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마마로 살아가기 -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한 그녀들을 위한 관계 심리학
가야마 리카 지음, 안혜은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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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논마마란 단어가 낯설지 않은 것은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논마마의 정의로 저자는 ‘아이를 원하지 않거나 아이는 원하지만 일과 취미 때문에 출산을 미루는 아이 없는 여성’이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이런 여성이 있다고 해도 쉽게 입밖으로 말하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결혼 자체를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여성은 더 많다.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제는 주변에 비교적 흔한 경우가 되었다. 이 변화를 저자는 자신과 사회의 변화 속에서 경험한 것을 엮어서 책으로 내었다. 저자 자신도 논마마다.

 

결혼을 했는데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이 거의 20년 전이다. 당시 분위기에서 이런 말을 공공연히 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의 상황에서 결혼했는데 아이가 없으면 양가 어른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압박을 받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데 불임전문병원을 찾아가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20년 전 그 부부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을 통해 듣고 놀랐는데 최근에도 역시 아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나 자신이 그들 부부의 속내를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또 다른 집안에서 이런 부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부모가 이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와 아쉬움을 느낀다는 소식은 추가적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 주변에도 논마마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물론 아이를 간절히 원하지만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불임전문병원이 호황을 누리는 이유 중 하나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 점점 늘어나는 논마마에 대해 저자는 결혼과 출산은 지극히 사적인 문제라고 분명히 말한다. 하나의 국가가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태어나는 아이가 필수적이다 보니 많은 아이를 낳기를 원한다. 능력만 된다면 대가족을 유지하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현실은 수많은 이유로 이런 논마마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질타하고 악의 없는 폭력을 휘두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음을 깨달았다.

 

논마마 여성에 대한 사회 폭력은 결혼과 육아를 경험하지 못한 남성에게도 적용되는 부분이다. 육아에서 흔히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아이를 키워보면 안다’란 말이다. 실제 아이를 키워보면 수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나의 아이가 옆집의, 친구의, 후배의, 동료의 아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라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은 분명히 있다. 이 공유할 수 있는 경험만 가지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경험한 자만이 모든 것을 안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모성에 대한 과도한 신화를 만들어낸다. 강요된 모성에 수많은 엄마들이 얼마나 힘든 과정을 겪고 있는지 알려주는 경우는 흔치 않다. 누구나 경험하는 일로 치부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모순은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반려동물 부분에서 “동물에게 애정을 듬뿍 쏟고 거기서 얻는 반응이 만족스러워 아이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냐고 한다면 솔직히 부정할 수는 없다.”라고 말하지만 “반려동물에게 육아 대리만족을 얻는 일은 거의 없다.”라면서 분명히 선을 긋고 있다. 국가가 많은 출산을 원하고 장려한다고 하지만 실제 사회 시스템은 이것을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만들어놓았다. 책 속에서 부족한 유치원을 언급한 것도 이것의 연장선이다. 실제 한국도 어린이집 문제는 아주 오래되었지만 전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출생 전에 대기신청을 해도 몇 년을 기다려야 한다. 이 문제 제기에 대한 일본 수상의 반응은 우리도 별 차이가 없지 않나 생각한다.

 

