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로마사 2 - 왕의 몰락과 민중의 승리 만화 로마사 2
이익선 지음, 임웅 감수 / 알프레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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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비전문가가 쓰고 그린 로마사를 읽는 느낌은 어떨까라는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2~3년 정도 걸릴 것을 예상하고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이미 시간이 훌쩍 지나 10년이나 되는 시간이 필요했고 드디어 올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그리고 로마사에 대한 컨텐츠는 기대 이상이었다. 이미 마키아벨리의 <로마사논고>, 예전과는 열광했지만 지금은 정치적 성향 때문에 더 이상 관심을 끊게 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그리고 최근 연달아 출간되고 있는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를 통해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오래 전에 읽었기에 잊어버려 생소한 이야기들을 다시 만나게 됐다. 특히 로마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넘어가는 시기는 역사적으로도 오래되었기도 하거니와 사료들의 절대부족으로 인해 저자가 표현한 대로 전승에 상당 부분 의존해야 하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만화 로마사> 두 번째 이야기는 기원전 509년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반왕정 세력이 거만한 타르퀴니우스를 몰아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건국 이래 250년 동안 지속된 왕정은 라틴계와 사비니계 토착 귀족과 에트루리아 왕들의 연합체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저자는 유부녀 폭행 사건으로 공화정 혁명이 시작되었다는 전승에 의문을 표하며, 대신 귀족 계급과 전쟁을 통해 획득한 토지분배라는 당근정책으로 민중을 포섭해 숫적 우위를 지키려는 왕정 세력 간의 계급투쟁적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고 분석한다. 어찌 되었던 더 이상 왕의 독재를 원하지 않았던 로마 민중과 귀족들은 로마 부근에서 호시탐탐 왕정복고를 노리는 타르퀴니우스의 위협은 물론이고, 인근 부족의 침입에도 대비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특히 클루시움의 강력한 에트루리아 연맹의 수장이었던 포르센나의 원조를 받아 거의 신생 공화정 로마를 포위하고 탈환직전까지 가지만,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기록될 정도의 기개와 의기를 가진 가이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같은 영웅들의 분전에 힘입어 가까스로 포르센타를 설득해 그전에 점령한 베이이를 반환하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포르센나군을 철수시키는데 성공한다.

 

로마 공화정 체제의 수호를 위해 이런 외부로부터의 충격과 싸우는 와중에, 로마 내부에는 당장 해결해야 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원로원으로 대표되는 로마의 실질적 지배계급인 귀족과 상대적으로 권한과 사유재산이 적었던 평민 간의 대립이었다. 로마가 궁극적으로 미래에 ‘팍스 로마나’라는 세계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그런 내부의 모순을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공화정 로마의 끊임없는 팽창은 제국주의적 수탈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귀족에 비해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평민을 달랠 수 있는 전리품과 토지를 분배하기 위해서는 전쟁이 꼭 필요했다. 그런 실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는지 하루가 다르게 팽창하는 로마의 위협을 느낀 이탈리아 반도 내의 유력한 부족은 시시때때로 로마를 침공해 왔다.

 

문제는 그런 상시적 전쟁국가 로마의 현실이 평민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평민들의 의무 중에 하나인 병력소집에 응하게 되면, 그들의 농경지는 누가 경작한단 말인가. 그리고 증가하는 채무 때문에 채무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로마 평민들의 의무였던 군복무는 그들에게 짐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회적 평등권 주장이 점증해 가던 로마 사회에서 그들이 가진 강력한 항의의 수단이기도 했다. 기원전 494년 볼스키 족과 아이퀴 족의 침공 와중에 로마군의 중무장 보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민들이 침공에 대비하는 대신, 성산으로 알려진 몬스사케르 산에서 자신들의 권리신장을 주장하며 시위에 돌입했다. 로마 원로원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평민들의 권리를 보호할 2인의 호민관 제도와 평민회 도입을 승인하기에 이른다. 공화정 도입 이래 반세기만에 로마 평민들은 비로서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둔 것이다.

 

계속되는 외적의 침입에 대항해서 오늘날 미국 신시내티 시의 유래가 된 킨킨나투스를 독재관으로 선출해 군사대권을 맡기기도 했다. 훗날 술라나 카이사르가 원래 독재관 취지를 변형시켜 자신의 독재에 이용하기도 했지만, 첫 독재관이었던 킨킨나투스는 보름만에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대권을 원로원에 반납하는 그야말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원형을 보여주기도 했다. 어쩌면 공화정 로마가 숱한 위기를 모면하고 국가를 유지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런 엘리트 계급의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진행 중인 국가원수 탄핵의 과정에서 들어나는 지배 엘리트 계급의 파렴치한 국정농단 행위를 보며, 왜 우리나라에는 고대 로마 사회에서 숱하게 목격할 수 있는 그런 끝없는 사회지도층의 자기희생 대신 부정부패와 기회가 되었을 때 사리사욕을 챙기겠다는 추한 욕망만이 존재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 현대인들의 사고가 기원전 5세기를 살던 사람들보다 못하다는 비애감에 서글퍼졌다.

