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내버려둬
전민식 지음 / 파람북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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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혹하게 만든 문장 하나 ‘육체파 SF 장편’.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육체파 SF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일까?

가까운 미래 기계 시스템이 삶을 지배하는 한 도시의 풍경을 보면 조금씩 이해가 된다.

궤도를 움직여 도시에 필요한 에너지를 생산하는 시대.

이 궤도를 움직이는 것은 자전거처럼 생긴 것을 타 바퀴를 돌리는 페달러.

다부진 허벅지와 같은 궤도의 페달러와의 호흡으로 궤도를 돌린다.

이들이 하루에 페달을 밟는 시간은 3시간.

물론 3시간 연속으로 페달을 밟지 않고 중간에 잠시 쉬는 시간이 있다.

1200궤도 이상은 특별한 페달러들이 모여서 움직인다.


이 도시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페달러들이 궤도를 돌려 삶에 필요한 전력 등을 공급하면서 도시를 유지한다.

인간의 다리 근육으로 전력을 생산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든다.

50명이 한 조가 되어 3시간 동안 페달을 돌리면 그들은 집에서 녹초가 된다.

가장 앞에 있는 페달러는 마스터가 되어 관리자가 된다.

그 누구도 마스터를 본 페달러들은 없다.

주인공 탁수는 마스터에 가장 가까운 페달러다.

하지만 그는 마스터 지위로 올라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다른 페달러처럼 브랜디를 마시면서 삶을 살지도 않는다.

평범한 페달러 생활에 균열이 생기는 것은 그의 행동 하나와 한 페달러의 죽음이다.


육체파 페달러가 어느 날 갑자기 심폐소생술로 여자 한 명을 살린다.

그는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행동인데 자연스럽게 그 행동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소리와 장면들.

그의 일상은 보통의 페달러와 다른 부분이 있지만 페달러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시간을 맞춰 모두 최선을 다해 페달을 밟는데 50번 페달러 히로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들은 열심히 앞만 보고 페달을 밟기에 뒤에 누가 사라져도 알 수 없다.

탁수는 공장장실에 불려가는데 탁수에게 히로에 대한 질문보다 다른 질문을 더 한다.

심폐소생술을 배운 적이 있는지, 갑자기 이상한 생각들이 떠오른지.

히로가 궤도 속에 머리를 넣고 있는 사진도 본다.

왜 히로는 이런 자살을 한 것일까? 공장장의 질문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페달러의 세계는 남성의 영역이었다.

낮은 궤도에서 여성들이 페달러가 되기도 하지만 1200번대는 아직이다.

그런데 여성 역도 선수 아리를 히로 대신 페달러로 넣어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그녀와 함께 히로의 화장장에 가는데 그곳에서 백발의 이상한 남자를 만난다.

그가 주장하는 내용은 이 견고한 세계에 대한 의혹들이다.

화장장에서 아리의 페달러로서의 힘을 확인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힘이 아니라 같은 궤도 페달러와의 호흡이다.

그녀가 처음 왔을 때 아리는 그들의 리듬과 호흡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

시간이 더 필요한 듯한데 이상한 것은 탁수의 행동이다.

최고의 페달러가 작은 실수를 하는데 이것은 내면과 삶의 방식을 바꾼 탓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헬스장에서 스피닝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재생되었다.

이들이 허공에서 바퀴를 돌린다면 페달러들은 궤도에서 거대한 힘을 발휘한다.

이들이 얼마나 대단한 지는 아리가 화장장 궤도에서 15인용을 움직인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탁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과 공장장의 질문과 심문은 이어져 있다.

가장 이상한 것은 모두 같은 부모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도시에 알려진 정보와 다른 사실들이 나온다.

빗물을 먹으면 산성비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고 하지만 먹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없다.

아니 탁수와 아리에게 이 빗물은 페달러에게 제공되는 물과 다른 작용을 한다.

이 기묘한 도시와 의문 가득한 설정은 머릿속에 온갖 설정을 다 가져오게 한다.

하지만 작가는 아주 불친절하고  불명확하게 이 세계에 대한 설명을 생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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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분식
김재희 지음 / 북오션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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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세 중 하나인 힐링소설이다.

유미분식이란 공간을 통해 이어져 있던 사람들의 사연들이 흘러나온다.

이 작은 분식집은 우리가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분식집이다.

하지만 이 분식집 주인의 마음과 행동은 그렇게 흔하지 않다.

내가 모르는 수많은 분식집들 중에서 이런 집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10년 전 손님을 부르는 초대장을 보내는 곳은 없다.

분식집 딸이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말하고 일곱 명의 손님을 초대한다.

소설은 일곱 개의 사연과 하나의 반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뻔한 이야기인데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대목들이 많다.