저자는 논마마 폭력에 목소리를 높이고, 자신을 긍정하고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회 배후에 있는 가치관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강요보다 무서운 마이드 컨트롤 부분에서 우리가 쉽게 만나게 되는 논마마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폭력이 어디에서 기인하게 되었는지 생각할 기회를 얻는다. 행복한 결혼보다 사회 안정 혹은 인구절벽의 탈출을 우선하는 일이 너무 쉽게 말해진다. 결혼이란 사회적 제도를 새롭게 만들 필요가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공식처럼 되어 있는 결혼, 출산, 육아의 연결 고리를 깨트려야 한다. 이것은 실제 결혼한 부부 모두에게 아주 큰 부담이다. 길지 않은 글이지만 자신의 경험과 사회 자료를 묶어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논마마 문제를 아주 잘 다루었다. 사회적으로 더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할 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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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숙한 국가 - 국가를 바라보는 젊은 중국 지식인의 반성적 사유
쉬즈위안 지음, 김태성 옮김 / 이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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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중국은 공산당 독재체제다. 중국에 가면 되지 않는 검색 엔진과 SNS가 있다. 어떤 한국 인터넷 페이지는 열리지도 않는다. 강하게 통제되고 있다는 증거다. 이런 곳에서 대규모 집회가 일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정부의 입장은 아주 강경하다. 저자의 한국 서문에 나온 사드 문제에 관해 그의 의견에 공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정치 쪽을 제외하고 경제로 넘어가면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문화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부분이 개방되었다. 물론 정치적 필요에 의해 단속되는 것은 변함없다. 중국의 발전 속도는 과거 한국을 능가한다. 거대한 영토와 엄청난 숫자의 인구는 발전 초기에 아주 큰 힘을 발휘했다. 몇 년 전 정체기에 들어섰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것 또한 변하고 있다.

 

이 거대한 국가의 발전을 중국의 한 지식인은 미성숙하다고 말한다. 경제 발전만 놓고 보면 틀린 말이지만 정치와 문화로 넘어가면 어느 정도 수긍하게 된다. 사실 이 책을 선택할 때 나의 관심은 과연 어디까지 중국의 정치문제를 다룰까? 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문화대혁명과 천안문사태를 정면에서 다룰까 하는 것이었다. 문화대혁명을 경험한 작가들의 소설을 읽고, 그 시대를 다룬 영화를 보았지만 정치적으로 엄청난 실패였던 이 정책의 아주 참담한 결과는 정면에서 다룬 것은 거의 본 적이 없다. 물론 외국 저자들의 글에서는 아주 신랄하고 정확하게 표현된다. 수천 만 명의 아사자들을 내가 알게 된 것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물론 스탈린 체제 아래의 소련도 이와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독일이 통일되고, 소련연방이 해체되던 그 시절 중국은 천안문사태를 맞이했다. 그 대처는 아주 강력했다. 천안문 광장에서 한 청년이 전차 앞에 서 있는 사진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이후 수많은 지식인들이 중국을 떠나 외국으로 망명했다. 이 망명자들은 외국에서 그 나라의 언어로 소설이나 다른 저작물을 만들어내면서 중국과 자신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그렇지만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천안문사태는 중국의 금지어 중 하나다. 사실 내가 기대한 것은 바로 이 두 부분 중 어느 하나라도 정면에서 다루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원래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고 넘어간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1장부터 7장까지는 중국의 역사를 다룬다. 이 부분은 나에게 아주 흥미로웠다. 피상적이고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중국 역사를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청 제국이 무너지는 과정과 그 과정 속에서 그 당시 지식인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일본과 비교하는 몇 가지 대목은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많은 유학생을 일본으로 보내고,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대목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그들의 갈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유럽 등지로 유학을 떠났고, 이들이 혁명 세력으로 발전했다. 중국 근·현대 역사를 중국인의 시선으로 해부하고 해석한 이 내용은 서양 학자나 동양의 다른 나라 역사학자들의 시선과 많은 부분이 차이가 난다. 물론 저자 자신도 외국 저자들이 기록한 것을 많이 인용한다. 이 인용은 그 자신에게도 역사를 다른 시각에서 보게 만들었을 것이다.

 

메이지유신은 잘 알고 있지만 동치중흥은 잘 모른다. 역사 시간에 졸았기 때문일까? 신해혁명은 알지만. 이 둘을 같이 놓고 한 장을 할애한 것은 비슷한 시도였지만 다른 결과로 이어졌다는 사실과 그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다. 이후 3개의 장에서는 다섯 명의 역사적 인물들을 통해 그 시대를 말한다. 쑨원과 장제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이 그 주인공이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을 흔히 같이 놓고 비교하는 경우는 보았지만 이렇게 나열한 경우는 조금 어색하다. 쑨원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부분 중 하나가 건국의 아버지란 것인데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그의 조직 능력은 그렇게 뛰어난 것 같지 않다.