 

다시 고대 로마로 돌아가 로마 평민들은 호민관 제도와 평민회 도입에 이은 최초의 성문법이라고 할 수 있는 <12표법>(BC 451), 귀족과 평민간의 결혼을 허용하는 카놀레이우스법(BC 445), 2명의 최고지도자인 집정관 중 한 명은 평민 중에 선출되어야 한다는 리키니우스법(BC 367)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평민회 의결 사항은 원로원의 승인 없이도 법적 효력을 지니게 된다는 호르텐시우스법(BC 287) 등이 차례로 통과하면서 귀족과 평민 간의 갈등이 진정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외부적으로도 가공할 갈리아 족의 침공으로 수도 로마가 거의 점령될 뻔하기도 하고, 50년에 걸친 삼니움 전쟁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듯이 5번이나 독재관의 자리에 오른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의 지도 아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발전의 전기를 마련했다. 특히 마그누스 그라이키아의 거점이었던 타렌툼 전쟁으로 도시국가 타렌툼을 정복하면서 지중해 패권 장악을 위한 거점 확보에 성공한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타렌툼 전쟁에서 상대했던 피로스 대왕의 코끼리 부대와의 전투는 공화정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 넣었던 카르타고 한니발 부대의 맛보기였던가.

 

물론 일단의 평민들을 위한 개혁 조치들과 법안들이 마련되었다고 해서, 파트리키(혈통 귀족)와 플레브스(평민) 간의 갈등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두 계급 간의 차별은 존재했고, 이 두 계급 간의 계급투쟁은 어쩌면 공화정 로마 기간 동안 내내 지속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브루투스가 100명을 추가해서 300명 정원이 된 원로원은 태생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고, 새로운 인원의 충원에 인색했다. 부유한 평민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정치적 성공을 의미하는 원로원 진출을 도모했지만, 건국 이래 수백 년을 이어오면서 특권층을 형성하게 된 파트리키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시스템을 흔들 지도 모를 신입 회원의 증가를 원하지 않았다. 어쨌든 원로원이 중심이 된 과두정 형태의 로마 공화정은 왕정을 붕괴시켰고, 대외적 갈등들을 봉합시키면서 이탈리아 반도 통일에 성공했으며 세계 제국으로 가는 도약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곧 출간될 3권 <지중해 쟁탈전>에서는 훗날 로마의 곡창이 되는 시칠리아 섬의 원주인이었던 해양세력 카르타고와의 일대결전이 기다리고 있다.

 

오래전 역사 시간에 막무가내로 외웠던 12표법, 리키니우스법 그리고 호르텐시우스 법이 생기게 된 과정을 다시 돌아보는 건 역시 거시 만화사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모름지기 역사 공부를 위해선 과정이 중요한 법인데, 무조건 암기식으로 외우니 그게 오래 갈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만화 혹은 독서로 만나게 되니 그야말로 이해가 쏙쏙 됐다. 역사 교육의 현장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지면 정말 좋겠다는 공상을 해봤다. 시대가 퇴행한 것 같은 국정교과서가 부활된 시절에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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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1587 만력 15년 아무일도 없었던 해
레이 황 지음, 김한식 외 옮김 / 새물결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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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책은 두 번 사서 두 번 읽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내게 레이 황의 <1587 만력 15년 아무일도 없었던 해>가 그런 책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어제부터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예전에는 그렇게 진도가 나가지 않던 책을 이번에는 쾌속의 속독 중이다. 시절이 어수선한 탓인진 모르겠지만, 거대한 제국의 붕괴가 시작되었던 해의 기록을 거시적 차원에서 다룬 저자의 실력이 돋보이는 수작이 아닐 수 없다.

 

9세에 신종이자 만력제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 친근한 주익균이 명 제국의 일인자가 된 지 15년이 지난 어느날 오조 사건이라는 희극적 사건이 발생한다. 저자는 언뜻 보기에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은 사건 하나에서 파란만장한 역사 드라마의 시작을 알린다. 천여 개에 달하는 현을 효율적으로 지배하는 대제국의 통치는 법률과 시스템만으로 가능하지 않았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그보다 고래의 윤리 도덕에 의한 교화 그리고 제현의 기로와 신사의 협력이 절대로 필요했다. 무엇보다 제국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문관 집단과의 관계가 중요했을 거라고 저자는 추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는 직접 경작하는 시늉을 하며 모든 번잡한 의례들을 소화해 내야했다. 어린 나이에 제국의 일인자가 된 만력제는 스승과 통치를 위한 유능한 조력자가 필요했고, 그런 필요를 내각대학사 원보 장거정과 대반 풍보가 채워졌다.

