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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기억 ㅣ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9
윤이형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기억은 개인적인 것이 아닐까? 모든 사람이 똑같이 기억하는 기억이 존재할까? 흔히 말하는 사진 같은 기억력이란 보통 사람에게는 사진에 의존하는 기억일 수도 있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다. 물론 엄청난 기억력을 가진 사람은 실재 존재한다. 아니 존재했다. 이 소설은 바로 이 기억을 소재로 한 사람의 삶을 간결하지만 깊이 있게 다룬다. 그리고 보르헤스의 소설집 <픽션들> 중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필사하고, 그와 비슷하지만 다른 능력을 지닌 화자 나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낸다.
안타깝게도 나는 보르헤스의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읽지 않았다. 이 책에 나오는 몇 개의 문장만으로 이 작품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재로 등장한 푸네스가 보여준 사진 같은 기억력은 화자에게는 한정적으로 작용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혹은 인식하고 있는 것만 뚜렷하고 명확하게 기억할 뿐이다. 기억이란 것은 망각을 동반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삶이 늘 즐거울 수만 없기 때문이다. 나쁜 기억과 아픈 기억은 망각의 늪 속으로 빠져야만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이 기억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있는가. 화자인 지율에게도 이런 기억들은 어느 순간 촉발되어 끝없이 흘러나온다. 자신이 조절할 수도 없다. 그에게는 무엇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즐겁고 행복한 것이 아닌 고통스러운 일일 뿐이다.
아이가 자신의 지나온 삶의 흔적들을 기억한다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자신의 감정도 절제할 수 없는데. 부모가 이 아이를 보고 병원에 데리고 간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그들은 가난했다. 아이가 가진 과잉기억증후군을 진단하기 위해 뉴욕에 가는 것조차 버거워한다. 아니 한국 병원에 다니는 것도 힘겨워한다. 의사의 진단에 따라 이런 저런 방법을 써보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다. 아이는 자신이 가진 기억력으로 좋은 대학 의예과에 입학하지만 문제가 생긴다. 책을 읽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을 시작하면서 필사하게 되는 것도 읽은 것이 아닌 여자 친구가 읽어 준 책을 기억해서 쓴 것이다. 출판연도와 출판사와 표지와 몇 쇄인지까지 다 기억한다.
중반까지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흘러나왔다면 그 이후는 그가 집은 나와 일하던 게스트하우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정확히는 그에게 보르헤스의 단편을 읽어주었던 그녀, 은유에 대한 기억이다. 그녀와의 만남, 사랑과 어느 날 갑자기 헤어지기까지의 이야기가 자신의 기억력과 더불어 나온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여자의 만남은 열정적이지도 강렬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은근하고 인상적이다. 게스트하우스 직원과 손님의 관계를 유지하지만 누구나 그들의 사이를 알고 있다. 아니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당사자들만 신경 쓸 뿐이다. 재미있는 커플이다.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 이런 증상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약 오브가 나온다. 완성품이라고 해도 약효가 완전히 증명된 것은 아니다. 지율은 너무나도 폭발적이고 정확한 기억을 깨트려 평범한 사람처럼 살고 싶다. 약을 먹는다. 약효가 힘을 발휘한다. 문제가 있거나 고통스럽고 아픈 기억을 특별히 봉인해야 하는 일이 사라진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희미해진다. 그가 필사한 소설을 실제 원문과 비교하니 다른 부분이 드러난다. 그가 필사하면서 힘겨워했던, 고민했던 것들의 결과가 이렇게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은유에게 편지를 쓴다. 답장이 온다. 이야기는 그 편지를 읽는 것에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