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2년만 살고 싶었습니다
손명주 지음 / 큰나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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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인가 제주로 가는 사람이 많이 늘어났다. 광풍까지는 아니겠지만 열풍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명 연예인들도 제주에 터를 잡고 사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여기에 중국인 투기까지 곁들여지면서 오래 전 배낭 하나 매고 며칠 돌아다녔던 그곳이 아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제주도로 향한다. 이곳에 정착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여유로운 삶을 꿈꾸며 살고자 했던 사람들의 반 이상은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돌아간다고 한다. 여행지와 사는 곳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저자 부부가 2년이라는 한정된 시간을 약속한 것은 아주 현명한 결단이었다.

 

저자는 “이 책은 제주 게스트하우스 창업기도, 제주 정착기도 아니며 친절한 여행 안내서는 더더욱 아니다. 많은 사람들의 제주로망에 찬물을 끼얹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되지만, 환상제주를 설파하느라 위선과 가식을 떨고 싶지는 않다.”라고 말한다. 실제로도 내용이 말한 대로다. 여행에 대한 안내는 하나도 없고, 게스트하우스 창업에 대한 간단한 비용만 알려줄 뿐이다. 제주 정착을 위해 주민들과 어떤 살가운 관계를 가지게 되었는지도 전혀 말하지 않는다. 단지 세 파트로 나눠 2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자신이 느끼고 경험하고 생각한 것을 정리해서 적어놓았을 뿐이다. 어떤 부분은 너무 솔직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감상적이라 아주 낯설게 느껴진다.

 

작년에 참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제주도로 놀러갔다. 겨우 2박 3일. 제주 사는 후배에게 부탁해 일정을 짰는데 거의 제주 일주였다. 하지만 숙소를 달리하면서 숙소로 돌아가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첫날 먹고 싶었던 식당은 재료가 떨어져 먹을 수 없었고, 추성훈이 간 식당에서는 맛이 없어 욕만 하고 나왔다. 그리고 20여년 만에 간 성산일출봉은 그때의 감동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수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에 치여 올라가고 내려간 그곳은 이제 나의 제주 여행의 지도에서 지워야 할 곳이 되었다. 몇몇 유명한 관광지를 돌아보았지만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고생하면서 오른 윗세오름과 팬션 주인아주머니가 추천한 모슬포항의 작은 식당이다. 너무 급하게 돈 일정이라 여유를 전혀 누릴 수 없었다. 이런 나에게 2년만 살겠다는 저자의 희망사항은 부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생각하는 사직서. 몇 번 내보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조심하게 된다. 사직서를 낸 후 세계일주를 꿈꾸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나도 높다. 생계라는 무거운 짐은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매월 들어오는 월급의 위대함은 긴 세월 백수로 살아본 사람은 잘 안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내려간 저자의 제주도행. 일단 박수를 쳐주고 싶다. 그가 게스트하우스를 힘들게 열고, 자신이 예상한 삶과 다른 삶을 살게 되었지만 그와 그의 아내는 다시 현실에 적응하고 있다. 아주 힘들 때는 한달을 쉬면서 삶의 무거움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게스트하우스를 시작하는데 아마도 이 시점이 그들에게 아주 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두껍지도 않고, 글의 분량이 많지도 않다. 사진이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이것을 채우는 것은 초보 게스트하우스 운영자의 솔직함이 묻어나는 글들이다. 그가 바란 책 읽고, 글 쓰고, 음악을 들으면서 사는 삶은 이미 사라졌지만 2년 동안 제주에 살면서 느낀 바가 깊은 생각을 통해 흘러나온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의 말처럼 그는 게스트하우스를 즐겁게 운영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그러나 생활은 돈을 요구한다. 돈은 친절과 비굴을 요구한다. 이런 글을 볼 때면 왠지 화가 난다. 안타깝다. 현실은 그들의 얼굴에 가면을 씌운다. 이것이 한 달의 휴가 속에서 완전히 풀렸을까 하는 의문이 있지만 2년이 지난 후에도 그들은 제주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도시 사람과 다른 방식의 삶에 적응했다. 보는 곳도, 느끼는 바도, 걷는 속도도 다르다. 나도 2년 동안 제주에 살면 이렇게 변할까? 아내에게 말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읽는 동안 괜히 이런저런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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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리라
조정현 지음 / 답(도서출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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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아득해서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현재에 만족하기에 그 첫사랑이 희미해졌다. 잠깐 그 아득한 첫사랑을 떠올려보면 부끄러웠던 많은 일들이 먼저 생각난다. 어리숙하고 미숙하고 감상적이고 책임지지 못할 말들을 쏟아내었던 시기다. 하지만 그 당시는 그 말들에 모두 진심이 담겨 있었다. 단지 그것을 꾸준히 지속적으로 유지할 능력도 마음도 없었다는 것이 문제다. 이런 경험이 나에게 첫사랑을 다룬 소설을 읽을 때면 다양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그 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순수함과 결국 깨어질 것이라는 현실이 싸움을 한다.

