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금아. 사람들이 너를 오해하는 게 있다. 네 능력은 뛰어나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 모두가 그만두는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시작하는 것. 너는 얼음 속에 던져 져 있어도 꽃을 피우는 꽃씨야.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라고 격려해주면서도, 끝에는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라며알아주는 마음. 우리 서로에게 이것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누구는 세상으로부터 전면적인 인정, 사랑, 존경을 받고 싶어하고 누구는 세상에 전면적으로 헌신하고 싶어하지만 누군가는 광장 속에서는 살기 힘든 체질이기도 하다. 그걸 죽어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냥 레고에는 여러 모양의 조각들이 있는 거다.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인 집단이 거꾸로 개인의 행복의 장 대가 되어버리는 순간, 집단이라는 리바이어던은 바다괴물로 돌 아가 개인을 삼킨다. 집단 내에서의 서열, 타인과의 비교가 행복의 기준인 사회에서는 개인은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노예가 되어 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사다리 위로 한 칸이라도 더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매달려 있다가 때가 되면 무덤으로 떨어질 뿐이다. 행복의 주어가 잘못 쓰여 있는 사회의 비극 이다.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 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 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정답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어사 박문수나 판관 포청천처럼 누군가 강력한 직권 발동으로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악인을 엄벌하는 것을 바란다. 정의롭고 인간적이고 혜안 있는 영웅적 정치인이 홀연히 백마 타고 나타나서악인들을 때려잡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주길 바란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일은 없을 거다. 링에 올라야 할 선수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한국사회는 이런 사회다.
실제 하는 일, 봉급도 중요하지만 남들 보기에 번듯한지‘ ‘어떤급인지‘가 실체적인 중요성을 가진 사회인 거다.

‘갑질‘의 심리 역시 수직적 가치관의 사회에서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있으면 그걸 이용해 상대에 대한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려는 수컷 동물 사이의 우세경쟁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내가누군지 알아?"가 이렇게 자주 튀어나오는 사회가 있을까. 이런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타인에 대한 관용 부족으로 이어져 약자혐오와 위악적인 공격성을 낳는다. 약자는 자기보다 더 약자를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이다.

우리가 더 불행한 이유는 결국 우리 스스로 자승자박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그가 가장 많이, 반복해서 한 말은 의외로 소박한 것이었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보다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이다.

북유럽, 서유럽, 북미의 행복도가 높은 데 비하여 한국, 일본, 싱가포르의 행복도는 이상할 정도로 낮게 나타나는데, 그 원인을 개인주의적 문화와 집단주의적 문화의 차이로 분석한다.

타인과의 비교에 대한 집착이 무한경쟁을 낳는다. 잘나가는집단의 일원이 되어야 비로소 안도하지만, 그다음부터는 탈락의공포에 시달린다. 결국 자존감 결핍으로 인한 집단 의존증은 집단의 뒤에 숨은 무책임한 이기주의와 쉽게 결합한다. 한 개인으로는위축되어 있으면서도 익명의 가면을 쓰면 뻔뻔스러워지고 무리를 지으면 잔혹해진다. 고도성장기의 신화가 끝난 저성장시대, 강자와 약자의 격차는 넘을 수 없게 크고, 약자는 위는 넘볼 수 없으니 어떻게든 무리를 지어 더 약한 자와 구분하려든다. 가진 것은이 나라 국적뿐인 이들이 이주민들을 멸시하고, 성기 하나가 마지막 자존심인 남성들이 여성을 증오한다.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그가 믿었을지 알수 없는 천국에서의 명복을 빌기보다 "당신의 아들이어도 좋고,
엄마 오빠 강아지 그 무엇으로도 다시 인연을 이어가고 싶지만,
만일 내가 택할 수 있는 게 주어지고 우리가 윤회를 통해 다음생에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면 나는 다시 한번 당신의 남자친구가 되고 싶고, 다시 한번 당신의 남편이 되고 싶다"는 아내를 향한 그 의 절절한 유언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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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 판단, 차별적인 감정, 정신 활동, 도덕적 선호 등 인간의 능력은 선택을 통해서만 발휘될 수 있다. 관습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선택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는 최고를 가려내고 구하는 훈련을 도무지 할 수 없다. 정신과 도덕도 근육과 마찬가지로 사용해야 좋아진다.(...)세상이 혹은 자기 몫에 해당하는 세상이 자신이 인생 진로를 대신 선택하게 내버려 두는 사람은 유인원처럼 흉내 내는 능력만이 필요할 뿐이다. 자기 계획을 자기가 선택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다.