 

장제스의 이야기 부분에서 송가황조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처가 부분이 많이 생략된 것 같다. 전술가인 그와 전략가인 마오쩌둥으로 둘을 비교한 부분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6~70년대 마오주의가 세계를 휩쓸 때 나온 많은 저작들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이 태반이지만 대장정의 기록은 아주 흥미롭다. 이 부분을 생략한 것은 아마 중국에서는 너무 잘 알려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우은라이에 대한 평가는 최근에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 봤는데 한결같이 호평 일색이다. 덩샤오핑의 그 유명한 흑묘백묘 이야기는 언급조차 없지만 그가 권력을 획득한 후 펼친 정책은 아주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다. 마오쩌둥을 그대로 둔 것부터 그렇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은 엄청난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는 묻는다. 민주라는 것은 과연 좋은 것인지? 이 보다 나의 시선을 끈 것은 기업가 정신이다. 성공했지만 거짓과 부패로 이름을 알린 기업가들을 말하면서 아쉬워한다. 이것을 보면서 바로 마윈이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록펠러에 대한 그의 과한 칭찬과 기업에 대한 우대는 이 책의 정체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에 북경대학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그가 그 대학 출신이기에 가능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다른 대학 출신도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지만 몇 곳은 눈에 거슬린다. 20세기 초 일본이 아시아의 동반자로 중국을 도와주려고 했었다는 대목은 아주 놀라웠다. 나의 오독이 아닌지 의문을 품는다. 다시 정밀하게 읽고 평가해야 할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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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기발한 우연학 입문
빈스 에버트 지음, 장윤경 옮김 / 지식너머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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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읽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에서는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이 말을 뒤집는다. 우연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 우연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네 개의 파트로 나누어 설명한다. 개인의 삶, 일과 성공, 학문, 미래 등이다. 미시적으로 본다면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맞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혹은 전 우주적으로 본다면 어떨까? 아마도 우연보다는 누군가에게 일어날 일이 결국 그 사람에게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개인에게는 분명 우연이 작용했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원제목은 이렇게 길지 않다. <unberechenbar>라는 원제목의 독일어를 번역하니 ‘계산할 수 없는’ 혹은 ‘예측할 수 없는’ 이란 형용사로 설명되어 있다. 이 짧은 제목이 이렇게 변한 것은 최근에 많이 팔린 책의 제목을 따라한 탓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제목은 원래의 저자가 의도한 것과 조금은 다른 식으로 변했다. 우연을 계산할 수 없는 것으로 대체 가능한가 하는 의문도 생기면서 말이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대는 앞에서 말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란 책과 나의 생각이 맞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도 거대하고 복잡한 현상을 우리가 설명할 수 없기에 ‘우연’이란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연학이란 학문이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 책의 앞의 두 장은 원제목에 나온 계산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설명으로 채워져 있다. 계획한대로 잘 되지 않는 우리의 삶을 개인과 일로 풀었다. 실제 많은 사람들이 삶과 일에서 수많은 계획을 세운다. 저자도 말했지만 수많은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매년 새로운 예측을 쏟아낸다. 그런데 그 중에서 제대로 맞은 것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뒤에는 다시 언론이 그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하는 기묘한 일이 벌어진다. 책 속에서 종말론을 믿는 신도의 예와 닮아 있다. 한 번 생긴 권위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익숙하고 유명한 이름은 인용하는 사람에게 아주 편한 존재다. 그 결과를 다시 검토하는 일이 없는 언론에서는 특히.

