌은 유일하고, 독특하고, 극적인 사건이었고, 아마 자본주의 도시의 역사에서 이런 종류로서는 가장 특별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 불씨에 불을 붙인 것은 전쟁, 프로이센에 포위되었다는 절망감과 패배의 굴욕감이었다. 하지만 코뮌의 원재료는 이 도시의 역사적 지형이 자본주의적으로 변형되는 느린 리듬에 맞추어 이미 한데 모여 있었다. [p. 542]

 

 

사실주의 예술가라는 렌즈

 

저자는 파리 개조 계획을 전후한 ‘파리’라는 도시의 구체적 상황들을 설명하고 분석하기 위해 사실주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그 시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구체적으로는 <고리오 영감>, <골짜기의 백합>, <외제니 그랑테> 등 ‘인간 희극’ 시리즈를 기획한 오노래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 1799~1850, 이하 ‘발자크’), 프랑스어로 쓰인 최초의 위대한 모더니즘 소설이라는 <보바리 부인>을 쓴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 루이 필리프 1세(재위 1830~1848)의 세금정책을 풍자한 <가르강튀아(Gargantua)>(1831)나 고된 하루를 보내고 삼등열차에 오른 가난한 서민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삼등열차>(1862) 화가이자 판화가인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 등을 들 수 있다.

 

오노레 도미에의 풍자화 <가르강튀아>

출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p. 117

 

이들 사실주의 예술가들이 본 파리는 오스만 남작이 개조하려고 했던 그 낡은 ‘파리’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이 무렵 진행되고 있던 자본주의가 빚어내는 인간형과 그들을 지배하는 ‘파리’라는 도시의 위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작품에서 ‘파리’라는 도시는 또 하나의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사실주의 소설가인 발자크는 <인간 희극> 시리즈에서

 

대개 시골 출신들이 파리 생활에 적응해가는 통과의례의 장면을 묘사하는데, 상인이든 야심 찬 젊은 귀족이든, 아니면 연줄이 좋은 여자든 상관없다. 일단 적응하고 나면 그들은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는다. 설령 자신들이 파리에서 겪은 실패 때문에 결국 파멸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지방 출신이라는 것, 지방의 권력에 대한 격렬한 부정은 이렇게 발전하여 파리 생활의 창립 신화 가운데 하나가 된다. 즉 파리는 독자적인 실체이며, 어떤 면으로든 그것이 그렇게 경멸하는 지방 세계에 의존하지 안는다는 신화다. [p. 61]

 

 

공간과 기억, 근대를 만들다

 

역사지리학자인 저자는 발자크의 소설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공간적 유형을 분석한다. ‘공간은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상류계급과 귀족은 자기들만의 중심을 가지고 있고, 평민들도 언제나 자기만의 특별한 구역을 갖고 있다.

 

도시 자체가 그 주민들의 집합적 기억이라고 할 수 있으며, 기억이 그렇듯이 그것도 대상과 장소에 결합되어 있다. 도시는 집합적 기억의 장소다. 그렇다면 장소와 주민 사이의 이 같은 관계는 건축학적으로나 지형적으로 도시의 지배적 이미지가 되고, 어떤 물건이 기억의 일부가 되듯이 새로운 기억이 솟아난다. 이렇게 전적으로 긍정적인 의미에서 도시의 역사에는 엄청나게 많은 상념이 흘러가며 도시에 형태를 부여한다. [pp. 103~104]

 

발자크는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공간이 어떻게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지 보여준다.

 

그의 인물들은 심지어 한 구역에서 다른 구역으로 이사하면 성격이 바뀌기까지 한다. [p. 79]

 

이런 공간의 변화는 자본주의가 가져온 영향 가운데 하나다. 왜냐하면 오스만 남작의 계획에 따라 건설된 대로변과 그 뒷길 사이의 토지 가격의 격차와 그로 인한 임대료 수준의 격차, 중심부에서 변두리로 갈수록 점증적으로 낮아지는 임대료로 인해 파리의 여러 지역은 서로 다른 직업적, 계급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즉, 노동자와 자본가 등의 거주지가 공간적으로 격리되고 그들간에 의식적 무의식적 단절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축가 루아예는 19세기 파리의 설계와 건설 관례를 자세하게 재구성하면서, 당시 준수되던 원칙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본주의가 건축에 미친 가장 중요한 영향 가운데 하나는 기획 규모의 변화였다.” [p. 26]

 

공간에 이어 이야기 되는 것은 ‘기억’이다. 발자크는 ‘희망은 욕구하는 기억[99’이라고 했는데, 기억과 욕구의 이러한 결합은 근대성의 신화가 어떻게 그처럼 강력한 힘으로 유통되는 지 보여준다. 나아가 발자크는 공간과 기억이 결합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 지를 <인간 희곡> 시리즈를 통해 드러낸다.

