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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착역 살인사건 - 제34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2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 레드박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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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트래블 미스터리의 대가로 불리는 니시무라 쿄타로의 1980년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요 무대인 우에노 역을 지난 초여름에 다녀왔다. 정확하게 말하면 역앞에 있는 호텔에서 며칠 머물렀다. 현재 역의 풍경은 소설 속에 묘사한 장면과 다르지만 불과 몇 개월 전에 다녀왔다는 사실 때문인지 무척 반가웠다. 이런 우연을 바탕으로 여행객이 아닌 일본에 사는 사람들에게 우에노 역이 어떤 의미인지 듣는 것은 새로운 느낌이다. 수많은 전철노선과 국철 등이 통과하던 그 역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완전히 새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한다.

 

우에노 역은 도호쿠 아오모리 역으로 가는 기차의 출발역이자 종착역이다. 아오모리로 가는 사람에게는 출발역이지만 도쿄로 오는 사람에게는 종착역이다. 제목에 종착역이란 이름을 붙인 것도 소설 속 인물들이 도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가장 직접적으로 조사하면서 도쿄 역과 우에노 역의 차이를 설명하는 아오모리 현 출신 가메이 형사는 이 차이를 아주 잘 설명해준다. 아오모리 현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에서 7년을 산 7명의 친구들에게 이 역은 과거에 함께 약속했던 추억을 다시 되살리는 기회이자 공간이 된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시작한다. 하나는 가메이 형사가 고향 모교에서 선생하는 친구 모리시타의 부탁으로 하루 휴가를 내고, 친구와 함께 한 학생을 찾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7년 전 약속을 위해 미야모토가 우에노 출발 침대특급 유즈루 7호 탑승권을 산 후 친구들에게 연락해 함께 2박3일의 여행을 같이 하는 것이다. 어느 미스터리 소설처럼 이 둘은 전혀 관계없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후반부로 가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짐작할 수 있지만 어떤 관계를 맺는지는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모리시타의 부탁은 가족과 연락이 끊어진 제자를 찾아달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 드러나는 사실은 불편하고 어색한 부분이 많다. 가메이가 단서를 쫓아가는 도중에 미야모토 일행 중 여섯 명은 유즈루 7호를 타고 떠난다. 한 친구는 도착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역안 화장실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이 소설 속 첫 희생자다. 그는 통상성 공무원 야스다다. 기차는 밤의 어둠을 뚫고 달린다. 친구들은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푼다. 밤새 달리는 도중에 또 한 명의 친구가 기차에서 사라진다. 두 번째 희생자다. 그는 가와시마다. 나중에 미토 근처 강에서 그의 시체를 발견한다. 당연히 아오모리 경찰은 이들을 호텔에 격리한 후 조사한다. 그러다 또 한 명이 죽는다. 이번에는 여자인 마유미다. 유서도 있어 자살처럼 보이는 밀실살인이다. 누가 범인일까보다 어떤 원한이기에 이런 연쇄살인이 벌어질까 호기심이 생긴다.

 

사실 이 소설에서 트릭으로 내세운 철도 운행 시간표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약하다. 책끝 해설자의 말처럼 철도전문가라면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는 정보를 조금씩 흘려보내면서 이 미스터리를 좀처럼 풀지 못한다. 이런 와중에 또 다른 살인사건이 펼쳐진다. 두 명이 더 죽는다. 이 순간 당연하다는 듯이 두 사람의 공범이 떠오른다. 그런데 작가도 이 부분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이 공범이 아닐까 의심한다. 하지만 알리바이와 상황 등을 생각하면 공범이 될 수 없다. 분명 이 둘 중에 범인이 있는데도 말이다. 살인동기를 찾지 못한 상황에서 트릭은 더 큰 힘을 발휘한다. 형사들은 혼란에 빠진다.