 

불안하고 외로운 아이들 이야기란 소개글이 있다. 친구 딸과 이름이 같은 주다인은 실업고 3학년 여자고, 그녀의 남자 친구는 학교를 쉰 후 같은 학교에 다니는 유은기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이야기가 점점 진행되면서 이 둘의 비밀이 중심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그 첫 시작은 다인의 오디션이다. 그녀는 외형적으로 전혀 오디션을 볼 생각이 없는 아이처럼 행동한다. 그 이유는 그녀의 아빠가 연극을 위해 가족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갔기 때문이다. 당연히 엄마는 이런 활동을 금지한다. 아니 히스테리 같은 반응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다인이 오디션에 합격한다고 해도 실제 활동하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그녀에게 메일이 와서 계속해서 연극이나 뮤지컬에 도전하게 만든다.

 

은기. 그가 등장하는 것은 다인이 오디션을 엉망으로 본 후 극단을 나올 때다. 그녀에게 왜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느냐고 말한다. 이때만 해도 콩깍지가 씐 남자의 일반적인 반응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다인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녀가 매일 새벽 5시에 학교에 와서 달리고 춤추고 노래 연습을 한다는 것을. 다인은 은기가 신입생을 위한 공연에서 보여준 매력에 푹 빠져있다. 그라면 오디션에 쉽게 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우연을 가장한 필연에 의해 둘은 관계를 맺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둘은 점점 가까워지고, 수줍은 연인으로 발전한다.

 

은기에게는 여동생이 있다. 은서다. 그녀는 홀로 산다. 사진에 탁월한 실력이 있는데 전학생 레이가 등장하면서 같이 나오기 시작한다. 학업 성적도 미모도 뛰어난 아이가 레이다. 그녀와 다인과 은서는 이제 삼총사로 뭉쳐 다닌다. 처음에는 레이가 디자인한 것을 실물로 만들기 위해 두 친구를 이용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이들의 관계를 보면서 이 생각은 사라졌다. 하지만 이 세 명의 여자 친구 사이는 큰 비밀을 품고 있다. 아직 다인과 은기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이들이 은기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인에게도 빛나는 시절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무대에서 멋진 공연을 펼쳐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부모의 이혼 이후 이 빛은 점점 사라졌다. 아빠가 보내주는 공연 티켓으로 관람하고, 매일 새벽 연습을 하지만 실제 그녀의 미래에는 배우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메일로 오는 오디션에 대한 정보와 남자 친구 은기의 격려와 의지가 힘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아무런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엄마와 함께 바느질을 하는 인생이 펼쳐졌을 것이다. 이 미래의 방향을 바뀌게 하는 존재가 이 소설 속 그녀의 첫사랑 은기다.

