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린 물건이 좀 있긴 했어도, 내 짐들이 1톤짜리 픽업트럭 하나도다 채우지 못한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내 또래로 보이는 이삿짐센터아르바이트생은 조립식 간이 옷장을 헐렁하게 모양만 맞추고 도망쳤다. 옷걸이를 몇 개 걸었더니 간이 옷장은 무너져버렸다. 무너진 간이옷장을 일으키고 다시 너트를 죄면서 나는 투지를 불태웠다. 공무원시험에 합격하면 애를 낳지 않고 그 대신 남들이 좆같이 양육비에 쓰는 돈을 전부 유흥비로 쓰면서 다시는, 다시는 씨발 이렇게 궁상맞게살지 않을 거야.

- 예전에는 졸부가 되어 돈을 펑펑 쓰면서 돈이 주는 권력의 맛을 즐-
업기는 상상을 했다. 그런데 이제는 상상 속의 그런 일은 벌어질 수 없게 됐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운이 좋아 시험에 합격한다 해도 7급 공무원이 어디서 그런 돈을 벌겠는가? 뇌물을 받아서? 공무원 시험을공
준비하는 학생들이 만든 인터넷 카페에는 7급 공무원이 얼마나 막강한 자리인지에 대한 게시물들이 올라왔다. 나는 건설업자나 사업가들을 상대로 횡포를 부리는 7급 공무원의 모습을 그리며 자리가 주는 권력의 맛을 상상 속에서나마 즐겨보려 했지만, 추잡하고 부끄럽다는생각만 들 뿐이었다.

우리는 그런 사회에 분명히 거부 의사를 밝혔다. 버나드 맬러머드는 "인간의 가치 하락은 인간이 하등의 항의도 없이 그것을 받아들 이기 때문에 생긴다" 라고 말했다. 우리는 항의했다.

1978년 이후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유지·보수자의 운명을 띠고 세상에 났다. 이 사회에서 새로 뭔가를 설계하거나 건설할 일 없이 이미 만들어진 사회를 잘 굴러가게 만드는 게 이들의 임무라는 뜻이다. 이들은 부품으로 태어나 노예로 죽을 팔자다.

먼저 사회의 완성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있다.
완성된 사회라는 것은 구성원 또는 계층 간의 갈등이 완전히 사라진 사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완성된 사회는 그런 갈등과 모순이 어느 범위 이내에서 더 커지지 않는 상태로 계속 지속될 수 있는 사회를 의미한다.

서구 국가들과 아시아의 일본, 한국은 이런 단계에 도달했다. 한국은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성공하면서 ‘완성된 사회‘ 의 초입에 접어들었다.
완성된 사회에도 근본적인 불의와 부조리는 있으나, 완성된 사회는 한 가지 답을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그 부조리를 피해간다.
이 시스템에서는 어떤 모순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지만,
또 어떤 모순도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는 쌓이지 못한다. 고작해야 선거 혁명‘ 이다. 즉 오늘날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사이의 논쟁은 적당한 온도의 온수를 놓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관과 차가 운 물이 나오는 관 사이에 레버를 어느 위치에 놓느냐를 두고 벌이는 싸움에 불과하다.

자신들의 힘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그것도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드라마틱하게 그 시대적 사명을 이뤄낸세대가 우리 세대를 우습게 보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 거나 ‘분노할 줄 모른다‘ 고 비아냥거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새로운 담론을 제기할 수조차 없는 환경은 우리 세대의 가치관에도 예상치 못한 영향을 미친다. 이른바 ‘표백 세대‘ 의 등장이다.
이 세대에게는 실질적으로 어떤 사상도 완전히 새롭지 않으며,
사회가 부모나 교사를 통해 전달하는 지배 사상에 의문을 갖거나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은 낭비일 뿐이다. 그런 시도는 기껏 잘돼봤자 기존 지배 사상이 얼마나 심오하고 빈틈없는지를 더 잘 이해할수 있게 되는 효과만 낳는다.
이들에게 지배 사상은 큰 틀에서 항상 옳으며,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게 개인마다 과정과 깊이가 다를 수는 있으나 결론은 언제나 같다. 이들은 지배 사상을 받아들이는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따라서 실제 삶에서 온갖 종류의 불편함과 부당한을 겪어야 하는데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개인이나 작은 이익집단의 단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되며, 세계는 사상적으로 완전무결한 상캐가 된다.
이것이 바로 표백과정이다. 아무도 더 나은 시스템을 떠올리지 못한다. 거대한 흰색 세계는 모등 빛을 흡수하며 무결점 상태를 유지한다.

위대한 일을 할 기회를 박탈당한 세대는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출세나 개인적인 성공과 같은 보다 작은 성취에 매달리게 된다. 그 런데 완성된 사회는 개인적인 성공에 대해 사실상 단 하나의 평가 기준만 지니고 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의 결합에서 필연적으로 나 올 수밖에 없는 결과다. 자유민주주의는 교리에 따라 어떤 사람이다른 사람보다 근본적으로 우월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가치 면에 서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수정자본주의는 시장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평가 척도를 한 가지만 지니고 있다.