 

일곱 명의 동창생이 살인자에게 한 명씩 죽어간다. 분명 이 중에 살인자가 있다. 알리바이는 견고하고 트릭은 쉽게 깨지지 않는다. 살인동기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형사들은 주변을 조사하고 단서를 하나씩 모으면서 알리바이와 트릭을 하나씩 깨트린다. 조직의 힘이다. 그 사이에 이 일곱 명의 동창생들의 삶을 간략하게 풀어낸다. 고향을 떠난 젊은이들이 타지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려준다. 이들의 삶 속에 우에노 역에 대한 가메이 형사의 감상이 녹아있다. 모든 사실이 다 밝혀진 후 왜 이 소설의 제목이 <종착역 살인사건>이 되었는지 되새겨보게 된다. 비록 살인동기에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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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의 악마
모 헤이더 지음, 최필원 옮김 / 펄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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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맨> 이후 처음으로 번역된 작가의 소설이다. 이미 영미권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너무 적은 번역이다. 아마도 남경대학살을 소재로 하지 않았다면 번역되지 않았을 것 같다. 아닌가? 굉장히 자극적일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작가는 노골적인 묘사를 상당히 많이 생략했다. 어떻게 보면 기대치에 조금 못 미친다. 남경대학살의 풍경이 소설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곳의 생존자이자 그 시기를 경험한 스충밍과 그 학살의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영국 여자 그레이의 사실 집착이 더 강하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

 

남경대학살은 역사적 진실이다. 하지만 일본은 거부하고 있다. 너무 잔혹한 이야기지만 그들은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어찌 남경대학살 뿐이겠는가. 종군위안부 문제도 역시 그들은 부인하고 있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도 역시 마찬가지다. 일제의 만행과 잔혹함 중 상당 부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거나 묻힌 것들이 많다. 그 유명한 731부대도 그 실체가 완전히 벗겨지지 않고 있다. 나치의 대학살이 낱낱이 밝혀지고 진심으로 사죄한 것과 정말 대조된다. 이런 현실에서 이 작품이 나왔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것과 관계없이 상당히 의미 있다. 장르 속에 그 이야기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가 교차한다. 현재는 영국 학생 그레이가, 과거는 남경대학살 당시 남경에 살았고 지금은 동경에 거주하는 대학교수 스충민의 일기가 중심이다. 그레이는 아픈 기억이 있다. 이 기억과 남경대학살에 대한 사실 집착이 스충민을 찾아오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이 역사적 사실을 지우고 왜곡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한 일본에서 쉽게 자료를 받을 수 없다. 스충민은 거부하고 그레이는 계속 요청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돈이 바닥난다. 이때 한 남자가 그녀를 클럽으로 유혹한다. 자신이 바라는 정보를 확인하려는 욕망이 너무 강한 그녀는 동경에 머물고 클럽에서 돈을 번다. 이 체류 속에 무시무시한 사실이 숨겨져 있다.

 

대학살이 일어나기 전 스충민은 그곳을 떠날 기회가 있었다. 장개석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그는 그 기회를 놓친다. 역사를 알고 있는 지금 그 선택은 너무 미련해 보인다. 그 대가는 너무 무시무시하다. 일본군이 진격한 후 직접 스충민이 본 것은 사실 그렇게 직접적이고 충격적인 장면들이 아니다. 학살이 있지만 다른 곳에서 묘사된 수위를 생각하면 조금 부족하다. 하지만 그 시기에 생존을 위해 살았던 그가 경험했던 것들이 연쇄적인 상상으로 이어지면서 엄청난 장면을 연상하게 만든다. 특히 냄새에 대한 착각은 끔찍하다.

 

스충민은 남경대학상 필름에 대한 보답으로 그레이에게 뭔가를 받기 원한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것의 정체를 말하지 않는다. 그레이는 그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찾고자 한다. 이 상황을 만들게 된 것은 그녀가 일하는 클럽에 야쿠자 두목 후유키가 오면서부터다. 그는 가끔 이 클럽의 호스티스들을 자신의 집 파티에 초대한다. 이 초대가 뭔가를 훔칠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필름에 대한 집착으로 삶이 정체된 그녀에게 이것은 엄청난 유혹이자 기회다. 그렇지만 야쿠자 집의 보안이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여기에 오가와 간호사가 만들어내는 공포도 상당하다. 교수가 원하는 물건에 대해 떠도는 소문만으로 짐작하게 되지만 그 실체를 알지 못하니 훔칠 수가 없다. 독자의 상상력이 마구 발휘되는 순간이다.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과정에 긴장감은 점점 더 고조된다. 이 긴장감은 그레이와 스충민이 쫓기는 과정에 더 높아진다. 두 사람의 죽음이 예상되지 않지만 앞으로 밝혀질 사실이 줄 충격 때문이다. 조금도 주저함이 없는 두 부류가 등장한다. 이들이 보여주는 잔혹함에는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 살의만 가득하다. 이 때문에 더 무섭다. 그리고 마주하는 진실은 조금 약했다. 더 심한 장면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스충민과 그레이의 집착과 상처가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상승해야 하는 고통과 아픔과 공포등이 순간 사라진 것이다. 그 동안 그들의 감정에 깊이 몰입하지 못한 모양이다.

