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번지는 유럽의 붉은 지붕 - 지붕을 찾아 떠난 유럽 여행 이야기 In the Blue 5
백승선 지음 / 쉼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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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냥 부럽다. 이렇게 백승선 씨처럼 많은 유럽의 나라에 가보고, 번지는 추억을 되새겨 볼 수 있다니 말이다. 지금까지 나온 네 권의 번짐 시리즈가 개별 나라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 책은 전 유럽을, 그 중에서도 붉은 지붕과 잿빛 지붕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아우른다.

 

언제나처럼 독자를 반겨주는 푸근한 사진이 담긴 기행문은 어느새 백승선 씨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느낌이다. 책을 처음 보는 순간, 삭막한 회색빛 아파트 단지가 삶의 표준 양태가 되어 버린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다채로운 빨간 지붕의 화려한 행렬에 그만 황홀해졌다. 모름지기 여행이란 일상의 권태에서 탈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유럽의 붉은 지붕이 주는 시각적 만족감은 상상 그 이상이다.

 

직접 가봤던 파리와 잘츠부르크 그리고 그간의 번짐 기행문에서 만날 수 있었던 두브로브니크, 브뤼헤, 겐트, 스플리트, 토룬이라는 도시 이름이 어찌나 반갑던지.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면서 오래 전에 함께 했던 소중한 여행의 추억이 샘솟는 기분이 들었다. 미처 가보지 못한 피렌체, 바르셀로나 그리고 뤼데스하임 같은 지명에서는 새로운 도전의식을 고취시킨다. 나도 언젠간 가보고 말겠다는.

 

그중에서도 가장 나의 눈길을 끄는 건 몬테네그로의 페라스트였다. 도대체 어디에 위치한 곳인지 알고 싶은데 구글맵으로 찾아보는 수고도 마지않았다. 게다가 인터넷으로 페라스트-몬테네그로를 검색해 보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 나온 블로그를 클릭해 보니 바로 백승선 씨의 첫 번째 범진 시리즈였던 크로아티아의 일러스트 그림이 대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니 동일한 분의 블로그였던가. 책에서 만나볼 수 없었던 훨씬 많은 사진에 그만 입이 쩍 벌어졌다. 때로는 구구절절한 그런 말보다, 한 장의 사진에 더 울림이 있는 법이다. 그렇게 무언가 좀 부족한 마음에 찾아낸 페라스트의 감흥은 유달리 풍부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기행과 문학의 접목도 인상적이었다. 오래 전에 헌책방에서 만나 사기는 했지만 여전히 읽지 못하고 있는 파울로 코엘료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는 그래서 더 특별하게 다가왔던 걸까. 캐나다 작가 스티븐 갤러웨이의 장편소설 <사라예보의 첼리스트>의 배경이었던 사라예보도 마찬가지다. 저격수의 총탄과 박격포탄이 난무하는 내전의 한복판에서 폭격으로 사망한 22명의 망자를 위로하며, 평화를 염원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첼로 연주를 감행했다는 베드란 스마일로비치의 전설 같은 이야기는 그야말로 감동 그 자체였다. 언제나 그렇지만, 여행의 고갱이는 역시 아름답고 수려한 풍광이 아니라 그 풍광을 완성시키는 인간의 이야기였다.

 

번짐 시리즈를 통해 작가 백승선 씨의 아름다운 풍광을 찾아나서는 창조적인 가치 추구야말로 이 시리즈의 핵심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로 말미암아 번져 나가는 행복 바이러스가 모쪼록 계속해서 창궐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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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섬
브루스 디실바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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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브루스 디실바의 <악당들의 섬>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로드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에 간 적이 있다. 나의 짧은 기억 속의 로드아일랜드는 부근에서 제일간다는 디저트 가게인 패스티슈, 이름 모를 어느 카페에서 마신 쓰디쓴 에티오피아 산 원두커피 한 잔의 추억 그리고 어마어마한 큰 쇼핑몰 정도라고나 할까. 아, 타 지역에 비해 높았던 소비세(sales tax)도 인상적이었다.

