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유언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재형 옮김 / 무소의뿔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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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러시아 출신이지만 프랑스어로 글을 쓴다. 이렇게 모국을 떠나 다른 나라의 언어로 소설 등을 쓰는 작가가 상당히 있다. 자전적 요소가 많다고 하는데 그 경계를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꽤 많은 부분에서 그의 경험이 녹아 있을 것이고 생각한다. 그가 그려낸 곳과 프랑스에 대한 환상과 프랑스어에 대한 설명을 읽다 보면 경험한 자의 여유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나에게 쉽지 않았다. 더디게 읽혔고, 가계도가 충분히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묘사가 많은 부분도 하나의 이유다.

 

한 장의 사진과 프랑스어와 할머니가 이 소설의 핵심이다. 할머니 샤를로트가 없었다면 이 소설은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프랑스 출신이고, 러시아에서 험난했던 20세기 초반을 보냈다. 소설 속에 그녀가 경험했던 일들을 하나씩 보여주는데 그 참혹함은 엄청나다. 물론 그것이 당시 그곳만의 특별한 것은 아니다. 현재도 전쟁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일상적으로 일어지고 있거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살인과 강간과 폭행과 부상병들까지. 사지 중 일부가 절단된 병사들을 사모바르라고 부르는 부분에서는 깜짝 놀랐다. 잠시 다시 생각하면 우리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한국전쟁 이후를 다룬 영화나 소설에서 말이다.

 

책속에서 프루스트가 나왔을 때 작가가 풀어내었던 이야기들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직선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아니다보니 순간적인 이미지를 모아야했다. 이 이미지들은 어느 순간 엮이면서 하나의 이야기로 묶인다. 개인적으로 편하게 읽힌 것은 역시 3부였다. 현재가 아닌 과거를 다룰 경우 타인의 경험보다는 자신의 것이 더 생생하기 때문이다. 십대의 열정과 충동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섹스 후에 대한 그의 감정은 쉽게 공감할 수 없었다. 그의 경험과 할머니의 경험을 같이 놓고 해석했을 때 이것이 남자 일반적인 감정이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러시아만의 특징인지 쉽게 분간이 되지 않았다.

 

기억과 사실이 교차한다. 프랑스어는 프랑스 출신 할머니 샤를로트를 통해 배운다. 러시아어가 모국어인 그에게 프랑스어는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열심히 두드리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경험하다 보니 문을 조금씩 열어준다. 후반부에 이 경험을 들려줄 때 낯설었다.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소문으로 들었던 것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도 이때다. 샤를로트가 자신이 당한 강간 이야기를 해줄 때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자체에 놀란다. 이 부분이 바로 앞에서 말한 섹스 후 남자의 감정을 표현한 대목이기도 하다. 이 이외에 할머니는 자신이 겪은 삶의 다양한 부분을 말해준다. 물론 그가 프랑스에 대한 환상을 키운 것은 할머니의 가방 속 신문과 그 기사와 할머니의 이야기들 덕분이다.

 

전체적인 이미지는 솔직히 다 읽은 지금도 떠오르지 않는다. 더 넓은 시베리아의 풍경도 마찬가지다. 전제주의 국가의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내었다. 역자도 지적했듯이 베리아를 제외하면 할머니의 신분증을 둘러싼 에피소드 외에 몇 개 없다. 빈곤과 궁핍함과 허기 등이 가득한 시절이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 빠르게 씻겨 간다. 현실과 삶의 놀라운 회복력 덕분이다. 작가가 섬세하게 표현한 장면들이 나에게 깊이 와 닿지 않아 힘들었지만 차분하게 음미한다면 또 다른 느낌이 들 것 같다. 마지막 장에서 프랑스 유언이 던져준 반전은 다시 첫 이야기를 돌아보게 만들고,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감정들의 정체에 의문을 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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