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문이 있었다
태극문 20주년 기념위원회 엮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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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무협의 시작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좌백의 <대도오>를 꼽는다. 그런데 이 <태극문>을 효시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 용대운은 구무협 시대의 작가였다. 야설록이란 이름으로 몇 권의 무협을 내었고, 본인의 필명의 몇 권을 낸 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공장무협 시대의 내막을 잘 몰랐던 사람들에게 이것은 하나의 일상처럼 다가왔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태극문>이란 무협으로 돌아왔다. 이전처럼 만화방용이 아닌 서점용으로 말이다. 그때 많은 무협 팬들은 열광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몇 년 동안 이어진 출판사 뫼의 성공은 바로 이때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때 출판사 뫼에서 나온 무협은 믿고 보는 책이었다. 기존 무협과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그 당시 PC통신을 달구었다. 하이텔 무림동은 그 중에서 최고였다. 나도 이때 여기서 많은 정보를 얻었고, 이 당시 출간된 뫼의 무협을 열심히 모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뫼도 몰락했다. 작품의 질이 떨어지고, 공장무협처럼 하나의 필명으로 여러 작가들이 소설을 내놓기 시작한 것이다. 공장무협의 대명사였던 사마달처럼 말이다. 무협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가들에게 이것은 배신과 다름없는 일이다. 그렇게 하나의 무협 대명사가 사라졌다. 이 책은 좌백의 글을 통해 그 이면의 역사를 짧고 간략하면서도 핵심적으로 알려준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반가운 대목이다.

 

미친 듯이 읽은 <태극문>이지만 이 책은 고룡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때 고룡 작품의 표절이란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실제 고룡의 작품을 읽었을 때 세부적인 묘사는 다르지만 기본 줄거리는 크게 변함이 없어 표절을 주장한 사람의 말에 공감했다. 그 당시 무림동에서 작가와 독자들이 다투면서 탈퇴하고 절필 등을 선언한 사건도 있었다. 그 영향인지 지금도 문피아에서는 작품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요즘은 거의 들어가지 않지만 GO무림 시절에는 이 규칙이 상당히 황당했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표절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만약 표절이 아니라면 명확하게 이 부분을 집고 넘어가야 한다. 이 책에 글을 쓴 작가들의 관계를 생각하면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용대운, 좌백, 이재일 등은 모두 좋아하는 작가다. 이들의 작품은 모두 보려고 한다. 그런데 이 세 작가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완성하지 않고 있는 작품들이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다시 이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후속작들을 내고 있지만 팬들로 하여금 절필로 인한 주화입마를 수차례 경험하게 한 전력들이 있다. 부디 글을 계속 써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주길 바란다. 최근에 다시 중간부터 읽고 있는 <군림천하>가 28권까지 나왔는데 아껴가면서 읽고 있다. 나머지 둘도 마찬가지다. 이들 외에 전성기 뫼의 작가들이 판타지 등으로 전업해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도 있는 모양인데 최근 무협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신작을 잘 모른다. 언젠가 한 번 리스트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을 단숨에 읽으면서 가장 반가웠고 재미있었던 것은 역시 뫼의 전성기 시절 이야기다. 잘 몰랐던 이야기와 반가운 작가들의 글이다. <태극문>에 헌정한 진산의 <태극비전>은 재밌었고 반가웠다. 그녀가 얼마나 무협에서 멀어진 삶을 살았던가. 그리고 하이텔 무림동 이야기는 아련한 기억 속 추억을 불러왔다. 미친 듯이 텍스트 파일을 다운 받아 읽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 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당시 게시판에 올라온 수많은 글들이다. 감상이다. 90년대 이 글들은 이전 무협에 대한 수많은 애증을 담고 있다. 오랫동안 무협을 읽었던 고수들의 감상과 비판이다. 만화방에서 도서대여점을 거쳐 이제 이북으로 변하고 있는 시장을 생각할 때 용대운의 대담에서 나왔듯이 좋은 글을 위해 많이 고민하고 노력하는 작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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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의 아이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박하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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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을 읽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1990년 4월 고분샤에서 처음 나왔을 때 제목이 <도쿄(워터프런트) 살인 만경>이었고, 1994년 10월 문고로 나오면서 <도쿄 시타마치 살인 만경>으로 개제되었다. 지금 같은 제목은 2011년 9월에 바뀌어졌다. 한 권의 책 제목이 세 번이나 바뀐 것이다. 가끔 번역본이 이렇게 여러 번 바뀌어 나오는 것을 보았지만 단행본이 세 번씩이 바뀐 것은 처음 본다. 더 찾아보면 적지 않을 수 있지만 미야베 미유키를 감안하면 더욱 놀랍다. 물론 이 책이 나올 당시 그녀의 지명도가 그렇게 높지 않은 듯하다. 세 번째 장편이었으니 말이다. 지금 그녀의 이름을 생각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듯하지만.