 

<프로비던스 저널>에서 오랜 기자 생활을 바탕으로 초짜 소설가 브루스 실바가 노년에 발표한 <악당들의 섬>에는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한가득이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민완 기자로 활약을 펼치는 L.S.A.(리엄) 멀리건은 자신이 나고 자란 프로비던스의 ‘마운트 호프’ 지역에서 연달아 발생한 연쇄 방화 사건을 추적한다. 만성 위궤양으로 고생하는 중년 기자는 이혼 수속이 끝나지 않는 전처로부터 오늘은 또 어떤 여자와 바람이 났냐는 닦달 전화에 시달린다. 첨단 기술이나 정보 수집 같은 테크닉보다 동네 불법 도박장을 운영하는 휙 영감으로부터 은밀한 정보를 조달하는 멀리건은 그야말로 구시대의 공룡 화석 같은 캐릭터다. 이렇게 구닥다리 기자가 어떻게 복잡하기 짝이 없는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수십 년간의 기자생활을 통해 뉴잉글랜드에서 가장 작은 주라는 로드아일랜드의 사정에 빠삭한 브루스 디실바는 지역의 내밀한 속살을 헤집는다. 소아성애자 교구 신부로부터 시작해서, 뇌물이 없으면 에이즈 검사 한 번 진행하는 몇 주일씩 걸리는 그 동네 사정을 작가처럼 기술해 낼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소설에서 나를 한층 더 자극했던 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인 2008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메이저리그 페넌트 레이스에 대한 묘사였다. 약물파동으로 추락하기 전, 보스턴의 쌍포로 리그를 호령하던 데이빗 오티즈와 매니 래미레즈가 그야말로 마지막 불꽃을 불사르던 시절의 추억 말이다. 뉴잉글랜드의 레드삭스 팬들이 숙적 양키즈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소설의 후반부에서 목에 현상금이 걸린 멀리건이 양키즈 복장으로 변장하고 다녔다는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자신의 애완견에서 리라이트(re-write)라는 애칭을 붙이고, 공짜 주차 장소를 찾아 헤매는 신문사나 사사건건 경찰들의 비리를 들춰내서 신문에 까발리는 멀리건은 그야말로 적대적인 사방에 둘러 쌓여 있다. 하지만, 어느 모로 보나 예쁜 구석 하나 없는 이 기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마운트 호프/프로비던스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무장한 “경주마”다. 무고한 시민과 소방대원들, 자신이 존경하는 은사와 사랑하는 친구가 연쇄방화범의 화마에 희생당하면서 멀리건에게 이 사건은 단순한 취재의 대상이 아닌 반드시 자신이 응징해야 하는 개인 차원의 복수로 업그레이드된다. 브루스 디실바는 독자로 하여금 후반부로 갈수록 그 결말이 사법권에 의한 처벌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린치가 되더라도 부디 통쾌한 해결을 꿈꾸게 유도한다. 아니 이 사람이 초짜 작가가 맞나?

 

멀리건의 입체적 캐릭터를 위해 같은 신문사의 동료이자 로맨틱한 관계에 있는 베로니카와의 밀당도 작가는 빼놓지 않는다. 손에 잡힐 듯, 빠져 나갈 듯 그야말로 애간장을 태우는 미녀 기자와의 로맨스는 결말에서 반전을 기다리고 있다. 작고한 아버지와 오랜 우정을 대변하는 전직 소방대원 잭 아저씨의 구수한 이탈리아 욕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 포인트다. 아마 이것도 대를 이어 가며, 프로비던스에서 살아온 사람만 알 수 있는 브루스 디실바만의 문학적 노하우가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본다.
 
‘악당들의 섬’(Rogue Island)라는 옛 지명에서 유래된 것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로드 아일랜드의 이권사업에 개입된 다수의 마피아, 건설업자 그리고 변호사 집단을 대량으로 등장시키면서 브루스 디실바 작가는 자신의 처녀작을 다채롭게 만든다. 악동 이미지의 주인공 캐릭터, 적당한 반전 그리고 호쾌한 복수까지 갖춘 <악당들의 섬>은 데뷔작으로 이 정도면 준수하지 싶다. 물론 개인적인 체험 때문에, <악당들의 섬>에 더 흠뻑 빠질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도미 낚시를 즐기던 포트 애덤스에는 또 언제나 가볼 수 있게 될지, 가슴 시리게 푸르렀던 그 바다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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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 수 없는 모중석 스릴러 클럽 30
할런 코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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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을 것이다. 그 비밀은 타인에게 공개되어선 안 된다는 숙명의 궤도에 올라 있다. 할런 코벤의 신작 <용서할 수 없는>은 바로 오래된 비밀에 대한 이야기다.