공리주의를 주창한 위대한 두 인물을 비교하자면, 밀은 보다 인간적인 철학자였고, 벤담은 보다 일관된 철학자였다.

실제로 미국의 상위 1퍼센트가 미국 전체 부의 3분의 1을 소유하는데, 이는 하위90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부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액수다.
또한 상위 10퍼센트 가정이 미국 전체 소득의 42퍼센트, 전체 부의 71 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규제 없는 시장을 옹호하면서 정부 규제에 반대하는데, 이는 경제 효율성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 때문이다. 이들의 핵심 주장은 우리 개인에게는 자유라는 기본권이 있으며,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는 한, 우리는 자신의 소유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
는 것이다.

『아나키,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 Anarchy, State and Utopia (1974)란 책에서, 로버트 노직 Robert Nozick은 자유지상주의 원칙을 철학적으로 옹호하며, 분배정의라는 익숙한 개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개인에게는 "워낙 강력하고 광범위한 권리가 있어서, 국가가 할 일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게 무엇인지 의문이다"라는 주장으로 시작한다. 그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오직 계약의 이행을 강제하고, 사람들을 폭력과 절도와 사기에서 보호하는 제한적인 기능만 수행하는 최소 국가만이 정당화될 수 있다. 이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일을 한다면, 어떤 일도 강요받지 않을 개인의권리를 침해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국가는 정당화될 수 없다."

다른 사람을 돕는 행동은 남에게 강요해서도 안 되고 남으로부터 강요받아서도 안 된다.

노직은 현재의 경제적 지위를 얻는 것에 기여한 초기 소유물의 정당 성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과세(내 수입을 가져가는 행위)를 도덕적으로 강제 노동(내 노동을 가져가는 행위)과 노예제(나에 대한 내 소유권을 부정하 는 행위)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본다.

반면 시장 회의론자들은 (...) 이들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이 겉보기처럼 항상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돈으로 거래할 경우 타락하거나 질이 떨어지는 재화와 사회적 행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자유지상주의나 공리주의 논리로 생각할 경우, 병역을 배분하는 최선의 방법은 지원자들로 꾸리는 모병제이고, 그다음이 남북 전쟁 당시의 혼합형 제도이며, 징병제는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선택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는 최소한 두 가지 반박이 가능하다. 하나는 공정성과 자유가 침해된다는 반박이고, 또 하나는 시민의 미덕과 공동선을해친다는 반박이다.

가난과 경제적 어려움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군 입대 말고 다른 대안이 없을 수 있다. (...) 미국 사회에서 기회 불균등이 지속되는 한, 시장을 통해 병역을 배분하는 것은 대안 없는 사람들에 대한 부당한 처사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배심원을 고용하지 않고 징발하는 이유는 법정에서 정의를 집행하는 행위를 모든 시민이 함께 나눠야 할 책임으로 보기 때문이다.
(...) 배심원 활동은 단지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에 그치지 않는다. 배심원 의무가 늘 의식을 고양시키지는 않겠지만, 모든 시민이 그 책임을 수행해야 한가는 생각은 법정과 사람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병역을 시민의 의무로 본 가장 유명한 발언 가운데 하나는 제네생의 계몽주의 정치 이론가 장 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 의 말이다. 그는 『사회 계약론 The Social Contract』(1762)에서 시민의 이미거래되는 물건으로 바꾸는 행위는 자유를 증진시키는 게 아니라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공공의 업무를 시민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로 여기지 않게 되면,
그리고 그것을 사람이 아닌 돈으로 해결하려 들면, 국가의 몰락이 가까워 온다. 전쟁터로 진군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그들은 군대에 돈을지불하고 집에 머무른다. (.……) 진정으로 자유로운 국가라면 시민은모든 일을 직접 하지, 돈으로 해결하지 않는다. 돈으로 의무를 면제받으려 하지 않고, 의무를 직접 이행할 특권을 얻기 위해 오히려 돈을 지불할 것이다. 나는 사회 통념과 달리, 강제 노동이 세금보다 자유에 덜위배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으므로 물건처럼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런 시각은 (존중받아야 하는) 인간과 (언제나 사용될 수 있는) 물건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이를 근본적인 도덕적 차이로인식한다. 이러한 견해를 가장 강하게 펼친 사람이 다음 장에서 살펴볼 이마누엘 칸트다.