 

일상에서 만남은 우연인 경우가 많다. 수많은 가능성 중의 하나로 볼 수도 있지만 최소한 그 순간만은 우연일 것이다. 운명적 만남을 이야기하는 수많은 소설 등도 바로 이 우연을 극대화시켜 표현한다. 건강은 어떨까? 아이는 또? 이 부분에서는 우연보다 저자의 원제목인 ‘예측할 수 없는’ 이란 표현이 더 적합하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우리는 수없이 생각하고 살면서 바꾼다. 계산한 대로 세상이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수학 공식대로 삶이 흘러간다면, 미래가 개인별로 정해져 있다면 얼마나 단순할까? 우연한 발견이나 발명이나 만남도 역시 정해진 것이라는 의미일 테니.

 

학문에서 우연은 준비한 자에게만 온다고 말한다. 기회가 늘 준비된 자에게 온다는 말과 똑같다. 사실이다. 과학사에서 실수나 착각 등의 우연으로 발견한 놀라운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측한대로, 계획한대로 되지 않아서 더 많은 것을 배우는 것이 과학이고 발전이다. 고집스러운 사람들이 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뇌가 우연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앞에서 내가 주장한 것도 이것의 연장선일지 모르겠다. 최소한 아주 미시적인 부분에서는 말이다. 그리고 현생 인류가 살아남은 이유 중 하나로 지식의 전달과 변화에 대한 빠른 적응을 말하는데 동의한다.

 

우리는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전문가의 예측은 그냥 예측일 뿐이다. 빅 데이터의 분석도 마찬가지다. 살면서 늘 합리적으로 살지도 않는다. 늘 동일한 패턴으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변하기도 한다. 이때는 우연보다는 ‘계산할 수 없는’이란 표현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이 책 속에서 천재성에 대한 연령별 인용이 나오는데 우리의 억압적인 교육 방식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사고의 틀이 고정된 후에 우리가 가지는 선입견은 무서울 정도다. 재미처럼 나온 사이코패스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에 읽은 소설 한 대목을 떠올려주었다.

 

공연을 많이 하는 저자가 쓴 책이고, 유머를 곳곳에 넣어 생각보다 쉽게 읽었다. 덕분에 곳곳에서 실소를 풋! 하고 몇 번이나 날렸다. 그 유머가 나와 맞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우연학이란 제목 때문에 원래의 가치가 조금 사라진 것 같다. 저자는 우연보다는 우리가 계산한대로 되지 않는 삶과 미래와 일들을 말하고 싶어한 것 같은데 말이다. 이 표현의 차이를 하나로 뭉뚱그린다면 그 의미가 많이 왜곡될 것이다. 오랜만에 재미있게 대중적인 자연과학 분야 글을 쓰는 작가 한 명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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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품 (특별판) 작가정신 소설향 11
정영문 지음 / 작가정신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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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문보다 번역가 정영문에 더 익숙하다. 집 책장을 뒤져보면 정영문의 소설 한두 권 이상이 나오겠지만 그가 번역한 소설은 최소한 그보다 몇 배는 될 것이다. 나의 한국 소설 사랑이 90년대 중반에 거의 끝나면서 몇 사람의 작가를 제외하면 번역된 소설에 집중한 탓도 있다. 수없이 사들인 책들 중에 혹은 읽은 책들 중에 번역 정영문이란 이름이 각인된 것은 그만큼 다른 번역자와 달리 나쁘지 않은 번역을 한 덕분일 것이다. 한때 김연수가 번역했다는 이유로 책을 산 적도 있으니 번역자에 대한 나의 호불호는 어떤 때는 집착과도 같다. 뭐 번역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면서 이런 편식은 꽤 많이 사라졌지만.

 

<하품>이란 작품은 신작이 아니다. 출판사에서 기존에 출간된 중편소설을 새롭게 기획해서 낸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중편이란 설명과 책을 받았을 때 판형과 편집을 봤을 때 빠르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처음 초판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미묘한 언어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미로 속에 빠진 듯했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곱씹으면서 읽었지만 나의 회색뇌세포는 쉽게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명사와 동사, 동사의 어미변화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차이는 이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겨우 서막일 뿐이다.