 

여느 할런 코벤의 작품처럼 <용서할 수 없는> 역시 뉴저지를 그 공간적으로 펼쳐진다. 코벤과의 몇 번의 만남을 통해 익숙해진 바로 그 장소 말이다. 소설은 초반부터 극적인 장면을 독자에게 들이민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캐릭터가 누구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지역방송의 뉴스리포터에 의해 사람 좋은 농구팀 코치는 소아성애자로 전락한다. , 이제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된다. 이 사건과 동시에 평범한 가정의 십대 소녀가 그야말로 소리 없이 증발해 버린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할런 코벤은 왜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두 사건을 동일 선상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소설 <용서할 수 없는>을 이끌어 가는 이야기의 힘이다.

 

예상과는 달리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고 싱글맘으로 꿋꿋하게 아들을 키워 나가는 대쪽 같은 기자 정신의 웬디 타임스 여사가 <용서할 수 없는>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다. 자신이 파렴치한 소아성애자라고 단정하고 올가미에 몰아넣은 댄 머서를 좇으면서 직감적으로 그가 어쩌면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생각한 대로 그런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의 집에서 나온 숱한 증거는 어쩌란 말인가.

 

한편 댄 머서는 유능한 변호사의 도움으로 법정구속을 면하고 자유의 몸이 된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사건은 가히 충격적이다. 어이없게도 웬디 타임스와 함께 소설의 더블 캐스팅이라고 믿었던 댄 머서는 성추행을 당한 아들을 둔 정의의 사도에 의해 복수의 제물이 되고 만다. 순간 독자는 앞으로 도대체 이 소설이 어떻게 전개될까 하는 의구심에 젖어든다.

 

할런 코벤은 전작 <아들의 방>에서처럼 평화로워 보이는 뉴저지 교외의 여피 가정에 드리워진 그늘의 이면에 방점을 찍는다. 십대 소녀 헤일리 맥웨이드의 실종사건을 추적하면서 그녀가 찾아낸 사실은 안에서 곪아가고 있는 21세기 미국의 현주소에 대한 적나라한 보고서다. 청소년 자녀들이 부모 몰래 술 마시고 문제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부모의 감독 하에 음주 파티를 연다는 그네들의 사고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할까 하는 노파심이 앞선다.

 

사법권을 가지지 못한 주인공 웬디 타임스가 용의자를 추적하거나 그들의 정보를 얻기 위해 페이스북 같은 SNS 네트워크를 이용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구닥다리 방식대로 하염없이 잠복을 하거나, 정보원을 접촉하는 대신 인터넷을 이용한 인적 정보 취득은 진일보한 시대의 산물임에 틀림없다. 다만, 개인정보가 아무런 여과 장치 없이 그렇게 손쉽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우려가 앞선다.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기술 문명의 진보가 반드시 유토피아 입장을 위한 충분조건은 아닌 것 같다.

 

추리소설의 새로운 캐릭터와의 만남에는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용서할 수 없는>을 읽으면서 좀처럼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이 댄 머서의 과거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스토리텔링의 동력이 현저하게 빠져 나간 느낌이 들었다. 웬디 타임스 여사는 부지런하게 사건의 명쾌한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그녀의 발품이 비해 이야기의 밀도가 부족했다. 오히려 그녀의 남편이자 사랑하는 아들의 아버지를 앗아간 끔찍한 사고의 트라우마를 그녀가 어떻게 극복할까 하는 점이 궁금했다. 제목 <용서할 수 없는>을 관통하는 주제를 너무 처음부터 극명하게 드러내려고 한 게 작가의 과욕이 아니었나 추측해 본다.

 

흥미로운 출발에 비해, 느슨한 전개과정과 다소 작위적인 결말이 참 아쉬웠다.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면 명백한 스포일러가 되겠기에 이 정도로 맺어야할 것 같다. 소설의 허리 부분을 좀 더 매끄럽게 다듬고, 이야기의 밀도를 충실하게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하긴 100% 완벽한 소설이 어디 있겠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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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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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모음집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마지막 장을 덮었다. <앙앙>이라는 패션잡지에 연재된 하루키의 에세이 모음집이라고 하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50년도 더 전에 녹음되었다는 전설의 프로코피에프의 음반도 들어 보고 싶어졌고, 노르웨이에서 판매하고 있다는 그 몸에 좋다는 바다표범 생기름도 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역한 맛을 견딜 자신은 없지만.

