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기억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9
윤이형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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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개인적인 것이 아닐까? 모든 사람이 똑같이 기억하는 기억이 존재할까? 흔히 말하는 사진 같은 기억력이란 보통 사람에게는 사진에 의존하는 기억일 수도 있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다. 물론 엄청난 기억력을 가진 사람은 실재 존재한다. 아니 존재했다. 이 소설은 바로 이 기억을 소재로 한 사람의 삶을 간결하지만 깊이 있게 다룬다. 그리고 보르헤스의 소설집 <픽션들> 중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필사하고, 그와 비슷하지만 다른 능력을 지닌 화자 나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낸다.

 

안타깝게도 나는 보르헤스의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읽지 않았다. 이 책에 나오는 몇 개의 문장만으로 이 작품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재로 등장한 푸네스가 보여준 사진 같은 기억력은 화자에게는 한정적으로 작용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혹은 인식하고 있는 것만 뚜렷하고 명확하게 기억할 뿐이다. 기억이란 것은 망각을 동반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삶이 늘 즐거울 수만 없기 때문이다. 나쁜 기억과 아픈 기억은 망각의 늪 속으로 빠져야만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이 기억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있는가. 화자인 지율에게도 이런 기억들은 어느 순간 촉발되어 끝없이 흘러나온다. 자신이 조절할 수도 없다. 그에게는 무엇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즐겁고 행복한 것이 아닌 고통스러운 일일 뿐이다.

 

아이가 자신의 지나온 삶의 흔적들을 기억한다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자신의 감정도 절제할 수 없는데. 부모가 이 아이를 보고 병원에 데리고 간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그들은 가난했다. 아이가 가진 과잉기억증후군을 진단하기 위해 뉴욕에 가는 것조차 버거워한다. 아니 한국 병원에 다니는 것도 힘겨워한다. 의사의 진단에 따라 이런 저런 방법을 써보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다. 아이는 자신이 가진 기억력으로 좋은 대학 의예과에 입학하지만 문제가 생긴다. 책을 읽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을 시작하면서 필사하게 되는 것도 읽은 것이 아닌 여자 친구가 읽어 준 책을 기억해서 쓴 것이다. 출판연도와 출판사와 표지와 몇 쇄인지까지 다 기억한다.

 

중반까지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흘러나왔다면 그 이후는 그가 집은 나와 일하던 게스트하우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정확히는 그에게 보르헤스의 단편을 읽어주었던 그녀, 은유에 대한 기억이다. 그녀와의 만남, 사랑과 어느 날 갑자기 헤어지기까지의 이야기가 자신의 기억력과 더불어 나온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여자의 만남은 열정적이지도 강렬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은근하고 인상적이다. 게스트하우스 직원과 손님의 관계를 유지하지만 누구나 그들의 사이를 알고 있다. 아니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당사자들만 신경 쓸 뿐이다. 재미있는 커플이다.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 이런 증상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약 오브가 나온다. 완성품이라고 해도 약효가 완전히 증명된 것은 아니다. 지율은 너무나도 폭발적이고 정확한 기억을 깨트려 평범한 사람처럼 살고 싶다. 약을 먹는다. 약효가 힘을 발휘한다. 문제가 있거나 고통스럽고 아픈 기억을 특별히 봉인해야 하는 일이 사라진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희미해진다. 그가 필사한 소설을 실제 원문과 비교하니 다른 부분이 드러난다. 그가 필사하면서 힘겨워했던, 고민했던 것들의 결과가 이렇게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은유에게 편지를 쓴다. 답장이 온다. 이야기는 그 편지를 읽는 것에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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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 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3
미우라 시온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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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고 유쾌하다. 73살 노인들이 보여주는 행동과 말들이 읽으면서 잔잔히 웃게 만든다. 노인 콤비로는 최강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멋진 호흡을 보여준다. 티격태격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바탕에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우정이 쌓여 있다. 이들이 보여준 우정의 연원을 보았을 때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평범한 구성이지만 이들의 과거가 사이사이에 흘러나와 진한 감동을 준다. 작가의 간결한 문장은 가독성을 높이고,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많지 않지만 재미난 이야기들은 몰입도를 높여준다. 작가의 말처럼 재미있게 읽었다.