 

소설은 한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다. 왠지 모르게 읽다가 포기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연상되었다. 나와 그의 대화가 진행되는데 이들은 거의 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이 이야기는 나의 시점에서 말하고, 그가 말하는 것을 듣는 방식이다. 당연히 나의 심리 묘사는 좀더 세밀하고 길지만 그의 심리 묘사는 짧고 추측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 둘이 나누는 대화의 내용과 방식이다. 어떤 부분에서 그들이 누군가를 죽였다고 말할 때 청부살인자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또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자신들의 현재 삶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도 자세한 설명은 사라지고 지리멸렬한 일상만 쏟아낼 뿐이다. 읽으면서 답답함을 느낀다.

 

이 두 사람의 나이도 알 수 없다. 적지 않은 나이인 것은 분명한데 홀로 살고 있다는 것 외에는 어떤 정보도 없다. 그냥 오랜만에 만나 수다를 떨 뿐이다. 그 수다를 읽다 보면 어느 부분에서는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도 일치하여 놀란다. 감정과 행동의 차이가 작은 행동으로 사라지거나 순식간에 감정의 표현이 변화는 장면은 어떤 것이 진심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그리고 문장으로 표현되는 이성과 감정은 조금만 주의하지 않으면 누구 것인지 알 수 없다. 집중해서 읽어야 겨우 따라갈 수 있다. 쉽게 구분하는 방법은 문장의 끝에 ‘내가 말했다’ 혹은 ‘그가 말했다’를 읽는 것이지만 그렇게 하려면 앞의 문장을 다시 한 번 더 읽어야하는 번거로움이 생긴다. 이런 점에서 번거롭다.

 

쉽고 빠르게 읽히는 소설이 아니다 보니 생각이 어떤 지점에서 멈출 때가 많다. 미묘한 감정의 차이를, 이 둘의 이상한 친분 관계를 보다 보면 내가 살면서 경험했던 몇 개의 장면들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술을 마시면서 서로의 주장을 목소리 높여 말하던 때, 서로가 자기 말만 하던 때, 억지로 함께 그 시간을 보내야만 하던 때 등의 수많은 장면들 말이다. 이런 장면들에 담긴 감정의 변화는 상황에 따라 쉽게 달라진다. 그렇다고 전체적인 감정이 변할 정도는 보통 아니다. 비루해 보이는 이 둘의 대화 속에서 나의 모습을 더 많이 보았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내 삶이 비루하다는 것일까? 아니면 비루해 보이는 이들의 대화가 우리의 일상을 잘 보여준다고 해야 할까?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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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6-28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소설가보다 번역가 !
 
에타와 오토와 러셀과 제임스
엠마 후퍼 지음, 노진선 옮김 / 나무옆의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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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이면 여든세 살이 되는 에타는 어느 날 한 통의 편지를 남겨 놓고 집을 떠난다. 그녀의 떠남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면서. 이 교차하는 시간은 더 먼 과거에서 가까운 과거로, 현재는 새로운 현재로 이어진다. 그 시간 속에 세 인물의 삶이 조금씩 녹아든다. 바로 에타와 오토와 러셀이다. 제임스는 처음 읽었을 때는 에타가 짝사랑했고, 언니를 임신시킨 남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제임스는 에타의 여행동반자로 사람이 아니라 코요테다. 사람들이 개라고 생각할 정도다. 이 소설 속에서 에타와 제임스는 상당한 기간 같이 다니고 대화를 나눈다. 비현실적인 장면이지만 이 교감에는 눈길이 절로 간다.

 

에타가 떠난 후 남겨진 사람은 오토와 러셀이다. 오토는 남편이고, 러셀은 옆 농장의 주인이다. 하지만 더 먼 과거로 돌아가보면 오토와 러셀이 어떻게 만났는지, 이 둘이 어떤 관계인지 천천히 드러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오토와 러셀은 떼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다. 모르는 옆 농장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는 트랙터를 타고 사고 난 그 순간 말이다. 이렇게 러셀은 오토 네 집안으로 스며들고, 둘은 절친한 우정을 쌓는다. 이 둘이 헤어진 순간은 오토가 군입대해서 유럽의 전쟁터로 파견된 그때뿐이다.