 

책 리뷰에 앞서 먼저 고백할 게 하나 있다. 가장 대중적인 일본 작가 중의 한 명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제대로 읽어본 게 하나도 없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1Q85>, <해변의 카프카> 그리고 <노르웨이의 숲>까지도.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그의 책 중의 몇 편의 기행문과 잡문은 접했지만. 그래서일까? 하루키는 나에게 소설가라기보다 에세이스트로 더 친근한 기분이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역시 나와 하루키의 기묘한 관계의 연장선에서 무시로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제목 한 번 잘 뽑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일 년 동안 연재했다는 이 에세이집은 하루키가 나중에 소설에 써먹으려고, 자신만의 소재 창고에 소중하게 수장해둔 비장의 무기다. 글로 독자와 만나야 하는 소설가에게 이야기 수집은 선택이 아닌, 필연의 그것이려나. (하루키에게) 마음 가는 대로 쓱쓱 쓰는 소설쓰기보다 훨씬 더 어려운 에세이 쓰기는 그의 말대로 확실히 새로운 영역에 대한 도전이리라. 어떤 글을 써도 책을 사주는 고정 팬을 지닌 베스트셀러 작가의 에세이 쓰기는 어렵노라는 엄살이 귀엽게 들린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는 하루키가 직접 체험한 에피소드에 대한 자신만의 단상을 양념으로 잘 버무린 샐러드 같은 느낌의 에세이집이다. 그래서 가독성이 무척 좋다. 일면 가벼워 보이는 에피소드의 뒷면에는 사물을 꿰뚫어 보는 탁월한 글쟁이의 내공이 담뿍 담겨 있다고나 할까. 재밌고 읽기 쉬운 글을 끊임없이 생산해 내는 하루키의 능력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보통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사물의 자세한 부분까지 예리하게 짚어내는 하루키의 시저스 샐러드같은 글은 독자의 마음을 흔드는 울림이 있다.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 때문에 꽁한 마음을 풀지 않는 작가의 까칠함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하는 출판사가 주최한 파티에서의 어색함보다 차라리 적은 인원이 모인 파티에서 중년부인의 타조사육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든다는 솔직한 고백이 사뭇 매력적이다. 어지간해서는 잘 사인을 해주지 않지만, 간곡하게 부탁하면 마지못해 파인애플 같은 요란한 그림 대신 이름만 방명록에 다소곳하게 적어 놓는 말도 마음에 든다. 지나친 상업화와 치열한 국가대항전이 되어 버린 올림픽에 대한 냉정한 평가도 일품이다. 달리기/마라톤에 미친 작가가 미국 나이키 본사에 있다는 전설의 조깅 코스를 직접 뛰어 보았다는 부분에선 마냥 부러웠다. 야구라면 누구 못지않게 좋아한다고 자부하는 나에게 내가 열렬하게 응원하는 팀의 라이벌 3루수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유연한 플레이에 대한 극찬에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가슴이 좀 쓰리더라. 오하시 아유미 씨가 그린 양키즈의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은 더말할 것도 없고.

 

바야흐로 신나는 여름휴가 시즌이 됐다. 누군가 부담 없이 휴가지에 가서 읽을 만한 가벼운 책을 추천하라고 한다면, 자신 있게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에서 발행된 하루키 월드 초대장을 건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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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4 - 무슬림의 역습과 인간 살라딘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4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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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공교롭게도 김태권 작가의 <십자군 이야기> 시리즈는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십자군 이야기>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십자군 이야기가 기존의 정치적 관점 대신 십자군 원정을 통해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상인집단의 활동과 원정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 일정 부분 초점을 맞춘다면, 김태권 작가는 종래의 정치적 관점을 기본으로 이슬람의 관점에서 객관적 사실을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다. 언제나 그렇듯, 역사란 이야기를 다루는 사람의 시점이 중요하다.