 

발자크는 <인간 희극> 전체를 관통하여 이 연관성을 끈질기게 다루었다. 그는 도시의 역사에 등장하는 위대한 상념의 흐름에 뭔가를 추가하고 보완한다. 그는 도시를 기억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집합적 기억을 위한 특별한 장소를 상상 속에 구축한다. 이것은 혁명의 순간이 오면 “번뜩이는” 어떤 정치적 감수성의 근거가 된다. 이것이 바로 작동중인 도시를 근거로 한 혁명적 변형으로서의 근대성의 신화다. 기억이 1830년에 “번뜩여” 혁명적 감수성을 이어 붙이는 데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고, 1848년과 1871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혁명적 순간들이 전통에 호소하는 바람에 짐이 더 무거워지기는 했지만, 그들에게는 미래를 향해 열릴지도 모르는, 완전히 다른 길로 나아가는 급격한 단절을 추구하는 강렬한 근대적 면모도 있었다. 그러므로 희망이 기억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 연결된 기억이 희망을 발생시킨다. [p. 104]

 

 

사크레쾨르 성당, 핏자국을 눈으로 덮으려는 시도

 

사크레쾨르 바실리카가 아름답거나 우아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것이 충격적이고 눈에 확 들어온다는 점, 스타일이 특이하고 유별나서, 그 발밑에 펼쳐진 도시로부터 존경을 요구하는 일종의 거만하거고 장엄한 분위기를 빚어낸다는 점도 대부분 인정할 것이다.

중략 ~

그리하여 사크레쾨르는 성스러운 장엄함의 이미지, 영원한 기억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의 기억인가? [p. 548]

 

1871년 파리 코뮌이 성립될 당시 군중에게 발포 명령을 내렸던 정부군의 르콩드 장군과 1848년 6월 혁명기간에 잔혹한 학살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던 토마 장군이 군중들에 의해 총살되고, 32살의 코뮌의 지도자 외젠 발랭이 군중에게 모욕받으며 몽마르트르 언덕길 주위를 끌려다니다가 총살되었다. 바로 그 자리에 사크레쾨르 바실리카는 세워졌고, 그 내부에 그려진 반구형의 천장화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의 승리[Le Triomphe du Sacre-Cœur de Jesus] 아래에는 흔히 프랑스는 회개하노라[GALLIA POENITENS]”로 알려진 “SACRATISSIMO CORDI JESU GALLIA POENITENS ET DEVOTA ET GRATIA”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파리 코뮌 당시 좌우익의 희생자를 기념하는, 순결한 영묘(靈廟)처럼 생긴 이 바실리카 혹은 대성당에는 무엇이 묻혀 있는 것일까?

 

1789년의 정신인가? 프랑스의 죄악이 묻혀 있는가? 비타협적인 가톨릭주의와 반동적 군주제의 동맹인가? 르콩드와 클레망 토마 같은 순교자의 피? 아니면 외젠 발랭과 그와 함께 무자비하게 도살된 2만 명 이상의 코뮌 가담자들의 피인가? [p. 598]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잔혹한 전쟁터에 내린 눈처럼, 이 바실리카는 그 모든 것을 묻어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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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의 도쿄
호즈미 가즈오 지음, 이용화 옮김 / 논형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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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明治]의 시작은 1868년이다. 1868년은 일본 역사에 큰 의미가 있는 해인데,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라 중세에서 근대로의 패러다임의 변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에도[江戶]가 신정부의 수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에도가 당시 일본의 중심이 되는 대도시였고, 보신[戊辰] 전쟁 당시 도쿠가와 막부측의 가쓰 가이슈[勝 海舟, 1823~1899]와 메이지 신정부군측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 隆盛, 1828~1877]의 협상으로 ‘에도’라는 도시가 전쟁의 피해를 보지 않고 온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탄생한 메이지 정부의 도쿄는 어떤 모습일까?

먼저 ‘1장 문명개화’에서 소개된 메이지 시대의 특징을 보면,

 

에도 이래의 전통과 서구의 근대문명이 뒤섞여진 이상한 이국정취야말로 메이지의 독특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전통과 근대화라는 이중구조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활과 사고방식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pp. 18~19]

 

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메이지 정부가 목표로 한 것은 ‘근대도시’로서의 도쿄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국의 수도’ 즉 국가의 수도로서의 딱딱한 관리사회를 의미하고 있었다. 요컨대 걸핏하면 쾌적성보다도 국가의 체면과 통치가 우선되어 정치성과 경제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도쿄의 일반시민들은 에도 이후의 시민문화를 이어받아 자유로운 생활공간을 추구했다. 메이지의 도쿄는 ‘천황’의 의향과 ‘시민’의 목소리라는 두 개의 요소가 대립과 공존하면서 성립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p. 19]

 

라고 한다.

 

이러한 메이지의 도쿄를 보여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도쿄 최초의 본격적인 호텔이라고 불리는 ‘쓰키지[築地] 호텔관’이다.

 

쓰키지[築地] 호텔관

출처: <메이지의 도쿄>, pp. 28~29

 