 

구성이 그렇게 복잡한 소설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고, 사건을 복잡하게 꼬거나 비틀지 않는다. 제목처럼 형사의 아들 준이 모든 사건을 해결하지도 않는다. 만약 준이 살인 사건을 해결했다면 소년 명탐정류의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준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용의선상에 올라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등장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약간 어린 티가 나지만 준과 신고의 등장은 무거울 수 있는 연쇄살인사건에 조금은 무게를 덜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소설의 소재 중 가장 중요한 도고 씨의 <화염>을 통해 2차 대전 끝 무렵에 있었던 참상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아이와 함께 사타마치 강을 구경하던 한 엄마가 토막 시체 일부를 발견한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혼한 아버지 야키사와 미치오와 함께 도쿄 서민 동네 사타마치로 이사 온 준의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아주 좋은 가정부 할머니 하나와 만난다. 이 조용한 동네에 나쁜 소문 하나가 돈다. 어느 집에서 살인이 벌어졌다, 젊은 아가씨가 살해됐다는 소문이다. 그 대상은 고급 2층집이다. 이곳이 바로 유명한 화가인 도고 씨의 집이자 아틀리에다. 준과 신고는 도고에 대한 정보를 모은다. 그러던 어느 날 준은 도고의 집에 들어가 진짜 <화염>을 본다. 엄청난 작품이다. 이 작품에 엮인 사연을 듣게 된다.

 

준의 아버지 미치오는 형사다. 토막 살인사건을 수사하고 있다. 탐문 수사 결과를 가지고 단서를 하나씩 모은다. 형사의 감이 발동한 탓인지 토막 시체의 일부를 발견한다. 아직 시체의 정체도 밝혀내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에 범인에게서 한 통의 편지가 온다. 사체의 다른 부분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준 것이다. 한 명인줄 알았던 시체가 두 구가 된다. 사체가 더 나오고, 단서가 더 모이지만 범인은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단기간에 해결될 사건이 아니다. 처음에는 자극적인 사건 탓에 언론도 난리였지만 이제는 시들해졌다. 하지만 경찰의 수사는 아직도 계속 중이다.

 

토막 살인사건이란 소재를 다루고, 2차 대전 끝 무렵의 무시무시한 폭격도 하나의 중요한 소재지만 전체적으로 그렇게 무겁지 않다. 각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살아있어 간략하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다. 형사의 아들 준이 보여준 직관과 관찰은 아버지의 영향인지 또래에 비해 탁월하다. 하지만 가장 정확하게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는 인물은 역시 미치오다. 수사의 진행 방향을 따라가면서도 다른 방향을 돌아본다. 여기에 하나 할머니도 멋진 역할을 보여준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 통찰력은 미스 마플의 향기가 살짝 풍긴다. 준과 하나 할머니 콤비로 시리즈가 나왔어도 재미있었을 것 같다.

 

토막 살인사건에 가려져 있지만 또 하나 중요한 사회적 논쟁거리를 담고 있다. 바로 미성년자들의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 폭력과 살인의 강도 문제다. 미치오가 하나의 사건을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성인과 미성년자의 살인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미성년자의 경우 끔찍하다. 일본 미스터리 소설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주제 중 하나가 미성년자 살인과 폭력이다. 한때는 가해자의 시선을 따라갔는데 이제는 피해자 가족의 시선을 더 많이 비춰준다. 물론 이 소설은 이 시선과는 상관없다. 하지만 그 한 면을 잘 보여준다. 준이 살고 있는 마을이 무대인 작품은 많은 듯한데 준이 다시 등장하는 소설은 없는 것 같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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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 - 2015년 제1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근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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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세계문학상 대상작이다. 오리가 고양이를 잡아먹다니 제목부터 특이하다. 낯익은 작가 이름인데 한때 판타지 소설 쪽에서 유명했던 그가 맞다. 고등학교 때 쓴 <바람의 마도사>란 작품으로 이름을 알렸고, 그 후 몇 편의 판타지 소설을 쓴 경력이 있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의 소설을 읽은 것은 <피리새>다. 다른 초기작을 사놓고 어딘가에 쌓아두고 있기는 하다. 이름으로 검색하니 깜빡 잊고 있던 작품들도 나온다. 제대로 그의 작품들을 읽은 적이 없어 쉽게 판타지 소설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 다만 첫 작품과 너무 다른 이야기 방식이라 놀랐던 것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학상까지 받았다. 이 변화가 놀랍다.

 

이 소설에서 이름이 제대로 나오는 것은 딱 하나 있다. 바로 오리에게 잡아먹힌 고양이 호순이다. 호순이의 복수를 하려는 노인도, 이 일을 돕는 두 명의 남녀도, 그의 아들이나 손자도 이름이 불린 적이 없다. 이 익명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단지 마지막에 서로의 이름을 알려준다고 하지만 실제로 불린 적은 없다. 우리가 너무 쉽게 통성명을 나누는 세상에 살다 보니 이런 관계가 이상하게 보인다. 하지만 실제 이름을 알려준다고 해도 그것을 가슴 속에 담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필요에 의해 이름을 기억하고 부를 뿐이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그런 관계였다.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에 의해 만나고 헤어지는 관계 말이다.

