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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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개인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읽고 만족한 것은 몇 편 되지 않는다. 물론 그의 대표작이나 시리즈를 제대로 읽지 않은 것도 있다. 하지만 엄청난 다작의 작가가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작품에서 평균 이상의 좋은 작품이 계속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다. 어떤 작품은 작가의 이름이 없었다면 보고 난 후 그냥 던져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을 읽게 되는 것은 가끔 나오는 좋은 작품과 군더더기 없는 전개와 구성 때문이다. 한 번 잡으면 단숨에 읽게 되는 가독성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 작품은 완전히 만족하지는 못하지만 평균 이상은 된다.

 

과거의 이야기를 다룬 두 개의 프롤로그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먼 과거의 이야기를 다룬 하나는 살인에 대한 것이고, 비교적 가까운 것은 한 중학생의 가슴 아픈 첫사랑 이야기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와서 한 음악가의 자살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살한 음악가는 나오토다. 그는 천재형 인간이다.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다. 그런데 자살했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 장례식에 사촌인 리노가 온다. 가벼운 추억이 이야기된다. 이 장례식에서 홀로 살고 계신 할아버지를 만나고, 그의 집에서 할아버지가 찍은 멋진 꽃 사진들을 본다. 할아버지는 자비 출판을 생각하는데 그녀가 이 사진 등을 블로그에 올려주겠다고 한다. 이 둘은 이렇게 정기적인 만남을 가진다.

 

이 소설을 끌고 나가는 사람은 두 명이다. 한 명은 앞에 나온 리노고, 다른 한 명은 두 번째 프롤로그에 나온 소타다. 소타는 현재 대학원생이다. 그의 전공은 원자력이다. 후쿠시마 이후 애물단지가 된 원자력을 생각할 때 그의 미래는 암울하다. 남들에게 내놓고 자랑할만한 전공이 아니게 된 것이다. 어릴 때 첫사랑과 깨어진 후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고, 형과도 친밀한 관계가 없었던 그는 집을 거의 찾지 않는다. 이번에는 돌아가신 아버지 3주기를 맞이하여 집에 온다. 하지만 이 귀향은 새로운 사건을 만나게 하고, 과거의 오해를 풀고 진실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프롤로그의 살인 후 두 번째 살인이 나온다. 그것은 리노의 할아버지 아키야마 슈지의 죽음이다. 그의 시체를 발견한 것은 리노다. 큰 충격을 받는다. 형사 하야세는 이 관할 경찰서 담당이자 슈지와 과거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그의 아들이 마트에서 도둑으로 몰려 힘든 시간을 보낼 때 무죄를 증명해준 은인이다. 그 후 특별한 연락을 하고 지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은 매년 연하장 등을 주고 받고 있었다. 그는 과거 외도 때문에 아내와 별거 상태다. 아들을 제대로 만날 수도 없다. 그런데 이 사건 때문에 아들과 통화를 하게 된다. 아들은 아버지가 꼭 범인을 잡아주었으면 한다. 이제 그의 강한 의지가 작용한다.

 

소타의 형 요스케는 경찰청 간부다. 리노가 할아버지 사후 올린 한 장의 사진 때문에 연락해서 가짜 신분으로 그녀를 겁주고 블로그를 폐쇄하게 만든다. 이후 이어지는 그의 행보를 보면 그는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다. 노란 나팔꽃에 대한 정보를 쫓지만 강한 액션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가 숨긴 정체 때문에 리노와 소타가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둘은 노란 나팔꽃의 정체를 찾아다닌다.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꽃인데 리노는 이미 본적이 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죽은 후 그 꽃 화분이 사라졌다. 제목처럼 이 몽환화가 정체가 뭐길래 이런 저런 사건들과 비밀이 생기는 것일까? 이 모든 의문이 풀리는 것은 당연히 마지막 장면이다. 그리고 밝혀지는 진실은 사람들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역할을 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개의 프롤로그를 연결하고, 과거를 현실과 다시 이어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뛰어나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만들어놓은 이야기들 몇 가지는 그냥 평범하게 묻혀 버린다. 특히 하야세와 아들의 관계나 그 뒷이야기가 없어 아쉽다. 리노가 뛰어난 수영선수였다가 심리적 문제로 수영을 중단하게 된 사연을 간단하게 묘사한 것은 좋은데 이것을 진정한 재능이란 것과 연결한 것 외에는 다른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갈등과 고민이 지나가듯 흘러간 것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납득하기 힘든 것은 역시 몽환화를 두고 펼치는 두 집안의 과거와 현재의 행동들이다. 하나의 성장소설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이런 사명감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다른 작품과 달리 다양한 인물들을 내세우고 관계를 맺고 풀어낸 것은 좋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려주지 앉는 것은 역시 아쉽다. 그러나 가독성은 변함없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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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 - 때時를 고민하는 당신을 위한 인생수업
조용헌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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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초판 발행 12년 만에 개정증보판으로 재출간한 책이다. 초판을 읽지 않아 어디부터 어디까지 개정되고 증보되었는지 모른다. 알 수 있는 부분은 4부에 2002년 이후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들이다. 출판사 글을 보면 “갑부 김갑순부터 한덕수 총리, 정치인 서청원 등 우리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인물들의 사주 분석과 사주명리학 대가들의 면면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삽화 60여 컷이 더해진”이라고 한다. 초판의 목차와 비교하니 상당한 차이가 있다. 초판에는 지금처럼 4부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시간의 흐름 속에 곁들여진 내용에 따라 각각의 꼭지로 잘 나누어진 모양새다.