이곳의 설계는 미국인 리차드 브리젠스(Richard P. Bridgens)가 했지만, 건축은 훗날 시미즈[淸水] 건설의 창업자의 양자인 2代 시미즈 기스케[淸水 喜助, 1815~1881]가 맡았다. 그래서인지 완성된 쓰키지 호텔관은 시미즈 기스케의 독창적인 디자인이 가미되었다. 쓰키지 호텔관의 외관은 흙과 회로 두껍게 바른 것 같은 해삼벽[海鼠壁]1)이고, 지붕 중앙에는 절의 종루를 닮은 탑이 솟아 있다. 탑으로 오르는 입구에는 나선형 계단이 있어 일본식도 서양식도 아닌 너무나도 기묘한 건축물이 되었다. 게다가 외국인이 바다에서 직접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는 바람에 원래 후문으로 설계된 나가야문[長屋門]2)이 정문으로 바뀌는 등의 설계상의 변동도 발생했다. 하지만 이 건물은 아쉽게도 1872년 긴자[銀座]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호텔들은 메이지 정부가 내세운 ‘서구화 정책’ 혹은 ‘근대 문명’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명개화(文明開化)의 또 다른 상징으로는 긴자[銀座]의 벽돌거리가 있다. 1872년 발생한 긴자 대화재를 기점으로 메이지 정부는 도쿄 전체를 불에 타지 않는 서구식 건물로 바꾸겠다는 방침 아래 화재로 인한 폐허 위에 서구식 거리(street)를 건설하기로 결정했고, 토마스 워터스(Thomas J. Waters, 1842~1898)에게 설계를 맡겼다. 이렇게 조성된 ‘벽돌거리’ 혹은 ‘렌가가이[煉瓦街]’는 일본 최초로 대로를 중심으로 차도와 인도를 분리했으며 가로수를 심고 가스등을 세웠다. 대로변의 상점 건물을 붉은 벽돌로 지었으며, 부채꼴의 벽돌로 만든 원주로 지탱되는 아케이드를 상가 입구에 붙였다. 이렇게 건설된 벽돌거리의 모습은 19세기 영국과 그 식민지에서 볼 수 있었던 아케이드로 둘러싸인 모습 그대로3) 였다고 한다. 하지만 습기가 많은 일본 환경과 거주자를 고려하지 않고 조성했기 때문인지, 완공 후 약 5~6년간 가옥들이 거의 빈 채로 있었고, 입주 후에도 목조 부엌과 변소 등을 건물 외부에 대나무로 만든 전통 빗물 보호대를 설치하는 등 일본적 요소를 추가한 대대적인 개축 등을 실행했다4)고 한다.

 

벽돌거리의 계획은 수도의 체제를 정비하려는 정부의 생각만으로 진행된, 이를테면 주민 부재의 지역 개발이었다. 타고 남은 가옥의 강제철거를 시작으로 벽돌구조의 비싼 건축비로 인한 집세와 불하료5)문제, 일본의 기후습도에 어울리지 않는 설계상의 약점, 게다가 거주자의 생활양식과 맞지 않는 점도 특이할 만하다. [p. 37]

 

긴자[銀座] 벽돌거리의 변화

출처: <메이지의 도쿄>, pp. 34~35

 

출처: <메이지의 도쿄>, pp. 242~243

 

이처럼 일방적으로 서구화를 하다 보니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도 발생했다.

 

메이지 5년(1872) 연말은 실로 황당하고도 묘한 일이 벌어졌다. 왜냐하면 정령에 의해 지금까지의 태음력 대신에 태양력이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12월은 겨우 이틀 만에 끝나고, 다음날인 3일은 다시 메이지 6년(1873) 1월 1일이 되었다. 이 때문에 관공서에서 지불하는 월급이 1개월분 덜 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작스런 설 준비로 시민들은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pp. 95~96]

 

메이지의 패션

출처: <메이지의 도쿄>, p. 248

 

출처: <메이지의 도쿄>, p. 250

 

일본 여성의 머리모양과 속발

출처: <메이지의 도쿄>, p. 253

 

당대의 아이돌이었다는 ‘뮤수메 기다유[娘 義太夫]’와 메이지 시대의 오빠 부대인 ‘도스루 팬클럽[ド-スル連]’의 얘기는 신기했다. 다만, 이 책에서 언급된 뮤수메 기다유[娘 義太夫]가 사람 이름인지 아니면 ‘걸그룹’처럼 장르 혹은 분야의 명칭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한국의 판소리처럼, 일본에는 독특한 창법으로 말하고 노래하는 다유[太夫]와 다유의 표현을 리드하고 반주하는 샤미센[三味線]으로 구성된 기다유부시[義太夫節]라는 장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저자는 문명개화, 새 나라 만들기, 도시의 시설, 언론의 시대, 도시 만들기, 시민의 생활, 도시의 즐거움, 메이지의 쇠퇴기라는 8개의 주제로 메이지 시대의 건축물과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서양으로부터 들여 온 새로운 문화, 풍습, 사회 현상 등을 깔끔한 일러스트와 함께 차분하게 서술하고 있다. 아마도 저자가 건축학과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 호즈미 가즈오[穗積 和夫, 1930~ ]이기 때문이 아닐까? 전체적으로 역사에 기반을 두면서도 건축물, 도로와 철도, 도시 계획 등에 초점을 맞춰 오늘날의 도쿄가 어떤 기틀에서 형성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백과사전적인 측면이 있다 보니 메이지 시대의 역사를 살피고자 하는 이에게는 다소 난잡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또 흑백 일러스트이기에 건축물들이 비슷비슷해 보인다는 점도 아쉽다.

 

1) 흙벽돌로 된 외벽에 네모진 평평한 기와를 붙이고 그 이은 틈을 석회로 불룩하게 만든 벽

2) 다이묘[大名]이 자신의 저택 주변에 가신들을 위해 나가야[長屋]을 지어 살게 하고 그 일부에 문을 연 것에서 비롯된, 일본 무가 저택의 전통식 문(門)의 형식.

