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일 : 2017년 1월 30일 월요일

 

설날 연휴의 마지막 날,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감상했다. 감상에 대한 단평을 남기자면, 명불허전이었다.

 

영국 출신의 노장 켄 로치 감독은 서구사회에서 가장 선진적인 복지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조국 영국의 현실에 대해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 분)의 일상에 대한 카메라 리포트로 대신한다. 영화의 시작은 꼬장꼬장한 노친네 댄이 실업수당(의료 수당)을 받기 위해 속칭 의료 전문가와 대화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미 국가가 맡아서 해야 할 사회복지도 민영화돼서 미국 회사가 도맡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댄의 입을 통해 알게 된다. 마이클 무어의 <식코>를 통해 알고 있는 것처럼, 건강보험회사가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보험금 지급을 막으려는 것처럼 의료 전문가 역시 댄의 담당의사와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당신은 아직 일할 수 있으니, 실업수당 받아먹을 생각을 하지 말고 일자리를 구해 일하라!

 

시작부터 자본주의 시스템의 냉혹한 현실은 관람객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국가에 기댈 생각은 하지 말고 스스로 자력갱생하라. 그 뒤에는 어처구니 없는 사회복지 시스템의 현실이 줄줄이 등장한다. 담당자와 통화하기 위해 자그마치 1시간 58분이나 자신의 비용을 들여 대기해야 하는 현실. 참다 못한 우리의 용사 댄이 복지부를 찾아 갔지만, 온라인 예약을 하지 않고서는 면담조차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무조건 온라인으로 신청서를 작성하란 전형적인 공무원 스타일의 대답이 돌아올 뿐이다. 그런 그를 도우려는 앤을 갈구는 상사. 그렇다, 우리가 신봉하는 자본주의 3.0의 시스템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능률을 가장한 자본의 확대와 이윤 추구일 뿐이다.

 

평생 목수일만 해오면서 살아온 노친네가 어찌 온라인 신청서를 작성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와중에 댄은 역시 실업급여를 신청하러 왔다가 정시에 출석하지 못해 제재대상에 오른 미혼모 케이티 모건(헤일리 스콰이어 분)과 그녀의 딸 데이지 그리고 딜런과 마주하게 된다. 그들의 상식적인 항의는 깔끔하게 무시되고, 오로지 원칙만을 주장하는 슈퍼바이저에 의해 내쫓긴다. 케이티를 도우려는 댄의 노력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직장도 없이 런던의 방 한칸짜리 노숙인 쉼터에서 살다가 뉴캐슬로 이주한 케이티의 앞날은 암담하기만 하다. 당장 자신의 앞가림도 어려운 댄은 그런 케이티네를 돕는다. 돈없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의 적선보다 이웃의 그렇게 따뜻한 연대라고 감독은 조용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강압적 조언에 댄은 도서관에 가서 컴퓨터로 온라인 신청서를 작성하는 법을 배우고, 이력서 쓰는 강좌에도 모습을 드러낸다. 삶의 대부분을 오프라인 스타일로 살아온 남자에게 이런 온라인 환경은 폭력적이고 적대적일 따름이다. 댄이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이는 동안, 케이티는 아들 딜런의 스트레스 증후군을 달래야 하고 신발 깔창이 떨어져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는 데이지의 고충도 해결해 줘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댄과 함께 찾은 무료식품보급소에서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깡통음식을 그 자리에서 까먹기도 한다. 우리네 깔창 생리대처럼 그녀도 생리대가 필요하지만, 살 돈이 없다. 결국 마트에서 생리대를 훔치다가 잡히는 수난을 겪기도 한다. 도대체 참을 수 없는 가난의 끝은 어디인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렇게 모욕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켄 로치의 카메라는 집요하게 추적한다.

 

미혼모에 무학력 그리고 부모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케이티는 결국 마트에서 자신을 잡은 아이반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에 몸을 팔기에 이른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댄이 그녀를 찾아가 억장이 무너진다며 호소한다. 정말 이게 비극의 끝일까 싶을 정도다.

 

한편, 댄의 이웃 청년 차이나가 세계화와 관련된 돈 버는 방식에 대해서도 감독은 예리한 비판의 시선을 감추지 않는다. 중국 광저우에서 스탠 리를 통해 시내에서 팔리는 150파운드짜리 운동화를 어둠의 경로를 통해 입수해서 절반 정도인 80파운드에 팔겠다고 한다. 자신의 집 쓰레기조차 제대로 치우지 않는 차이나(세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막스 밀리언이라는 가명을 사용한다)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에 안착한 댄의 선배로 그려진다. 그런 차이나가 고지식하고 꼬장꼬장한 댄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여기서도 없는 사람들끼리의 연대는 착실하게 이루어진다. 며칠 동안 온라인 신청서 때문에 앓던 골치를 차이나는 단박에 해결해 준다.

 

100분 남짓한 짧은 영화 속에서 켄 로치는 상상 이상의 많은 이슈들을 끌어 들여 영화를 보는 이에게 묻는다. 이게 정녕 우리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이냐고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21세기에 창궐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모두를 위한 공존의 시스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사회에서 도태된 이들은 모두 배제시키는 그런 냉혹하기 짝이 없는 시스템이 아닌가. 디지털 시대에 낙오된 다니엘 블레이크의 모습은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미래 우리의 현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만 아찔해져 버렸다. 지금도 턱없이 부족한 일자리가 미래 세계에 획기적으로 생긴다는 보장도 없지 않는가. 자본주의 순환을 위한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신화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빚으로 늘린 가계부채가 결국 언젠가 모두가 감당할 수 없는 시한폭탄이라는 걸 알면서도 개선에 나설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이 순간만을 모면하려는 우리의 모습에 비추어 볼 때, 다니엘 블레이크나 케이티 모건의 모습이 저 멀리 영국에서 벌어지는 일만은 아닐 거라는 점에서 비극의 확장은 그만큼 공감대를 형성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다가 어느 순간 내가 영국 BBC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앞으로 살아갈 희망이 보이지 않아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들이 생기고, 21세기 서울의 한복판에서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는 작가가 나오는 마당에 아직도 자력갱생을 해야 한다는 타령의 칼럼을 생산해내는 현실에 나는 절망한다. 내가 이 영화를 통해 얻은 메시지는 간단하다. 바로 없는 사람들끼리의 각성한 연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댄과 케이티, 차이나 그리고 상사에게 갈굼당하는 앤 같이 힘없는 다수의 연대야말로 우리를 개가 아닌 인간답게 만들어줄 마지막 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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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7-01-31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bbc 다큐를 보는 느낌은 <스틸 라이프> 마찬가지였습니다. ^^

레삭매냐 2017-02-02 15:03   좋아요 0 | URL
오오 지금 막 <스틸 라이프> 트레일러를 봤습니다.
이 영화도 찾아서 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