로 두 이데올로기가 결합한 가치 체계에서 한 인간의 가를 재는 방법은 그 사람이 자유민주주의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있는가(독재자나 범죄자가 아닌가)‘와 ‘그 사람이 얼마나 높은 시장가치를 갖고 있는가‘ 가 된다.
따라서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의 젊은이는 부에 대한 욕심이크지 않더라도 자신의 능력과 야망을 증명하려면 돈을 버는 경쟁에뛰어들어야 한다. 그 외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존재 가치를 주장할 다른 방법이 없다.
군대를 일으켜 무공을 세우는 일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에 어긋나며, 단식과 묵상으로 깨달음을 얻는 행위는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느냐를 놓고 벌이는 시합에서도 표백 세대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완성된 사회는 가능성이 그만큼 고갈된 사회기 때문에, 부를 창출하는 능력에서도 성숙한 단계에 있다. 닷컴 열풍, 부동산 시장 활황과 같은 국지적인 성장은 때때로하지만 산업화 초·중반에 볼 수 있었던 ‘경제 전반에 걸친 활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완성된 사회의 경제성장률은 이론적으로0퍼센트에 가까워야 한다.
고백 세대들은 아주 적은 양의 부를 차지하기 위해 이전 세대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비교도 안 되는 경쟁을 치러야 하며, 그들에게 열린 가능성은 사회가 완성되기 전 패기 있는 구성원들이 기대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가장 똑똑하다는 젊은이들조차 엘리트 조직의 끄트머리가 되기 위해 몇 년을 골방에 처박혀야 하고, 그런 노력이 결실을 얻은 뒤에도 조직의 말단에서 다시 경쟁을 시작해야 한다.
표백 세대는 같은 세대뿐 아니라 이미 사회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성세대들과도 경쟁해야 하는데, 사회 각 분야가 고도로 발전해 있고 표백 세대들이 가진 자원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불리한 게임이다. 분배 방식이라는 게임의 규칙조차 기성세대가 정한 것을 따라야 한다.

자살 선언은 위에 언급한 네 가지 삶의 방식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살 선언은 완성된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자살 선언은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가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저항 운동이다. 그것은 극단적이면서 저항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유일하게 논리적으로 기능하는 저항 운동이기도 하다. 물을 인정할 수 없는 물고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다.
자살 선언자들은 완성된 사회에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미약한대가를 사양하며, 완성된 사회를 긍정해 그 구조 안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죽음의 고통과 사후에 당할 모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후 세계에 대한 어떤 기대나 선망도 갖고 있지않다.
나는 자살 선언자에 대해 완성된 사회가 쏟아낼 비난이 어떤 것 인지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은 자살 선언자의 자살이 비겁한 도피와현실 부정이며, "그럴(자살할) 용기와 의지가 있다면 그 힘으로 살 아라" 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패전을 각오한 군인과 순교 자들처럼 명백하게 죽음을 선택한 이들에 대해서는 같은 주장을 하지 않는다.

자살 선언자들은 봉건사회를 무너뜨린 부르주아지나 공산 혁며을 시도한 프롤레타리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살 선언자들의 목표는 완성된 사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완성된 사회의 천박함과 불완전성을 고발하고 자신들이 품고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증명하는 데 있으며, 그 방법은 오로지 죽음이라는 완전한 거부뿐이다. 왜냐하면 봉건 시대의 부르주아지와 산업시대의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대안과 미래가 있었으나 표백 세대와자살 선언자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웅으로 태어났으나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은 영웅의 삶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영웅다운 죽음뿐이다.
부모 세대가 만들어놓은 무대 위에서 하찮은 욕망을 채우는 데- 시간과 열정을 허비하며 의미 없는 삶을 보내고 우리 세대가 별 볼일 없음을 시인할 것인가, 아니면 담대한 결단으로 그대 안에 있는위대한 가능성을 증명하고 우리를 비웃어오던 세상에 충격과 공포를 줄 것인가.
선택은 그대에게 달렸다.

자살 선언에 대한 내 반론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세연은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무가치한 것처럼 얘기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것을 우리 모두 잘 알잖아. 우리가 호모사피엔스라는 동물 종으로서잘 가꿔진 숲길을 걸을 때 거부할 수 없는 작고 소소한 기쁨을 맛본다.
면, 그 숲을 지키고 가꾸는 일에 가치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어. 좋은음악이나 그림, 음식을 즐기는 데서 오는 즐거움은 본능적인 것이고,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만들거나 만드는 기술을 갈고 닦는 데에는 왜우리가 그걸 해야 하는지,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애써 설명해야 할 필요가 없어. 그러니 그런 일을 하면서 보내는 샇ㅁ에고 가치는 있는거야.

위대한 일을 하고자 하는 욕망은 사람들에게서 잊히고 싶 지 않다는 바람이고, 그것은 곧 다른 사람의 애정과 관심을 바라는 육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누군가 어른스럽게 삶을 사는 법을 세연에게 보여줬어야 했다. 불행히도 우리 주위에는, 아니 한국 사회 전체에 그렇게 성숙한 삶을 사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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