 

작가는 무지를 말한다. 스충민도 그레이도 무지했다. 그들이 겪은 고통은 무지에서 비롯했다. 이 무지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일까? 이것은 다시 일본의 역사 왜곡으로 이어진다. 일본 사람들은 왜곡되고 감춰진 역사에 무지하다. 그들이 저지른 만행에 무지하다. 그럼 용서받을 수 있을까. 무지와 실수를 연결한 대목을 읽을 때 그 무지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알려고 노력했는지도. 소설 속 화자 두 사람은 그 무지로 인해 충분히 고통받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현재 일본은 어떤 노력을 했는가? 그들이 거부한 잔혹한 역사의 진실은 몰랐다는 말로 결코 덮을 수 없는 것이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완전히 치료받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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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 짓는 여인
엄정진 지음 / 북퀘스트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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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sf단편집은 오랜만이다. 한 작가의 단편집은 더 오래되었다. sf 불모지 한국에서 단편집이 나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나왔다. 한 명의 sf팬으로서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또 큰 기대로 이어졌다. 이 기대가 해외 걸작으로 단련된 과거를 생각하면 아주 과도한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기대하게 된다. 몇 년 전 아주 재미있게 읽은 한국 sf단편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뭐 그 후 정체된 느낌이 강하지만.

 

모두 일곱 편이다. 솔직히 이 중에서 관심을 끄는 작품은 둘이다. <악마와의 거래>와 <소설을 쓰는 사람들에 대한>이란 작품들이다. <악마와의 거래>가 재미있었던 것은 악마와의 계약을 아주 꼼꼼하면서도 반전을 노린 설정으로 풀어내었기 때문이다. 세 가지 소원과 마지막 소원을 이용해 악마가 영혼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려는 한 남자의 노력이 코믹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악마와의 계약에서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데 성공한 수많은 사람들의 결과를 악마의 계약서에 포함하여 다룬 것도 아주 흥미로웠다.

 

<소설을 쓰는 사람들에 대한>은 알까기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A가 B에 대한 소설을 쓰고, B는 C에 대한 소설을 쓴다. 이렇게 물린 사람들의 절박함을 다루는데 이 단편이 흥미로웠던 것은 이런 구성이 아니다. 각각의 다른 장르를 쓰는 작가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문학, 추리, sf, 무협, 로맨스 등. 각 장르별 문제점이 같이 다루어지는데 공감대가 많이 형성된다. 물론 전혀 읽지 않는 장르도 있다. 중반 이후 이야기가 너무 순환 고리에 집중하면서 어디에서 본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인생의 꿀맛>은 몇 번의 타임루프 속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간략하게 다룬다. 형식과 소재는 특별한 것이 없지만 상황이 재미있다. <네거티브 퀄리아>는 무한 긍정이 세상을 어떻게 파멸시키는지 아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에서 힘이 부족해서 재미가 조금 떨어진다. <거울 속에 사는 법>은 기존 판타지, sf를 재구성한 것 같다. <고르바초프>는 황당하지만 재미있는 설정이다. 하지만 갑자기 중단된 느낌이 든다.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데도 그냥 멈춰 섰다. 개인적으로 중편 이상이 되었으면 더 재미있었을 것 같다.

 

표제작 <고치 짓는 여인>은 남자의 욕망과 여자의 순수함이 충돌한다. 단편이지만 그 속에 담긴 남성들의 우월함에 대한 착각과 처녀성에 대한 집착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고치와 처녀성을 연관시켜 풀어낸 이야기가 역설을 노린 것이 아니라면 굉장히 남성우월적인 이야기다. 보통 남자들이 흔히 갖게 되는 환상과 허상이 곳곳에 드러난다. 여자의 사랑과 아픔을 남성의 시각으로 풀어내었다고 하지만 그 시각에 그대로 안주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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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분의 1의 우연]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10만 분의 1의 우연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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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신문의 <독자 뉴스사진 연간상>에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A신문은 아마추어들의 사진을 월별로 상을 준 후 연말에 연간상을 준다. 이번 연간상은 <격돌>이다. 이 사진은 도메이 고속도로 야간에 발생한 연쇄 추돌 사고 장면을 담고 있다. 5중 충돌 장면을 찍은 것인데 놀라운 것은 세 대의 차량에서 솟는 화염이 소용돌이를 틀며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을 위에서 찍었다는 것이다. 평에 의하면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하고 그 박력과 효과가 월등한 작품이다. 보통 보도 사진이 사고 후의 잔해 등을 찍는 반면에 이 사진은 사고 발생 순간을 거의 찍은 것이다. 심사위원장이 이것을 10만분의 1의 우연이라고 칭찬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이 우연을 하나씩 파헤치고 반격한다.