 

조용헌의 글을 읽을 때면 늘 강호동양학이란 단어가 따라 다닌다. 강호동양학을 구성하는 3대 과목은 사주, 풍수, 한의학이다. 그는 이 과목을 천·지ㆍ인 삼재사상과 연관시킨다. 천은 사주, 지는 풍수, 인은 한의학이다. 이 삼재를 말할 때 예상한 것이지만 그의 설명은 좀더 체계적이다. 이런 서문을 시작해서 사주팔자로 이야기의 문을 연다. 그의 해석을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늘 사용하고 뱉어내고 듣는 단어들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인용에만 그치지 않고 학문과 경험을 같이 녹여내어 풀어낼 때 단순히 이것을 미신으로 분류하는 것에 의문을 품게 된다.

 

이 책 속에 나오는 사주, 관상, 주역 등의 고수 이야기는 굉장히 흥미진진하다. 그들의 야사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만 전설의 한 이야기를 몰래 듣는 기분을 전해준다. 명리학의 두 거인 박재완과 박재현, 주역의 대가 야산 이달의 이야기는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는데 한 분야의 고수가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데 이것과 비교되는 은거 고수의 삶은 또 다른 흥밋거리다. 저자는 단순히 이 사람들의 이야기와 비사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주풀이로 그들을 이해한다. 이 때문에 그의 글들이 단순한 이야기 수집가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강호동양학을 공부한 고수에 의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사주를 믿지 않는다. 작명소에서 이름 짓는 것도 믿지 않는다. 음양오행 이론을 좋아하지만 이것이 개인의 운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조선조의 사대부와 왕가의 자식들의 삶을 보면서 신뢰의 벽이 깨어졌기 때문이다. 2002년 대선을 두고 각각의 무리들이 각자 다른 인물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했다. 결과를 가지고 해석하면 역으로 끼워 맞춘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교차하면서 현재는 믿음이 없다. 하지만 이것은 뒤집어 생각하면 믿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반작용이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나도 정말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면 사주명리학이나 주역의 괘에 의지할지 모른다.

 

인간이 세상을 아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다. 자연을 개발하고 개척한다고 하지만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너무나도 무력하게 무너진다. 이성과 과학을 믿고 있지만 아직 모르는 부분이 더 많다. 그런 점에서 이 사주명리학은 통계적인 부분을 감안하면 상당히 과학적이다. 저자의 해석 중 반복된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자연과 삶의 반복으로 만들어진 과거의 통계는 미래를 예측하는데 분명 도움이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가 영발에 T.O가 있다고 한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인다. 과거를 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역설적이지만 수긍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주팔자를 믿지 않지만 읽으면서 고수의 전설은 가슴 한 곳을 뛰게 만들었다. 사주에 대한 풀이가 나올 때는 나도 모르게 나의 생년일시 등을 대입하려는 마음이 생겼다. 절대적으로 맞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통계의 위력을 어느 정도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과 연관해서 이야기를 풀어낸 저자의 필력과도 관계가 있다. 역사적 순간, 특히 5.16군사 쿠데타의 마지막 결정을 할 때 점쟁이나 주역의 대가들에게 물었다는 야사는 아주 그럴 듯하고 매력적이다. 흔한 말로 진인사대천명이기 때문이다. 때를 고민하는 당신을 위한 인생수업이란 부제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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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 목걸이 - 딜쿠샤 안주인 메리 테일러의 서울살이, 1917~1948
메리 린리 테일러 지음, 송영달 옮김 / 책과함께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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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 안주인 메리 테일러의 1917년부터 1948년까지 서울살이를 다룬 책이다. 딜쿠샤의 위치는 서대문과 사직공원의 사이에 있는 사직터널 뒤쪽에 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니 붉은 벽돌에 1923년 건축연도가 표시된 건물이 보인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현재의 사진이 없는 것이 살짝 불만이었다. 역자가 현재 여러 가구가 살고 있다고 끝에 덧붙였지만 가장 확실한 자료 사진 한 장이면 될 텐데 하고 말이다. 덕분에 표지 그림과 사진을 비교하면서 그 동안 이 집이 어떻게 변했는지 볼 수 있어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저자가 이 책을 썼지만 책을 출간한 것은 아들이다. 그녀는 1889년 영국 첼트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출생연도와 가정 경제 내용을 적은 것은 그녀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이 환경이 그녀가 다른 국가를 보는 시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집을 모험과 아름다움으로 가득 찼다고 표현한다. 아버지가 모험을, 어머니가 아름다움을 담당했다고 하면서 집을 찾아온 다양한 직업군을 말한다. 이때 경험이 그녀가 연극배우가 되어 세계를 돌아다닐 때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호박 목걸이가 나온다. 가끔 영국 영화에서 보는 귀족들의 삶과 상당히 닮아 있는 풍경 등이다.