 

황제가 어린 소년에서 의젓한 청년 황제로 성장해 가는 동안의 집권 초반의 10년은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고 무사태평한 시절이었다. 장거정이 발탁한 총병 척계광을 비롯한 일단의 무인들이 동분서주하며 북로남왜를 제압했고, 평소 검약을 주창한 내각대학사의 의도래도 사해의 지배자인 황제조차 마음대로 재정을 집행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장거정 자신의 축재와 사치스러운 생활은 예외라는 점이 존재하고 있었다. 정치가로서 여러 가지 면에서 장거정은 확실히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수신제가에는 좀 부족한 인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관리들에게 박봉을 제공하는 명조의 시스템은 구조적인 관리들의 부정부패의 원인을 제공했다. 장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궁정의 방대한 지출과 2만 명에 달하는 과다한 환관의 숫자 그리고 근위부대의 열악한 근무조건에 대한 지적도 저자는 빠뜨리지 않는다.

 

명나라 태조 홍무제 주원장은 승상제를 폐지했지만, 내각대학사가 실질적인 황제의 대리인으로 비서실장과 고문으로서 최고 권력을 행사했다. 거대한 영토에서 매일 같이 쏟아져 들어오는 그 수많은 상주문을 황제가 일일이 검토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후대에 환관은 무지하고 축재만 밝히는 부정적 이미지로 그려져 있지만, 명조대의 환관은 과거를 통해 입신한 문관 집단 이상의 실력을 가진 엘리트 집단이었다. 어려서부터 전문적 교육과 훈련은 받은 환관 중에 병필태감으로 발탁된 유능한 인재들은 방대한 분량의 상주문을 사전에 읽고 요약해서 황제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 게다가 동창이라는 비밀경찰/특무기관의 장이었던 대반 풍보와 대학사 장거정이 협력해서 정보를 스크린할 수만 있다면, 어린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 같다. 자신에게만 관대한 이상주의자 장거정의 무단통치가 계속되면서 그에 반대하는 집단의 저항 역시 점증되기 시작했다. 장거정의 뒤를 이어 제국의 일인자가 된 신시행은 도덕률로 상대방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사리사욕도 추구했던 문관 집단의 이중성을 포착하지 못했던 전임자의 사례를 통해 교훈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고로 타인의 실패는 내 성공의 바탕이지 않은가.

 

자그마치 48년간 제위에 있었던 만력제는 제위 10년차에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첫 번째 아들이었던 주상락이 탄생했고, 그동안 자신을 보필해서 제국을 대리통치했던 장거정이 죽었다. 탄생과 소멸이라는 인생의 순환과정처럼 황제의 스승이자 총신 장거정의 인생 역시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생전에 부친의 탈상 문제 때문에 반대파들의 극렬한 탄핵으로 홍역을 겪었지만, 소년 황제의 절대적 신임으로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지만 사후에는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겉으로는 검약을 주창하면서 자신만은 예외로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언행불인치하고 파렴치한 공직자로 비난받기 시작했다. 만고의절을 위해 죽음마저 불사하고 황제에게 상주문을 빗발처럼 생산해 내던 전국 지식인들의 파상적인 공격 앞에 이미 죽은 내각대학사의 명예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장거정의 후임자이자 현실주의자였던 수보 신시행이 분석했던 것처럼 문관 집단의 이중성에 대해 적절한 타협 대신 강공책으로 문관 집단 전부를 적으로 만들어버린 내각대학사의 치명적 실책에 대한 지적이 매섭다.

 

물론 이 정도의 위기 때문에 거대한 제국이 근간이 흔들린다는 건 말도 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24세의 나이에 문관 집단의 이중적 모습과 그들의 집요한 권력 투쟁 그리고 결정적으로 문관 집단이 “폐장입유”라는 이유로 청년 황제가 사랑하는 3황자를 황태자로 삼을 수 없게 되면서 장기간에 걸친 정치적 태업/파업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근 30년 동안, 황제는 상주문에 대한 주비도 내리지 않고 인사권 행사도 거부했다. 물론 신하들이 무도한 군주를 폐할 수도 있었지만, 황제의 한 세대에 걸친 태업 정도로는 폐립의 이유가 되지 않았다는 점도 저자는 냉철하게 지적한다. 문제는 그렇게 허송세월한 시간이 망국으로 치닫는 시계를 가속화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책의 절반가량 읽고 나서 책의 구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봤다. 우선 저자는 1587년 당시 최고권력자였던 만력제를 필두로 한 권력집단의 실상을 해부했다. 황제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위해 대옥사도 마다하지 않았던 태조 홍무제와 달리 만력제는 거의 바지사장에 가까운 황제일 따름이었다. 최고 통치자였던 만력제가 사실은 자금성의 죄수였다는 표현은 절묘했다. 장거정과 신시행으로 대변되는 문관 집단이야말로 명제국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법률과 시스템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사서에 따른 도덕 윤리야말로 제국 최고의 규범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확고한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폐장입유를 원한 만력제의 집요한 입태자 지연전술도 결국 자신의 뜻대로 관철되지 않았다. 암군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어려서부터 최고의 스승으로부터 제왕의 도를 배운 총명한 황제는 명나라 군신관계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무위의 방법으로 소극적 저항에 나선 것이었다.

