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형, 체 게바라
후안 마르틴 게바라 & 아르멜 뱅상 지음, 민혜련 옮김 / 홍익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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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원한 혁명가 체 게바라에 대한 이런저런 글들을 읽어 왔다. 전설적 게릴라 체 게바라의 정전처럼 되어 버린 장 코르미에의 체 게바라 평전에서부터 시작해서,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볼리비아 일기까지. 그는 생전에 남아메리카 혁명의 전진기지로 생각했던 볼리비아 냥카우아수 라 이게라에서 볼리비아 정부군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기 전까지 불의에 고통 받는 인민들의 해방을 꿈꾸는 혁명가였다. 39살의 나이로 지상에서 영원으로 떠난 혁명가의 이야기는 당연히 전설이 되었다. 과연 그는 전설에서처럼 완전무결한 인간이었을까?

 

에르네스토 게바라의 친동생이었던 후안 마르틴은 영원이 된 혁명가를 다시 지상으로 소환한다. 가족이 쓰는 게바라 전기는 죽음에서 출발해서 몰락한 부르주아 출신으로, 유년 시절부터 심각한 천식을 앓았던 에르네스토의 삶을 관조적 시각으로 추적한다. 탱고 무용수였던 게라바의 아버지는 천생 한량이었다. 항상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돈벌이에 나섰지만 다섯 아이의 아버지로서는 부적격한 남자였다. 대신 유복한 부르주아 가문 출신이자 수녀원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은 게바라의 어머니는 훗날 혁명가로 성장하는 아들에게 지대한 미쳤다고 동생은 증언한다.

 

대학에서 원래 공학도였던 에르네스토는 22살에 처음으로 떠난 남아메리카 방랑에서 “양키” 미국제국주의의 주변국가로 전락해서 신음하는 동포들의 참담한 현실을 직접 체험하고 본격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의 조국 아르헨티나 역시 군사독재와 횡행하는 매판자본주의의 영향으로 남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과 다를 게 없는 상황이었다. 에르네스토는 과테말라 아르벤스 정권이 미국 CIA의 공작으로 전복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혁명에 투신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그의 혁명 활동은 망명지 멕시코에서 쿠바 출신 카스트로 형제를 만나면서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1959년 1월,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의 지난한 무장투쟁 끝에 악랄한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시키는데 성공한 삼십대 초반의 에르네스토는 일약 전 세계의 주목을 받기에 이른다. 외국인이라는 신분으로 신생 쿠바의 산업부장관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그는 콩고에 잠입해서 게릴라 활동에 참가하기도 했고, 무대를 볼리비아로 옮겨 남아메리카 해방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던 중 결국 최후를 맞이하게 됐다.

 

이 정도가 대략적으로 동생 후안 마르틴이 증언하는 에르네스토에 대한 초상이고, 후반부는 불순분자로 찍혀 조국 아르헨티나에서 장장 8년에 걸친 옥살이를 한 후안 마르틴의 증언이 이어진다. 혁명가의 가족에겐 독재정권에 부역하거나 아니면 먼저 간 혁명가의 길을 따르는 선택 밖에 없었던 걸까? 개인적으로 문득 왜 에르네스토는 조국 아르헨티나의 현실을 잘 알면서도 조국보다 쿠바나 멀리 콩고 혹은 볼리비아에서 혁명을 시도하려고 했던 걸까? 청렴결백했던 에르네스토는 쿠바 혁명이 성공한 뒤, 아바나에서 가족들과 재회를 만끽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럼주를 제조하는 바카디 사와 특혜를 이용해서 사업을 시도하려고 하자 단칼에 아버지를 본국으로 소환시키기도 했다. 한편, 포클랜드 전쟁의 패배로 “추악한 전쟁”이라 불리던 암울한 군사독재를 종식된 아르헨티나 옥살이에서 석방된 후안 마르틴은 쿠바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도 했지만, 모든 게 일장춘몽으로 끝나는 체험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영원에서 지상으로

