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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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만 놓고 보면 조금 긴 단편소설 정도다. 160쪽이라고 하지만 그림과 한쪽 면에 많지 않은 글을 생각하면 정말 단편소설 분량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라 큰 불만은 없지만 이런 분량으로 나오는 책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너무 비싸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읽고 서평을 쓸 때는 좋다. 얇아서. 책을 모두 읽은 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용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그냥 무심코 지나간 삽화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유를 가지고 삽화들에 좀더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스쳐지나간다.

 

작가는 이 소설을 ‘기억과 놓음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과 그의 손자와 아들이 등장하여 잃어가는 기억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노인의 기억은 거대한 광장 크기에서 점점 작아져 작은 텐트로 축소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텐트지만 그 중간에는 노인의 기억만큼 큰 공간이 존재한다. 그 공간의 변화는 언제나 손자인 노아와 아내가 함께 한다. 노아를 부를 때면 언제나 노아노아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두 배의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개그 코너에서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부르면 정말 느끼하고 밥맛인데 말이다.

 

기억의 공간을 조금씩 잃어가는 노인과 그와 함께 하는 가족의 모습은 현실과 상상이 교차한다. 노인의 머릿속에서 대화가 오고 가고, 현실의 아이는 할아버지와 동행한다. 먼저 죽은 아내를 기억 속에 불러내어 그들의 사랑과 삶을 이야기하고, 기억의 공간이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의 수학에 대한 열정은 아들을 지나 손자에게 이어지고, 둘은 원주율을 가지고 놀이를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의 공간은 점점 더 줄어든다. 그래도 그의 곁에는 아내와 손자가 있다. 실제로는 아들과 손자가 있는 것이지만.

 

두려움은 그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생긴다. 기억을 놓는다면 두려움도 사라진다. 하지만 기억은 내가 원하는 것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억의 퇴행은 그래서 무섭고 힘들고 어렵다. 손자를 잊는 것에 대한 손자의 답변은 정말 멋지다. 다시 친해질 기회가 생긴다고, 자신은 꽤 괜찮은 아이라고. 기발하면서도 아주 따뜻한 대답이다. 수학을 좋아하지 않는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모든 부모의 바람을 벗어난 자식 이야기와 마찬가지다. 자신의 바람과 열망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식을 키우다보면 얼마나 이런 경우를 자주 보게 되는가.

 

길지 않은 글이지만 곱씹어볼 대목이 많다. 자신의 바람과 사랑과 삶을 간결하지만 아주 인상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아들의 기타를 지나가듯이 물을 때는 순간 뭉클했다. 노골적으로 다루지 않았기에 생긴 감정이다. 아마도 그의 삶에서 오랫동안 걸려있던 응어리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들이 아빠가 되어 다시 그 아들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돌보는 아들에게 하는 말은 우리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같이 걷고, 같이 있어주는 것 말이다. 이렇게 이 소설은 특별한 무엇인가를 억지로 과장해서 표현하지 않는다. 그래서 좋다. 기억과 이별을 아름답게 묶어 그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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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죽이다 데이브 거니 시리즈 3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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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브 거니 시리즈 3번째 작품이다. <658, 우연히>와 <악녀를 위한 밤>을 읽고 그의 작품을 기다린지 거의 5년이 지났다. 퍼즐 미스터리를 엄청난 가독성으로 풀어내는 존 버든의 작품임을 생각하면 너무 느린 출간이다. 다름 작품은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언제나 그렇지만 존 버든의 소설은 두께가 문제가 된 적은 없다. 이번 작품이 오히려 짧은 편이다. 거의 550쪽에 달하지만 지루한 부분을 느낄 수 없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라면 작가가 깔아놓은 트릭의 정체를 내가 쉽게 파악했다는 것 정도다.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이미 사용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범인을 찾아낸 것은 아니지만.