 

다음은 타협을 모르는 보수적 원칙주의자이자 모범관료 해서를 통해 명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농촌 조직을 명철하게 분석했다. 명태조의 건국 이래 20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여전히 이 거대한 제국의 기반은 농촌경제였다. 제국은 인구과잉과 전국적 재정제도, 교통 통신제도의 개선 그리고 박봉에 시달리는 문관들의 인사 및 급여 제도 같이 시급한 제도 개혁이 대두되었지만, 문관 집단의 고질적 이중성 때문에 그 어떤 개혁도 추진될 수 없는 구조적 모순의 질곡에 빠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해서 같은 소수의 청렴결백한 모범관료들의 분전만으로는 도저히 일상화된 관리들의 부정부패 수입인 상례 같은 악폐들을 현실적으로 척결할 수 없었다. 해서 역시 홍무제 당시의 제도야말로 현상의 문제들을 타파하기 위한 최상의 해결책으로 생각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명나라 농촌경제를 지탱하는 농민들의 삶이야말로 제국의 영속을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돌봐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수탈함으로써 발생할 미래 자신들의 경제적 이권을 포기할 수 없었던 문관 집단의 비정한 이중성을 저자는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비판한다. 그들은 현상유지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현실세계의 균형을 가져올 지도 모를 해외무역이나 상공업의 발달로 인한 변혁을 애써 외면했던 것이다.

 

레이 황이 주목하는 다음 분야는 척계광으로 대표되는 군사다. 태조 이래 명제국은 문관 위주의 정책으로 일관해 왔다. 군에 대한 징병과 보급 같이 필수적인 문제도 역시 문관들의 소관이었고, 당말 군권을 가진 절도사의 발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왜구와 오랑캐의 침공이 일상화된 남부의 절강 복건 지역 혹은 북쪽 장성 지방에 강력한 군권을 가진 총병의 등장에 문관 집단들이 경계심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실제로 수도 북경 부근의 군사령관이 반심을 품는다면, 무슨 수로 그들을 제압할 수 있었겠는가? 명나라 시대 군조직의 존재이유는 혹시 모를 지방 반란에 대한 진압이 최우선 목적이었다. 그런 상황이니 외부의 가공할 침략에 대한 유기적이고 조직적인 대응과 방어가 불가능했다. 북로남왜라는 표현처럼, 소수 무인집단으로 이루어진 남방에 출몰해서 끝없이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에 대해서도 그리고 연례행사처럼 진행된 알탄으로 대표되는 북방 몽골족의 침략에도 조정은 무기력한 대응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절강성 용병들로 구성된 척계광의 척가군은 엄정한 군율과 혹독한 훈련 그리고 무엇보다 중앙의 실력자 담륜과 장거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왜구와 몽골에 대한 상승군의 이미지를 쌓아나갔다. 물론 척계광 개인의 용병술에 대한 뛰어난 실력과 원앙진으로 대표되는 전술훈련이 적에 대한 대응력을 높여준 것도 사실이다. 척계광은 군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주어진 현실 조건 아래서 최선의 방법들을 뽑아내는데 주력했다. 남부 지방 왜구들을 소탕하고, 계주총병이 되어 북방전선의 실질적인 총책임자가 되어 장성의 보루 구축에 전념하던 척계광은 장거정 사후, 실각되어 말년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와 장거정이 추진했던 군비 확장책이 성공했다면, 역사의 가정이긴 하지만 만력 연간 말년의 대청작전이었던 사르후 전투에서의 굴욕적인 패전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만력 15년>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인물은 바로 이단아 지식인 이탁오다. 레이 황 저자에 따르면 이천년 전 등장한 유가사상이 진한시대에는 선진적인 관료제도로 새로운 학풍으로 받아 들여졌을 진 몰라도, 특히 명나라 시대에는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진단이다. 문관 집단이 가장 중요시하던 현상유지 균형 정책과 농촌경제와 생산력 발전을 가로 막은 상공업의 발전에 대한 무관심, 법률 시스템을 대신해서 황제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사서에 의한 공맹사상의 인의중시는 결국 사회발전에 퇴보를 가져왔고, 나아가 망국에 이를 수밖에 없는 모순의 결정적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관료 출신 철학자 이탁오는 관료로서의 성공 대신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선택했다. 주희가 개발한 신유학 이데올로기에도 반대하면서, 유가가 추구하는 도의 완성과 불교 혹은 도가의 그것이 다르지 않다는 이단적인 주장을 내세우기도 했다. 번잡한 의례를 중요시하는 공맹사상과 지식인 관료 계급에 비판적이면서도, 실생활에서는 그들의 지원에 힘입어 여생을 보내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여 주기도 했다. 모범관료가 해서가 지방관들에게 골칫거리였던 것처럼, 이단적인 주장을 설파하면서 당대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행실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던 이탁오는 결국 노년의 옥중에서 자결로 생을 마무리한다.