개인적으로 분식을 찾아서 잘 먹지 않는다.

떡볶이도 있으면 먹지 맛집을 찾아갈 정도는 아니다.

친구가 잘 하는 집이라고 칭찬하고 데려간 곳도 그 맛 차이를 잘 몰랐다.

튀김은 좋아하지만 역시 사서 먹을 정도는 아니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메뉴 중 내 취향에 맞는 음식은 거의 없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있다 보면 먹게 되는 음식들이다.

자취생활이 길어질 때는 라면에 김밥 한 줄로 저녁을 떼우기도 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비싸지 않아 크게 부담되는 가격도 아니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몇몇 사람에게서 나의 흔적들이 보인다.

아마 나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분식집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여덟 개의 사연, 개성 강한 캐릭터들과 감칠 맛 나는 조연들.

시간에 쫓기는 은행원이 먹는 김밥

실종된 아이가 좋아했던 돈가스와 그 사연.

개떡이란 별명을 가진 남자의 절절한 아내 간병 사연과 쿨피스.

학폭으로 집에만 머물던 청년이 시켜 먹던 떡튀순 세트.

돈이 아까워 결혼도 하지 않은 건물주 아저씨의 숨겨진 사연과 소불고기덮밥.

경찰시험 준비생 시절 마시던 어묵탕 국물과 청소년 사연.

대박을 꿈꾸었지만 금융사기 당한 청년이 즐겨먹던 치즈라면.

이렇게 손님들의 사연들이 나오고, 문제가 조금씩 해결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유미분식 사장님이 즐겨 먹었던 열무비빔국수와 비밀 하나.


어렵게 꼰 구성도 아니고, 비극으로 흐르는 이야기도 아니다.

어떤 대목은 ‘뭐야?’ 라고 말할 정도로 김이 빠지는 대목도 있다.

하지만 그 사연들이 나에게 자극적이지 않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다른 문제다.

작은 노력과 도전, 포기하지 않는 열정 등이 어우러진 이야기들이다.

개떡 같은 남편이 치매 걸린 아내를 자신이 죽을 때까지 돌보는 모습은 강한 여운을 준다.

엄마가 남긴 레시피로 이전의 맛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대목에서 놀란다.

화려하지 않고 구성에 복잡한 힘을 들인 것은 아니지만 투박한 재미가 있다.

마지막 비밀은 정말 끝에 와서야 겨우 눈치를 챘지만 이미 늦었다.

읽으면서 나와 주변 사람들의 입맛과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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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 어 원더풀 월드
정진영 지음 / 북레시피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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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작가다. 낯익은 이름이라 한두 권 정도 읽은 줄 알았다.

새로운 작가를 만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이 문장을 쓰고 보니 어딘가에서 본 듯하다. 아마 맞을 것이다.

제목을 보고 루이 암스르통의 노래가 먼저 떠올랐다.

이 노래를 머릿속에 떠올리다 보니 영화 속 한 장면도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나오는 자전거길 국토종주는 다른 가족의 에세이로 읽은 적이 있다.

세 아들과 엄마가 함께 달린 그 길을 소설로 본다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물론 소설과 에세이의 자전거길 종주의 목적은 다르다.

하지만 이 자전거길을 달리면서 경험하는 각 구간의 느낌은 비슷하다.

괜히 한 번 달려보고 싶다는 욕심이 나는데… 정신 차리자.


주인공 일행이 자전거길 국토종주를 하는 이유는 조금 황당하다.

한 직원의 퇴사 송별회에 사장이 준 로또 중 하나가 1등 당첨되었다.

출근한 직원들의 로또를 확인했는데 당첨자가 보이지 않는다.

퇴사한 과장이 1등 당첨자일 가능성이 높다.

좀생이 사장은 직원들에게 퇴사한 문희주 과장을 데리고 오면 연봉 천만 원을 올려주겠다 말한다.

이 과정에서 사장을 믿을 수 없는 직원들이 동영상 등을 찍어 확실하게 해 놓는다.

그리고 유급휴가를 받아서 퇴사한 과장을 찾으려 가려고 한다.

물론 이 여정에 동참하지 않는 직원들도 있다.

불확실한 추적보다 자신 앞에 놓인 휴가를 즐기겠다는 실속파들이다.


이들은 모두 자동차공장에 납품하는 부품 제조업체에서 일한다.

회사 경영은 솔직히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직원들의 인건비를 낮춰 사장 부부의 배를 불리고 있다.

직원들에게 마구 대하는 사장도 한 직원에게는 끽소리도 못한다.

바로 회사 최고 미녀이자 모든 남성들이 바라는 경리팀의 임정연이다.

그녀에 대한 소문은 다양하게 나 있는데 실제 사실은 반전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 추노 같은 추적단은 화자와 임정연과 그녀를 사모하는 두 남자 합쳐 네 명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남자, 우희철과 이재유가 정연을 두고 서로 티격태격 다투는 사이란 것이다.