 

이번 소설에서 첫 번째 살인이 일어나는 것은 소설의 중반 이후다. 중반까지는 착한 양치기 살인사건을 다시 조사한다. 그리고 재미난 설정이 하나 있다. 두 개의 프롤로그가 있는 것이다. 세 번째 파트에서 다시 프롤로그가 나오고, 이때부터 연쇄살인은 아주 빠르게 일어난다. 실제 앞의 두 파트는 이 세 번째 파트를 위한 아주 길고 중요한 기본 그림이다. 물론 바로 살인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부분에서 집중이나 관심이 떨어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때까지도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뭔가가 일어날 것이란 기대를 심어주고, 새로운 사실들과 가정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에 FBI와의 갈등은 또 다른 재미다.

 

2000년 봄 벤츠를 탄 여섯 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 착한 양치기로 불리는 그는 선언문을 내어 이들이 탐욕 등 때문에 죽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홀연히 사라졌다. 10년 동안 이 사건은 미해결로 남아 있고, 심리학자와 FBI는 선언문을 중심에 놓고 사건을 파헤친다. 여섯 명의 인물들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찾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딱 하나 벤츠를 탔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말이다. 한때 엄청난 관심을 누린 사건이고, 이 사건 때문에 한 케이블방송이 떼돈을 벌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용히 묻혔다. 그런데 이 사건을 다시 파헤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바로 킴이다.

 

킴은 10년 전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진 후 큰 혼란을 겪었다. 방황을 하다 학사 논문을 준비중에 미해결사건의 피해자 가족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생각해낸다. 너무 광범위한 것을 줄이다 특정 사건 피해자로 한정한다. 착한 양치기 살인사건이다. ‘그 여자를 막아야 한다.’란 소설의 첫 문장은 바로 킴을 가리킨다. 킴의 기획은 교수의 추천으로 케이블 램TV의 프로그램으로 발전한다. 문제는 여기서 일어난다. 잠자고 있던 악마를 깨운 것이다. 원제인 ‘LET THE DEVIL SLEEP'은 중의적으로 사용된다. 책 속에서는 ’악마를 깨우지 마라‘는 문장으로 더 강하게 다가오지만.

 

거니는 지난 사건의 총격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러다 킴의 엄마인 코니 클라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는다. 그를 슈퍼캅으로 띄워준 저널리스트다. 딸의 기획을 도와달라는 부탁이다. 킴이 그를 흠모하고 있다고 말하고, 딸의 전 남친이 딸을 괴롭힌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전설의 슈퍼캅은 미해결 사건인 착한 양치기 살인사건 속으로 발을 내딛는다. 처음에는 비교적 간단하게 생각한 채로. 킴을 도와 몇 가지 도움을 주는 정도였던 것이 하드윅에게 사건 파일을 얻은 뒤로 점점 빠져든다. 선언문을 읽고, 몇 명의 피해자 가족을 만나면서 그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솟아난다.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

 