 

소설 속에는 정확한 시대를 알려주는 연도가 나오지 않는다. 현재를 기준으로 하면 1930년대부터 이야기가 시작한다. 오토가 경험한 전쟁은 제2차 대전일 것이다. 이 시대는 많은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이 많이 죽던 시절이다. 오토 네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더욱. 대가족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주는 앞부분의 몇 장면은 지금의 우리를 생각하면 아주 비현실적이다. 가끔 옛날 사진을 볼 때면 이 시간들이 너무나도 낯설게 다가온다. 오토와 러셀이 다닌 학교의 풍경도 그랬다. 에타와 오토와 러셀을 묶어준 것도 바로 이 학교다. 에타가 선생으로 온 것이다.

 

과거가 이들의 흔적으로 강하게 드러낸다면 현재는 늙은 두 노인의 새로운 삶을 보여준다. 에타는 도보로 특별한 목적지 없는 긴 여행을 떠나고, 오토는 에타가 돌아오길 기다리면 에타의 레시피대로 음식을 해먹는다. 이 둘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인 것은 러셀이다. 하지만 러셀이 그녀에게 갔을 때 에타는 집으로 돌아갈 의지가 없다. 러셀은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고, 에타는 계속 걷는다. 이 도보여행이 언론을 타면서 그녀의 인기가 올라간다. 이 장면들을 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소설이 계속 떠올랐다. 이 여행 도중에 그녀는 자신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적어놓는다.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장면이다.

 

오토는 음식을 해먹다가 어느 날 러셀의 집앞에 서 있는 사슴을 발견한다. 이때부터 에타가 나온 신문으로 사슴을 만든다. 에타와 러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몇 번의 실패 끝에 사슴은 완성된다. 다른 동물들도 만든다. 그 대상은 점점 많아진다. 그가 아내와 친구를 위해 만든 것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이 작품만은 위한 전시회를 열겠다는 사람까지 나타난다. 비가 와서 이 작품들이 훼손되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도 나온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도 그랬다. 아주 현실적인 작품이라면 잘 보관되었으면 좋겠다고.

 

학교에서 이 둘이 함께 보낸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쟁은, 편지는 둘을 묶어주기에 충분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오토의 글을 교정보기 위해서였지만 어느 순간 분위기가 바뀌었다. 유럽의 전쟁은 젊은이들의 열정과 정의를 부채질했다. 그들은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몰랐다. 전사 통지는 수많은 가족을 비탄으로 몰아넣고, 전쟁에 뛰어든 군인들로 하여금 평생 그 트라우마를 안고 살게 만들었다. 때로는 누군가의 운명과 관계를 비틀게 만들기도 한다. 이야기가 뒤로 가면서 이 부분이 더욱 부각된다.

 

소설 구성의 놀라운 점은 어느 특정 시점까지 이야기한 후 끝맺은 것이다. 그 후와 현재의 시간을 비워놓았다. 이후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상상력으로 채워놓거나 보여준 시간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대화는 별도 인용부호를 사용하지 않는다. 덕분에 앞부분을 읽을 때는 조금 고생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자 읽는 속도가 빨라졌다. 후반부에 가면서 에타가 오토와 헷갈리는 대목이 나오는데 무슨 반전이 펼쳐지는 것일까? 하고 기대했다. 이런 깜짝 놀라는 장면을 빼도 힘든 시기를 지나온 사람들의 삶이 주는 강한 인상은 그대로 남는다. 마지막 장면은 몇 번을 앞뒤로 넘기면서 그 여운에 빠져든다. 긴 세월을 산 세 노인의 삶을 세밀하게 적어나가지 않고 빈곳으로 남겨두었기에 그 여운은 더 강하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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