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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아 - 어느 시골의사 이야기 ㅣ 존 버거 & 장 모르 도서
존 버거 지음, 장 모르 사진, 김현우 옮김 / 눈빛 / 2004년 11월
평점 :
올해 들어 존 버저 작가의 부고 소식을 듣고 그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행운아>는 내가 이달에 읽은 존의 세 번째 책이다. <제 7의 인간>을 먼저 읽었는데 미처 리뷰를 작성하지 못했다. 그의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리뷰로 담아내기란 정말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67년에 발표된 <행운아>도 분량에 비해 만만치 않은 작품이었다.
존 버저는 <행운아>에서 사진가 장 모르와 협업을 통해 영국 숲속 사람들을 상대로 의료행위를 하는 의사 존 사샬의 모습을 에세이로 담아냈다. 아마 에세이의 시작은 나무에 깔린 나무꾼 아저씨를 구하러 간 의사의 시선으로 되었지 싶다. 전쟁 중에는 그리스의 어느 섬에서 해군 군의관으로 활약했던 참전용사 존 사샬이 이번에는 자발적으로 영국 모처의 2,000명 가량이 사는 시골 마을에서 28년간 의사로 활동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점들이 존 버저의 철학적 손과 장 모르의 카메라 렌즈를 통해 부활하기에 이르렀다.
원시 시대 이래 의사란 직업은 무당이나 주술사 같은 영적 단계에 최상위층 엘리트들에게 부여되어 왔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기에, 그들은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생산에서 제외되었고 일종의 특권을 부여받아왔다. 아마 그 사실은 현대사회에서도 별 차이가 없을 것 같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의사가 된다는 것은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부여된 일이니 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다년간의 수련가 막대한 비용, 그리고 개인의 피나는 노력이 수반된다는 사실도 외면해선 안될 것이다. 하지만 에세이 말미에서 마르크스주의자 저자가 냉철하게 짚어내듯이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금전에 우선하는 그런 가치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교육 시스템에서 배제시키게 되면서 의사가 아닌 의료기술자들만 양산해 내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그런 의구심이 자꾸만 드는 것도 배제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다시 존 버저의 에세이로 들어가 보자. 의사는 환자의 치부까지 모두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환자는 의사 앞에서 비무장 상태로 자신의 마지막 보루인 옷가지들을 스스럼없이 벗어젖힌다. 최근에는 역시 일부 미꾸라지들이 못된 짓을 해서 다수 선량한 의사들을 욕보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의사에게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바로 환자를 알아줌으로 발생하는 신뢰가 아닐까. 존 버저는 이런 신뢰야말로 치료의 과정에서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강조한다. 고대 파라켈루스 이래 의료 행위에 있어 불변의 조건이라는 점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존 버저는 의료 행위를 넘어 숲속 사람들의 일상에까지 침투한 의사 존 사샬의 한계를 넘어선 좋은 의사라고 그들에게 인정받는 비결에 대해서도 남김 없이 에세이에서 밝히고 있다. 빈약한 수술대에서 온갖 수술을 집도하고, 달리는 차 안에서 아이를 받아내는 수고도 마다 하지 않고, 들어오는 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일을 찾아나서는 그런 의사를 오늘날 우리는 찾아 볼 수 있는가라고 그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 같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낭만닥터 김사부>에 나오는 김사부처럼 사람을 치료하고 살리는 일이야말로 의사의 본업이라는 기본적인 진실조차 무시되는 현실세계가 그저 두려워질 따름이다. 아니 오죽했으면 이런 드라마가 인기를 끌 현실이라니. 드라마가 모름지기 존재하지 않는 현실의 재현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데올로기적 상식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을 치유하는 의사로 존 사샬 역시 완벽할 수 없을 것이라고 존 버저는 증언한다. 자신의 영역을 훨씬 뛰어 넘어 활동하다 보니 어쩌면 셀프 심리치표를 받아야 할 당사자는 바로 정작 의사 자신이 아니었을까. 경제 사회적으로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숲속 사람들을 위해 버려진 성의 해자를 수리해서 정원조성에 자신의 온전한 여가시간을 투자하고, 댄스파티나 마을모임 같은 것을 조직하는 그런 의사를 본 적이 있는가. 이런 의사가 존재한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런 의사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단지 뛰어난 의료 기술을 시전한다는 것 말고도 온전한 인격체에 대한 인간적 존경심을 오히려 부차적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환자를 단순히 자신의 섭생과 여흥을 위한 돈벌이의 대상이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로 받아 들이고, 진심으로 그들의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어쩌면 측은지심일 지도 모르겠다) 한 “알아줌”(이 번역어 대한 원서의 표기가 참 궁금하다)이야말로 의사와 환자 관계의 핵심이 아닐까. 에세이의 어디선가 읽은 먼저 다수의 죽음을 목도한 선배로서 숲속 사람들을 위로하는 어쩌면 종교적 경지에까지 도달한 의료인의 모습에 그저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존 버저가 글로 독자들의 가슴을 휘어잡았다면, 그의 동업자 장 모르는 카메라 렌즈를 이용해서 숲속 사람들과 존 사샬의 일상을 담아냈다. 바로 전에 읽은 <제 7의 인간>에서도 그랬지만, 존 버저와 장 모르의 협업은 정말 일품이다. 인간에 대한 고뇌를 담은 존 사샬의 이미지에서도, 그가 분주하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행운아로서의 모습들을 훌륭하게 지면에 살려 내는데 성공하지 않았던가.
현재 의료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미래의 의사를 꿈꾸는 이들에게 이 책을 꼭 추천해 주고 싶다. 아마 이 책을 만난 그들은 정말 행운아일 거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올해 안으로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어야겠다. 그 땐 또 연초와는 다른 어떤 느낌으로 만나게 될지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