 

400쪽 남짓한 레이 황의 <1597 만력 15년 아무일도 없었던 해>를 새해 들어 숨가쁘게 완독했다. 예전에 샀던 책을 7년 만에 다시 한 번 사서 읽는 느낌은 아무래도 남달랐다. 그 시절에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리뷰를 썼었는지 궁금해졌다. 이 리뷰를 다 쓰고 나면 한 번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나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는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반역의 책> 그리고 명청교체기를 다룬 <룽산으로의 귀환>의 재독, 작년에 읽다 만 <건륭제> 그리고 상당 부분 읽은 하버드중국사 <청제국> 같은 숙제를 마쳐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역시 대가의 저술은 다시 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던 1587 만력 15년을 기점으로 해서 벌어졌던 다양한 인물들이 엮어낸 역사드라마의 귀결이 사실은 거대제국 명나라가 영속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자 역사의 터닝포인트일 수도 있었다는 가정은 의미심장하다. 그 어느 때보다 혼란한 시절을 통과 중인 우리는 미래에 어떤 평가를 내리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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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완벽한 1년
샤를로테 루카스 지음, 서유리 옮김 / 북펌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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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로테 루카스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다. 비프케 로렌츠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같은 이름의 작가라고 한다. 후자가 본명이고 전자는 비프케 로렌츠의 필명이다. 그전에 비프케 로렌츠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두 권의 책이 소개되었는데 미처 몰랐다. 독일 뒤셀도르프 출신으로 대학에서 독일 철학과 영문학을 전공했다.

 

작가가 현재 독일 함부르크에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일까? 소설 <당신의 완벽한 1년>의 공간적 배경 역시 함부르크다. 소설의 시작은 비교적 평범하다. 사랑하는 아내 티나를 친구에게 빼앗긴, 다시 말해 오쟁이진 남자 요나단 N. 그리프는 새해의 시작을 달리기로 시작하지만, 아내가 남긴 선물 때문에 온통 정신이 시끄럽다. 도대체 티나는 배불뚝이 그놈의 뭐가 좋다고 신나서 따라간 걸까? 훨씬 더 부유한 출판사 사장인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부유함을 거부하고, 재산분할 마저 마다하고 떠나간 아내에 대한 애증이 묻어난다. 그때 불쑥 등장한, 누군가 자신의 자전거에 두고 간 다이어리의 주인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원심력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번갈아 등장하는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나 마르크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르크스, 하지만 이름과 달리 그녀는 보육원 교사로 이번에 박봉의 힘든 보육교사 대신 절친 리자를 꼬드겨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는 찰나다. 그것은 바로 아이들의 여가를 책임지는 <꾸러기교실>, 그런 게 있다면 나라도 당장 아이를 맡기고 싶은 절절한 심정이 들 정도로 멋진 아이디이거 아닌가. 암튼 최근 신문사에서 해고당한 남친 지몬 클람 씨를 이용해서 성대한 오픈 파티를 구상하지만 꼭 필요할 때, 남친이 지독한 감기에 걸려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위기, 위기의 연속이다.

 

다시 요나단의 이야기로 돌아가 신년부터 월급사장 마르쿠스 보데로부터 출판사 매출이 급전직하하고 있다는 비보를 전해 듣는다. 보데 역시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 할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가족과 신년축하를 하는 대신 매출 부진의 이유를 찾는데 휴일을 보낸 걸 보면 말이다. 대학에서 철학 공부를 한 요나단에게 출판사 사장이란 직함은 어울리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디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던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찾아가 이런저런 고민을 상담해 보려고 하지만, 어린 나이의 자신을 버려두고 자신의 곁을 떠나 버린 이탈리아 출신 어머니 소피아에 대한 알쏭달쏭한 수수께끼만 추가했을 뿐이다. 다이어리를 찾아 주기 위해 방문한 점술사 아니 인생상담사 사라스바티 슐츠로부터 들은 새해에는 좋은 일들이 생길 거라는 위안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생에서 결정적인 한 방이란

 

혼란스러운 인생의 갈림길에 선 요나단의 고민은 또다른 소설의 주인공 한나가 지몬에게서 들은 충격적인 이야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청혼할 거라고 예상한 자리에서 말이다. 왜 이 책의 띠지에 조조 모예스의 <미 비포 유>를 언급했는지 바로 알게 됐다. 그랬었군. 너무 장황하게 소설의 줄거리에 이야기할 순 없으니 이 정도에서 삼가는 게 맞을 듯 싶다. 소설 초반에 요나단과 한나가 시간과 공간을 교차하면서 등장하는 장면이 조금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이 지점을 기점으로 해서 소설은 또다른 도약을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시련을 극복해야 하는 사람과 우연히 습득한 다이어리에 맞춰 그동안 자신이 해보지 않았던 일들에 도전하는 출판사 사장님의 도전기가 흥미를 더해 간다.