인도의 대리 출산과 앤드루 카네기가 남북전쟁에서 자기 대신 싸울 군인을 고용한 사례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사례에서 옳고 그름을 생각하다 보면 정의에 대해 둘로 갈라져 경쟁하는 두 가지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자유 시장에서 우리가 하는 선택은얼마나 자유로울까? 세상에는 시장에서 취급하는 것이 영예롭지 못하며 돈으로 살 수 없는 미덕과 고귀한 재화가 존재할까?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선한 의지가 선한 까닭은 그것이 어떤 효과나결과를 낳기 때문이 아니다." 선한 의지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든 그렇지 않든 그 자체로 선하다. "비록 (.....) 이 의지가 원래 의도를 실천할 힘이 매우 부족하다 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를 얻을 수 없다 해도 (......) 그것은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 보석처럼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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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자발적 구매자들이 자유롭게 시장에 들어가 자발적 판매자를 만나고, 가격이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되는 정상적인 자유 시장 상황이 아니다. 비상 상황에서 압력을 받는 구매자들에게 자유는 없다. 안전한 숙소와 같은 생필품의 구매는 강제되고 있다.

여기는 미국입니다. 우리는 부를 폄하하지 않습니다. 성공한 사람을 탐탁하지 않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성공은 보상 받아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분노하는, 또한 마땅히 화를 내는 이유는경영진들이 실패하고도 포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돈이미국 납세자들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부진한 작황이 날씨 탓이라면, 날이 좋을 때의 풍요로운 수확 역시 유능하고 부지런한 금융인, 증권 거래인, 월스트리트 경영자들 덕분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때로 도덕적 추론을 타인을 설득하는 수단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도덕적 추론은 자신의 도덕적 신념을 분별하는 수단이자, 우리가 어떤 신념을 왜 믿는지 이해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이 책의 목적은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알려 주는 정치 사상사를 다루는 데 있는 것이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정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립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도록 만들어, 자신이 무엇을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도록 하는 데 있다.

도덕은 목숨을 숫자로 세고, 비용과 이익을 저울질하는문제인가, 아니면 어떤 도덕적 의무와 인권은 기본적인 것이어서 그러한 계산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인가? 그리고 어떤 권리가 그토록 기본적인 것이라면, 타고난 권리든, 신성한 권리든, 빼앗을 수 없는 권리든, 정대적 권리든 간에, 그것을 어떻게 가려낼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들이 기본 권리인 이유는 무엇인가?

영국의 도덕 철학자이자 법 개혁가인 제러미 벤담은 공리주의 원칙을 만들었다. 공리주의의 핵심은 간결하며 직관적으로 이해 가능하다.
도덕의 최고 원칙은 행복의 극대화, 즉 쾌락의 총량이 고통의 총량보다많게 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벤담에 따르면, 공리 utility‘를 극대화하는행위는 무엇이든 옳다. 그가 말하는 ‘공리‘란 쾌락이나 행복을 가져오고 고통이나 불행을 막는 일체를 의미한다.

모든 도덕적다툼은 알고 보면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극소화하는 공리주의 원칙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둘러싼 이견일 뿐, 원칙 그 자체에 대한이견이 아니다.

오멜라스 사람들은 아이가 그곳에 있음을 모두 알고 있다. (……) 그아이가 왜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 자신들의 행복,
도시의 아름다움,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정, 아이들의 건강, 학자들의지혜, 장인들의 기술, 그리고 심지어는 풍성한 수확과 온화한 날씨조차 전적으로 그 아이의 혐오스러울 만큼 비참한 처지에 달려 있다는사실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 물론 아이를 그 지독한 곳에서 밝은 햇살이 비치는 바깥으로 데리고 나온다면, 아이를 깨끗하게 씻기고 잘 먹이고 편않게 해준다면, 그것은 정말로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당장 그날 그 시간부터 지금껏 오멜라스가 누렸건 모든 행복과 아름다움과 즐거움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계약인 것이다.

과연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일까? 벤담의 공리주의에 대한 첫 번째 반박, 즉 인간의 기본권 존중을 내세우는 사람은 아무리 도시 전체가 행복해진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라고 말한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라 하더라도 죄 없는 아이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잘못이다.