 

책은 그녀가 한국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떠나게 되었는지로 시작한다. 바로 2차 대전 때문이다.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폭격하면서 한국에 있던 외국인들은 잠정적으로 포로가 된다. 한국에 이십 수 년을 머물면서 쌓아온 관계와 기억과 추억과 물건 등을 두고 떠나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한국은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그곳이 아니다. 사실 이 부분은 뒤에 나오는데 분단 후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물론 이 풍경은 그녀가 살아온 방식에 의한 것이다. 짧지만 강한 여운을 남긴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보낸 한국. 그곳을 바라보는 외국인의 시선을 보면서 갑자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남아 등에 나가서 바라본 그곳의 모습과 얼마나 닮았고, 얼마나 다를까 하는 것이다. 시대가 변했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위에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변화가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심할지도 모르지만. 이 시각을 생각하게 된 것은 그녀의 글에 등장하는 한국 사람들의 이름 대신 성만 나오는 것 때문이다. 또 어떤 장면들은 유럽인들이 동남아에서 그 나라 사람들을 하인 등으로 부리던 장면과 너무 닮아 있었다.

 

우리의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는 현실에서 외부인의 시선과 기록은 당시 역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이 책에 나오는 3.1운동이나 고종 황제 장례식 장면은 길지 않지만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 한 자락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녀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지나가면서 벌어진 에피소드들은 짧지만 강렬하다. 특히 스탈린 시대 소련의 모습은 거짓과 역설로 가득하다. 이런 모습이 그 당시 한국을 여행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지나간다. 이것은 우리가 가끔 다른 나라를 여행하면서 짧게 경험한 것으로 그 나라를 평가하는 것과 아주 닮아 있다.

 

특권을 가진 외국인에 부유하기까지 한 그녀의 삶에서 결핍이란 자신이 살던 물건이나 문화가 존재하지 않으면서 발생한다. 더 좋은 문화나 방식이 있다 하여도 그녀는 그것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문화를 그대로 유지할 만한 부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생활의 방식을 바꾸려고 하면서 생기는 불편함도 무시못할 것이다. 그렇게 많지 않은 돈으로 여러 명의 하인을 두고 집을 가꾸고 밖을 돌아다니는 그녀를 보면 어느 정도 거부감도 생긴다. 하지만 이것을 탓할 수 없다. 그녀의 삶이자 문화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녀 주변 사람들이 받게 될 문화의 충격은 또 다른 문화의 형성과 발전을 가져온다. 그리고 그녀가 완전히 한국의 문화를 거부한 것이 아니다. 인정하고 있다. 그 장면을 볼 때면 암울했던 그 시대가 그대로 느껴진다.

 