 

과연 혁명가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피델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의 남은 가족들을 확실히 후대했다. 저자인 후안 마르틴은 한사코 허망하게 죽은 형의 죽음을 상업화하는데 반대했지만, 자본주의 3.0 시대에 볼리비아 라 이게라가 관광지가 되고, 그동안 환대받지 못했던 조국 아르헨티나에서도 전설적 게릴라의 자취를 따라가는 관광상품이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볼리비아 정글에서 죽었다고 알려졌지만, 과연 죽었는지 유족들이 시신을 확인하지 못한 점도 체 게바라가 “성 에르네스토”가 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체 게바라와 그의 동지들이 목숨을 바친 쿠바 혁명대의는 어떨까? 구 소련이 붕괴하면서 공산권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세계 초강대국 미국와 1962년 이래 반세기 넘게 엄정한 대결구도를 보이던 쿠바는 마침내 오바마 정부 시절에 미국과 화해하기에 이른다. 작금의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그런 밀월관계가 지속될 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들지만, 미국을 괴롭히던 눈엣가시 쿠바가 드디어 자본주의에 대한 문호를 개방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억압구조를 후안 마르틴은 비판하면서, 오늘날에도 죽은 형의 사상과 그가 유산으로 남긴 이미지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물론 역설적으로 그의 이미지들이 상업적으로 왜곡되어 소비되고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순 없겠지만 말이다. 거리에서 저항의 상징이 된 체의 이미지가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젊은이들이 체 게바라가 권력의 횡포와 자본의 착취에 맞서 무장투쟁에 나선 반세기 전 혁명가이자 완전에 가까운 세계인이었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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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의 이야기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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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만난 노숙인 양반의 다리를 주물러 드린 적이 있다. 밤이 늦도록 무언가 오래 대화를 나눴던 것 같은데 그놈의 블랙아웃 덕분에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경황이 없는 가운데 무슨 이유 때문인진 몰라도 서로 유쾌해 했던 잔상만 남아 있다. 그게 내 인생의 유일한 노숙인과의 접점이었다 지금까지는.

 

지난 설날 연휴 기간에 존 버저의 <킹>을 읽었다. 존 버저는 평생 모두 8편의 소설을 남겼는데 그 중에 7번째 작품으로, 노숙인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나는 다시 소설로 그렇게 노숙인을 만났다. 소설을 이끌어 가는 화자는 공항의 경비견 출신의 이름도 멋진 “킹”이다. 소설리스트 추천으로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리긴 했지만 미처 다 읽지 못하고 반납했고, 새해 들어 존 버저의 부고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역시 책읽기에는 강력한 동인이 필요한 모양이다.

 

유럽의 모처에 생 발레리란 이름을 가진 곳에 킹과 그의 주인인 비코와 비카가 살고 있다. M.1000 도로가 지나가고 도처에 쓰레기가 널려 있으며 공해와 소음으로 범벅이 된 곳이 바로 그네들 삶의 안식처다. 우리의 얼굴이 모두 다르듯, 생 발레리 쓰레기산에 사는 이들도 제각각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세상이 바뀌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아무 일도 안하는 거에는 반대하는 유일한 규칙이 있었노라고 거리의 철학자 킹은 조용한 목소리로 되뇐다. 아무 것도 안할 수 있는 자유는 그네들에게도 허용되지 않는구나. 뤼크와 함께 한 에피소드에게 킹은 파트너로 정육점에서 큼지막한 스테이크 고기를 훔친다. 누군가의 물질적 손해가 다른 이들에겐 저녁 한때의 무용담과 유쾌함 그리고 포식으로 전환된다. 물론 노숙인들의 삶이 모두 그렇게 유쾌한 에피소드로 가득한 건 아니다. 앙팡테리블을 능가하는 꼬마 악당들은 거리의 노숙인에게 불을 붙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끔찍하다.