 

이 둘의 사랑이 조금씩 자라 폭발하기 전까지 가장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은기다. 어느 순간에는 그가 현실에 존재하는 인물이 아닌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다인이 다른 누군가와 만날 때는 그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혼란스러웠다. 그의 숨겨진 재능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른 이름으로 알려줘 있기 때문이다. 이 비밀을 풀어내는 과정은 결코 아름답지 않지만 계속 관심을 가지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중간에 하나의 힌트를 던져주지만 이것을 제대로 알기는 쉽지 않다. 어떻게 생각하면 반전이라고 해야 할까.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사랑은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게 불탄다고 해도 금방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첫사랑의 추억만 남길 뿐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이 사랑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불안과 외로움을 날려버리고 원하는 바를 향해 나아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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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남미 - 그 남자 그 여자의 진짜 여행기
한가옥.신종협 지음 / 지콜론북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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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조금 야릇하다. 제목만 본다면 야한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올 것 같다. 그런데 인터넷 서점에 검색을 하면 19금 표시가 없다. 젠장! 잠시 뭔가를 기대한 나의 잘못이다. 책을 모두 읽은 지금도 제목에 홀린 느낌이다.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이 책을 들고 읽을 때 남들이 오해하지 않길 바랐던 일이 갑자기 생각난다. 표지에도 제목을 붉은 색으로 적어 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착각하고,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이 두 남녀 저자의 글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19금과 확연히 다른데도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매력을 지닌 제목과 색깔이다.

 

남녀 두 명의 저자가 남미를 각자 여행한 후 그 경험을 솔직하게 적은 책이다. 남자 작가 신종협은 우리가 흔히 보게 되는 장기 배낭여행자로 남미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여성 작가 한가옥은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3년 동안 호스텔을 운영했다. 이 둘이 남미를 여행하고 경험한 것은 정말 다르다. 한곳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그 나라 사람들을 다양하게 제대로 경험한 한가옥에 비해 신종협은 한곳에 오랫동안 머물렀다고 해도 떠날 것을 늘 생각하는 배낭여행자다. 그래서 이 둘은 글은 다른 방식으로 적혀 있다. 어떻게 보면 한가옥의 이야기는 호스텔 경영 후기이자 실패담에 더 가깝다. 현지 생활인의 경험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이야기의 첫 번째 문은 신종협이 연다. 그가 이 책에서 다룬 나라는 모두 여섯 나라다. 쿠바,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등이다. 그가 들려주는 이곳의 여행담은 이전까지 내가 들었던 남미 여행의 그것을 모두 능가한다. 여기서 말하는 그것은 사기, 절도, 강도, 살인, 마약, 매춘, 가난, 동물보호 등이다. 치안이 잘 되어 있고, 크게 도둑들을 걱정하지 않는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남미다. 우리가 흔히 카페에서 핸드폰이나 노트북 등을 올려놓고 화장실을 가는데 만약 남미라면 모두 사라졌을 것이다. 물론 이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 어떤 여행 팟캐스트나 책에서도 마약, 매춘 등과 같은 일은 잘 다루지 않는다. 이런 내용들이 19금이라는 제목을 불러온 것일까?

 

한가옥은 친구 존의 요청으로 보고타에서 호스텔을 운영하기 위해 스물일곱의 나이로 4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왔다. 모든 장기 여행자의 꿈이라는 호스텔 운영 말이다. 거의 이야기 후반까지 그녀가 만난 여행자와 콜롬비아 직원들과의 관계는 아주 좋았다. 호스텔도 큰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비교적 잘 운영되었다. 한 번의 이사, 확장된 호스텔 등은 장밋빛 꿈을 꾸게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한순간에 무너진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몰랐거나 편법으로 처리한 일들이 부메랑이 되어서 큰돈을 지출하게 만든 것이다.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탓이고, 너무 믿은 탓이다. 이런 일 사이사이에 호스텔에서 생긴 에피소드와 그녀가 보고타에 살면서 경험했던 여러 가지 일들은 들려준다. 재미있고, 문화 차이 때문에 놀랄 일들로 가득하다.