아마도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상호 작용 철학 강의로 기록될 노천극장에서의 강의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황홀했다. 하지만 내가 가장 큰 감동을 받은 이유는따로 있었다. 내 생각에, 아마도 서울의 따뜻한 봄날 저녁 야외에 모였던 대중의 생각은 고대 아테네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느꼈던 생각과 비슷했을 것이다. 이견을 가진 사람들이 정중하고 예의를 갖춰 나눈그 대화는 민주주의 시민정신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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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세대와 자살 선언

유지 보수자의 운명을 띠고 세상에 태어나 노예로 죽을 팔자의 이 시대의 이 삼십대의 분노, 절망, 히스테리를 극적으로 얘기하는 책이다.

우리 앞의 세대들은 그들의 후속 세대들에게 말한다. ˝왜 열심히 하지 읺는 거지??˝ ˝우리때는 말이야 0에서 시작했어˝ ˝왜 정열이 없니? 고전이라는 걸 해봐.˝ 그도 그럴것이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내지 않았던가. 기성 세대들이 이뤄놓은 민주화나 자본주의가 결과적으로 이랬대더라 저렀더라 평가할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기에 우리는 순응하는 삶이 당연한 것으로 교육을 받았고 뭔가 이룰 것이 없는 상태 이기도 한다. 현재 우리는 이미 완성된 사회안에서 나눠 먹을 파이가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부스라기라도 먹고 싶은 세대들은 그 전 세대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경쟁을 치루며 살아간다. 이 시대를 원망하며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기도 하고, 꿈을 모른채 의미없이 살아가기도 하며, 끝을 뻔이 아는 게임에 참여 하기도 한다. 노력해도 보상받지 못하고 자신의 가치를 돈으로밖에 증명할 수 없는 이시대를 살아가기에 수 많은 사람이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려 할 수 있다.

이 책의 주인공 세연은 와이두유리브딧컴에서 말한다. [우리가 자살을 한 뒤 사회가 궁극적으로 바뀌지 못해도 괜찮다. 우리는 그런 사뢰에 분명히 거부 의사를 밝혔다. 버나드 맬러머드는 ˝인간의 가치 하락은 인간이 하등의 항의도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긴다˝라고 우리는 항의했다.]

자살을 통해 사회에 대한 항의를 하고 이목을 집중시킬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 시대를 바꾸고자 하는 외침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가장 가까운 어느곳에 아주 작지만 행복과 성취를 발견하는 포인트들은 분명히 있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자뀌지는 않겠지만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다음 세대들응 위한 고민과 해결방법을 강구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세상 누구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 세상 수 많은 사람들때문에 이 사회가 그래도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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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20-02-03 0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지 보수자의 운명을 띠고 세상에 태어나 노예로 죽을 팔자의 이 시대의 이 삼십대의 분노, 절망, 히스테리를 극적으로 얘기하는 책이다.

한줄평이 인상깊네요.
 

버린 물건이 좀 있긴 했어도, 내 짐들이 1톤짜리 픽업트럭 하나도다 채우지 못한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내 또래로 보이는 이삿짐센터아르바이트생은 조립식 간이 옷장을 헐렁하게 모양만 맞추고 도망쳤다. 옷걸이를 몇 개 걸었더니 간이 옷장은 무너져버렸다. 무너진 간이옷장을 일으키고 다시 너트를 죄면서 나는 투지를 불태웠다. 공무원시험에 합격하면 애를 낳지 않고 그 대신 남들이 좆같이 양육비에 쓰는 돈을 전부 유흥비로 쓰면서 다시는, 다시는 씨발 이렇게 궁상맞게살지 않을 거야.

- 예전에는 졸부가 되어 돈을 펑펑 쓰면서 돈이 주는 권력의 맛을 즐-
업기는 상상을 했다. 그런데 이제는 상상 속의 그런 일은 벌어질 수 없게 됐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운이 좋아 시험에 합격한다 해도 7급 공무원이 어디서 그런 돈을 벌겠는가? 뇌물을 받아서? 공무원 시험을공
준비하는 학생들이 만든 인터넷 카페에는 7급 공무원이 얼마나 막강한 자리인지에 대한 게시물들이 올라왔다. 나는 건설업자나 사업가들을 상대로 횡포를 부리는 7급 공무원의 모습을 그리며 자리가 주는 권력의 맛을 상상 속에서나마 즐겨보려 했지만, 추잡하고 부끄럽다는생각만 들 뿐이었다.