시작부터 갈라진 둘은 문희주의 인스타를 통해 한 곳에서 만난다.

인스타를 기반으로 이들은 문희주가 가는 길목에서 만나려고 한다.


한 여자를 둔 남자의 연적 다툼이 펼쳐진다.

그 사이에서 도도하게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는 정연.

회사 막내로 희철에게 부려지는 화자.

이 국토종주 자전거길을 경험했다는 우희철의 자신감 넘치는 호언.

티격태격하고 삐걱거리면서 이들은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그리고 이 여정 속에 각자의 사연들이 하나씩 흘러나온다.

사실적인 자전거종주길의 설명은 기본 안내서 정도는 된다.

개성 강한 캐릭터들과 미묘한 엇갈림 등도 재미를 북돋는다.

작가가 깔아 둔 설정 하나는 중반 정도가 되면 쉽게 예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진짜 재미는 이 여행으로 인해 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자신이 진짜 바라는 바를 알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려는 노력과 열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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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쇄 - 두 남매 이야기 케이스릴러
전혜진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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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족쇄: 두 남매 이야기』의 원작소설이다.

만화가 먼저 출간되었고, 종이책은 이번에 처음 나온 것 같다.

만화는 보지 못했는데 읽으면서 웹툰에서 본 어떤 장면 몇 개가 머릿속에 지나갔다.

막장에 막장을 더하고, 출생의 비밀까지 덧붙였다.

금기를 부수는 미친 이야기란 평에는 동의한다.

읽으면서 계속 불편함을 느꼈고, 이 불편함의 마지막을 보고 싶었다.

뛰어난 가독성과 예상하지 못한 상황과 예상 가능한 장면으로 빠르게 끝까지 달려갔다.

이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막장이라는 단어로도 부족할 듯하다.


5년 전 감옥에 갔던 준현이 출소를 한다.

그는 동생 나현을 늘 성추행하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다.

그의 출소는 많은 사람들의 분노와 불안감을 고조시킨다.

5년 전 사건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신문사 기자 조성춘.

준현의 출소가 지역을 움직이는 서윤병원 상속에 문제가 될 거라 생각한 큰고모.

준현이 나현과 함께 사는 것이 불편하고 불안한 나현의 외삼촌들.

이런 사람들 위에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는 서필환 원장.

원장의 수족이 되어 이들 사이에서 사건을 조율하는 변호사.

이복오빠 준현과 둘이 살고자 하는 마음이 강렬한 나현.

이들의 탐욕과 욕망이 뒤섞이고, 과거 사건의 진실이 하나씩 밝혀진다.

이 과정에 벌어지는 폭력과 비밀들은 막장 드라마의 최고봉이다.


한 지역의 유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과거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사라졌지만 사람들 마음속에서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경기도 외곽의 장제시에 대형병원을 세워 도시를 일으킨 서필환 원장.

뛰어난 외과 수술 실력과 탁월한 운영 능력과 음습한 음모로 서윤병원을 키웠다.

그의 성장에는 과거 지역 유지들의 몰락과 공조가 함께 한다.

조 기자의 집안은 몰락했고, 장진제약은 서 원장의 지원으로 약국에서 제약회사로 성장했다.

과거 머슴이었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양반가 딸 정혜를 며느리로 들인다.

하지만 문제는 아들이 학창 시절 사귄 여자가 가진 아들 준현.

자신아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 살인도 주저하지 않는 서 원장.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것보다 더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온다.


먼 곳에서 봤을 때 이들의 행동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인 행동 두 가지가 바로 준현에게 가해지는 두 사람의 폭력이다.

하나는 나현의 외삼촌들이 와서 가하는 잔혹한 폭행이다.

자신의 동생을 죽인 준현과 조카가 함께 사는 것이 불안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병원의 소유권을 탐내는 큰고모의 폭행과 납치다.

강제로 집문을 따고 들어와 준현을 폭행하고, 남매를 납치하려고 한다.

이들에게는 법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보는 동안 분노하지만 서 원장의 뜻이 법적 처벌로 이어지는 것을 막는다.


자폐가 있는 준현, 그런 그와 함께 살기를 바라는 나현.

이들을 떼어 놓고 싶은 사람들, 할아버지의 증여를 막고 싶은 사람들.

작은 도시에서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습관이 붙은 사람들.

폭력과 갑질은 그들에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과장된 듯 보이지만 어쩌면 우리의 현실은 이렇게 돌아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점점 표현되는 남매의 근친상간 분위기.

작가가 곳곳에 깔아둔 몇 가지 설정은 마지막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의도적으로 숨기고, 꼰 이야기 구조와 노골적인 장면들.