 

마사의 본명은 구니마사다. 겐의 본명은 겐지로다. 이 둘의 이름을 줄여서 마사&겐이다. 이들은 칠십 년 동안 친구였다. 도쿄 스미다 구에 위치한 가상의 마을 Y를 배경으로 은행원이었다가 정년퇴직한 마사와 전통비녀 직인인 겐은 각각의 이유로 혼자 살고 있다. 마사의 아내는 그의 나이 칠십에 나가 큰딸의 집에서 살고, 겐의 아내는 죽었다. 마사는 딸 둘이 있지만 겐은 없다. 결혼은 겐이 먼저 했는데 그 과정이 평범하지 않다. 마사의 경우는 선을 보고 바로 결혼했다. 마사가 본 것은 아내 기요코가 줄 안정감이었다. 겐이 선택한 것이 사랑이었던 것에 비하면 밋밋하지만 그 시절 흔히 볼 수 있던 모습이다. 이것은 이 둘의 성격과 관계있다.

 

마사가 은행원으로 돈을 벌면서 가정에 소홀했다면 겐은 아내가 죽기 전까지 충실했다. 둘이 홀로 사는 현재 마사는 요통으로 고생하면서 외로움을 느낀다면 겐은 자신의 일을 하면서 제자까지 두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 건실한 은행원의 노후 생활을 그리면서 마사를 본다면 대충 맞을 것이고, 늙은 바람둥이를 예상하면 겐에게 더 어울린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겐일 것 같지만 실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인물은 마사다. 그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그가 마주한 몇 가지 상황들이 할배 콤비의 활약으로 해결된다. 그 상황들 대부분은 마사와 겐의 제자 뎃페 때문에 일어난다.

 

이 둘의 관계를 가장 함축적이면서 분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2차 대전 당시 공습으로 도쿄가 불타고 겐의 어머니와 동생이 죽은 후에 마사가 나타났을 때다. 그의 안위를 먼저 걱정해줬고, 달려와 손을 맞잡았고, 얼굴 가득 빛나는 웃음이 번졌던 그 장면이다. 그 웃음을 마사는 평생 잊지 못한다. 그래서 겐이 아내 하나에와의 결혼을 도와달라고 했을 때 무리한 연극을 하기까지 했다. 이후 이들의 결혼 생활은 잔싸움이 많았다. 반면 마사의 결혼은 조용했다. 산업발전기에 일에 지친 아버지가 흔히 보여주었던 그 모습을 그대로 했었다. 아내와 딸들의 마음이나 행동에는 관심을 제대로 기울이지 않고. 어떻게 보면 행복하지 않은 노후 같지만 이 둘은 아주 행복해 보인다. 아니 점점 행복해진다. 마사는 그 사실을 알고 자신을 조금씩 바꾸고, 겐은 멋진 제자와 친구 때문에 삶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70이 넘은 노인이다 보니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대화 중 나온 겐지로가 한 사후에 대한 표현은 최근에 본 가장 멋진 문장이다. “죽은 사람이 가는 곳은 사후 세계 같은 데가 아니라 가까운 사람의 기억 속이 아닐까.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제들도 사부도 집사람도, 다들 내 안에 들어왔어.” 이 보다 더 멋진 죽은 자를 기리는 말이 있을까. 진한 여운을 남기고 나의 기속으로 들어온 많은 사람들을 잠시 떠올려본다. 소설은 이 기억의 일부를 풀어놓고, 현실의 문제와 부딪히게 하고, 지금 이 순간 가장 열렬하게 사랑하는 커플인 뎃페와 마미를 보여주면서 삶의 한 장면을 따뜻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한때 미친 듯이 붙어 다녔던 친구와 결혼 등으로 멀어져 가끔 연락만 하는 사이가 된 현재를 보면서 나의 노후도 이들처럼 멋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부러움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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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와 쿠스쿠스 - 요리하는 철학자 팀 알퍼의 유럽 음식 여행
팀 알퍼 지음, 조은정 옮김 / 옐로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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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하는 철학자란 표현이 참으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요즘처럼 쿡방이 대세인 시대에 철학자가 요리까지 한다면 얼마나 많은 방송국에서 환영을 받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 나도 쿡방에는 저절로 눈길이 가는 것을 감안하면 한 편의 인문학적 쿡방이 나올 것도 같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지 않는다. 유럽 음식 여행이라는 부제에 더 방점이 찍혀 있다. 저자는 유럽을 네 개의 권역으로 나눠 각 지역의 특색 있는 음식들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 나라들이 있다.