우리는 그런 사회에 분명히 거부 의사를 밝혔다. 버나드 맬러머드는 "인간의 가치 하락은 인간이 하등의 항의도 없이 그것을 받아들 이기 때문에 생긴다" 라고 말했다. 우리는 항의했다.

1978년 이후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유지·보수자의 운명을 띠고 세상에 났다. 이 사회에서 새로 뭔가를 설계하거나 건설할 일 없이 이미 만들어진 사회를 잘 굴러가게 만드는 게 이들의 임무라는 뜻이다. 이들은 부품으로 태어나 노예로 죽을 팔자다.

먼저 사회의 완성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있다.
완성된 사회라는 것은 구성원 또는 계층 간의 갈등이 완전히 사라진 사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완성된 사회는 그런 갈등과 모순이 어느 범위 이내에서 더 커지지 않는 상태로 계속 지속될 수 있는 사회를 의미한다.

서구 국가들과 아시아의 일본, 한국은 이런 단계에 도달했다. 한국은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성공하면서 ‘완성된 사회‘ 의 초입에 접어들었다.
완성된 사회에도 근본적인 불의와 부조리는 있으나, 완성된 사회는 한 가지 답을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그 부조리를 피해간다.
이 시스템에서는 어떤 모순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지만,
또 어떤 모순도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는 쌓이지 못한다. 고작해야 선거 혁명‘ 이다. 즉 오늘날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사이의 논쟁은 적당한 온도의 온수를 놓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관과 차가 운 물이 나오는 관 사이에 레버를 어느 위치에 놓느냐를 두고 벌이는 싸움에 불과하다.

자신들의 힘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그것도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드라마틱하게 그 시대적 사명을 이뤄낸세대가 우리 세대를 우습게 보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 거나 ‘분노할 줄 모른다‘ 고 비아냥거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새로운 담론을 제기할 수조차 없는 환경은 우리 세대의 가치관에도 예상치 못한 영향을 미친다. 이른바 ‘표백 세대‘ 의 등장이다.
이 세대에게는 실질적으로 어떤 사상도 완전히 새롭지 않으며,
사회가 부모나 교사를 통해 전달하는 지배 사상에 의문을 갖거나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은 낭비일 뿐이다. 그런 시도는 기껏 잘돼봤자 기존 지배 사상이 얼마나 심오하고 빈틈없는지를 더 잘 이해할수 있게 되는 효과만 낳는다.
이들에게 지배 사상은 큰 틀에서 항상 옳으며,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게 개인마다 과정과 깊이가 다를 수는 있으나 결론은 언제나 같다. 이들은 지배 사상을 받아들이는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따라서 실제 삶에서 온갖 종류의 불편함과 부당한을 겪어야 하는데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개인이나 작은 이익집단의 단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되며, 세계는 사상적으로 완전무결한 상캐가 된다.
이것이 바로 표백과정이다. 아무도 더 나은 시스템을 떠올리지 못한다. 거대한 흰색 세계는 모등 빛을 흡수하며 무결점 상태를 유지한다.

위대한 일을 할 기회를 박탈당한 세대는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출세나 개인적인 성공과 같은 보다 작은 성취에 매달리게 된다. 그 런데 완성된 사회는 개인적인 성공에 대해 사실상 단 하나의 평가 기준만 지니고 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의 결합에서 필연적으로 나 올 수밖에 없는 결과다. 자유민주주의는 교리에 따라 어떤 사람이다른 사람보다 근본적으로 우월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가치 면에 서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수정자본주의는 시장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평가 척도를 한 가지만 지니고 있다.