 

킹의 주인 잔니 비코는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으로 한때 발명가이기도 했고, 공장을 소유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쓰레기산에 오두막을 짓고 잭에게 자릿세를 내며 살아간다. 가수 출신으로 보이는 파트너 비카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출신으로 한 때 화려한 미모를 자랑했지만 역시 형편은 비슷하다. 그들은 아무도 사고 싶어 하지 않는 밤을 구워 팔고, 남의 집 정원의 수선화를 캐다가 거리에서 판다. 노숙인들에게 겨울 추위야말로 가장 무서운 존재다. 판지로 만든 지붕을 이고 사는 비카와 비코 그리고 킹은 잠이 최고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상시적인 식수난은 문젯거리도 아니라고 한다.

 

소심해서 거리에서 팔려고 내놓은 무나 밤을 사라고 제대로 외치지 못하는 비코 아저씨에게 쾌활한 성향의 비카 아줌마는 즉석에서 벨리니 공연을 하겠다고 협박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제발 그러지 말라고 애걸하는 비코 아저씨. 그녀의 목소리를 파는 게 싫다며, 거리의 생활을 접고 암스테르담의 오빠에게 돌아가라는 비코의 간절한 부탁에는 어쩌면 곧 일어날 파국에 대한 예지가 숨어 있었던 걸까.

 

열댓명 남짓한 노숙인들이 거주하는 잭의 코트에 확성기와 탐조등으로 무장한 전경들이 들이 닥친다. 어디서 많이 목격한 장면이 아니던가. 개발과 이윤추구 그리고 재산권행사라는 자본의 무지막지한 논리 앞에 이들의 생존이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한궤도 차량과 립헬 기중기로 깨끗하게 코트를 밀어버리고, 집행에 방해가 되는 거추장스러운 노숙인들을 시설로 보내기 위해 야만적인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 결말은 묘한 기시감을 자아낸다.

 

존 버저의 글들은 상대적으로 짧아서 술술 익히는 편이다. 어쩔 땐 마치 산문이라기 보다 하나의 운문을 대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가 다루는 주제들은 가볍지 않고 묵직하게 다가온다. 실제로 저자는 스페인 알리칸테 지역의 노숙인들의 삶을 바탕으로 해서 이 소설을 썼다고 하는데, 피상적 관찰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에까지 도달한 마르크스주의자의 깊은 성찰이 곳곳에서 돋보이는 작품이다. 단지 그들의 삶을 문학적으로 다룰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시각에서 보이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일까? 자본의 소유 유무, 불안정한 거주 문제 그리고 가난이 불러온 인간 존엄성 상실 같은 문제들은 최근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통해 간접 체험하지 않았던가. 소설 <킹>의 흥미로운 점 중의 하나는 이 모든 이야기들이 경비견 킹의 시선으로 치환돼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같은 인간도 아닌 개의 시선에서 바라본 인간들의 이야기라니. 어쩌면 그러한 존재의 가치는 동물이 인간보다 나을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작가는 던지고 싶었던 걸까? 어떤 존재의 우월성에 대해 따지기보다 상대적 시선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다고 믿고 싶다.

 

소설 <킹>을 통해 나와 다른 존재를 내가 사유하는 바운더리에 넣는 게 얼마나 난망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그들은 내 삶의 바운더리에 아무런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실천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아무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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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2-03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겉모습에 대한 편견 때문에 타인을 나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대합니다. 사실 레삭매냐님이 들려준 경험담을 보면서도 ‘술 취한 상태에서 노숙인을 만나면 위험하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이 생각 속에 ‘노숙인은 위험한 존재‘라는 선입견이 있었어요.

레삭매냐 2017-02-03 16:52   좋아요 0 | URL
아주 오래 전의 일이라 기억이 다 가물가물하네요 -
지난 달에 열심으로 존 버저의 책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중고서점에 잘 나오지 않는 책이라 하는 수 없이
사서 읽었네요...
 