 

저자는 친가는 영국인이고, 외가는 프랑스인인 유대계다. 이 두 나라는 유럽에서 가장 맛없는 음식과 가장 맛있는 음식을 대표하는 나라들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랐다는 것은 음식을 맛보는데 최상의 조건이 된다. 왜냐고? 맛없는 영국 음식을 먹으면서 가장 맛있는 프랑스 음식의 맛과 비교하고 제대로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영국 태생이라는 것을 나타내듯이 무려 세 가지의 음식을 이 책 속에 소개하고 있다. 당근 케이크를 제외하면 낯설기만 하다. 여기에 에프트눈 티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면서 우리의 허영을 살짝 비판한다. 당연히 피시 앤 칩스도 간단하게 나온다. 만약 저자가 영국인이 아니라면 이렇게 많은 음식이 나왔을까 하는 의문은 누구나 가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먹은 음식이니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만.

 

저자가 나눈 유럽은 북부, 남부, 중부, 동부 등이다. 북부 유럽은 영국과 스웨덴 달랑 두 나라다. 스웨덴이 음식은 바이킹 식사라는 루트피스크 뿐이다. 이렇게 하나의 음식만 소개하는 나라가 몇 곳 더 있다. 그리스, 스위스, 불가리아 등이다. 이 중에서 그리스와 불가리아는 약간 의외다. 남부 유럽에 위치해 있고, 다양한 야채와 과일과 풍부한 해산물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호리아티키 샐러드 하나만 소개할 정도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방송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미카엘이 보여준 불가리아 요리를 보면 이 또한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생선 튀김인 플젠 트사트사만 소개되다니 말이다. 비록 이것이 자신의 경험에 의한 개인적 견해라고 해도 쉽게 납득하기는 어렵다. 뭐 이 나라들을 제대로 여행하면서 음식을 먹어보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 책에서 가장 화려하고 멋진 요리에 대한 설명은 역시 프랑스 편이다. 홀랜다이즈 소스를 설명하면서 황홀한 계급투쟁의 맛이라고 했을 때 방송에서 본 그것이 그렇게나 대단한 것이었나 하고 놀랐다. 빵 종류와 파티셰리를 구분하면서 장황하게 이야기할 때 몇 년 전 가본 파리의 빵집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의 기억 어딘가에서 잘못된 것이 남아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빵과 파티셰리가 같은 빵집에 있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당연히 호사스러운 테린 같은 음식은 먹지 못했고, 그 좋다는 와인도 술에 약해 몇 잔 마시지 못했다. 하지만 저렴한 와인과 치즈 등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했고 좋았다. 빵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이런 기억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재조정되었고, 다시 가보고 싶다는 열망에 들뜨게 만들었다.

 

프랑스 요리의 그 기원을 제공했다고 하는 이탈리아 음식에 대해서는 너무 빤한 설명이라 강한 인상에 남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 너무 많이 자주 들었고 봤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흔한 음식점이 되었지만 가슴 한 곳은 언제나 그곳에 가서 본토의 음식을 맛보고 싶다는 욕망이 늘 꿈틀거리고 있다. 반면에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스페인 음식들은 시선을 끈다. 특히 빠 암 토마캇은 더욱 그렇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그 모습이 나오지 않는데 어떤 모양이고 맛인지 궁금하다. 이렇게 남부 유럽 음식을 읽다 보면 역시 중요한 것은 음식의 풍부한 재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제대로 없는 지역에서 만들 수 있는 음식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벨기에의 그 유명한 초콜릿이나 맥주가 잠시 시선을 끌고, 독일의 맥주와 절임인 사우어크라우트는 언젠가 한 번 맛봐야지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구 소련 연방을 통틀어 러시아로 묶은 음식에서 한국식 당근 김치인 마르코브카 파-레이스키는 MB정권의 한식 세계화를 비웃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들 나라와 영국의 음식 중 어디가 더 못할까 하는 의문이 살짝 들지만 이것은 개인의 취향이니 그냥 넘어가자. 내가 영화나 소설 등에서 입맛을 다셨던 음식들이 약간 비하되는 것 같은 느낌이 살짝 있지만 많은 유럽의 맛있는 다양한 음식을 맛본 후 개인의 평에 의한 것임을 감안하면 약간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먼 훗날 이 나라들을 여행한 후 다시 이 책을 펼 기회가 있다면 또 다른 의견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요리한 바나나와 외할머니가 만들어주신 쿠스쿠스에 대한 추억들은 나의 과거 속 음식을 잠시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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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 소설 전집 5 : 모험 편 - 아서 고든 핌 이야기 외, 최신 원전 완역본 에드거 앨런 포 소설 전집 5
에드거 앨런 포우 지음, 바른번역 옮김, 김성곤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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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의 장편이 단 한 편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한 편 더 있었다. 흔히 알고 있던 <아서 고든 핌 이야기>가 완결된 장편인 반면 <줄리어스 로드먼의 일기>는 미완인 채로 끝난 장편이다. 두 작품을 묶어 낸 책이 바로 모험 편이다. 개인적으로 모험 편에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소설은 <줄리어스 로드먼의 일기>다. 로키산맥을 처음으로 횡단했다는 가상의 인물 ‘줄리어스 로드먼’의 일기를 재구성했다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본격적인 모험으로 들어가는 시점에서 중단되었다. 아쉬웠다. 이전까지 단편들만 읽다가 장편을 읽다보니 약간 호흡이 달라졌다. 약간의 적응기를 거쳤지만 포는 그렇게 쉽게 읽히는 작가는 아니다. 편안하게 읽게 두지 않고 머릿속으로 그 상황을 끊임없이 재생하고 긴장하게 만든다. 제대로 빠지면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구성과 전개다.