 

세계를 뒤흔든 유명한 사진들이 많다. 그 중 몇 작품은 연출이라는 말도 들린다. 그 상황을 극대화시키는 순간을 제때 포착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소설 속에서 <격돌> 이후 많은 아마추어 작가들이 위험한 상황을 연출하여 응모한다. 심사위원장도 중간에 어느 정도 연출이 필요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어릴 때는 사진은 사실만을 보여주는 도구라고 배웠다. 하지만 이 사진이 어떻게 연출되고 편집되는가에 따라 원래 상황이 왜곡되고 뒤틀린다. 포토샵의 발전은 이것을 더 부추긴다. 작년 대선의 몇 장면은 너무 유명하다. 요즘 종이신문을 보지 않아 매체 사진에 관심이 없지만 가끔 의도에 의해 편집된 사진이, 연출된 사진이 나온다. 재벌가의 코스프레는 대표적인 연출이다. 이 연출에 대해 주인공은 또 다른 연출로 복수한다.

 

보도 사진이 나오면 늘 두 진영이 싸운다. 사람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어떻게 셔터를 누를 수 있냐고 하는 것과 그것은 사진가의 직업이자 사명이란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두 진영 사이를 수없이 오고 갔다. 그것은 사진이 담고 있는 내용에 따라 바뀌었다. 도입부에 <격돌>을 두고 벌어지는 독자와 신문사와의 논쟁은 이것에 대한 것이다. 작가는 사실 이 문제를 파고들기 위해 이 상황을 만든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이 연출로 만들어진 장면들이란 것이다. 오랫동안 다루어져 온 논쟁을 밖으로 끄집어낸 후 그 이전으로 돌아간다. 바로 왜 이 사고가 발생하게 되었는가 하고. 그리고 진실이 드러났을 때 피해자 가족 등을 내세워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격돌>을 찍은 야마가 교스케, 이 사고로 약혼자를 잃은 남자. 이 둘도 서로 격돌한다. 피해자 유족인 남자는 사고의 진실을 파헤치고 이것을 복수로 풀려하고, 교스케는 어느 순간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반격을 가하려고 한다. 정확한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법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남자는 교스케가 연출했던 것처럼 상황을 연출한다. 처음에는 그 장면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몰랐는데 사건이 발생한 후 그 흔적으로 뒤따라갈 때 그것이 드러난다. 연출 대 연출의 격돌이다. 어떻게 보면 여기서 멈췄다면 더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복수는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연출 속에 예상하지 못한 마무리를 여운으로 남기고 끝난다. 이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개인에게 달렸다.

 