 

감상일 : 2017년 1월 30일 월요일

 

설날 연휴의 마지막 날,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감상했다. 감상에 대한 단평을 남기자면, 명불허전이었다.

 

영국 출신의 노장 켄 로치 감독은 서구사회에서 가장 선진적인 복지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조국 영국의 현실에 대해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 분)의 일상에 대한 카메라 리포트로 대신한다. 영화의 시작은 꼬장꼬장한 노친네 댄이 실업수당(의료 수당)을 받기 위해 속칭 의료 전문가와 대화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미 국가가 맡아서 해야 할 사회복지도 민영화돼서 미국 회사가 도맡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댄의 입을 통해 알게 된다. 마이클 무어의 <식코>를 통해 알고 있는 것처럼, 건강보험회사가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보험금 지급을 막으려는 것처럼 의료 전문가 역시 댄의 담당의사와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당신은 아직 일할 수 있으니, 실업수당 받아먹을 생각을 하지 말고 일자리를 구해 일하라!

 

시작부터 자본주의 시스템의 냉혹한 현실은 관람객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국가에 기댈 생각은 하지 말고 스스로 자력갱생하라. 그 뒤에는 어처구니 없는 사회복지 시스템의 현실이 줄줄이 등장한다. 담당자와 통화하기 위해 자그마치 1시간 58분이나 자신의 비용을 들여 대기해야 하는 현실. 참다 못한 우리의 용사 댄이 복지부를 찾아 갔지만, 온라인 예약을 하지 않고서는 면담조차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무조건 온라인으로 신청서를 작성하란 전형적인 공무원 스타일의 대답이 돌아올 뿐이다. 그런 그를 도우려는 앤을 갈구는 상사. 그렇다, 우리가 신봉하는 자본주의 3.0의 시스템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능률을 가장한 자본의 확대와 이윤 추구일 뿐이다.

 

평생 목수일만 해오면서 살아온 노친네가 어찌 온라인 신청서를 작성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와중에 댄은 역시 실업급여를 신청하러 왔다가 정시에 출석하지 못해 제재대상에 오른 미혼모 케이티 모건(헤일리 스콰이어 분)과 그녀의 딸 데이지 그리고 딜런과 마주하게 된다. 그들의 상식적인 항의는 깔끔하게 무시되고, 오로지 원칙만을 주장하는 슈퍼바이저에 의해 내쫓긴다. 케이티를 도우려는 댄의 노력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직장도 없이 런던의 방 한칸짜리 노숙인 쉼터에서 살다가 뉴캐슬로 이주한 케이티의 앞날은 암담하기만 하다. 당장 자신의 앞가림도 어려운 댄은 그런 케이티네를 돕는다. 돈없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의 적선보다 이웃의 그렇게 따뜻한 연대라고 감독은 조용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강압적 조언에 댄은 도서관에 가서 컴퓨터로 온라인 신청서를 작성하는 법을 배우고, 이력서 쓰는 강좌에도 모습을 드러낸다. 삶의 대부분을 오프라인 스타일로 살아온 남자에게 이런 온라인 환경은 폭력적이고 적대적일 따름이다. 댄이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이는 동안, 케이티는 아들 딜런의 스트레스 증후군을 달래야 하고 신발 깔창이 떨어져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는 데이지의 고충도 해결해 줘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댄과 함께 찾은 무료식품보급소에서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깡통음식을 그 자리에서 까먹기도 한다. 우리네 깔창 생리대처럼 그녀도 생리대가 필요하지만, 살 돈이 없다. 결국 마트에서 생리대를 훔치다가 잡히는 수난을 겪기도 한다. 도대체 참을 수 없는 가난의 끝은 어디인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렇게 모욕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켄 로치의 카메라는 집요하게 추적한다.

 

미혼모에 무학력 그리고 부모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케이티는 결국 마트에서 자신을 잡은 아이반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에 몸을 팔기에 이른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댄이 그녀를 찾아가 억장이 무너진다며 호소한다. 정말 이게 비극의 끝일까 싶을 정도다.