킴은 전 남친 로비가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한다. 경찰에 연락을 해도 제대로 처리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거니가 확인하니 킴이 경찰의 CCTV설치를 거부했다. 로비의 도발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고 허세를 부린다. 엄마에게 가라는 몇 번의 의견도 묵살한다. 이런 킴의 행동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특히 집안에서 발견된 핏방울과 피 묻은 부엌칼의 등장은 이 이야기의 중심에 킴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읽는 내내 언제쯤 킴에게 착한 양치기라고 말하는 연쇄살인범이 다가올지 궁금했다. 이 예상은 전혀 내가 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연쇄살인범을 다루는 수많은 소설과 분명히 다르다. 소설 속 첫 살인이 벌어지는데 걸린 시간이나 두 번의 프롤로그뿐만이 아니다. 살인자의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과 그 이유까지 다르다. 거니도 확신을 가지고 누가 범인인지 알지 못한다. 자신이 세운 이론이 맞다는 확신조차 없다. 하지만 그의 놀라운 추리력과 상상력은 기존의 틀을 뛰어넘는다. 프로파일링에 대한 환상을 지우고 원점에서 다시 사건을 수사할 것을 바란다. 그의 의견이 기존의 수사관들에게 통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그들이 힘들게 쌓아놓은 수사와 이론을 무너트리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통찰력을 가지게 된 것은 직접 수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다른 수사가 모두 이루어졌기에 다른 시각으로 사건을 보게 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이 단순히 혼자만의 공은 아니다. 한 사람의 수사관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얼마나 기다려야 다음 이야기가 출간될지 머릿속으로 계산한다. 부디 지금보다 짧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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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
닐 게이먼 지음, 박선령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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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말에 1909년에 출간된 <북유럽 신화, 재밌고도 멋진 이야기>를 읽었다. 이 책은 신들을 한 명씩 한 명씩 이야기로 풀어내었다. 신들의 인명사전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옛 에다를 바탕으로 한 새 에다와 산문으로 써 원전의 느낌을 살렸다. 덕분에 읽을 때는 낯선 이름과 그 운문으로 조금 고생했다. 이 고생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북유럽 신화는 기억 속에서 조금씩 사라졌다. 영화 <토르>나 <어벤저스>의 이미지만 강하게 남긴 채 말이다. 그런데 닐 게이먼은 이 북유럽 신화를 사건 중심의 각각 독립된 단편소설로 만들었다. 당연히 엄청난 가독성을 보여주었다.

 

이 북유럽 신화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리스 로마 신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의 죽음과 노쇠 등이 다루어지고, 각각의 신들이 하나의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신화를 비교하는 것은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이 신화가 들려주는 놀랍고 재밌고 아주 인간적인 이야기를 즐기면 된다. 실제 에다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지 안다면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닐 게이먼처럼 재미있게는 쓰지 못할 것이다. 각각의 이야기 속에 신들의 성격을 아주 잘 드러내주었기 때문이다.

 

북유럽 신화를 다룬 에다를 읽지 않았기에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오딘, 토르, 로키 등의 분량이 실제 이렇게 많은지는 알 수 없다. 특히 이 소설에서 토르와 로키의 분량은 절대적이다. 이들이 경험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건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니면 사건 속에서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한다. 특히 로키는 대부분의 큰 문제에 직접 간접적으로 엮여 있다. 신들의 황혼이라 불리는 라그나로크의 경우에는 그의 자식들과 그가 일으키는 엄청난 사건이다. ‘로키의 자식들’이란 이야기에서 이들이 어떻게 태어났고, 앞으로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보여준다. 그리고 왜 그들을 죽이지 않고 문제를 그대로 안고 갈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이것은 운명이란 이름으로 포장된다 해도 말이다.

 

북유럽 신화를 읽을 때면 토르의 무식함과 과격함과 엄청난 힘에 늘 놀란다. ‘토르의 거인 나라 여행’은 그가 지닌 힘이 얼마나 대단하지 알려준다. 그의 엄청난 식성도 같이. 이 식성은 ‘프레이야의 이상한 결혼식’에서 한 번 나왔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훨씬 대단하다. ‘하미르와 토르의 낚시 여행’에서 거인들보다도 많이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작은 몸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음식이 들어갈지 궁금하다. 물리학적으로 본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토르에게 일어난다. 폭이 5킬로미터나 되는 솥은 들고 올 수 있을 정도의 힘이란 것에 놀라고, 이 솥을 사용하는 거인들을 아주 쉽게 죽이는 모습에 또 한 번 놀란다. 이 신화를 읽을 때면 이 비과학적인 수치들에 항상 의문을 품는다.

