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신세계는 구세계만큼이나 경직돼버렸고, 사회는 본래의 유동성 1을 상실했으며, 노동자의 업무는 세밀하게 정해져 있다. 기회 역시 고정 !
되어 개인은 출발부터 열린 미래를 갖지 못한다. 톱니바퀴 속에 자리 잡은 개인의 위치가 그의 인생 전체를 결정짓는 것이다. 물론 몇몇 우발적성공이 아직도 자수성가라는 신화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기는 하지만그것은 복권을 당첨금과 동일시하는 기만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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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아직까지 실체가 규정되지는 않았지만, 그 속성이 절대성, 보편성, 불변성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진리가 실제로 존재할 것인지에 대한 네 가지 태도가 있음을 보았다. 절대주의, 상대주의, 불가지론, 실용주의가 그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진리가 역사에서 어떻게 변화되어왔는지를 살펴보았다. 각 시대마다 진리라고 믿어지는 영역이 존재했다. 원시의 자연신,
고대의 신화, 중세의 유일신, 근대의 이성이 그것이다. 근대 이성은 합리 성, 객관성, 효율성을 기반으로 인간에게 낙관적인 미래를 전망해주었 으나 세계대전이라는 외적인 요인과 학문 내부의 붕괴라는 내적인 요인 으로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음이 그러났다. 이러한 근대 이성의 붕괴와 함께 진리에 저항하는 포스트모던이 탄생했다. 포스트모던은 중세와 근대의 이분법을 비판하고, 이분법에 의해 억압 되어ㅛ던 다원적 가치를 복원하는 실천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다.

"만약 네가 영혼의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믿어라. 다만 네가 진리의 사도가 되려 한다면, 질문해라."

소피스트란 말 자체가 그리스어로 지혜로운 사람 혹은 지혜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뜻이다.

프라톤의 철학은 불완전하고 제한적인 인간에게 완전하고 무한한 진리의 세계가 있음을 알림으로써 인간의 가능성을 극대화했다는 의의가있다. 하지만 완전한 세계를 상정함으로써 상대적으로 현실 세계의 가 치를 저하하고 일상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스승의 생각에 불만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는 스승이었던 플라톤의 이데아의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플라톤에 비해볼 때 그는 현실의 물질을 중요시했으며, 물질 세계의 변화와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질료와형상의 설명에 있어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말 말하고자 한 바는 궁극의 ‘신‘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질료가 형상으로 나아가는 ‘운동‘ 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서구 자연과학과 경험주의 철학의 기원이 되며, 플라톤과 함께 서구 철학의 양대산맥으로 위치한다.

실제로 지금의 그리스도교 사상은 플라톤의 절대주의와 유사하다. 예를 들어 신플라톤주의의 ‘일자‘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에 해당하고,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는 그리스도교의 ‘천국‘에 해당한다. 플라톤 사상에서 완전한 이데아 세계와 불완전한 현상 세계를 구분하는 이분법은 그리스도교에서 완벽한 천상 세계와 타락한 지상 세계를 구분하는 이분법과 동일하다. 이에 대해서 현대 철학의 문을 연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에 다름 아님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그에 의하면 플라톤 사상의 세계 이해 방식은 그리스도교 세계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끝없는 의심 속으로 데카르트는 침전해 들어갔다. 깊이와 끝을 알 수어느 의심의 바다 속으로 내려간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닿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던 그 끝에 데카르트의 발이 극적으로 닿았다. 어떠한 극다적인 가정으로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하나의 진리를 발견한 것이-
다. 이것이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다. 사실이 문장은 후에 데카르트에 의해 수정되어서 "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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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네시아의 여러 사회에 이러한 차이점들이 존재한 것은 폴리네시아의 섬들 사이에 적어도 여섯 가지 환경적 변수가 작용했기 때문이었 다. 섬의 기후, 지질 유형, 해양 자원, 면적, 지형적 분열, 고립성 등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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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독일인의 삶
브룬힐데 폼젤 지음, 토레 D. 한젠 엮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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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벨스 비서의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자신이 맡은 일에서 어떻게든 잘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렇게 잘못되고 이시적인 일인가요? 그게 설사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라는 걸 알았더라 하거라도 말이예요. 하지만 그걸 알고서야 누가 그러겠어요? 그 정도까지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우리는 근시안덕이었고 무관심했어요.˝