 

한편, 댄의 이웃 청년 차이나가 세계화와 관련된 돈 버는 방식에 대해서도 감독은 예리한 비판의 시선을 감추지 않는다. 중국 광저우에서 스탠 리를 통해 시내에서 팔리는 150파운드짜리 운동화를 어둠의 경로를 통해 입수해서 절반 정도인 80파운드에 팔겠다고 한다. 자신의 집 쓰레기조차 제대로 치우지 않는 차이나(세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막스 밀리언이라는 가명을 사용한다)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에 안착한 댄의 선배로 그려진다. 그런 차이나가 고지식하고 꼬장꼬장한 댄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여기서도 없는 사람들끼리의 연대는 착실하게 이루어진다. 며칠 동안 온라인 신청서 때문에 앓던 골치를 차이나는 단박에 해결해 준다.

 

100분 남짓한 짧은 영화 속에서 켄 로치는 상상 이상의 많은 이슈들을 끌어 들여 영화를 보는 이에게 묻는다. 이게 정녕 우리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이냐고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21세기에 창궐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모두를 위한 공존의 시스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사회에서 도태된 이들은 모두 배제시키는 그런 냉혹하기 짝이 없는 시스템이 아닌가. 디지털 시대에 낙오된 다니엘 블레이크의 모습은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미래 우리의 현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만 아찔해져 버렸다. 지금도 턱없이 부족한 일자리가 미래 세계에 획기적으로 생긴다는 보장도 없지 않는가. 자본주의 순환을 위한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신화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빚으로 늘린 가계부채가 결국 언젠가 모두가 감당할 수 없는 시한폭탄이라는 걸 알면서도 개선에 나설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이 순간만을 모면하려는 우리의 모습에 비추어 볼 때, 다니엘 블레이크나 케이티 모건의 모습이 저 멀리 영국에서 벌어지는 일만은 아닐 거라는 점에서 비극의 확장은 그만큼 공감대를 형성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다가 어느 순간 내가 영국 BBC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앞으로 살아갈 희망이 보이지 않아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들이 생기고, 21세기 서울의 한복판에서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는 작가가 나오는 마당에 아직도 자력갱생을 해야 한다는 타령의 칼럼을 생산해내는 현실에 나는 절망한다. 내가 이 영화를 통해 얻은 메시지는 간단하다. 바로 없는 사람들끼리의 각성한 연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댄과 케이티, 차이나 그리고 상사에게 갈굼당하는 앤 같이 힘없는 다수의 연대야말로 우리를 개가 아닌 인간답게 만들어줄 마지막 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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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7-01-31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bbc 다큐를 보는 느낌은 <스틸 라이프> 마찬가지였습니다. ^^

레삭매냐 2017-02-02 15:03   좋아요 0 | URL
오오 지금 막 <스틸 라이프> 트레일러를 봤습니다.
이 영화도 찾아서 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벌들의 역사
마야 룬데 지음, 손화수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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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소설이다. 미래세계에 막시류에 속하는 벌들이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가정 아래 쓰인 노르웨이 출신 마야 룬데의 데뷔작 <벌들의 역사>는 인류가 생각하는 미래가 항상 밝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어쩌면 디스토피아일 수도 있다는 가정으로 출발한다. 노르웨이에는 해리 홀레 경감으로 유명한 요 네스뵈만 있는 줄 알았는데, 마야 룬데 같이 새로운 작가도 있구나 싶었다. 새로운 작가의 책을 읽는 도전은 언제나 즐거울 따름이다.

