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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섬
브루스 디실바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오래 전에 브루스 디실바의 <악당들의 섬>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로드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에 간 적이 있다. 나의 짧은 기억 속의 로드아일랜드는 부근에서 제일간다는 디저트 가게인 패스티슈, 이름 모를 어느 카페에서 마신 쓰디쓴 에티오피아 산 원두커피 한 잔의 추억 그리고 어마어마한 큰 쇼핑몰 정도라고나 할까. 아, 타 지역에 비해 높았던 소비세(sales tax)도 인상적이었다.
<프로비던스 저널>에서 오랜 기자 생활을 바탕으로 초짜 소설가 브루스 실바가 노년에 발표한 <악당들의 섬>에는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한가득이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민완 기자로 활약을 펼치는 L.S.A.(리엄) 멀리건은 자신이 나고 자란 프로비던스의 ‘마운트 호프’ 지역에서 연달아 발생한 연쇄 방화 사건을 추적한다. 만성 위궤양으로 고생하는 중년 기자는 이혼 수속이 끝나지 않는 전처로부터 오늘은 또 어떤 여자와 바람이 났냐는 닦달 전화에 시달린다. 첨단 기술이나 정보 수집 같은 테크닉보다 동네 불법 도박장을 운영하는 휙 영감으로부터 은밀한 정보를 조달하는 멀리건은 그야말로 구시대의 공룡 화석 같은 캐릭터다. 이렇게 구닥다리 기자가 어떻게 복잡하기 짝이 없는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수십 년간의 기자생활을 통해 뉴잉글랜드에서 가장 작은 주라는 로드아일랜드의 사정에 빠삭한 브루스 디실바는 지역의 내밀한 속살을 헤집는다. 소아성애자 교구 신부로부터 시작해서, 뇌물이 없으면 에이즈 검사 한 번 진행하는 몇 주일씩 걸리는 그 동네 사정을 작가처럼 기술해 낼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소설에서 나를 한층 더 자극했던 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인 2008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메이저리그 페넌트 레이스에 대한 묘사였다. 약물파동으로 추락하기 전, 보스턴의 쌍포로 리그를 호령하던 데이빗 오티즈와 매니 래미레즈가 그야말로 마지막 불꽃을 불사르던 시절의 추억 말이다. 뉴잉글랜드의 레드삭스 팬들이 숙적 양키즈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소설의 후반부에서 목에 현상금이 걸린 멀리건이 양키즈 복장으로 변장하고 다녔다는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자신의 애완견에서 리라이트(re-write)라는 애칭을 붙이고, 공짜 주차 장소를 찾아 헤매는 신문사나 사사건건 경찰들의 비리를 들춰내서 신문에 까발리는 멀리건은 그야말로 적대적인 사방에 둘러 쌓여 있다. 하지만, 어느 모로 보나 예쁜 구석 하나 없는 이 기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마운트 호프/프로비던스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무장한 “경주마”다. 무고한 시민과 소방대원들, 자신이 존경하는 은사와 사랑하는 친구가 연쇄방화범의 화마에 희생당하면서 멀리건에게 이 사건은 단순한 취재의 대상이 아닌 반드시 자신이 응징해야 하는 개인 차원의 복수로 업그레이드된다. 브루스 디실바는 독자로 하여금 후반부로 갈수록 그 결말이 사법권에 의한 처벌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린치가 되더라도 부디 통쾌한 해결을 꿈꾸게 유도한다. 아니 이 사람이 초짜 작가가 맞나?
멀리건의 입체적 캐릭터를 위해 같은 신문사의 동료이자 로맨틱한 관계에 있는 베로니카와의 밀당도 작가는 빼놓지 않는다. 손에 잡힐 듯, 빠져 나갈 듯 그야말로 애간장을 태우는 미녀 기자와의 로맨스는 결말에서 반전을 기다리고 있다. 작고한 아버지와 오랜 우정을 대변하는 전직 소방대원 잭 아저씨의 구수한 이탈리아 욕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 포인트다. 아마 이것도 대를 이어 가며, 프로비던스에서 살아온 사람만 알 수 있는 브루스 디실바만의 문학적 노하우가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본다.
‘악당들의 섬’(Rogue Island)라는 옛 지명에서 유래된 것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로드 아일랜드의 이권사업에 개입된 다수의 마피아, 건설업자 그리고 변호사 집단을 대량으로 등장시키면서 브루스 디실바 작가는 자신의 처녀작을 다채롭게 만든다. 악동 이미지의 주인공 캐릭터, 적당한 반전 그리고 호쾌한 복수까지 갖춘 <악당들의 섬>은 데뷔작으로 이 정도면 준수하지 싶다. 물론 개인적인 체험 때문에, <악당들의 섬>에 더 흠뻑 빠질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도미 낚시를 즐기던 포트 애덤스에는 또 언제나 가볼 수 있게 될지, 가슴 시리게 푸르렀던 그 바다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