자신의 성공과 출세를 위해 노력하고 그러한 기회를 쟁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차 세계대전과 경제 공항을 겪으며 이 책의 주인공은 부의 축적 명성 출세를 위해 차곡차곡 스텝을 밟아 나가는 한 사람의 평범한 시민으로 보인다. 하지만 본인이 하는일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에 대한 고민이나 관심이 전혀 없었다. 히틀러 선전운동을 주도했던 괴벨스의 비서 및 속기사로 일했던 그녀는 놀라우리만큼 본인의 업무에 대한 관심이 없었으며 그 일로 인해 닥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고민 또한 하지 않았다.

˝세상 모든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다는 건, 그래요. 일단 서민들한테는 그럴 시간이 없었어요. 먹고살기 바빠서요. 반면에 다른 사람들, 예를 들어 내 두변 사람들은 그런 문제들에 둔감했어요. 그런 문제들로 딱히 피해를 받은 것고 없고 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죠. 물론 지금은 달라요. 오랜 세월을 살아 놓고 보니 요즘은 그런 일에 관심이 무척 많아졌어요.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히고 싶은 건, 인생이라는 곳에 처음 나온 젊은이들에게는 하나의 방향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게 항상 하나의 영향으로만 정해져서는 안 돼요. 오늘날에는 그걸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린 독일 나치가 저질렀던 만행과 유대인학살과 같은 민족 차별이 잘못된 것이며 다시는 되풀이 되어선 안되는 일로 계속해서 교육받았다. 하지만 현재 우리를 되돌아 보자 1930-40년대와 지금 다른 점이 크게 있을까?? 정치에 언제나 무관심한 사람들, 불의를 보고도 지나치는 사람들, 본인의 이익과 상충될 때에는 적으로 몰아 싸우는 사람들, (비슷한 소득 수준의 자녀들끼리 어울리라 하는
부모들, 장애인 보호시설 건립에 반대하는 주민 등) 유색인종, 무슬림, 난민들을 배척하는 사람들... 지금의 우리는 어렵게 민주주의를 일으킨 우리 윗 세대들로 인해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행운아들이다. 다시는 잘못된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된다. 나는 몰랐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폼젤과 같이 말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해선 안된다. 적극적이게 사회를 바라보고 토론하고 개입해야 한다. 진짜 진실이 무엇인지 일이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시민으로서의 깨어 있는 의식이 부족할 때 이기주의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보여주는 좋은 보기이자 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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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큐멘터리 영화 「어느 독일인의 삶」 시사회에서관객과 기자들은 요제프 괴벨스의 전직 비서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를 경계했다. 이런 식의 경계심이 작동한 이유는오늘날에도 시민들 사이에서 무지와 수동성, 무관심이 다시 고개를 치켜드는 가운데 사회 일각에서 극단적인 정치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는 자각에서였다.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는 자각에서였다. 잡지 『VICE의 파울 가르불스키는 이와 관련해서 이렇게 정리했다. 나는 늘타인들을 조심하면서 살아왔는데, 그러는 나는 내 속의 보통 사람입니다. 그 보통 사람 속에는 군대 전체의 배반과폭력을 조장하기에 충분한 관성적 부조리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다들 얼마씩 품고 있는 폼젤을 늘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몰라요. 당시에 우리가 탄압받던 그 불쌍한 유대인들을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다고 말이에요. 물론 선의로 그런 말을 하는것이겠지만, 그 사람들도 막상 그 시대에 살았다면 우리와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치가 권력을 잡은 뒤로는 온 나라가 거대한 수용소 같았어요. 자유라고는 없이 모 두가 감시 속에서 살았죠.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로는 모든 것이 이미 너무 늦었어요. 다들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어요. 유대인 탄압도 그중 하나였지만, 그 밖에 다른 일도많았어요. 거기다 전쟁에 나간 가족들에 대한 걱정도 늘 달고 살았죠. 사죄할 일들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치 권력 기구 내부의 마지막 산증인으로 추정되는 브룬힐데 폼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날 왜 우익 포퓰리즘과 권위주의적 체제, 심지어 독재 정권까지 다시 돌아오고 있는지, 그런 흐름이 왜 오래전부터 국제적으로 다양한 특색을 갖고 전개되고 있는지 또 거기엔 어떠한 원인들이 작용하고 있는지 깨달을 기회를 제공한다.