 

<벌들의 역사>의 주인공은 다음의 세 명이 맡았다. 미래, 과거 그리고 가까운 현재 세계에서 각각 중국 쓰촨성의 인공수분 노동자 타오, 영국 하트포드셔의 학자 혹은 상인 윌리엄 그리고 미국 오하이오 오텀힐의 조지. 우선 세상에 존재하는 식물들의 수분을 그동안 도맡아 오던 벌들과 온갖 날벌레들이 전멸하자 이제 인간의 노동이 자연이 하던 일을 맡아 하게 된 시절이 됐다. 단순 반복의 노동에 시달리는 타오는 아들 웨이원에게만은 자신이 하는 일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한다. 이제 고작 세 살짜리 아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전해 주기 위해 밥풀로 숫자 세는 법을 알려 주려고 하는 그녀의 노력이 눈물겹다. 다른 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인공수분) 인구대국 중국에서는 순전히 인간의 노동력을 이용해서 가능하다는 설정도 눈여겨 볼만하다. 8살 어린 나이의 어린 아이들도 노동에서 예외는 아니라는 점도.

 

다음 주자는 잉글랜드에서 병상에 누워 있는 한 때 람 교수의 촉망받는 제자로서 조교이자 동물학자였던 윌리엄이다. 하지만 아내 틸다를 만나 자그마치 8명이나 되는 자제들을 두게 되면서 학문보다 생업에 더 힘쓰게 되고, 씨앗 유통 상인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런 제자를 람 교수는 돼지 새끼라며 모욕하고 그 충격으로 조지는 자리에 눕게 된다. 마지막 세 번째 주인공은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선조 대대로 물려온 특별한 디자인으로 설계된 벌통으로 벌을 치는 양봉업자 조지다. 대학에서 잠시 집을 방문한 아들 톰과 냉전 중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인 톰이 마케팅과 최신 경제학을 공부해서 가업을 잇길 바라지만, 톰은 작가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포부를 밝힌다. 보수적인 양봉업자인 아버지와 가업 대신 자신만의 삶을 살고 싶어하는 아들의 갈등은 그래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마야 룬데는 미래 세계에 어떤 과정을 통해 민주주의 체제가 무너졌고, 디지털 네트워크가 작동하지 않게 되었으며 전 세계의 인구수도 10억으로 줄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는 대신 타오와 윌리엄 그리고 조지의 삶을 통해 벌들이 자취를 감추게 된 연원을 조용한 목소리로 추적한다.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작가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비교적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자연을, 우리와 벗하여 살아가는 생태계를 그대로 두라는 것이다. 꿀벌이나 날벌레하는 수분이 인류에게 어떤 혜택을 주는지 모르고 살아왔다. 그런데 막상 그런 존재들이 사라지고 나면, 자연이 하던 일을 인간이 대신해야 한다는 간단한 진리를 이 소설을 통해 배우게 되었다. 문제는 그런 작은 일들이 우리의 생존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분명한 진실이다. 가령 예를 들어 우리가 일상에서 아무 생각없이 사용하고 있는 화석 에너지의 경우를 보자. 석유를 이용해서 발전해서 생산해내는 전기가 당장 끊어진다면 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될까.

 

마야 룬데가 그리는 미래의 디스토피아에는 역시 가족 간의 갈등이 빠지지 않는다. 인공수분 노동자로 근근히 벌어먹고 사는 타오는 아들 웨이원에게 그런 미래를 물려주고 싶지 않아, 어린 나이에 무엇이라도 가르쳐 주려고 노력하지만 결과는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원인조차 알려주지 않고 소중한 아들을 베이징으로 이송해간 당국의 처사는 비인간적이다. 하긴 각자도생의 시절에 그런 것이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조지와 톰의 경우를 살펴보자. 보수적인 양봉업자 아버지 조지는 아들 톰에게 자신이 하던 일을 가업으로 물려주고 싶어 하지만 아들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이걸 세대 간의 갈등이라고 봐야 할까? 개화된 아들은 오직 조상 대대로 물려오는 비법대로 꿀벌을 치는 것이야말로 전부라고 생각하는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할까. 군집 붕괴 증후군(CCD), 다시 말해 일벌들이 집단적으로 사라지는 현상 앞에 아버지와 아들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웨이원의 케이스처럼 세상사가 다 그런 게 아닐까.