 

샤를로테 루카스 작자를 처음 만나는 거라 그런지 그녀의 스타일이 어떤지 감을 잡을 수가 없지만, 이 로맨스 소설의 짜임새는 상당하다. 웃픈 로맨스에 구성진 스토리텔링, 미스터리까지 가미한 소설의 재미는 새해 벽두에 읽기에 아주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주인공 요나단 N. 그리프(주인공의 이름이 Grief 라는 설정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인생은 그렇게 후회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가 지닌 인생의 트라우마의 비밀을 해결해 나가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부주의하게 두었던 회사 재무 서류를 찾기 위해 재활용 쓰레기수거차를 뒤지던 중에 만난 노숙자 레오폴트는 요나단의 정신적 멘토가 거듭난다. 요즘 드라마에서 유행하는 브로맨스의 시작이라고 해야 할까? 순수문학만을 고집하는 그리프손&북스 출판사의 사장으로서 심각한 출판사의 매출부진 앞에 과연 대대로 이어져 온 가업을 고집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오롯하게 요나단의 몫으로 떨어진다. 보데 사장이 제안한 자사의 브랜드가 싫다면, 새로운 임프린트로 대중서적을 출판하는 것도 어떠냐는 의견도 점점 순수문학 대신 대중문학을 선호하는 세태를 포착해낸 작가의 냉철한 현실감각이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했다. 예전 같으면 절대 가지 않았을 팝스타 저리가할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낭독회에 참가한 장면도 재밌는 삽입이었다. 덕분에 새로운 스릴러 작가에 대해 알게 되었다, 고마워요 샤를로테.

 

요나단 개인적으로는 절친 토마스와 눈이 맞아 떠난 티나에 대한 감정이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 질투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요나단은 예전에 사랑했다고 믿었던 티나에게 전화해서 진정을 담은 사과를 건넨다. 새로 만난 사랑의 와중에 과거에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를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은 덕분에 파국으로 치닫는 가운데, 정말 자신이 해결해야 했던 과거 수십 년간 외면했던 엄마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보통 사람에겐 한 가지 정도일지도 모르는 인생에 해결해야 할 숙제 같은 결정적 한 방이 이 남자에겐 너무 과하게 많다는 느낌이다.

 

소설의 또다른 축을 차지하는 한나의 경우는 또 어떤가. 매사에 지나칠 정도로 긍정적이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캐릭터의 주인공 한나.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냉소적 남자친구 지몬 클람의 불투명한 미래를 교정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지만, 결과는 그녀의 예상과 너무 달랐다. 한나와 지몬의 관계를 통해 내가 아닌 타인의 삶을 드라이브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나의 최선이 타인에게 최고의 행복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정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겐 사라스바티 같은 인생상담사가 필요한 지도 모르겠다. 삶이 모두 컨트롤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로서는 인정하고 싶진 않겠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이 소설도 곧 영화화되지 않을까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 관객들을 유혹할 수 있는 이런 재밌는 요소들로 가득한 이야기를 영화업자들이 가만 놔둘 리가 없지 않은가. 짧은 동영상으로 제작된 북트레일러를 보면서 우리는 참 소소한 행복들을 놓치면서 사는구나 싶어졌다. 비록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이지만 그 가운데 감사할 일이 하나도 없을까? 평소라면 내가 해보지 않을 일에 도전해서 행복을 찾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작가 샤를로테 두카스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다음의 문장으로 두서 없고 장황한 리뷰를 마친다. 당신은 어제 마지막으로 행복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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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이사카 고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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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가 작곡한 이른바 “소야곡”이라 알려진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란 곡을 아주 좋아한다. 애청하는 몇 안되는 클래식 곡이라 그런지 다작으로 유명한 이사카 고타로 작가의 연작소설집의 제목을 보고 마음이 이끌렸다. 그리고 보니 한동안 이사카 월드 방문이 뜸했던 것 같다. 한참 책을 읽던 시절, <골든 슬럼버> 그리고 <그래스호퍼> 등을 읽었었 것 같은데, 세밑에 만난 이사카 월드는 바지락 칼국수 같이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라고나 할까.

 

역자 후기에서 소설의 키워드를 “만남”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충분히 공감이 간다. 우리는 만남이 없다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어떤 관계든 만남이 있어야 출발이 되고, 지속적인 만남으로 관계가 유지되지 않는가. 그런데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만남의 중심에는 헤비급 복싱 챔피언 윈스턴 오노라는 인물이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밴텀급이나 라이트급 챔피언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동양출신 헤비급 챔피언이 있었던가? 하긴 요즘은 격투기 같은 종목이 예전 권투의 인기를 빼앗는 바람에 권투 경기에 대한 열기가 예전 같진 않지. 뭐 그래서 더 반가웠는지도 모르겠다.

 

매사에 무심한 남편에 질려 딸아이를 데리고 가출한 아내 때문에, 회사에서는 유능한 시스템 엔지니어로 알려진 남자가 홧김에 서버를 걷어차서 수하 직원이 데이터 수집을 위해 온라인 방식 대신 거리에 나가 설문조사를 하게 되었다는 설정도 흥미롭다. 아마 인터뷰를 진행해본 사람이라면 그런 일이 얼마나 어렵다는 걸 잘 알지 않을까? 그래서 개인적으로 누군가 인터뷰를 요청해 온다면 빙빙 돌아가는 카메라 앞에서 횡설수설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경험이 떠올랐다. 그렇게 남녀관계에서 극적인 만남을 꿈꾸는 남자에게 찬스는 어김없이 찾아온다.