국가 사회주의 체제에서 나름대로 성공한 브룬힐데 폼젤이 밝힌 정말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는 기억과 통속적으로들리는 동기들을 통해 그녀에게 접근하게 되면 현재와의 비교가 절로 떠오른다. 오늘날 서구 민주주의 사회의 주민 들은 대부분 사실이 아닌 감정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어느 한 지점에 이르렀다. 부당함의 감정이 주민들 일부를극단적인 생각으로 몰아가고 있고, 급기야 그들을 좀 더 간 단하고 나쁜 해결책으로 내몰기 위해서는 적당한 적을 찾 아내 악의 이미지만 덧씌우면 된다. 브룬힐데 폼젤의 이야 기는 우리가 열린 사회의 존속을 위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는지 자성할 계기를 제공한다.

정치학자 알브레히트 폰 루케는 트럼프가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짚어 냈다. 트럼프의 피아(彼我) 이데올로기, 국제 무대로부터의 전향과 국내문제로의 집중은 유럽 극우들의 환호까지도 설명해 주는중차대한 문제로 이어진다. 트럼프는 더 이상 다원성과 다양성으로 이루어진 민주주의가 아닌, 오직 단일 민족적으로만 이해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창끝이 될 수 있다. 헝가리 총리 빅토르 오르반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승리를 자기 멋대로 상상하면서 선거의 본래적인 의미를 재단했는데, 여기서 나타나는 것이 법치와 야당이 존재하지 않는 다른 형태의 민주주의였다.44 루케가 염려하는 것은 결국국민의 뜻이라는 미명하에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그뜻을 실현하는 것이다. 예전에 나치가 부르짖었던 다음의해결책과도 일맥상통한다.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지도자!)

브룬힐데 폼젤이 우리에게 관심을 끄는 것은 그녀가 우리를 다음과 같은 것에 주목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
우리의 불안, 힘겹게 피로 얻어 낸 자유에 대한 자만과 경시, 세계화의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는 연대 해체와 야만화의 메커니즘에 대한 무시가 그것이다.

페이스북 알고리즘은 관심 영역에 따라, 그리고 진실과 무관하게 극단적인 인간들이 열망하는 모든 것을 제공한다. 그 결과 알고리즘을 통해주어진 내용들은 선입견을 강화하고, 기존의 세계상을 공고히 한다. 그사이 소셜 미디어들은 어두운 쪽으로 사용될잠재력을 한껏 키우고 있다. 그것은 인터넷의 선구자들이인터넷 망을 새로운 천년기의 시작으로, 투명성과 민주주의, 자유 운동의 수단으로 환호했던 그 열정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인터넷 망은 증오를 배출하고 확산하는 장으로 타락해 버렸다. 사회 각 영역에 존재하는 불만들은 과거보다.
더 쉽게 하나로 뭉쳐져 확산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많은 것이 예전과는 다르다고 해도, 그러니까현대적인 생활방식, 인터넷망, 좋은 교육이 지배한다고 해도 젊은 세대의 상당수는 그 옛날 브룬힐데 폼젤이 그랬던것처럼 비정치적이고 체념적이고, 또 그녀가 자기 패거리〉라고 지칭했던 무리처럼 자기 자신의 문제에만 관심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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