 

<아서 고든 핌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아서 고든 핌이 배를 타고 항해하면서 경험한 것을 적은 소설이다. 모험이라고 하기보다는 고난기라고 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릴 정도로 그는 큰 고생을 한다. 첫 번째 항해가 실패할 때도, 그 이후 밀항한 두 번째 항해에서도, 마지막에 한 새로운 항해에서도 결코 그는 평화로운 항해를 하지 못한다. 모험에 힘든 일이 동반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앞의 두 이야기는 무기력하기만 한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특히 밀항한 두 번째 여행은 처음에 읽을 때 이것이 무슨 모험이냐! 라고 외칠 정도로 무기력하다. 친구 어거스터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배 아래에서 굶주려 죽었을 것이다.

 

아서 고든 핌이 바다에서 배로 여행하는 환상을 품게 된 데는 당연히 선장의 아들인 친구 어거스터스의 영향이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너무 매력적이어서 처음에는 둘이 출항해서 모험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끝나고 만다. 항해에 대한 지식도 배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그들이 살아난 것만도 다행일 정도다. 이 시도 후 두 번째 시도는 어거스터스 아버지의 배 그램퍼스호를 타고 가는 것이다. 방법은 밀항이다. 배 밑에 친구를 숨겨둔 후 큰 바다로 나가면 끄낼 생각이었는데 선상 반란이 일어난다. 이 반란으로 아서가 죽을 뻔 한 것이다. 갈증과 기아로 말이다. 이때만 해도 이런 고생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친구가 반란자 중 한 명을 설득해 배를 다시 장악했기 때문이다.

 

진짜 고생은 이제 시작한다. 망망대해에서 폭풍으로 배가 기울고 음식도 식수도 없는 상황에서 조난당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배에 물건을 선적하면서 생길 수 있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19세기에도 지적한 것을 21세기에는 왜 제대로 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과 아쉬움이 생긴다. 작년에 있었던 세월호 침몰의 이유 중 하나가 제대로 적재하지 않은 것임을 알려준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배가 기울었지만 완전히 가라앉지 않아 그들은 힘들지만 배 위에서 생활하게 된다. 금방 구조될 것처럼 보였는데 행운의 여신을 그들을 비켜나갔다. 잠수해서 배 속에 있는 식량과 술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아 지면서 갈증과 기아에 시달리게 된다. 이성은 점점 사라지고 광기가 자리 잡는다. 뽑기로 식량이 될 사람을 선택한다. 강한 생존의식이 인육을 먹는다는 거부감을 없앤 모양이다.

 

불행과 행운이 교차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결코 이 여행이 좋게 진행되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감을 더 높이는 장면도 나오지만 그의 선택에 의해 또 다른 시련과 고통이 찾아온다. 그러다 갑자기 끝이 난다. 어떻게 보면 황당한 마무리다. 그리고 다시 작가가 개입하면서 이 이야기를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만든다. 가끔 현대소설에서 보게 되는 설정이다. 그리고 읽으면서 궁금했던 것이 몇 있다. 이 두 장편에 나오는 모험의 과정을 작가는 어떤 식으로 조사를 하고 얼마나 많은 사실을 바탕으로 가상의 이야기를 집어 넣었을까 하는 것이다. 위치나 풍경 등의 자세한 설명과 묘사를 읽다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기 때문이다. 또 모험 편을 읽으면서 쥘 베른의 흔적을 발견했는데 나만의 착각일까? 누군가가 <줄리어스 로드먼의 일기>를 완성해주길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읽으면서 읽고 난 후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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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 소설 전집 4 : 풍자 편 - 사기술 외, 최신 원전 완역본 에드거 앨런 포 소설 전집 4
에드거 앨런 포우 지음, 바른번역 옮김, 김성곤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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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단편집은 재미있다. 나의 취향과 잘 맞는다. 이미 다른 작품집으로 그의 글에 익숙해진 탓도 있겠지만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다. 어떤 단편을 읽을 때는 이것과 과연 19세기에 쓰인 소설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지금 우리의 현실과 너무 비슷하게 다가온다. 이 단편집만 놓고 보면 왜 포가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는지 잘 이해된다. 내가 알던 미스터리와 공포 작가란 이미지가 퇴색할 정도다. 물론 어떤 작품은 잠시만 집중하지 않으면 그 흐름을 놓치고 재미를 못 느낀다. 약간의 억지 같은 것도 없지 않다.