한국 서울에 딜쿠샤란 집을 지어놓았지만 그녀의 여행과 모험은 세계를 누빈다. 일본에서 남편 브루스를 만났고, 결혼은 인도에서 했다. 시베리아를 횡단했고, 유럽과 미국을 다녀왔다. 그 시대를 생각하면 쉬운 일정이 아니다. 한국으로 온 후도 그녀의 여행은 금강산, 원산, 금광 등으로 계속된다. 이 때문에 독자는 그녀의 시선을 통해 그 시대 그 나라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한국에 체류하던 외국인들의 모임이 어떤 사람들이 참가했는지 간단하게 알 수 있다. 아쉬운 것은 역시 단편적인 소식이나 정보에 머물면서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좀더 깊이 있게 파고들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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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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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이 죽은 후 다른 사람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물건이나 비밀이 하나씩 있을 것이다. 죽기 전에 이 물건 등을 본인이 직접 없애면 될 텐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것을 가지고 있다. 이 처럼 죽은 후 걱정을 위해 자신이 원하는 물건 등을 없애주는 직업이 있다. 딜리터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탐정 구동치의 직업이 바로 이것이다. 이 직업을 하게 된 것은 유명 작가의 부탁 때문이다. 사실 읽으면서 노 작가의 주장을 보면서 어디까지 작가의 생각이 담겨 있는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이상한 냄새로 가득한 악어빌딩에 한 남자가 찾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이영민. 다른 고객의 소개로 구동치를 찾아왔다. 이야기의 전개에 강한 인상을 주는 부분이 없다 보니 그냥 지나가는 사람 중 한 명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계속 등장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을 가지고 있고, 이 물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다. 약간 끈적거리면서 나른한 분위기에서 시작하여 처음에 예상한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작가의 이력을 생각하지 않고 읽는다면 한 편의 탐정소설을 읽는 느낌일 것이다. 사실 마지막 장면에 그가 다른 일을 처리하기 위해 출장 갈 때 선택한 소설이 추리소설인 것을 감안하면 전혀 연관성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전직 형사였던 구동치는 딜리팅하면서 얻은 물건 중 일부를 자신이 보관한다. 계약 위반 사항이지만 죽은 자들이 이 사실을 알 리 없다. 남의 비밀을 엿보는 재미에 그는 빠져 있다. 물론 자신이 죽게 되는 경우 이 물건들을 없애달라는 요청을 다른 딜리터에게 해 놓은 상태다. 하지만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물건을 보관하는 것처럼 딜리팅을 요청받은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 모순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사건이 터진 후 누군가가 자신의 사무실에 침입한 후 흔적을 남겨 놓은 적이 있다. 일종의 경고였지만 가져가려고 하면 충분히 가능했다.

 

그의 귀는 아주 깊은 우물이다. 딜리팅을 하면서 비밀을 이 깊은 우물에 넣는다. 그런데 평소와 다르게 이번 딜리팅은 문제가 생긴다. 죽은 자의 태블릿 피시가 사라진 것이다. 죽은 자의 이름은 배동훈이다.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존재가 바로 배동훈의 태블릿 피시다. 이 피시에 담긴 동영상 때문에 몇 사람이 죽고, 구동치는 충격 받고 고뇌에 빠진다. 그의 적으로는 천일수 회장과 이영민이 있다. 이들은 함께 테니스를 치지만 뒤로는 살벌한 싸움을 벌인다.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활용해 적을 무너트리려고 한다. 초반에는 원수도장 수련생들의 도움을 받는 천 회장이 압도적이지만 정보는 또 다른 위력을 발휘한다.

 

소설은 등장하는 인물들을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다. 별로 중요하지 않는 사람도 단역을 맡아 강한 인상을 남긴다. 악어빌딩의 세입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무술도장 원장과 철물점 사장이 티격태격 싸우지만 이 둘이 합쳐 이룬 사건 하나는 구동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 된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것은 드라마 작가 오윤정의 비중이 거의 사라진 것이다. 이것은 구동치가 딜리팅할 때 그를 목격한 여자 정소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아침 드라마 작가로 끝부분에 다시 등장한다. 아침 드라마라면 이 세 사람의 삼각관계에 박찬일 셰프까지 엮인 관계로 발전할 수 있지만.

 

흔히 정보가 돈이자 힘이라고 말한다. 배동훈의 죽음 뒤 그의 태블릿 피시에 든 동영상은 최고의 돈이 된다. 쫓고 쫓기는 전개 속에 구동치는 자신도 모르게 엮인다. 그런데 여기에 형사 한 명도 같이 엮인다. 배동훈의 죽음을 조사하는 김인철 형사다. 그는 구동치의 선배 형사다. 처음에는 그냥 보통의 형사처럼 다가왔는데 뒤로 가면서 강한 개성을 품어낸다. 이렇게 엮인 관계가 단숨에 풀릴 리 없다. 물론 좋게도. 욕망이 어긋나고 비밀의 문이 열릴 때 가장 원초적인 감정들이 수면 위로 튀어오른다. 이것을 대표하는 두 인물이 바로 천 회장과 이영민이다.