 

토르와 함께 늘 말해지는 뮬리뇨가 로키의 장난 때문에 만들어졌다. 신들이 사랑하는 무기와 도구들이 로키의 장난 때문에 탄생한 것이다. ‘신들의 보물’ 이야기가 그렇다. 이것만 놓고 보면 장난꾸러기이자 모사꾼인 로키가 신들에게 좋은 일도 알게 모르게 많이 했다. ‘최고의 성벽 건축가’에서도 로키의 지혜와 희생이 없었다면 아스가르드의 높은 성벽은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멸의 사과’에서 로키는 신들을 아주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간다. 불멸의 신들이 노쇠해지는 상태까지 이르렀다. 물론 그가 기지를 발휘해 사건이 잘 해결되지만 그가 아스가르드에 아주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오딘은 이야기의 첫 부분에 등장해서 중심을 잡아준다. 까마귀들로부터 세상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알지만 이것을 쉽게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의 자리가 세상을 둘러볼 수 있는 위치인지도 모른다. 프레이가 그의 자리에서 게르드의 모습을 보고 한 눈에 반하지 않았든가. 로키의 자식들이 일으킬 문제를 알면서도 그대로 두는 것도 세계의 균형과 조화를 위해서다. 실제 사건들에서 그가 직접 활약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식인 발드르가 죽었을 때를 제외하면 이야기가 끝까지 별다른 활약이 없다. 하지만 최고신의 거대한 존재감은 언제나 이야기 속에서 조용히 흘러간다.

 

신화는 아주 비과학적이다. 동시에 아주 많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구전문학인 경우 원래의 이야기가 어떤 전승되는 과정에서 어떤 가감을 거쳤는지 알 수 없다. 기독교가 북유럽에 전파되면서 원래의 이야기는 더 많이 사라졌을 것이다. 기독교에 맞게 가공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은 학자들에게 맡기면 된다. 과학과 동떨어져 있는 이야기가 나처럼 거슬린다면 새로운 과학 이론 하나를 만들거나 상상하면 된다. 나처럼 거인과 싸우는 토르의 크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면 토르의 힘을 더 크다고 생각하거나 비율이 과장된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럼 이런 신화에 대한 트집은 닐 게이먼의 놀라운 이야기 속에 파묻혀 사라질 것이다. 혹시 닐 게이먼이 <그리스 로마 신화>도 써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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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마마로 살아가기 -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한 그녀들을 위한 관계 심리학
가야마 리카 지음, 안혜은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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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마마란 단어가 낯설지 않은 것은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논마마의 정의로 저자는 ‘아이를 원하지 않거나 아이는 원하지만 일과 취미 때문에 출산을 미루는 아이 없는 여성’이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이런 여성이 있다고 해도 쉽게 입밖으로 말하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결혼 자체를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여성은 더 많다.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제는 주변에 비교적 흔한 경우가 되었다. 이 변화를 저자는 자신과 사회의 변화 속에서 경험한 것을 엮어서 책으로 내었다. 저자 자신도 논마마다.

 

결혼을 했는데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이 거의 20년 전이다. 당시 분위기에서 이런 말을 공공연히 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의 상황에서 결혼했는데 아이가 없으면 양가 어른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압박을 받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데 불임전문병원을 찾아가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20년 전 그 부부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을 통해 듣고 놀랐는데 최근에도 역시 아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나 자신이 그들 부부의 속내를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또 다른 집안에서 이런 부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부모가 이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와 아쉬움을 느낀다는 소식은 추가적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 주변에도 논마마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물론 아이를 간절히 원하지만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불임전문병원이 호황을 누리는 이유 중 하나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 점점 늘어나는 논마마에 대해 저자는 결혼과 출산은 지극히 사적인 문제라고 분명히 말한다. 하나의 국가가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태어나는 아이가 필수적이다 보니 많은 아이를 낳기를 원한다. 능력만 된다면 대가족을 유지하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현실은 수많은 이유로 이런 논마마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질타하고 악의 없는 폭력을 휘두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음을 깨달았다.