 

무릇 시리즈라 하면 화끈하게 알파에서 출발해서 오메가까지 달려주는 그런 맛이 있어야 하는데 김태권 작가의 경우에는 1,2권과 나중에 다시 연재를 시작하면서 나온 3,4권의 간극이 원체 길다 보니 전반부에서 중요하게 다루던 미국 행정부에 대한 날선 비판은 후반부에서는 아예 사라져 버렸다. 김태권 작가가 계속해서 연재를 계속했더라면 과연 어떤 이야기가 십자군 이야기 속에 녹아들었을지 자못 궁금하다.

 

십자군 원정 초반까지도 십자군 세력의 침공이 종교전쟁이라는 실체를 인식하지 못했던 무슬림들은 기독교 전사들의 지배가 공고화되면서 비로소 기독교도들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지하드(성전)에 나서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분열 때문에 프랑크 기사들에게 단일대오 전선을 만들지 못했던 무슬림 세계는 알레포와 모술을 근거로 한 걸출한 지도자 이마드 앗딘 장기의 영도 아래, 기독교 제후들에 대한 반격을 개시한다. 1144년 팔레스타인 기독교 제후국 중의 하나인 에데사를 함락시키면서 장기는 일약 무슬림 세계의 스타로 부상한다. 에데사를 공략하는데 성공한 장기는 평생의 숙적이었던 부리 왕조가 지배하던 다마스쿠스를 정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다했으나, 노예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이 부분은 삼국지에서 일세를 호령하던 호걸 장비의 죽음과 너무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김태권 작가가 제대로 그려주었다.

 

사실 이번 네 번째 십자군 이야기의 주인공은 무슬림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영웅 살라흐 앗딘 유수프, 우리에게는 살라딘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군사적 영웅이라기보다 유약한 서생 스타일에 가까운 아이유브가 어떻게 해서 이슬람 세계의 대권을 차지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김태권 작가의 서술은 음미해볼만하다. 아이유브/살라딘의 경우에 영웅이 역사를 움직인다기 보다는 역사가 영웅을 만들었다는 해석이 더 옳지 않을까? 티크리트 쿠르드족 출신인 살라딘은 어려서 무슬림 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다마스쿠스에서 수학하고, 숙부인 시르쿠 휘하에서 그야말로 생사를 넘나드는 격전을 치르면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야말로 입지전적 인물이다.

 

문무를 갖추고 비상하는 예비영웅 살라딘에게 삼촌과 함께한 이집트 원정은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자신의 주군인 누르 앗 딘/누레딘과의 마찰을 끝까지 피하면서 살라딘은 결국 누레딘의 사후 유일한 무슬림 세계의 지도자로 부상한다.

 

역시 뭐니뭐니 해도 오랜 기간 동안 전개된 십자군 전쟁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무슬림의 영웅 살라딘과 서구 최강의 전사로 칭송받았던 사자왕 리처드의 대결이다. 그런 점에서 먼저 링 위에 오른 스타이자 인간 살라딘에 김태권 작가는 먼저 초점을 맞춘다. 온갖 신화나 에피소드로 치장된 영웅의 그것이 아닌 있는 모습 그대로의 영웅상은 그래서 더 인상 깊게 다가온다. 살라딘이 이집트 술탄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은 고진감래의 전형이었다. 시리아에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는 주군 누레딘의 날카로운 감시의 눈초리는 살라딘의 행동을 제약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명목상의 주군과 비상하는 술탄은 일촉즉발의 위기까지 치닫지 않았던가. 어쩌면 누레딘이 급사하지 않고, 살라딘과 무력충돌까지 갔다면 심각한 분열 때문에 무슬림 세계의 통일은 더 늦어졌을테고 예루살렘 왕국으로 대표되는 팔레스타인 기독교 왕국은 서방 십자군의 도움으로 그 명맥을 더 이어가게 되지 않았을까. 역사의 가정이란 덧없었다는 걸 뻔히 알지만,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역사적 상상력은 참 유쾌하지 않은가.

 

중세의 완벽한 재현을 위해 당대의 각종 미술자료와 회화는 물론이고 태피스트리까지 섭렵했다는 김태권 작가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외적으로는 그의 노고가 빛을 발할 진 모르겠지만 1,2권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든 현재를 관통하는 신랄한 비판정신은 상대적으로 줄어든 것 같아 아쉽다. 간간히 보여주는 현실비판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더 '부시 당나귀'가 아쉬운 모양이다.

 

이제 네 번째 단행본도 나왔으니 어서 빨리 다음 십자군 이야기의 시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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