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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이사카 고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2월
평점 :
모차르트가 작곡한 이른바 “소야곡”이라 알려진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란 곡을 아주 좋아한다. 애청하는 몇 안되는 클래식 곡이라 그런지 다작으로 유명한 이사카 고타로 작가의 연작소설집의 제목을 보고 마음이 이끌렸다. 그리고 보니 한동안 이사카 월드 방문이 뜸했던 것 같다. 한참 책을 읽던 시절, <골든 슬럼버> 그리고 <그래스호퍼> 등을 읽었었 것 같은데, 세밑에 만난 이사카 월드는 바지락 칼국수 같이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라고나 할까.
역자 후기에서 소설의 키워드를 “만남”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충분히 공감이 간다. 우리는 만남이 없다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어떤 관계든 만남이 있어야 출발이 되고, 지속적인 만남으로 관계가 유지되지 않는가. 그런데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만남의 중심에는 헤비급 복싱 챔피언 윈스턴 오노라는 인물이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밴텀급이나 라이트급 챔피언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동양출신 헤비급 챔피언이 있었던가? 하긴 요즘은 격투기 같은 종목이 예전 권투의 인기를 빼앗는 바람에 권투 경기에 대한 열기가 예전 같진 않지. 뭐 그래서 더 반가웠는지도 모르겠다.
매사에 무심한 남편에 질려 딸아이를 데리고 가출한 아내 때문에, 회사에서는 유능한 시스템 엔지니어로 알려진 남자가 홧김에 서버를 걷어차서 수하 직원이 데이터 수집을 위해 온라인 방식 대신 거리에 나가 설문조사를 하게 되었다는 설정도 흥미롭다. 아마 인터뷰를 진행해본 사람이라면 그런 일이 얼마나 어렵다는 걸 잘 알지 않을까? 그래서 개인적으로 누군가 인터뷰를 요청해 온다면 빙빙 돌아가는 카메라 앞에서 횡설수설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경험이 떠올랐다. 그렇게 남녀관계에서 극적인 만남을 꿈꾸는 남자에게 찬스는 어김없이 찾아온다.
자신의 일터인 미용실 손님으로 만난 이로부터 남동생을 소개 받고, 무려 일 년 동안 전화로만 일상을 나누는 커플 이야기도 새로운 천년의 세태인가 싶기도 하다. 가끔씩 일 때문에 남자로부터 오는 전화가 뚝뚝 끊기기도 하지만 편안한 만큼 그 정도의 두절은 감수해야 하지 싶은 여자의 속마음. 그런데 반전은 따로 있다. 그렇게 숫기 없어 보이는 남자가 바로 헤비급 챔피언이었다니, 놀랍군.
영화 <민 걸즈>의 연상시키는 학창시절 여왕 같은 존재가 어느날 느닷없이 자신이 다니는 화장품 회사 광고를 따내야 하는 을로 등장하다니, 인간사 요지경이라는 말이 하나도 틀림이 없군. 직장 동료는 가혹한 복수를 종용하지만 미운 오리 새끼마냥 예전의 모습에서 탈피한 주인공에게 그럴 마음은 없어 보인다. 오래된 네메시스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서 관계를 파탄시킬 수도 있는 공작을 벌일 충분한 기회가 있었지만, 그게 무슨 의미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역시 여기에도 반전이 숨어 있다. 네메시스가 공들이는 남자가 유부남이라니! 무겁지 않고 서로 얽히고설킨 이야기에 제각각 연관 있는 인물들의 관계도를 그려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헷갈릴 수도 있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아,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에 등장하는 수많은 범상치 않은 인물 중에 최고는 역시 미래가 궁금한 이들에게 짧은 음악으로 100엔(샤쿠엔) 짜리 점을 쳐주는 기타리스트 사이토 씨가 있었던가. 아니면 사이토 씨는 이미 어떤 결정을 내릴 지 의뢰자의 방향성을 읽고서 그 결정을 촉발시키는 서비스를 해준 게 아닐까? 수많은 인생의 결정 앞에서 아무리 갈팡질팡한다고 하더라도, 갈등하는 사람은 이미 어떻게 할 것인지 알고 있다는 사실은 아마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버지 같은 삶을 살기는 싫다고 하면서, 짝꿍 친구를 흠모하는 고등학생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침몰해 가는 일본 경제에 대한 식견은 과연 고등학생이 하는 생각일까 싶기도 하고. 모두가 한 번 사귀어 보고 싶은 짝꿍과 자전거 주차딱지를 훔친 도둑을 잡아 응징하겠다고 나선 모험담도 귀엽다. 위기의 순간마다 등장하는, “이 분이 누구의 따님인 줄 아시고 그러시는 겁니까?”라는 질문은 좀 구식이긴 하지만, 기세등등하게 날뛰는 이들을 위협하는 용도로는 그만이다. 작가의 스타일이 올드스쿨이구나 싶다. 요런 발칙한 카드가 먹힐 거라고 생각하다니 말이다.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이나 교향곡 같은 대작도 훌륭하지만, 이사카 월드의 주인장처럼 다작으로 유명한 대작곡가는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나 디베르티멘토 같은 소품에서도 그 진가를 발휘한다. 한동안 이사카 월드를 떠나 살았는데 다시 궁금증이 생겼다. 우선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부터 구해다 봐야겠다. 그때까지 이사카 월드,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