 

논마마 여성에 대한 사회 폭력은 결혼과 육아를 경험하지 못한 남성에게도 적용되는 부분이다. 육아에서 흔히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아이를 키워보면 안다’란 말이다. 실제 아이를 키워보면 수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나의 아이가 옆집의, 친구의, 후배의, 동료의 아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라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은 분명히 있다. 이 공유할 수 있는 경험만 가지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경험한 자만이 모든 것을 안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모성에 대한 과도한 신화를 만들어낸다. 강요된 모성에 수많은 엄마들이 얼마나 힘든 과정을 겪고 있는지 알려주는 경우는 흔치 않다. 누구나 경험하는 일로 치부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모순은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반려동물 부분에서 “동물에게 애정을 듬뿍 쏟고 거기서 얻는 반응이 만족스러워 아이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냐고 한다면 솔직히 부정할 수는 없다.”라고 말하지만 “반려동물에게 육아 대리만족을 얻는 일은 거의 없다.”라면서 분명히 선을 긋고 있다. 국가가 많은 출산을 원하고 장려한다고 하지만 실제 사회 시스템은 이것을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만들어놓았다. 책 속에서 부족한 유치원을 언급한 것도 이것의 연장선이다. 실제 한국도 어린이집 문제는 아주 오래되었지만 전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출생 전에 대기신청을 해도 몇 년을 기다려야 한다. 이 문제 제기에 대한 일본 수상의 반응은 우리도 별 차이가 없지 않나 생각한다.

 

저자는 논마마 폭력에 목소리를 높이고, 자신을 긍정하고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회 배후에 있는 가치관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강요보다 무서운 마이드 컨트롤 부분에서 우리가 쉽게 만나게 되는 논마마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폭력이 어디에서 기인하게 되었는지 생각할 기회를 얻는다. 행복한 결혼보다 사회 안정 혹은 인구절벽의 탈출을 우선하는 일이 너무 쉽게 말해진다. 결혼이란 사회적 제도를 새롭게 만들 필요가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공식처럼 되어 있는 결혼, 출산, 육아의 연결 고리를 깨트려야 한다. 이것은 실제 결혼한 부부 모두에게 아주 큰 부담이다. 길지 않은 글이지만 자신의 경험과 사회 자료를 묶어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논마마 문제를 아주 잘 다루었다. 사회적으로 더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할 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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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숙한 국가 - 국가를 바라보는 젊은 중국 지식인의 반성적 사유
쉬즈위안 지음, 김태성 옮김 / 이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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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중국은 공산당 독재체제다. 중국에 가면 되지 않는 검색 엔진과 SNS가 있다. 어떤 한국 인터넷 페이지는 열리지도 않는다. 강하게 통제되고 있다는 증거다. 이런 곳에서 대규모 집회가 일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정부의 입장은 아주 강경하다. 저자의 한국 서문에 나온 사드 문제에 관해 그의 의견에 공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정치 쪽을 제외하고 경제로 넘어가면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문화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부분이 개방되었다. 물론 정치적 필요에 의해 단속되는 것은 변함없다. 중국의 발전 속도는 과거 한국을 능가한다. 거대한 영토와 엄청난 숫자의 인구는 발전 초기에 아주 큰 힘을 발휘했다. 몇 년 전 정체기에 들어섰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것 또한 변하고 있다.

 