 

자신의 일터인 미용실 손님으로 만난 이로부터 남동생을 소개 받고, 무려 일 년 동안 전화로만 일상을 나누는 커플 이야기도 새로운 천년의 세태인가 싶기도 하다. 가끔씩 일 때문에 남자로부터 오는 전화가 뚝뚝 끊기기도 하지만 편안한 만큼 그 정도의 두절은 감수해야 하지 싶은 여자의 속마음. 그런데 반전은 따로 있다. 그렇게 숫기 없어 보이는 남자가 바로 헤비급 챔피언이었다니, 놀랍군.

 

영화 <민 걸즈>의 연상시키는 학창시절 여왕 같은 존재가 어느날 느닷없이 자신이 다니는 화장품 회사 광고를 따내야 하는 을로 등장하다니, 인간사 요지경이라는 말이 하나도 틀림이 없군. 직장 동료는 가혹한 복수를 종용하지만 미운 오리 새끼마냥 예전의 모습에서 탈피한 주인공에게 그럴 마음은 없어 보인다. 오래된 네메시스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서 관계를 파탄시킬 수도 있는 공작을 벌일 충분한 기회가 있었지만, 그게 무슨 의미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역시 여기에도 반전이 숨어 있다. 네메시스가 공들이는 남자가 유부남이라니! 무겁지 않고 서로 얽히고설킨 이야기에 제각각 연관 있는 인물들의 관계도를 그려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헷갈릴 수도 있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아,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에 등장하는 수많은 범상치 않은 인물 중에 최고는 역시 미래가 궁금한 이들에게 짧은 음악으로 100엔(샤쿠엔) 짜리 점을 쳐주는 기타리스트 사이토 씨가 있었던가. 아니면 사이토 씨는 이미 어떤 결정을 내릴 지 의뢰자의 방향성을 읽고서 그 결정을 촉발시키는 서비스를 해준 게 아닐까? 수많은 인생의 결정 앞에서 아무리 갈팡질팡한다고 하더라도, 갈등하는 사람은 이미 어떻게 할 것인지 알고 있다는 사실은 아마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버지 같은 삶을 살기는 싫다고 하면서, 짝꿍 친구를 흠모하는 고등학생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침몰해 가는 일본 경제에 대한 식견은 과연 고등학생이 하는 생각일까 싶기도 하고. 모두가 한 번 사귀어 보고 싶은 짝꿍과 자전거 주차딱지를 훔친 도둑을 잡아 응징하겠다고 나선 모험담도 귀엽다. 위기의 순간마다 등장하는, “이 분이 누구의 따님인 줄 아시고 그러시는 겁니까?”라는 질문은 좀 구식이긴 하지만, 기세등등하게 날뛰는 이들을 위협하는 용도로는 그만이다. 작가의 스타일이 올드스쿨이구나 싶다. 요런 발칙한 카드가 먹힐 거라고 생각하다니 말이다.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이나 교향곡 같은 대작도 훌륭하지만, 이사카 월드의 주인장처럼 다작으로 유명한 대작곡가는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나 디베르티멘토 같은 소품에서도 그 진가를 발휘한다. 한동안 이사카 월드를 떠나 살았는데 다시 궁금증이 생겼다. 우선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부터 구해다 봐야겠다. 그때까지 이사카 월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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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2-29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노래 멜로디는 친숙한데, 제목이 좀 길고 어려워서 외우기 힘들었던 적이 있어요. 지금도 헷갈리곤 합니다.. ㅎㅎㅎ

연말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레삭매냐 2016-12-29 13:32   좋아요 0 | URL
그렇죠~ 영어도 아닌 독일어라 더 그런 것 같더라구요.

싸이러스님도 해삐 뉴 이얼~하세요.
 
고래도 함께
존 아이언멍거 지음, 이은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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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고래와 함께>는 다분히 성경에서 연유한 이야기라는 느낌이다. 우선 요나와 고래에 대한 이야기가 그리고 욥기에도 등장하는 토마스 홉스의 그 유명한 “리바이어던(leviathan)”이 나오고 마지막으로 주인공 조 학(Joe Haak)이 세인트 피란(St. Piran)의 307명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장면은 노아의 방주의 그것과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IT 컨설턴트 출신 존 아이언멍거의 세 번째 소설이라는 <고래와 함께>는 콘월 지방의 세인트피란이라는 가공의 마을에 벌거벗은 주인공 조 학과 고래 리바이어던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물론 인정 많은 시골 사람들은 한 마음으로 낯선 이방인을 살리는데 성공하고, 뒤이어 위기에 빠진 고래도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는데 전력으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위기에 빠진 공화국을 구하기 위해 오늘도 촛불을 들고 추운 겨울바람에 맞서 광장에 나서는 우리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지는 그런 느낌이다.