로 두 이데올로기가 결합한 가치 체계에서 한 인간의 가를 재는 방법은 그 사람이 자유민주주의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있는가(독재자나 범죄자가 아닌가)‘와 ‘그 사람이 얼마나 높은 시장가치를 갖고 있는가‘ 가 된다.
따라서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의 젊은이는 부에 대한 욕심이크지 않더라도 자신의 능력과 야망을 증명하려면 돈을 버는 경쟁에뛰어들어야 한다. 그 외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존재 가치를 주장할 다른 방법이 없다.
군대를 일으켜 무공을 세우는 일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에 어긋나며, 단식과 묵상으로 깨달음을 얻는 행위는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느냐를 놓고 벌이는 시합에서도 표백 세대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완성된 사회는 가능성이 그만큼 고갈된 사회기 때문에, 부를 창출하는 능력에서도 성숙한 단계에 있다. 닷컴 열풍, 부동산 시장 활황과 같은 국지적인 성장은 때때로하지만 산업화 초·중반에 볼 수 있었던 ‘경제 전반에 걸친 활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완성된 사회의 경제성장률은 이론적으로0퍼센트에 가까워야 한다.
고백 세대들은 아주 적은 양의 부를 차지하기 위해 이전 세대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비교도 안 되는 경쟁을 치러야 하며, 그들에게 열린 가능성은 사회가 완성되기 전 패기 있는 구성원들이 기대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가장 똑똑하다는 젊은이들조차 엘리트 조직의 끄트머리가 되기 위해 몇 년을 골방에 처박혀야 하고, 그런 노력이 결실을 얻은 뒤에도 조직의 말단에서 다시 경쟁을 시작해야 한다.
표백 세대는 같은 세대뿐 아니라 이미 사회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성세대들과도 경쟁해야 하는데, 사회 각 분야가 고도로 발전해 있고 표백 세대들이 가진 자원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불리한 게임이다. 분배 방식이라는 게임의 규칙조차 기성세대가 정한 것을 따라야 한다.

자살 선언은 위에 언급한 네 가지 삶의 방식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살 선언은 완성된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자살 선언은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가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저항 운동이다. 그것은 극단적이면서 저항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유일하게 논리적으로 기능하는 저항 운동이기도 하다. 물을 인정할 수 없는 물고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다.
자살 선언자들은 완성된 사회에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미약한대가를 사양하며, 완성된 사회를 긍정해 그 구조 안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죽음의 고통과 사후에 당할 모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후 세계에 대한 어떤 기대나 선망도 갖고 있지않다.
나는 자살 선언자에 대해 완성된 사회가 쏟아낼 비난이 어떤 것 인지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은 자살 선언자의 자살이 비겁한 도피와현실 부정이며, "그럴(자살할) 용기와 의지가 있다면 그 힘으로 살 아라" 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패전을 각오한 군인과 순교 자들처럼 명백하게 죽음을 선택한 이들에 대해서는 같은 주장을 하지 않는다.

자살 선언자들은 봉건사회를 무너뜨린 부르주아지나 공산 혁며을 시도한 프롤레타리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살 선언자들의 목표는 완성된 사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완성된 사회의 천박함과 불완전성을 고발하고 자신들이 품고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증명하는 데 있으며, 그 방법은 오로지 죽음이라는 완전한 거부뿐이다. 왜냐하면 봉건 시대의 부르주아지와 산업시대의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대안과 미래가 있었으나 표백 세대와자살 선언자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웅으로 태어났으나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은 영웅의 삶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영웅다운 죽음뿐이다.
부모 세대가 만들어놓은 무대 위에서 하찮은 욕망을 채우는 데- 시간과 열정을 허비하며 의미 없는 삶을 보내고 우리 세대가 별 볼일 없음을 시인할 것인가, 아니면 담대한 결단으로 그대 안에 있는위대한 가능성을 증명하고 우리를 비웃어오던 세상에 충격과 공포를 줄 것인가.
선택은 그대에게 달렸다.

자살 선언에 대한 내 반론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세연은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무가치한 것처럼 얘기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것을 우리 모두 잘 알잖아. 우리가 호모사피엔스라는 동물 종으로서잘 가꿔진 숲길을 걸을 때 거부할 수 없는 작고 소소한 기쁨을 맛본다.
면, 그 숲을 지키고 가꾸는 일에 가치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어. 좋은음악이나 그림, 음식을 즐기는 데서 오는 즐거움은 본능적인 것이고,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만들거나 만드는 기술을 갈고 닦는 데에는 왜우리가 그걸 해야 하는지,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애써 설명해야 할 필요가 없어. 그러니 그런 일을 하면서 보내는 샇ㅁ에고 가치는 있는거야.

위대한 일을 하고자 하는 욕망은 사람들에게서 잊히고 싶 지 않다는 바람이고, 그것은 곧 다른 사람의 애정과 관심을 바라는 육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누군가 어른스럽게 삶을 사는 법을 세연에게 보여줬어야 했다. 불행히도 우리 주위에는, 아니 한국 사회 전체에 그렇게 성숙한 삶을 사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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