이 거대한 국가의 발전을 중국의 한 지식인은 미성숙하다고 말한다. 경제 발전만 놓고 보면 틀린 말이지만 정치와 문화로 넘어가면 어느 정도 수긍하게 된다. 사실 이 책을 선택할 때 나의 관심은 과연 어디까지 중국의 정치문제를 다룰까? 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문화대혁명과 천안문사태를 정면에서 다룰까 하는 것이었다. 문화대혁명을 경험한 작가들의 소설을 읽고, 그 시대를 다룬 영화를 보았지만 정치적으로 엄청난 실패였던 이 정책의 아주 참담한 결과는 정면에서 다룬 것은 거의 본 적이 없다. 물론 외국 저자들의 글에서는 아주 신랄하고 정확하게 표현된다. 수천 만 명의 아사자들을 내가 알게 된 것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물론 스탈린 체제 아래의 소련도 이와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독일이 통일되고, 소련연방이 해체되던 그 시절 중국은 천안문사태를 맞이했다. 그 대처는 아주 강력했다. 천안문 광장에서 한 청년이 전차 앞에 서 있는 사진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이후 수많은 지식인들이 중국을 떠나 외국으로 망명했다. 이 망명자들은 외국에서 그 나라의 언어로 소설이나 다른 저작물을 만들어내면서 중국과 자신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그렇지만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천안문사태는 중국의 금지어 중 하나다. 사실 내가 기대한 것은 바로 이 두 부분 중 어느 하나라도 정면에서 다루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원래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고 넘어간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1장부터 7장까지는 중국의 역사를 다룬다. 이 부분은 나에게 아주 흥미로웠다. 피상적이고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중국 역사를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청 제국이 무너지는 과정과 그 과정 속에서 그 당시 지식인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일본과 비교하는 몇 가지 대목은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많은 유학생을 일본으로 보내고,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대목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그들의 갈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유럽 등지로 유학을 떠났고, 이들이 혁명 세력으로 발전했다. 중국 근·현대 역사를 중국인의 시선으로 해부하고 해석한 이 내용은 서양 학자나 동양의 다른 나라 역사학자들의 시선과 많은 부분이 차이가 난다. 물론 저자 자신도 외국 저자들이 기록한 것을 많이 인용한다. 이 인용은 그 자신에게도 역사를 다른 시각에서 보게 만들었을 것이다.

 

메이지유신은 잘 알고 있지만 동치중흥은 잘 모른다. 역사 시간에 졸았기 때문일까? 신해혁명은 알지만. 이 둘을 같이 놓고 한 장을 할애한 것은 비슷한 시도였지만 다른 결과로 이어졌다는 사실과 그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다. 이후 3개의 장에서는 다섯 명의 역사적 인물들을 통해 그 시대를 말한다. 쑨원과 장제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이 그 주인공이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을 흔히 같이 놓고 비교하는 경우는 보았지만 이렇게 나열한 경우는 조금 어색하다. 쑨원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부분 중 하나가 건국의 아버지란 것인데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그의 조직 능력은 그렇게 뛰어난 것 같지 않다.

 

장제스의 이야기 부분에서 송가황조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처가 부분이 많이 생략된 것 같다. 전술가인 그와 전략가인 마오쩌둥으로 둘을 비교한 부분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6~70년대 마오주의가 세계를 휩쓸 때 나온 많은 저작들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이 태반이지만 대장정의 기록은 아주 흥미롭다. 이 부분을 생략한 것은 아마 중국에서는 너무 잘 알려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우은라이에 대한 평가는 최근에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 봤는데 한결같이 호평 일색이다. 덩샤오핑의 그 유명한 흑묘백묘 이야기는 언급조차 없지만 그가 권력을 획득한 후 펼친 정책은 아주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다. 마오쩌둥을 그대로 둔 것부터 그렇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은 엄청난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는 묻는다. 민주라는 것은 과연 좋은 것인지? 이 보다 나의 시선을 끈 것은 기업가 정신이다. 성공했지만 거짓과 부패로 이름을 알린 기업가들을 말하면서 아쉬워한다. 이것을 보면서 바로 마윈이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록펠러에 대한 그의 과한 칭찬과 기업에 대한 우대는 이 책의 정체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에 북경대학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그가 그 대학 출신이기에 가능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다른 대학 출신도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지만 몇 곳은 눈에 거슬린다. 20세기 초 일본이 아시아의 동반자로 중국을 도와주려고 했었다는 대목은 아주 놀라웠다. 나의 오독이 아닌지 의문을 품는다. 다시 정밀하게 읽고 평가해야 할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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