3) 김효진, “일본의 초기 근대 건축의 양상과 변모”, <일본비평> 15호, (2016), pp. 264~265

4) 김효진, 앞의 글, pp. 266~268

5) 불하(拂下)는 국유나 공유재산 또는 귀속재산을 개인에게 팔아 넘기는 일. 다만, ‘불하’라는 단어는 일본식 한자어이기에 ‘매각’ 또는 ‘팔다’로 순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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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의 도쿄
나이토 아키라 지음, 호즈미 가즈오 그림, 이용화 옮김 / 논형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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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江戶]의 등장

 

일본의 수도는 794년에 당시 세계 제일의 대도시였던 중국 당(唐)나라 수도인 장안(長安)을 본 떠 4분의 1 정도의 크기로 조성된, 계획도시 헤이안쿄[平安京, 오늘날의 교토]가 먼저다. 그러다가 고대 율령제 국가가 무너지면서, 교토 사람들이 ‘동이(東夷)’라고 부르며 업신여기던 간토[關東] 사람들이 주역으로 활동하는 중세가 시작됐다. 소위 ‘반도[坂東] 무사’ 혹은 ‘간토[關東]의 무사’들에 의한 막부(幕府) 시대, 구체적으로는 가마쿠라[鎌倉] 막부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에도[江戶, 오늘날의 도쿄]’라는 이름이 역사에 등장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렇다면 ‘에도’라는 도시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본격적인 에도성[江戶城]의 시작은 간토 간레이[關東 管領] 우에스기 사다마키[上杉 定正, 1443~1494]의 가신인 오타 도칸[太田 道灌, 1432~1486, 이하 ‘도칸’]이 1457년에 쌓은 요새라고 한다. 이 후 에도성이 ‘간토 제일의 명성(名城)’으로 불리면서, 많은 학자와 승려들이 황폐해진 교토를 떠나 도칸을 따르기 위해 모였다. 이렇게 그의 위망(威望)이 높아지자, 1486년 그의 주군, 우에스키 사다마키가 그를 암살한다. 도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에도성은 더 이상 번영하지 못하고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런 에도성이 변화를 겪게 된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이하 ‘이에야스’]가 간토를 새로 영지로 받으면서부터였다. 석축(石築) 하나 없이 잡초로 덮인, 흙을 다져 쌓은 토담[土墻]만 남아있는 에도성에 자리잡은 이에야스는 헤이안교를 모델로 삼아 1592년 에도성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세계 제일의 문명을 자랑하는 중국에서는 오랜 경험에서 ‘음양학(陰陽學)’이라는 학문이 번성했습니다. 현대의 천문학과 지리학을 합친 학문으로 인간이 행복한 생활을 보내려면 어떠한 지형에서 살면 좋은가를 점치고 예측하는 일종의 과학입니다.

음양학에서는 도시 만들기의 원리로써 ‘사신상응(四神相應)의 지형’을 선택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주를 지배하는 동서남북 4개의 신을 모시는 다음과 같은 지형을 찾아 도시계획을 하라는 것입니다.

동쪽에 ‘청룡’의 신이 머무는 강

남쪽에 ‘주작’의 신이 머무는 연못이나 바다

서쪽에 ‘백호’의 신이 머무는 길

북쪽에 ‘현무’의 신이 머무는 산

 

요컨대, 산을 등지고 남으로는 바다를 바라보며 태양 빛을 가득 받은 동쪽에서 맑은 물을 끌어들여와 평상시의 음용수로 이용하면서 서쪽에서 들여온 식료로 풍족한 생활을 한다 - 이것을 인간의 이상향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pp. 39~40]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 1536~1598]이 후시미성[伏見城]의 건설을 명하면서 에도성의 건설은 중단됐다. 그러다가 이에야스가 에도[江戶] 막부를 개설하면서 다시 공사가 재개됐다. 이후 에도 막부의 2대 쇼군[將軍]이 된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 1581~1632]의 지시로 축성술의 대가인 도도 다카토라[藤堂 高虎, 1556~1630]가 에도성을 중심으로 소용돌이 모양의 수로가 시계방향으로 끝없이 이어지도록 도시계획의 기본설계를 변경했다.

 

달팽이 모양의 확장계획

사진출처: <에도의 도쿄>, pp. 58~59

 

새롭게 고안해낸 것이 ‘달팽이[の]’ 모양의 거대한 확장계획이었습니다. 에도성을 중심으로 마치 ‘달팽이’를 그리듯이 오른쪽으로 소용돌이치는 모양의 수로를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지금까지 만든 동네를 보존했다는 것입니다. 외각에 있는 구릉이나 계곡과 산 등의 자연지형을 효율적으로 살리며 ‘달팽이’ 모양으로 수로를 뻗어가게 했습니다. 토목기술만 잘 활용하면 에도라는 도시는 그야말로 발전가능성이 무한했습니다.

그리고 이 ‘달팽이’ 모양의 수로에 방사상(放射狀)으로 다섯 갈래의 큰 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에도가 제아무리 커져도 무사의 소비생활을, 쵸닌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으로 충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도시계획은 아주 특이했으며, 처음부터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 계획에 의해 막부는 여러 다이묘들의 부인과 자녀를 에도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1년마다 참근교대(參勤交代)를 안정적으로 실시할 수 있게 했습니다. 전국에서 아무리 많은 무사가 몰려와도 충분히 거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확장계획이 없었다면 에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고작 해야 나고야[名古屋] 정도의 죠카마치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pp. 57~60]

 

토목공사

사진출처: <에도의 도쿄>, pp. 42~43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단단한 암반 위에 돌을 쌓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에도성의 해자는 히비야만을 매립한 갯벌 위에 쌓는 것이기 때문에 무거운 석축은 푹푹 가라앉았습니다.