 

단박에 마을 사람들의 환심을 사면서 세인트피란에 연착륙한 조 학의 정체는 바로 시티(런던) 출신 통계와 수학에 정통한 애널리스트다. 공매도라는 희한한 방법으로 레인 코프먼 투자은행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돈을 벌어들이던 조 학은 자신이 개발한 캐시라는 덫에 걸려 그만 급전직하하고 만다. 우리도 최근에 신약개발회사의 주가농단으로 촉발된 사례를 통해 공매도 작전세력의 실체를 알게 되었는데, 주가가 뛴다고 해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주가 하락을 전제로 해서 마치 망하는 회사에 달려들어 수익을 내는 그야말로 정글 자본주의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존 아이언멍거 작가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지구 종말로 치닫는 미래 예측 프로그램으로 우리가 얼마나 에너지 자원에 매달려 있는지, 공동체가 파멸로 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이기주의에 입각한 수익 창출 모델에 매달려 있는지 조 학의 연대기를 통해 잔잔한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었다.

 

레인 코프먼의 살인적인 스트레스 환경 속에서 장장 8년을 일하면서, 창의적인 발상을 바탕으로 캐시라는 인공지능적인 미래 예측 프로그램을 개발해낸 조는 다가오는 미래의 네 가지 시나리오 중 최악의 시나리오가 자신이 사는 영국을 비롯해서 전 세계를 덮치게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잘 돌아가던 캐시에 오류가 생겼다고 판단되는 순간 레인 코프먼 은행은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을 기록하게 되고, 성서에도 등장하는 폭풍우에 휘말린 요나가 탄 배의 승객들처럼 모든 책임을 희생양에게 돌리기 위해 제비뽑기가 시행된다. 알다시피 그 희생양은 바로 캐시의 개발자였던 조였다.

 

소설 <고래와 함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예언했던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고래로 상징하면서, 조 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엇갈리게 배치하는 방식으로 갈수록 과연 세인트피란 사람들은 그들에게 닥친 위기를 어떻게 해결하게 될 것인지 그리고 조 학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언을 어떻게 실천에 옮길 것인지에 주목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선지자 혹은 예언자의 말을 무시하지만 사람 좋은 세인트피란 사람들은 아마 예외였던 모양이다. 8천만 원 가까운 자신의 전 재산을 동원해서 자신과 고래의 목숨을 구해준 마을 사람들을 위해 식료품을 저장하는 그의 모습은 지구 종말을 의미하는 대홍수를 대비해서 묵묵하게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하는 노아의 노고를 연상시킨다.

 

물론 그 와중에 이루어지지 않는 교구 목사의 젊은 아내 폴리 호킹과의 로맨스도 등장하고,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있는 세인트피란 사람들의 이야기도 꾸준히 등장한다. 시티에서 짧았던 클레어와의 인연도 그리고 상사이자 감출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재니 커버데일과의 불같은 사랑도 쉴 새 없이 등장했다가 사라져 간다. 하지만 이야기의 모든 중심에는 홉스가 예언한 광폭한 환경에 대항하기 위해 권력의 상징으로서 리바이어던보다 한 마음이 되어 생존을 위해 투쟁에 나서는 공동체의 협력에 존 아이언멍거 작가는 방점을 찍는다. 어떤 영웅의 초인적인 능력과 예지로 공동체를 살릴 수도 있겠지만, 보잘 것 없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합심이야말로 우리가 삶의 터전을 마련한 공동체를 살리는 바로미터라는 것이야말로 소설 <고래도 함께>를 통해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에너지 고갈과 독감 같은 유행성 전염병이 지구 종말을 촉발시키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작가의 상상력이 놀랍다. 당장 세 끼만 굶게 되면 인류의 위대한 문명이 붕괴될 수 있다는, 모든 것이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전기 에너지와 식수 공급이 중단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이미 오래 전에 미국에서 발생했던 블랙아웃으로 증명된 바 있다. 글로벌리즘으로 지구촌이라는 말이 더 이상 낯설게 되지 않은 현실에서,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아시아 독감이 전 세계를 휩쓸고 에너지 자원의 유통을 마비시키고 순차적으로 네트워크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지적은 낯설게 들리지 않았다.

 

또 하나 아이언멍거 작가의 놀랍고 탁월한 솜씨 중의 하나는 바로 성경에서 가져온 텍스트를 이용해서 현대문명의 취약점을 짚어내면서도, 공동체와 인류에 대한 따뜻한 사랑, 그리고 과거의 어느 순간에 대한 추억이야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원동력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새로 시작하기 가장 좋은 시점이라고 피력하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모름지기 영웅은 떠나야 하는 법인가.

 

초반의 느린 진행에 비해 중반을 지나 후반으로 갈수록 과연 세인트피란 마을의 생존기가 어떻게 귀결될 지 호기심을 자극했다. 어떤 부분에서는 문학적 클리셰이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 정도야 옥의 티 정도로 봐줄만 했다. 좀 더 역동적인 고래의 모습이 그려져 원서 표지를 봤는데, 개인적으로 그 표지가 더 마음에 들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읽기에 부족함이 없는 <고래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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