 

첫 단편 <사기술>은 현대에도 통용될 듯한 수법이 꽤 있다. 어떤 것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사람의 욕심과 단순한 믿음이 허점을 만든다. 이것과 비슷한 작품이 <비즈니스맨>이다. <타르 박사와 페더 교수의 치료법>은 읽으면서 의심이 살짝 생겼는데 결말에서 그대로 맞았다. <안경>은 한 청년의 안경 혐오가 우연히 오해와 만나 만들어내는 최악의 상황을 풍자적으로 그려내었다. 그 결말을 읽고 너무나도 예상을 초월해 그럴 수도 있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오해를 통해 재미난 결말을 만들어내는 단편들이 이 책 속에는 여러 편 있다.

 

<일주일에 세 번 있는 일요일>은 포의 자전적인 부분이 들어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마지막에 이 제목에 대한 해답이 나왔을 때는 살짝 웃게 되었다. 이런 기발한 답이라니, 아니 이것을 그대로 인정하다니 하고. <소모된 남자>는 끝까지 이들이 말하는 바를 전혀 공감하지 못했는데 끝에 나온 장면으로 단숨에 이해되었다. <싱검 밥 명인의 문학 인생>, <블랙우드식 기사 작성법>, <곤경>, <X투성이 글>은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다. 글쓰기에 대한 포 식의 풍자가 잘 드러나는데 공감하게 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그리고 <X투성이 글>에서 X는 알파벳 X이고 다른 어떤 약자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모를 때는 오해하기 딱 좋다.

 

<멜론타 타우타>는 처음에 읽으면서 환상 편으로 가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다음에 나온 <미라와 나눈 대화>도 마찬가지다. 전작이 현재보다 더 먼 미래 이야기를 다루는데 과학 기술의 발전이 너무 더디다. 이 단편집들을 읽으면서 포의 과학적 상상력이 그 시대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후작은 고대인과의 대화가 너무 수준 낮아 어쩌면 이런 부분에서 풍자 편에 어울리기도 한다는 생각이 든다. <스핑크스>는 사람들의 착시 효과가 어떤 환상을 만들어내는지 보여주는데 그 이면에 깔린 공포를 한 번은 더 생각하게 된다.

 

<봉봉>, <기괴 천사>, <악마에게 머리를 걸지 마라>, <오믈렛 공작>는 악마나 천사 등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비현실적인 상황을 만들고 황당한 전개로 이어지면서 악마나 천사가 그 힘을 발휘하게 만든다. 물론 이들이 충동질하는 것도 있지만 그 바탕에는 인간들의 욕망과 허영심이 깔려 있다. <봉봉>에서 인간 영혼의 맛을 표현한 부분은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함축적인 풍자가 아닌가 생각한다. 어떤 작품에서는 하나의 장면이 약간 잔혹한 느낌도 있지만 전체 이야기를 읽다보면 이해가 된다. 환상 편에 어울리는 악마 등이지만 내용이 풍자 편에 더 맞는 것 같다.

 

여기에 말해지지 않은 몇 편은 나의 집중력이 깨진 상태에서 읽었거나 그 재미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 단편이다. 전체적으로 환상 편보다 더 집중했고, 더 재미있었고, 현실과 더 맞아떨어졌다. 풍자라는 것이 시대의 흐름과 상관없이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단편집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현실 문제를 잘 관찰하고 분석한 후 비틀었을 때 가능하다. 그래서 더 재미있다. 우리의 현실에 대입했을 때도 큰 무리가 없는 것도 바로 이런 통찰력이 곁들여졌기 때문이다. 포의 이력에 풍자가 더해져도 전혀 놀랍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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