그래서 진흙 속에 소나무를 나란히 깔고 뗏목을 짜넣고 긴 말뚝을 박아 움직이지 않게 고정시킨 후에 돌을 얹는 방법을 이용했습니다.

이것을 ‘뗏목지형’이라고 합니다만, 가라앉는 일이 잦아 모처럼 쌓은 석축이 공사 중반에 무너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중략 ~

(이에 가토 기요마사는) 무사시노에 우거져 있는 억새풀을 베어내어 진흙 늪 속에 깔고, 10살에서 15살까지의 어린이들을 모두 불러 모아 그 위에서 놀게 하면서 시간을 두고 굳어지게 한 후에 석축을 쌓았다고 합니다. 아사노 가문의 사고로 인해 공사는 늦어졌지만 이렇게 쌓은 석축은 지진이 발생해도 꿈쩍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pp. 79~80]

 

이렇게 석축 쌓는 토목공사가 끝나자 건축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나라[奈良] 호류지[法隆寺] 목수 출신인 나카이 마사키요[中井 正淸]는 그를 따르는 무리와 함께, 혼마루[本丸] 중앙에 솟아 있는 대천수(大天守)의 동-북-서쪽에 소천수(小天守)를 에워싸듯 짓는 마치 고리처럼 연결하는  ‘환립식(環立式)’ 천수를 세웠다.

 

환립식 천수(天守)

사진출처: <에도의 도쿄>, p. 83

 

1640년 4월,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때에 이르러 비로소 에도성이 완공됐다. 거의 50년 만이었다.

 

에도성[江戶城] 혼마루[本丸]

사진출처: <에도의 도쿄>, pp. 104~105

 

1644년의 에도 시역은 44평방 킬로미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일본 제일의 거대도시였습니다. 두 번째 도시인 교토는 21평방 킬로미터 정도였습니다. 언제부턴가 에도는 고대 이후 문화의 중심이었던 교토를 뛰어넘어 그 두 배 이상 되는 거대도시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달팽이’ 모양의 도시계획은 드디어 그 위력을 발휘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도 시민은 모두가 평화롭고 풍요로운 시대가 영원히 이대로 지속될 것이라고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p. 173]

 

이러한 안이함은 메이레키[明曆] 3년(1657)에 발생한 대화재로 사라졌다. 일본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에서 일어난 대형화재로 인해 50년에 걸쳐 세워진 에도성이 불과 이틀 만에 허허벌판으로 변했다.

이에 따라 막부는 서양식 삼각측량 기술에 의한 ‘에도 실측도’를 완성하고, 성곽 내에 ‘방화용 공터[火除け地]’라는 빈 터를 마련했다. 그리고 다양한 건축규제를 적용했다. 예를 들면, 들보 3간(약 5.9m) 이상의 대형 건축을 지을 수 없게 되었고, 도로의 폭이 넓어졌으며, 도로변에는 소화작업을 쉽게 하기 위해 1간(약 1.8m)의 차양을 새로 설치해야 했다.

 

이후 에도에는 거대도시에 얽힌 다양한 재해가 일어났지만 그 때마다 시민은 ‘화재와의 싸움은 에도의 꽃[火災と喧?は江戶の華花]’이라고 여기며 억척스럽고 힘차게 부흥하는, 더 큰 발전의 계기로 삼았습니다. 동시에 가부키와 우키요에[浮世繪] 등,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를 창조해 냈습니다. [p. 108]

 

어쨌든 ‘메이레키 대화재’는 결과적으로 ‘에도’가 ‘거대도시 에도’로 변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뿐만 아니라 화재예방을 위해 1쵸[町]마다 30명으로 구성된 시민소방조직[町火消し]을 모아 ‘이로하 48조’라는 소방대를, 화재감시대[火の見]를 설치하고, 불에 강한 내화건축을 위해 기와지붕 건축을 허가하는 등 변화가 시작됐다.

 

이에야스 이후 발전해 온 소비도시 에도는 ‘흑선내항(黑船來航)’ 이후 개항, 참근교대제의 완화 등을 거쳐 물가상승으로 약탈소동이 발생하는 등 쇠퇴의 기미를 드러냈다. 여기에 도막(倒幕) 운동의 결과로 생겨난 신정부군[倒幕軍]에게 에도성이 넘어가고, 1868년 에도[江戶]가 도쿄[東京]로 명칭이 바뀌면서 이 책은 끝을 맺는다.

 

이 책, <에도의 도쿄>는 ‘에도[江戶]’라는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에도 막부 시대에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그린 책이다. 일본 건축사를 전공한 나이토 아키라[內藤 昌, 1932~2012]의 글과 건축학과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 호즈미 가즈오[穗積 和夫, 1930~ ]의 일러스트가 맛깔지게 결합하여 비전공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쓰여졌다. 중세 도시의 형성과정이나 ‘에도’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옥의 티                                                                                                                                   

p. 12 [거대도시 에도에 관한 연표] 중에서

에도성 완성 시기가 1940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1640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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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답안지 - 시권 고전탐독 3
김학수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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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과거제 인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 셀러가 된 이후, ‘공정(公正)’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의 화두(話頭)가 된 듯하다. 그런다면 ‘공정’이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례는 어떤 경우가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두드러지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분야는 ‘취직’과 이를 위한 ‘입시’일 것이다. 조선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특히 양반을 자처하는 지식인에 있어서는 이 것이 둘이 아닌 하나였다. 게다가 그들에게 있어서 관리가 되는 길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다.