 

배낭여행자 신종협의 글은 행복함보다 현실의 어두운 면이 더 부각되어 있다. 그가 보고타를 공포에 깃든 도시라고 한 것도 이와 연관성이 있다. 길에서 칼을 든 강도를 만났거나 총소리가 들리고 감히 혼자서 밤거리를 돌아다니지 못하는 현실을 알려줄 때 그 나라의 역사 속에서 이유를 찾았다고 해도 이성과 감성은 따로 놀게 된다. 퓨마를 돌봐주는 자원봉사 현장에서 있었던 사고들은 보통의 배짱으로는 버티기 힘든 일이다. 몇 일만에 그곳을 떠난 사람이 있을 정도다. 이런 이야기는 읽으면서 남미 여행의 낭만과 모험에 대한 기대를 산산조각낸다. 현실을 보게 만든다.

 

재미난 것은 콜롬비아 보고타를 둘러싼 두 사람의 평가다. 신종협이 공포에 깃든 도시라고 했다면 한가옥은 아름다운 도시라고 말했다. 이 차이는 머문 지역과 하는 일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한 가지 공통점이라면 늦은 밤에 홀로 택시를 타거나 걸어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강조하는 부분이다. 속된 말로 객기를 부리는 것이 얼마나 멍청하고 위험한 일인지 알려주는 에피소드도 하나씩 있다. 이런 글을 읽을 때면 남미 여행에 대한 환상과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을 계속 읽는 것은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이 계속해서 보여주는 애정 때문이다. 행복했다는 표현 때문이다. 어쩌면 아직도 마음 한 곳에 남아 있는 도전과 모험 정신 때문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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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과 십자가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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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리버스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나 자신이 존 리버스 시리즈를 잘 아는 것 같지만 실제는 처음 읽는다. 단편 모음집 <페이스 오프>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지만 강한 인상을 남겨주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 이언 랜킨은 낯선 이름이다. 이 작품이 나오기 전에는 한 권도 출간된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력을 읽다 보니 집에 있는 책 제목과 비슷한 제목이 나온다. <부활하는 자들>이다. 혹시나 해서 책장을 보니 <부활하는 남자들>이 있다. 작가가 이언 랜킨이다. 사 놓은 지 한 십 년은 된 것 같다. 책을 펼치니 존 레버스란 이름이 보인다. 같은 시리즈다. 2004년 에드거 앨런 포 수상작이다. 괜히 반갑다.

 

한 남자가 소녀를 살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때만 해도 이것이 연쇄살인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존은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동생 마이클의 집을 찾아간다. 형의 방문에 이상한 반응을 한다. 동생 마이클은 최면술사다. 이때만 해도 이 설정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존은 에든버러로 돌아온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소녀들의 실종과 죽음으로 인한 경찰 협력 수사다. 높은 지위에 있지 않은 존 리버스는 궂은 일을 맡는다. 충분한 단서가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해야 만 하는 일이다. 불평을 토로하지만 자신의 일을 굳건히 한다.

 

존은 형사가 되기 전 영국 특수부대 SAS에서 훈련을 받았다. SAS에서 있었던 일을 그는 단 한 마디로 하지 않는다. 분명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 존은 계속해서 입을 다물고 있다. 이 비밀은 책 후반부에 가면 자세하게 나온다. 존은 형사지만 탁월한 추리력을 갖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그에게 온 첫 번째 단서를 너무 쉽게 무시하고 놓친다. 그에게 전달된 편지에는 매듭과 함께 하나의 메모가 쓰여 있다. ‘단서는 사방에 널려 있다.’ 나중에 모든 것이 드러났을 때 이 문장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지금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존은 이것은 단순히 장난으로 생각한다.

 

소녀들이 죽을 때마다 그에게 편지가 온다. 메모와 매듭도 같이. 하지만 이것을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의미하는 바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 단서를 발견하고 깊이 조사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와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되는 질이다. 그녀의 통찰력이 순간적으로 빛을 발한다. 이 작품을 보면서 처음에는 존 리버스의 매력을 그렇게 쉽게 발견하지 못했다. 액션도 거의 없고, 뛰어난 직관력이나 관찰력이나 통찰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조하면서 간결한 문장 속에서 과거의 상처를 껴안고 술과 담배와 늘 함께 하는 그를 보면 묘하게 빠져든다.