 

등장인물들의 강한 개성과 함께 원수도장의 사연도 시선을 끈다. 무도를 추구하는 그들의 과거를 생각하면 불행하기 그지없다. 그들의 대사형이 원수도장을 유지하가 위해 천 회장의 더러운 손발이 되는데 어느 순간 원래의 의도보다 유지라는 욕망의 그림자에게 잡아 먹혀 버렸다. 마지막 부분에 가면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의 시발점으로 변한다. 나비효과 같은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작가가 가장 보여주고 싶은 장면은 정소윤이 눈밭에 넘어진 후 기분이다. 자신이 누웠던 자리가 선명해서 그림자를 남겨두고 가는 기분이었다는 표현이다. 비밀의 그림자는 월요일처럼 길고 기니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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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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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대로 소설 속 등장인물인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다. 제목처럼 단지 그의 조카란 것만으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것은 아니다. “루트비히는 그의 철학으로 유명해졌고 파울은 그의 광기로 유명해졌다.”란 말처럼 소설 속 파울은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을 살짝 들여다보면 그의 삼촌처럼 엄청난 돈을 거부하고, 오히려 이 돈을 순수한 인민들에게 뿌리면서 자신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구원은 돈의 탕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빈털터리가 된 그를 친척들 중 누구도 반겨주지 않았고, 정신병자로 병원에 가둬두는 빌미를 제공했다.

 

작가의 자전소설이란 소개처럼 이 둘은 병원에서 환자로 서로의 소식을 듣는다. 작가 베른하르트가 폐병 환자라면 파울은 정신병자로 입원한 상태다. 이 우연이 친구의 소식으로 두 병실을 이어주지만 그 왕래가 그렇게 쉽지 않다. 이런 이 둘의 인연을 시작으로 작가와 파울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이 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파울이 광기를 띄고 있다면 작가는 냉소와 증오로 가득 차 있다. 특히 오스트리아 문화계에 대한 증오와 냉소는 한 에피소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얼마나 다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읽으면서 생각하지 못했는데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깊은 몰입에 빠지지 않으면 아무 것도 건질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단지 몇 가지 에피소드 정도만이 남을 뿐이다. 하지만 집중도를 높이면 이 둘의 묘한 관계와 이들이 지닌 열정이 곳곳에서 피어난다. 클래식과 오페라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문외한이 듣기에도 수준이 높아 보이고, 파울의 오페라 여행은 얼마나 열정적이어야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문과 감탄이 생긴다. 그리고 이 둘의 우정이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철학과 관점의 유사성에서 비롯한 것임을 알게 될 때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작가는 파울을 천재라고 부른다. 철학계의 천재이자 삼촌인 루트비히와 다른 점을 루트비히는 책을 출간하였고 파울은 하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다. 물론 파울도 잠시 글을 쓴 적이 있다. 하지만 어느 하나 완성을 보지 못했다. 출간하지 못하게 태어난 사람이란 표현처럼 그의 철학과 높은 식견은 단지 그와 대화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가 된다. 읽으면서 혹시 그가 글을 썼다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일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지만 이런 상상은 언제나 즐거운 법이다. 그리고 말년의 삶을 들여다보면 비루함 속에 자기 삶의 여유와 낭만을 지켰다. 그의 마지막 장난이 보여주는 것은 그가 가진 것들, 가졌던 것들에 대한 향수이자 마지막 발악이다.

 

파울의 재미난 이야기 중 하나는 그가 보인 반응에 따라 흥행의 여부가 갈라졌다는 것이다. 한 개인이 오페라에서 냉소를 보이면 그때부터 흥행은 끝이 된다. 그런데 이 반응이 자신의 음악관이나 심미안에 의해 결정나는 것이 아니라 기분이나 장난에 의해서도 변했다는 것이다. 순간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의 이미지가 살짝 떠올랐다. 한 분야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어떤 재미난 모순을 불러올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리고 세계적인 지휘자였던 카라얀에 대한 엄청난 호평은 순간 다른 평가와 충돌하면서 이들의 취향이 나와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겨우 140여쪽에 불과하지만 수많은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이 에피소드는 이들의 철학과 음악관 등을 아주 잘 드러내준다. 물론 이 둘의 관계도. 특히 하나의 잡지를 사기 위해 수백 킬로미터를 달린 이야기는 열정과 광기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둘이 병원에 입원한 후 12년 간의 우정과 관찰을 풀어낸다. 작가는 관찰자로서, 혹은 동반자로 등장하여 자신과 파울의 삶을 하나씩 녹여낸다. 이 과정에 흘러나오는 냉소와 경멸과 증오와 열정과 존경과 사랑은 가슴 한 곳에 조용히 자리 잡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다시 펼친 한 쪽에서 발견한 한 문장 때문에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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