 

먼저, 조선시대 지식인의 가장 큰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던 관료 선발 제도부터 살펴보자. 관료를 선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중국 수(隋)나라의 과목선거(科目選擧, ‘선거제’)에서 시작된 과거제도만큼 고위 관료를 능력에 입각하여 공정하게 선발하는 방법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대한민국의 공무원 제도도 연공서열에 따라 승진한다는 점에서 제도 그 자체만 본다면 과거제보다 공정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아마 그래서 과거제를 고위 공무원 선발에 있어서 제대로 시행한 국가가 중국(587~1905), 한국(958~1894), 베트남(1075~1919)1)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선비의 답안지]는

 

이 책은 조선 시대 선비의 모습을 과거제, 보다 정확하게는 과거 시험의 답안지인 시권(試卷)을 통해 보여준다. 13개의 논문을 엮어 3부 13장으로 구분했다. ‘1부 시권을 살펴보다’에서는 시권이라는 과거 시험 답안지에 대한 분석을 통해 과거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행되는지를 살펴본다. ‘2부 조선의 과거를 이해하다’에서는 장원 급제 비결, 합격자 발표인 방방(放榜)과 과거급제자의 시가행진이라 할 수 있는 삼일유가(三日遊街) 등 사회 풍속 및 여기에 얽힌 비화 등을 알려준다. ‘3부 시권의 행간을 읽다’는 과거 시험에 나왔던 문제, 특히 책문(策問)을 통해 당대의 지식인인 선비의 눈에 비친 사회상을 들여다 본다.

이 중 3부는 조선시대 성리학에 대한 대중의 편견을 교정해주는 측면도 있다. ‘책문’이라는 시험방법과 그 답안들을 통해 왠지 현실 문제에 관심이 부족하고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을 듯한 조선의 선비들이 어떻게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있고, 또 실제로 어떤 해결책을 제시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권(試卷)이란?

 

과거 시험의 답안지를 시권(試卷)이라고 하는데, 시험의 방식 혹은 내용에 따라 제술(製述), 강서(講書), 사자(寫字), 역어(譯語)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과거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제술(製述) 방식은 글을 짓는 능력과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능력 등을 살피는 시험으로 시(詩), 시와 산문의 중간 형태를 띤 부(賦), 어떤 인물의 공적이나 업적을 찬양하는, 전아(典雅)하고 장중(莊重)한 운문인 송(頌), 국왕의 물음에 대해 응시자가 해결 방안 등을 진술한 대책(對策), 어떤 사안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는 논(論) 등을 제출한다. 주로 문학적 능력을 살피는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책(對策)처럼 응시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요구하는, 일종의 논술시험에 해당하는 부분도 있어 그런대로 관료 선발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다고 할 수 있다.

 

강서(講書)는 사서삼경(四書三經) 등 경전을 보면서 물음에 답하는 임문(臨文) 형식과 경전을 시험관 앞에 펴 놓고 외우거나 책을 보지 않고 물음에 답하는 배강(背講)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과(文科)에서 많이 쓰이나 무과(武科)나 잡과(雜科)에서도 사용하는 시험방식이다. 이런 방식의 시험에는 답안 작성을 위한 시권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험절차상 시험문제를 내고, 채점내용을 기록해야 했기 때문에 시권을 작성한다. 즉, 강서 시권이란 시험출제 내용과 점수를 기록한, 일종의 구두(口頭)시험 채점표라고 할 수 있다.

 

역어(譯語)는 <경국대전>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형식이고, 사자(寫字)는 몽골어, 왜어(倭語), 여진어(女眞語) 등으로 된 출제부분의 내용을 외워서 베껴 쓰는 형식이다.

 

 

시권, 무엇을 기재하나

 

시권에 기재되는 내용은 크게 응시자 본인이 기록한 것과 시관(試官) 등이 기록하거나 확인하는 것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가장 시권이 많이 남아 있는 제술의 경우, 응시자는 먼저 본인과 사조(四祖;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인적 사항을 기재한다. 그리고 과목마다 정해진 양식에 따라 답안을 작성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시제(試題)가 짧을 경우는 문제를 그대로 쓰고, 긴 경우에는 ‘문운운(問云云)’ 등으로 문제를 생략한다. 그리고 시험명은 시(詩)나 부(賦)는 시제의 아래쪽, 대책(對策)과 경의(經義)는 대(對), 서의(書義), 예의(禮義), 역의(易義), 시의(詩義)라고 써서 시제의 위쪽에 각각 기록한다. 시나 부는 운자(韻字)를 맞춰야 하고, 경의나 대책의 답안에는 첫 부분과 끝 그리고 서술 중에 우(于), 근대(謹對), 신복유(臣伏惟), 신복독(臣伏讀), 공유(恭惟) 등의 자구를 삽입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답안의 글자 수도 최저 하한선이 있어 그 이상을 써야 했다.

 

응시자가 답안지를 제출하면 시관은 먼저 인적 사항 부분의 근봉(謹封) 여부를 확인한다. 그리고 시권을 연결시킨 부분이나 틀린 곳을 수정한 곳에 도장을 찍는다[착인(着印)]. 그리고 나서 시권을 관리하기 위해 답안지를 10장씩 묶어 천자문(千字文) 순으로 연번호(連番號)를 기재한다[자호(字號)]. 그 다음 점수를 붉은 글씨로 굵게 기록하고, 과차(科次) 즉 등수를 표시한다.