어떻게 보면 이야기가 조금 부족하다. 연출된 상황을 파헤치기 위한 끈질긴 노력은 오히려 기술적인 문제를 파고든다. 어떻게 이 상황을 만들 수 있을까 하고. 그리고 교스케에 대한 정보가 수집된다. 이 수집된 정보와 현장 근처에서 발견된 단서가 확신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 한 남자의 집념이 담겨 있지만 감정들은 밖으로 표출되지 않는다. 차분히 진행될 뿐이다. 세밀하고 치밀한 설명으로 장면과 상황을 만들어내지만 인간은 그 뒤로 숨어버린 것이다. 이 숨은 인간이 앞으로 나올 때 연출로 통해 바뀐 모습을 보여준다. 냉혹하고 치밀하고 차가운 복수가 펼쳐진다. 얼마나 증오가 심해야 이런 냉철한 복수로 이어질까? 보도와 인명보다 개인적으로 연출에 대한 연출의 복수라고 이 소설을 읽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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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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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15주년. <퍼레이드>, <악인>을 넘어서는 작가의 신경지란 광고 문구가 눈길을 끈다. 거대한 스케일, 질주하는 속도감, 하드보일드란 평이 이전 작품의 기억과 더불어 기대감을 높인다. 하지만 너무 높은 곳까지 기대가 올라간 것일까? 아니면 취향을 타는 것일까? 모두 읽은 지금 그의 초기작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일까? 분명 재미난 이야기지만 그것이 왠지 모르게 현실을 너무 넘어선 것 같다. 이 초월이 소설보다 만화의 설정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면 나만의 착각일까? 속도감 있게 읽는 와중에 그들에게 몰입하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프롤로그에 일본 NHK는 아시아에 CNN같은 뉴스 네트워크 GNN을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이 계획은 주도자인 시마 회장이 여자 문제, 경비 유용 의혹 등으로 물러나면서 사라진다. 그리고 현재로 넘어온다. 첫 시작은 호치민에서 벌어지는 살인이다. 이 살인이 벌어질 때만 해도 각 나라의 정보조직 사이에 암투가 벌어지는 것 같았다. 한국, 일본, 중국의 정보 조직이 은밀하게 움직이면서 각국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설정 말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예상하지 못한 장면들이 나온다. 다카노나 데이비드 김 등이 힘들게 얻은 정보를 정부 정보조직에 넘기지 않고 돈이 될만한 곳에 파는 것이다. 이때부터 이들의 정체에 대한 혼란이 생겼다. 더 나아가면서 그들이 돈을 쫓는 사람이나 조직이란 것을 알게 되었지만.

 

스파이소설이다. 이미 세계화와 다국적기업화가 진행된 상태에서 국적은 큰 의미가 없다. 애국을 내세운 마케팅을 펼치지만 그것은 이익을 얻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이런 국제 현실에서 정보를 가진 자들은 그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해주는 조직 등에게 정보를 판다. 이 정보를 얻거나 지키기 위해 그들은 폭력을 동원한다.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거짓 정보를 흘리고, 적과 손을 잡고, 다시 배신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흔하게 말하는 의리는 사라지고 돈만 남는다. 물론 살짝 감상적인 의리나 사랑 등을 넣어서 포장하는 작업을 한다. 하지만 이 세계에 중독된 사람에게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 더 지루하고 힘들다.

 

AN통신. 주인공 다카노의 근무처다. 그런데 이 회사 이상하다. 처음 다오카가 납치되었을 때 다카노가 보여준 행동부터 그렇다. 납치된 사실을 알리고 조직의 도움을 받으면 되는데 이 사실을 숨긴다. 그리고 그를 구해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이때만 해도 왜 그런지 몰랐다. 부하를 끔찍하게 아낀다 정도랄까. 하지만 이 회사에는 엄청난 비밀이 있다. 장난처럼 말한 것이 실제 존재한다. 이 설정은 또 하나의 시간제한으로 진행되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그리고 이 정보 조직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알려줄 때 앞에 풀어둔 이야기를 이해하게 되고,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 세계화와 자본주의가 어디까지 나갔는지 알게 된다.

 

스파이소설답게 광범위한 지역을 무대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베트남, 중국, 일본, 미국까지. 각 나라도 한 지역만 다루어지지 않고 다양한 도시와 지역을 옮겨 다닌다. 이 규모와 더불어 진행되는 정보조직 사이의 대결은 긴장감을 불어넣고 속도감을 높여준다. 데이비드 김과 AYAKO의 결합, 다카노와 장하오의 협력, AYAKO와 앤디 황과의 밀약 등은 쉴새 없이 흘러간다. 여기에 일본 정치인 이가라시 다쿠의 등장은 이 소설이 일본 소설임을 분명하게 깨닫게 한다. 앞에 벌어진 격렬하고 위험하고 잔혹한 정보 전쟁이 양심과 애국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정보는 돈이란 사실을 끼워 넣어 너무 많이 기우는 것을 예방했지만.

 

개성 강한 캐릭터를 등장시켜 빠르게 전개되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재미있다. 속도감도 상당하다. 하지만 역시 너무 많이 나간 이야기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 이것은 일본 만화를 읽을 때 자주 느꼈던 혹은 보았던 설정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자주 나온다. 그냥 재밌게 읽어도 되는데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정보가 우선순위에 올라가고 사람은 그 뒤로 처졌기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를 너무 심하게 흔든 것도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구성이나 전개가 조금 허술하게 느껴진다. 재미와 속도감이 만들어내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의 것을 기대한다면, 이전 작품과 같은 것을 기대했다면 불만스런 작품이다. 시리즈로 다음 이야기가 나온다면 또 어떤 느낌일지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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