이 강렬한 막장 드라마와 스릴러가 강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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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 : 옥구슬 민나 림LIM 젊은 작가 소설집 3
김여름 외 지음, 김다솔 해설 / 열림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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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LIM 젊은 작가 단편집 시리즈 3권이다.

1권을 읽고 2권은 건너 뛰었고, 3권은 낯선 이름으로 가득하다.

여섯 명의 작가 중 한 번이라도 읽은 작가는 2024 이상문학상 수상집에서 만난 성혜령이 유일하다.

아마 최근에 이상문학수상집을 읽지 않았다면 모두 낯선 작가였을 것이다.

최근 자주 많이 느끼는 것 중 하나가 새로운 작가들에 대한 낯섦이다.

특히 기존 문학상에 대한 관심이 덜해지면서 이런 경향이 더 심해진다.

가끔 이런 단편집을 읽으면서 새로운 작가 한 명씩 알아간다.

이것은 장르소설 쪽에서도 마찬가지다.


김여름의 <공중산책>은 읽으면서 일본 영화를 검색하게 한다.

자신의 장례식장을 영혼의 상태에서 참여하면서 시작한다.

자신과 오랫동안 사귄 남자 친구는 이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영혼은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일상의 공간 속으로 스며든다.

히로세 유코의 영화에 대한 설명은 지루할 것 같지만 눈길을 끈다.

귀신인 그녀가 남친과 마주하는 마지막 장면은 진한 여운과 강한 울림을 준다.


라유경의 <블러링>은 서술 트릭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액체 상태로 변하는 시대다.

화자의 옆자리에 있던 언니도 액체로 녹았는데 텀블러 한 잔도 차지 않는다.

처음 이 현상이 발견된 후에도 그 원인이 나오지 않는다.

외로움이 원인이라는 설이 있지만 언니와 화자의 관계를 생각하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이 소설의 마지막에 드러나는 사실 하나는 또 다른 가능성을 암시한다.

화자가 하는 블러링 작업과 액화는 그 대상의 의지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서고은의 <정글의 이름은 토베이>는 슬픈 현실을 보여준다.

먹고 살기 위해 알바를 뛰다 유학원의 실적으로 급여를 받는 일에 뛰어든 순지.

순한 이름이라 수잔으로 바뀌야 했던 이름.

해외여행 경험이 없어 고객 유치에 실적이 낮은 순지.

실적 좋은 동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토베이 유학을 열심히 설명하는 순지.

넘어올 듯 넘어오지 않는 고객, 도시에 대한 불안과 몰이해로 취소하는 고객.

한강의 던전에서 괴물이 산다고 한 친구와 가끔 오는 기프티콘.

집에 계속 생기는 곰팡이와 위에서 늘어진 넝쿨, 그리고 밝혀지는 사실 하나.


성혜령의 <대체 근무>는 여백이 많은 소설이다.

단강이 연구실 폭발 사고로 석사 과정을 휴학하는데 폭발 원인이 나오지 않는다.

소도시 지방정부 산하기관 행정보조로 1년 계약직에 붙는다.

유아휴직 대체 근무인데 임 주임은 예상한 시간보다 빨리 복직한다.

실직에 대한 불안감은 사라졌지만 업무는 그녀가 거의 대부분한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에 대해 알고, 그녀가 아기가 죽었다는 사실도 듣는다.

서로에 대한 이해 부족, 정규직에 대한 부러움, 마지막 장면은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예소연의 <통신광장>은 추억속으로 데리고 간다.

영화 <접속>을 모티프로 시작한다.

이 영화를 떠올릴 때면 늘 머릿속에서 노래 한 곡이 지나간다.

숙박사이트 모바일 상담원으로 재택근무하는 나.

영화 속 아이디로 접속해서 대화를 나누는 해피엔드와 여인2.

바퀴벌레가 나왔다고 환불을 요청하는 고객과 업무 매뉴얼을 따라가는 나.

과거를 현재에 재현하려는 여인2와 그 대화를 즐기는 나.

마지막 광장에서 모든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는 문장은 삶의 다양한 탈출구를 연상시킨다.


표제작인 현호정의 <옥구슬 민나>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소설이다.

민나의 탄생과 엄마의 존재가 시간 순으로 맞지 않다.

민나가 만나고 동행하는 존재들의 관계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민나가 점점 작아지는 장면을 보면서 우주의 가장 작은 원소로의 회귀다.

이 신화와 전설 같은 이야기 이후 나오는 ‘득’은 또 어떤가?

평론가에 의하면 작가가 계속 신화를 재해석해서 작업했다고 하는데 어렵다.

읽으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했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복잡하다.

어쩌면 좀더 섬세하고 느리게 읽어야 살짝 이해의 문이 열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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