 

이어지는 소녀의 실종과 교살은 경찰들이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수사본부가 만들어졌지만 그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한다. 서양 미스터리물을 읽을 때 자주 보는 것 중 하나가 수사 시간이 지난 후 쉬는 형사들의 모습이다. 특히 일본 형사물이나 한국 형사 영화 등을 보면 그들은 늘 수사본부에서 생활한다. 팽팽하게 끈이 당겨진 모습인데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효율을 따지면 분명 서양의 모습이 더 맞는데 말이다. 그리고 아직 컴퓨터가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전이라 모든 조사나 분류는 손으로 해야 한다. 이 시리즈를 순서대로 읽게 되면 이 시간의 변화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수사본부에서 일하는 리버스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면 마이클의 마약 거래를 발견한 후 그를 뒤쫓는 기자 짐 스티븐스의 시선이 또 다른 한 갈래를 이룬다. 그는 마약에 관심이 많은 기자인데 마이클의 형이 형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존의 뒤를 캐려고 한다. 분명히 헛다리를 짚었는데 이것이 과연 후반부에 어떤 역할을 할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실제 이것보다 더 자극적인 것이 소녀들의 실종과 죽음인데 그는 그 집착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이 연쇄살인이 에든버러를 공포에 떨게 하지만 신문사 등은 최고의 시즌을 맞이한다. 이런 노골적인 설명이 있다는 부분에서 살짝 놀란다.

 

이 작품의 최고 매력은 역시 존 리버스다. 그와 함께 활약하는 형사들이다. 이들의 모습은 굉장히 입체적으로 살아 있다. 술과 담배와 성욕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억눌린 심리 상태가 잘 표현된다. 연속적으로 그 앞으로 전달된 편지와 매듭을 그가 계속 무시한 것도 무의식적인 방어 작용이다. 이 때문에 범인은 연쇄살인의 목적을 쉽게 달성한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연쇄살인이 아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 순간으로 달려가는 그때도 존은 다른 경찰소설의 초인적인 주인공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더 좋다. 짧은 호흡의 간결하고 건조한 문장과 멋진 캐릭터가 잘 짜인 구성과 만났다. 이 시리즈 당분간 계속 관심을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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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의 연인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예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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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하면서 잔잔한 소설이다. 무리하게 갈등을 조장하거나 긴장감을 억지로 불어넣지 않으면서 쉴 새 없이 읽게 만든다. 그냥 보면 밋밋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관계와 심리묘사는 없는 듯하지만 강하게 연결되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든다. 처음에 약간의 적응기를 지나면 에둘러 각자의 마음을 되짚어 보고 그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을 한 편의 수채화처럼 들여다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치열함과 정확함 너머의 느긋함으로 가득한 타이베이의 삶이 있다. 분명 어느 부분에서는 조급함이나 분노나 안타까움을 느껴야 하는데 그 흐름에 휩쓸려 느긋하게 바라본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여 각자의 삶을 보여준다. 정밀하게 계산하여 분량을 조절하지 않고 이야기의 흐름 속에 등장하여 자연스럽게 그들의 현재와 과거를 보여준다. 굳이 중심이 되는 인물을 꼽자면 다다 하루카가 되겠지만 안자이나 웨이즈나 료렌하오나 이케가미 등도 결코 그 비중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실제 이들은 모두 하나로 엮여 있다. 직접적으로 만나는 횟수는 많지 않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곳에서 인연을 맺고 있다. 이 인연을 세밀하게 풀어서 느슨하게 보여주지만 그 핵심 인물들이 강하게 중심을 잡으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섬세한 심리 묘사는 곳곳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긴 시간과 타이베이와 일본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신칸센 고속철도를 타이베이와 카오슝 사이에 개설하려는 입찰에서 시작하여 개통 다음 해의 춘절 운전까지 7년 동안의 긴 세월을 다룬다. 이 긴 세월 속에서 철부지 청년은 결혼을 하고, 일본적인 마인드로 일하던 상사맨은 타이완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신칸센 수주 소식을 듣고 병원에 입원한 아내에게 농담처럼 완공되면 가자고 한 노인은 이제 홀로 산다. 타이완에서 하룻동안 함께 한 일본 여자와 타이완 남자의 운명 같은 사랑은 시간 속에서 현실적으로 바뀐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다시 만났을 때도 로맨스 영화의 열정적인 사랑은 없고, 그 세월 동안 묵혀둔 감정의 열정적인 담담함으로 이어진다. 어떻게 보면 답답하지만 그들은 느리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은은함과 여운이 오히려 강하게 남는다.