 

병상에서 일어난 윌리엄 새비지 씨는 꿀벌에 자신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고 분연히 관찰과 연구에 몰입해서 획기적인 꿀벌통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것 역시 이전에 누군가 이미 개발해서 특허까지 낸 제품이라는 사실에 그는 좌절하고 만다.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아들 에드먼드의 끝없는 비행 앞에 아버지는 망연자실한다.

 

타오는 아들을 찾는 와중에 얻게 된 책을 통해 어떻게 해서 지구에서 꿀벌이 사라지게 되었는지 연원을 추적하게 된다. 살충제의 무분별한 사용, 이상기후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양성 대신 천편일률적인 농작물재배를 선택해 재앙을 초래한 것이라는 사실에 도달하게 된다. 어떻게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과 너무 닮아 있지 않은가.

 

작가는 이렇게 세 가지 시대를 관통하는 가족 간의 갈등 구조와 인류에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혜택을 가져다 준 꿀벌과의 연관성을 배치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600쪽 달하는 이야기가 쉼 없이 돌아간다. 때로는 미스터리로, 때로는 가족 간의 갈등으로, 개인의 고뇌와 밥벌이의 지겨움, 인류적 재앙에 대한 경고에까지 마야 룬데는 이야기의 확장과 축소라는 상이한 방식으로 마치 아코디언을 연주하듯 <벌들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개인적으로 미래 디스토피아에 대한 엄중한 경고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법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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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아 - 어느 시골의사 이야기 존 버거 & 장 모르 도서
존 버거 지음, 장 모르 사진, 김현우 옮김 / 눈빛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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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존 버저 작가의 부고 소식을 듣고 그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행운아>는 내가 이달에 읽은 존의 세 번째 책이다. <제 7의 인간>을 먼저 읽었는데 미처 리뷰를 작성하지 못했다. 그의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리뷰로 담아내기란 정말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67년에 발표된 <행운아>도 분량에 비해 만만치 않은 작품이었다.


존 버저는 <행운아>에서 사진가 장 모르와 협업을 통해 영국 숲속 사람들을 상대로 의료행위를 하는 의사 존 사샬의 모습을 에세이로 담아냈다. 아마 에세이의 시작은 나무에 깔린 나무꾼 아저씨를 구하러 간 의사의 시선으로 되었지 싶다. 전쟁 중에는 그리스의 어느 섬에서 해군 군의관으로 활약했던 참전용사 존 사샬이 이번에는 자발적으로 영국 모처의 2,000명 가량이 사는 시골 마을에서 28년간 의사로 활동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점들이 존 버저의 철학적 손과 장 모르의 카메라 렌즈를 통해 부활하기에 이르렀다.