 

어쨌든 과거제가 공정을 강조했기 때문일까? 아무리 훌륭한 실력을 갖추고 뛰어난 내용을 담았다고 해도 시권의 규정된 형식을 지키지 못하면 합격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다소 억울하다고 느낄 사례도 발생한다.

오늘날 시험에서도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기입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1681년 강경에서 15분(分)2)이라는 매우 높은 점수를 받은 주항도(朱恒道)는 시권에 이름과 나이를 써 넣지 않아 불합격으로 처리됐다. 얼마나 긴장했기에 사조(四祖;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인적 사항을 기재해놓고 정작 본인의 인적 사항을 누락했을까?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니 이렇게 웃으면 얘기할 수 있지만, 나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속이 터져 미칠 것 같을 것이다.

 

 

시험 부정을 막기 위한 노력

 

우리가 ‘과거’라고 할 때 떠올리는 대과(大科)는 문관 임용 ‘자격’ 시험으로 소과(小科)에 합격하지 않아도 응시가 가능했다.  1차 시험인 초시(初試)에서 240명, 2차 시험인 복시(覆試)에서 33명을 각각 뽑는다. 3차 시험인 전시(殿試)는 복시에서 선발된 33명의 순위 결정전인데, 여기에서의 순위에 따라 처음 임관되는 품계가 달라진다. 즉, 갑과 1등인 장원(壯元)은 종6품, 갑과 2등인 아원(亞元) 혹은 방안(榜眼)과 3등인 탐화랑(探花郞)은 정7품, 을과 7명은 정8품, 병과 23명은 정9품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현관서용(顯官敍用)과 한품서용(限品敍用)의 임용원칙 때문에 4등 이하의 을과나 병과 합격자들은 사실상 전직관료나 명문가의 자제가 아니면 임용이 어려웠다. 그래서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부정행위에의 유혹도 강해질 수 밖에 없었다.

 

시제(試題)의 사전 누설, 붓에 커닝페이퍼를 숨기는 협서(挾書), 남의 답안을 베껴 쓰는 차술(借述), 답안을 대신 작성해주는 대술(代述), 응시자들이 하나의 접(接, team)을 이뤄 과장에 함께 입장하여 한 자리에 앉아 서로 돕고 의논하여 답안을 작성하는 공동제술(共同製述) 등의 부정행위는 입시부정이 오늘날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도 부정행위를 막으려는 노력은 계속 되어 왔다.

 

첫째, 봉미법(封彌法)이 있다. 응시자의 사조, 나이, 성명, 거주지 등 신원이 기재된 부분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말아올려, 말아올린 부분의 상단·중단·하단 세 곳에 구멍을 내고 끈으로 묶은 다음 ‘근봉(謹封)’이라는 글을 써 넣거나 도장을 찍어 두는 방법이다.

 

둘째는 역서법은 응시자가 작성한 문장의 필체를 시관이 알아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다. 즉, 서리를 시켜 시험내용을 다른 지면에 옮겨 쓰게 한 뒤, 이를 보고 채점하는 것이다.

 

셋째는 시관과 응시자 사이에 장막을 설치하는 것이다. 이는 강경에 있어서 시관이 응시자를 알아보고 공정하지 못하게 채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TV프로그램 [복면가왕]과 비슷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행위는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아마도 사람 사는 곳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비슷한가 보다.

 

 

옥의 티

 

p.27

③ 과시(科試): 고사나 시문 중의 문구를 시(詩)의 제목으로 제시하고 ~ 한시의 일종이다.

⇒ ③ 과시(科詩): 고사나 시문 중의 문구를 시(詩)의 제목으로 제시하고 ~ 한시의 일종이다.

 

 

1) 18세기 후반 대월(大越)의 떠이선[西山] 왕조의 꽝 쭝[光中, 재위 1788~1792] 황제는 베트남 고유의 문자체계인 쯔놈[字喃]을 공식문자로 지정하고, 나아가 과거시험에 이를 사용하여 답안을 작성하라는 파격적인 개혁안을 내놓기도 했다.

2) 강경(講經)의 각 과목마다 통[2분], 약[1분], 조[0.5분]의 점수를 부여하므로 원칙적으로 7과목 합산 최고 점수는 14분이 된다. 단, [주역(周易)]이나 [춘추(春秋)]를 선택했을 경우에는 2배의 점수를 부여하기에 주항도의 사례처럼 15분이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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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제국 15,000킬로미터를 가다 - 한 닢 동전의 제국 여행기 알베르토 안젤라의 고대 로마 3부작
알베르토 안젤라 지음, 김정하 옮김 / 까치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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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5 현제(賢帝) 시기를 로마제국의 전성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저자는 이 물음에 대해 로마 제국의 화폐 가운데 하나인 세스테르티우스 동전을 통해 대답하고 있다. 아,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고려시대의 <공방전(孔方傳)>처럼 가전체 소설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시기 로마 제국에서 사용되던 세스테르티우스 동전을 매개로 로마 제국인의 삶을 스케치하듯이 살펴보는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스테르티우스 동전은 어떻게 유통되었을까? 현대의 주화처럼 이 동전도 로마의 조폐창에서 주조되어 30인으로 이루어진 기마대들에 의해 제국 각지로 수송된다.