 

하루카와 료렌하오의 만남은 아주 작은 일이다. 하지만 이 작은 만남이 여러 가지 일들의 출발점처럼 여겨진다. 실제 이 소설에서 가장 비중 있는 인물이 다다 하루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만남이 엇갈리게 되는 것은 료렌하오의 연락처를 적은 종이를 하루카가 잊어버리면서부터다. 그녀의 소식을 기다리던 에릭, 그 남자에게 연락하고픈 하루카. 이들은 그리워하지만 결코 만나지 못한다. 그러던 중 고베와 타이베이에서 대지진이 발생한다. 그들의 감정은 아직 열정적이다. 에릭은 하루카가 걱정되어 고베까지 온다. 이 일이 바탕이 되어 일본으로 유학 와서 일본 대기업에서 근무까지 한다. 하루카는 상사의 타이베이 근무를 흔쾌히 수락한다. 운명적인 엇갈림이다.

 

타이완 청년 웨이즈의 삶은 느슨하다. 치열함도 열정도 밖으로 표출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철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가 메이친 주변을 겉돌면서 조금씩 스며드는 모습은 아주 인상적이다. 아직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지 못한 청년이기에 낙천적이기에 웃으면서 그를 볼 수 있다. 이에 대비되는 안자이는 일에 치여 산다. 계획을 둘러싼 두 나라의 인식 차이를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없다. 너무 팽팽하게 당겨진 그의 모습을 보고 하루카가 언제 끊어질지 모르겠다고 걱정할 정도다. 시간과 환경과 사랑은 그를 변하게 만든다. 이 소설에서 가장 긴장된 모습을 보여주는 순간도 바로 안자이가 등장할 때다.

 

토목전문가 이케가미는 아내가 죽은 후 홀로 산다. 그가 태어난 곳은 타이완이다. 전후 일본으로 넘어 왔는데 절친했던 타이완 친구에게 큰 실수를 저지른다. 이것이 그를 평생 동안 괴롭힌다. 동창을 만나거나 타이완으로 가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막고 있다. 그의 평온한 일상을 보면 무력해 보인다. 그냥 살아갈 뿐이다. 그러다 동문회지를 보고, 료렌하오를 만나고, 타이완을 방문하면서 바뀐다. 뒤에 그가 실수했던 친구를 만나 사죄하고 참회의 눈물을 흘릴 때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이것을 배가시킨 것은 친구인 나카노다. 그가 그 당시 내뱉은 2등 국민이란 표현은 그 시절을 함축적으로 잘 보여준다.

 

일본 작가의 타이완을 보는 시선을 따뜻하고 친밀하다. 수많은 지역의 묘사는 생생하고, 음식은 아주 맛있어 보인다. 타이베이 여행에서 느낀 것이지만 타이베이 시내 풍경 속에서 일본을 보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또 그들이 굉장히 일본에 우호적이란 것도 느꼈다. 이것에 대한 답을 나카노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드디어 본래의 우리로 돌아갈 수 있다고 기뻐하면서도 왜 일본인은 우리를 버렸을까 원망한 적이 있었지. 나만 그렇지는 않았을 거야.” 이것이 꼭 타이완만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문득 든다.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 이 한 편의 소설이 다시금 대만 여행의 열정을 되살린다. 그 당시 못 먹었던 음식들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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