원시 시대 이래 의사란 직업은 무당이나 주술사 같은 영적 단계에 최상위층 엘리트들에게 부여되어 왔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기에, 그들은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생산에서 제외되었고 일종의 특권을 부여받아왔다. 아마 그 사실은 현대사회에서도 별 차이가 없을 것 같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의사가 된다는 것은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부여된 일이니 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다년간의 수련가 막대한 비용, 그리고 개인의 피나는 노력이 수반된다는 사실도 외면해선 안될 것이다. 하지만 에세이 말미에서 마르크스주의자 저자가 냉철하게 짚어내듯이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금전에 우선하는 그런 가치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교육 시스템에서 배제시키게 되면서 의사가 아닌 의료기술자들만 양산해 내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그런 의구심이 자꾸만 드는 것도 배제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다시 존 버저의 에세이로 들어가 보자. 의사는 환자의 치부까지 모두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환자는 의사 앞에서 비무장 상태로 자신의 마지막 보루인 옷가지들을 스스럼없이 벗어젖힌다. 최근에는 역시 일부 미꾸라지들이 못된 짓을 해서 다수 선량한 의사들을 욕보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의사에게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바로 환자를 알아줌으로 발생하는 신뢰가 아닐까. 존 버저는 이런 신뢰야말로 치료의 과정에서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강조한다. 고대 파라켈루스 이래 의료 행위에 있어 불변의 조건이라는 점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존 버저는 의료 행위를 넘어 숲속 사람들의 일상에까지 침투한 의사 존 사샬의 한계를 넘어선 좋은 의사라고 그들에게 인정받는 비결에 대해서도 남김 없이 에세이에서 밝히고 있다. 빈약한 수술대에서 온갖 수술을 집도하고, 달리는 차 안에서 아이를 받아내는 수고도 마다 하지 않고, 들어오는 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일을 찾아나서는 그런 의사를 오늘날 우리는 찾아 볼 수 있는가라고 그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 같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낭만닥터 김사부>에 나오는 김사부처럼 사람을 치료하고 살리는 일이야말로 의사의 본업이라는 기본적인 진실조차 무시되는 현실세계가 그저 두려워질 따름이다. 아니 오죽했으면 이런 드라마가 인기를 끌 현실이라니. 드라마가 모름지기 존재하지 않는 현실의 재현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데올로기적 상식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을 치유하는 의사로 존 사샬 역시 완벽할 수 없을 것이라고 존 버저는 증언한다. 자신의 영역을 훨씬 뛰어 넘어 활동하다 보니 어쩌면 셀프 심리치표를 받아야 할 당사자는 바로 정작 의사 자신이 아니었을까. 경제 사회적으로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숲속 사람들을 위해 버려진 성의 해자를 수리해서 정원조성에 자신의 온전한 여가시간을 투자하고, 댄스파티나 마을모임 같은 것을 조직하는 그런 의사를 본 적이 있는가. 이런 의사가 존재한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런 의사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단지 뛰어난 의료 기술을 시전한다는 것 말고도 온전한 인격체에 대한 인간적 존경심을 오히려 부차적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환자를 단순히 자신의 섭생과 여흥을 위한 돈벌이의 대상이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로 받아 들이고, 진심으로 그들의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어쩌면 측은지심일 지도 모르겠다) 한 “알아줌”(이 번역어 대한 원서의 표기가 참 궁금하다)이야말로 의사와 환자 관계의 핵심이 아닐까. 에세이의 어디선가 읽은 먼저 다수의 죽음을 목도한 선배로서 숲속 사람들을 위로하는 어쩌면 종교적 경지에까지 도달한 의료인의 모습에 그저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존 버저가 글로 독자들의 가슴을 휘어잡았다면, 그의 동업자 장 모르는 카메라 렌즈를 이용해서 숲속 사람들과 존 사샬의 일상을 담아냈다. 바로 전에 읽은 <제 7의 인간>에서도 그랬지만, 존 버저와 장 모르의 협업은 정말 일품이다. 인간에 대한 고뇌를 담은 존 사샬의 이미지에서도, 그가 분주하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행운아로서의 모습들을 훌륭하게 지면에 살려 내는데 성공하지 않았던가.


현재 의료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미래의 의사를 꿈꾸는 이들에게 이 책을 꼭 추천해 주고 싶다. 아마 이 책을 만난 그들은 정말 행운아일 거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올해 안으로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어야겠다. 그 땐 또 연초와는 다른 어떤 느낌으로 만나게 될지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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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26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저번에 레삭매냐님이 중고매장에서 구입한 버거의 책이군요. 존 버거의 책이 꽤 많은데, 중고매장에 만나기가 어려워요. 버거의 책이 너무 안 팔려서, 그 책을 사서 되파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ㅎ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설 연휴 잘 보내세요. ^^

레삭매냐 2017-01-26 21:34   좋아요 0 | URL
아 그 책은 제가 처음으로 읽은 존 버저
의 책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이란 책이구요.

이 책 <행운아>는 반디에서 사서 읽었답니다.

말씀 대로 헌책방에서 존 버저의 책 만날 수
가 없네요.

싸이러스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