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문학의 싹 - 오늘의 한국 인문학을 있게 한 인문고전 12선
김기승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오늘의 한국 인문학을 있게 한 인문고전 12선 ’이란 부제가 달린 책이다. 실제 이 책은 인문학박물관 ‘우리 인문학의 역사교실’ 1기 강의를 묶어 내놓은 책이다. 강사 중 눈에 익은 사람은 진중권을 제외하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강의 대상이 되는 책과 저자를 보면 낯익은 책과 사람이 몇몇 보인다. 하지만 역시 낯선 책과 저자가 더 많다. 나의 지식이 얕아서 그런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더불어 대상이 되는 인문고전들이 일제 시대와 해방 전후에 출간되었고, 저자 상당수가 월북한 인사나 사회주의자란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정규 교육과정에서 이들을 거의 만날 수 없던 것도, 이 저서들이 출간되기 시작한 것이 80년대 후반인 것도 이유 중 하나다.
강의는 연대순으로 이어진다. 가장 먼저 한 것은 그 유명한 이중환의 <택리지>(1751)다. 이후 안확의 <조선문명사>(1923), 이여성·김세용의 <숫자조선연구>(1931), 이만규의 <조선교육사>(1947), 박열의 <신조선혁명론>(1948), 신남철의 <역사철학>(1948), 김동석의 <뿌르조아의 인간상>(1949), 백남운의 <쏘련인상>(1950), 배성룡의 <농민독본>(1953), 김태오의 <미학개론>(1955), 홍기문의 <조선신화연구>(1964), 이종화의 <우리민중의 노동사>(2001) 등이 강의 대상이 된다. 비슷한 다른 제목들과 이름이 연상되지만 아마 그것은 해방 전후사를 읽으면서 본 탓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목차를 보면서 <택리지>를 가장 먼저 올린 것을 보고 조금 의아스러웠다. 이 책을 단순히 지리서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사 양보경 씨의 설명을 듣다보니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특히 현대적인 측면에서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통찰한 부분을 설명할 때 그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책을 읽을 때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비판적 책읽기다. 다른 저자들이 이 책을 비판한 것도 같이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단편적인 것으로 전체를 폄하하는 것은 지양해야겠지만.
이 강의들을 읽으면서 놀랐던 것은 현재 나오는 학설들이 이미 수십 년 전에 나왔다는 점이다. <조선문명사>에서 통일신라 대신 남북조시대라는 말을 쓴 것이 대표적이다. 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통일신라로 교과서에 표기되었고, 발해가 점점 비중을 높여가는 중이었는데 이미 이 시대에 이런 시대 구분을 한 것이다. <숫자조선연구>는 통계자료가 지닌 의미와 해석 방법이 왜 중요한지 알려주는데 이것은 요즘도 유효하다. 실제 통계나 도표들이 가끔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 두 저자가 조선총독부의 통계로 보여준 해석과 분석은 그 시대를 이해하는데 많은 것을 보여준다.
조금 낯선 <조선교육사>에 대한 학계의 평을 읽다보면 반드시 읽어야 할 것 같다. 약점에 비해 장점이 너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시대구분과 실증사학에 입각한 교육사라는 점과 민족사학에 기초한 교육사이자 민중을 강조한 사회경제사학의 교육사란 평가 등이 더욱 부채질한다. 그 유명한 가네코 후미코와의 열애와 천황 일가 테러 음모 혐의로 오랫동안 수감 생활을 한 박열의 <신조선혁명론>은 책 내용보다 그의 해방 후 행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강사가 인문학은 항상 상상하는 것이라고 할 때 더 많은 것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그 상상력이 비루할지라도.
개인적으로 한 번 도전하고 싶은 의욕만 있는 책이 바로 신남철의 <역사철학>이다. 대학 때 멋모르고 강의를 들었던 철학자들이 나오고, 가장 부족한 부분 중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아마 이 책을 실제 손에 든다고 해도 수박 겉핥기나 중도에 포기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청중 중에 신남철의 강의를 직접 들은 분이 있다고 했을 때 이 강의에 참석하신 분들의 연세를 세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이분들의 놀라운 학구열과 지식은 이후 강의에서도 잘 드러난다. 제목이 강렬한 <뿌르조아의 인간상>은 새로운 지식인 김동석을 알게 되었고, 그의 실천적 삶과 월북 후의 비극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쏘련인상>은 당대 지식인의 대소 인식이란 부제가 붙었는데 사실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 책에 대한 내용보다 비판적 사고를 통한 냉철한 현실인식을 가졌던 그가 어떻게 그 학문적 성과를 반감시켰는지에 더 관심이 갔다. 어쩌면 당파성을 지니고 조직에 가담했을 때 지식인이 가지는 한계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농민독본>에 대한 소개를 읽으면서 마오쩌뚱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그가 레닌과 달리 농민과 연대해서 사회주의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정국에서 왜 토지개혁이 제대로 되지 못했고, 현재의 농협이 지닌 원천적인 문제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미학은 언제나 한 번 공부하고 싶은 학문이다. <미학개론>에서 어느 정도 지식을 얻고 싶었는데 나의 지식이 얕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진중권의 글은 재미있고 유쾌했다. 나중에 그 핵심 내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제가 항상 있지만. <조선신화연구>는 신화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세우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고, 우리의 신화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언제 한 번 읽어봤으면 한다. 가장 최근에 나온 <우리 민중의 노동사>는 민중과 노동의 의미를 다시 되짚는 기회가 되었고, 왕조사가 아닌 민중 주체의 역사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옛날에 왜 이순신 장군은 그렇게 추대를 하면서 그 밑에서 싸운 이름 없는 병사는 제대로 평가하지 않냐고 했던 것처럼.
사실 열두 권이지만 열두 명의 저자 이야기를 통해 아주 풍부한 정보를 제공한다. 강의 속에 나온 인물이나 책등을 통해 더 많은 공부를 할 재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상 지면상 제약에 의해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한 시대를 이해하고 현재와 과거를 연속적으로 생각할 때 이 저서들과 강의 내용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바로 우리의 인문학이란 것과 남북분단의 특수성 때문이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강사보다 더 날카롭고 예리한 질문을 던지는 청중과 그들의 나이다. 그들의 질문과 지식을 보다 보면 아직 배워야할 것이 너무 많이 남아 있고 조금도 긴장을 풀 수 없음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