 

매번 새로운 통화들이 주조될 때마다 제국의 동서남북 국경지대로 가능한 신속하게 전달하는 것은 당시의 관행이었다. 당시는 통화가 경제적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보 전달과 홍보를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pp. 323~33]

 

이 책에 소개된 동전의 경우, 로마의 조폐창에서 알프스를 넘고 갈리아를 거쳐 배를 타고 영국해협을 건너 제국의 서쪽, ‘론디니움(Londinium, 런던)’ 요새로 향했다. ‘룬디니움’은 지금의 런던을 생각하면 초라할지 모르지만 이 시기에도 이미 런던의 ‘City’에 해당하는 지역이 개발되어 있고 런던브리지의 원형이 되는 다리가 형성되었다니 흥미롭다.

 

이 세스테르티우스 동전의 본격적인 여행은 ‘론디니옴’ 요새에서 총독 마르쿠스 아피우스 브라두아(Marcus Appius Bradua)1)가 동전 한 닢을 동전을 수송한 기마대의 십부장에게 건네주면서 시작한다. 그 십부장이 제국의 서쪽 끝에 있는 빈돌란다(Vindolanda) 요새의 공중목욕탕에서 동전을 분실하고, 그 동전은 누군가의 손을 거쳐 포도주 상인의 돈주머니에 들어간다. 그리고 파리시(Parisii)족의 거주지에 세워진 ‘루테티아(Lutetia, 파리)’를 거쳐 신들의 음료라는 포도주를 만드는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트리어)’에 도착한다. 지금의 룩셈부르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 도시는 독일의 대표적인 와인 산지로 ‘모젤 와인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이다.

 

오랫동안 포도 재배를 허가받은 유일한 주체는 군단의 군인들이었다. 이들이 길게 펼쳐져 있는 국경선을 따라 주둔한 상황은 포도주 생산의 지역화에 기여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실질적으로 가장 큰 소비자였기 때문이다. 포도 재배는 종종 이 국경지역의 경작지를 정착의 대가로 제공받은 퇴역군인들에게 위임되었다.” [p. 86]

이로 인해 유럽 와인의 주산지와 고대 로마제국의 군대 주둔지가 겹치는 일이 많다.

 

모곤디아쿰[Mogontiacum, 마인츠]에서 호박(琥珀) 보석 상인은 안전을 위해 노예 상인과 동행하면서 고객이 있는 메디올라눔[Mediolanum, 밀라노]로 향한다. 여기서는 조선의 여성과 달리 로마의 여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좀더 많은 권리를 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명품을 두르고 거리를 거니는 메디올라눔의 여성들


출처: <고대 로마 제국 15,000킬로미터를 가다>, p. 162

 

공화정 당시 로마의 결혼은 항상 남편에게만 유리했을 뿐, 부인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결혼에서 여성에 대한 보호권은 마치 물건처럼, 그리고 집안의 애완동물처럼 부친에게서 남편에게로 넘겨진다” [p. 165]

공화정 시대가 끝나면서, 여성은 경제적으로 독립했고 재산에서도 남편과 동일한 권리를 획득했다. 이혼하기 위해서는 당사자들 중 한 명이 증인들 앞에서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면 그만이었으며, 그 순간 당사자들의 이혼이 결정되었다. ~ 중략 ~

이처럼 트라야누스 황제의 시대에 부유한 여성은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독립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자신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유일한 주체였다. 또한 특히 돈 때문에 결혼한 자신의 남편을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pp. 166~167]

어떻게 보면 고대 로마의 여성들이 중세나 근대 초기의 여성보다 더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뇌수종 수술을 하는 아리미늄의 외과의사


출처: <고대 로마 제국 15,000킬로미터를 가다>, p. 229

 

다른 도시의 경우, 예를 들면 이탈리아 북부의 아리미늄[Arriminum, 리미니]에서는 외과 의사에게 충치 치료, 백내장 치료, 뇌수종(腦水腫) 치료 등을 받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로마의 관문 역할을 하는 오스티아[Ostia]는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온갖 사람과 물건들이 유입된다. 때문에 현실에 존재하는 ‘언어의 바벨탑’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언어가 혼재(混在)한다. 이런 식으로 여러 도시들에서 살아가는 로마인의 삶을 그려낸다.

 

이렇게 소개되는 에피소드는 그냥 짧은 역사소설을 엮은 것처럼 보이지만, 세스테르티우스 동전의 여정(旅程)에서 묘사된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실제로 그 시대에 그리고 그 장소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실존 인물이고 실제로도 그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p. 10]고 한다. 게다가 이 책에 실린 “로마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도 그 대부분이 ‘진짜’이다. 왜냐하면, 마르티알리스, 오비디우스2), 유베날리스와 같은 고대의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에서 인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p. 11]

아마도 그래서 에피소드들이 생생하게 그려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실된 삼국시대 이전의 기록들을 생각하면, 수많은 전쟁과 자연재해 등을 거치면서도 이런 기록들이 남아있다는 것이 부럽다. 동시에 시공간을 뛰어넘어 다양한 신분의 사람으로 고대 로마제국을 여행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이 책을 쓴 저자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이런 것을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잡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 덧붙이자면 책 중간중간에 삽입된 삽화는 여행 에세이의 사진이나 삽화처럼 상상하던 것을 형상화해서 한 눈에 들어오게 해서 좋았다.

 

1) 마르쿠스 아피우스 브라두아는 적어도 111년부터 118년까지 브리튼 총독으로 재직했었다고 알려졌다.

2)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 나소(B.C. 43~A.D. 17)은  <사랑도 가지가지[Amores]>, <변신이야기(Metamorphoses)> 등의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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