 

등장인물이 몇 명 없고, 이야기 구성도 간단하다. 위에서 말한 사람들이 등장인물 전부다. 아! 한 명 더 있다. 엑스트라처럼 오리만 열심히 찍고 있는 그들을 보고 호기심 때문에 그들의 직업을 물어본 할머니 한 분 있다. 물론 불광천 주변을 오가는 사람이나 여기저기에서 부딪히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들은 단지 배경일 뿐이다. 어쩌면 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사람들보다 불광천에 서식하는 오리들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실제 할아버지의 의뢰에 의해 호순이를 잡아먹은 오리를 찾기 위해 매일 일당 5만 원에 오리 사진을 찍으니 말이다.

 

이야기는 말도 되지 않는 의뢰를 다룬다. 할아버지가 사랑하는 고양이 호순이를 잡아먹은 오리를 찾는 것이다. 이 일을 하기 사전 단계로 할아버지는 불광천에 서식하는 오리들의 사진을 찍으라고 한다. 자신이 호순이를 잡아먹은 오리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의 첫 생각은 일당 5만 원은 좋지만 과연 오리가 고양이를 잡아먹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며칠 동안은 돈 때문에 이 일을 하지만 정상적인 생각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할아버지는 계속해서 이 일을 시킨다. 전직 장르소설 작가인 화자도 이 일을 고민하지만 꾸준히 한다. 이 일이 이어지면서 이 일에 동참한 사람들의 사연이 짧게 나오고, 이런 저런 사건도 생긴다. 이 과정을 작가는 큰 과장없이 현실적으로 다룬다. 비현실적인 것으로 꼽으라면 너무 쉽게 이 일에 대한 회의와 미안함을 가지는 것이다.

 

작가는 소설 속에 자신의 경험을 녹여내었다. 실제로 작가가 판타지 소설가였다. 얼마나 그 경험이 현실적으로 담겨 있는지는 모르지만 많은 장르 소설가들이 알게 모르게 사라졌다. 최소한 한국에서 판타지 소설가에서 일반 문학상을 받을 정도로 성장한 작가는 없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이 발전과 성공은 이 다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전 경력이 그의 문학에 상상력을 더해주면서 일반 작가와 차별화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더 황당한 설정으로 더 강한 블랙 코미디를 보여줄지도 모르겠다. 김근우 작가의 세계문학상 수상을 축하하고 오랜만에 그의 소설을 읽어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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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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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가쿠다 미쓰요의 소설을 읽었다. 가독성이 좋은 작가였는데 이번 작품은 솔직히 조금 힘들게 읽었다. 왜냐고?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돈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삶을 조금씩 파괴하는 그녀들의 모습이 읽는 동안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와 관련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고, 그렇게 깊게 몰입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쩌면 이들의 파국을 알고 있기에 그랬는지 모른다. 1억 엔을 횡령한 리카의 삶이 어디로 갈지 알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쇼핑중독에 빠져 필요하지도 않는 물건을 사는 아키의 모습 때문인지 모르겠다.

 

1억을 횡령한 리카가 치앙마이에서 사는 모습이 나온다. 도망자의 삶이다. 그녀의 현재가 먼저 나오고, 이후 그녀의 과거와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교차하면서 진행되는데 리카의 사연은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진다. 다른 지인들은 현재의 연속선상에 있다. 이 소설의 재미난 점 중 하나는 리카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그들은 결코 리카를 나쁘게 말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기억하는 리카와 다른 모습이라 놀라고 궁금해 할 뿐이다.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는 사람들의 습관을 그대로 보여준다.

 

소설의 중심에 놓여 있는 이야기는 왜, 어떻게 리카가 1억 엔을 횡령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그녀가 1억을 횡령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한 번에 1억을 횡령한 것도 아니다. 조그만 돈이 점점 쌓여 1억이 된 것이다. 횡령의 시작은 좋은 의도에서 비롯했고 그 돈을 채워 넣으려는 마음도 강했다. 언제나 시작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더 쉬워진다. 돈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고, 돈으로 누리는 행복이 더 많다고 생각하면서 더 깊은 수렁에 빠진다.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늦었다. 그 대안으로 도망을 선택했고, 불안한 도주 생활을 하게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작가는 리카의 무미건조하고 애정없는 삶을 잘 보여준다. 부부 사이에 성관계는 사라지고, 당연히 애도 생기지 않는다.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남편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관계다. 아내가 은행에서 시간제로 일해 돈을 벌어 밥을 살 때 보여준 남편의 저급한 반응은 리카가 왜 고타에게 빠졌는지 단서를 제공한다. 하지만 우스운 것은 리카도 돈으로 고타의 애정을 샀다는 것이다. 고타가 애인이 생겼을 때 ‘여기서 나가게 해줘요’라고 말한 것은 돈으로 얻게 되는 향락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는 의미다. 자신이 누린 사치와 향락과 삶이 자신이 바란 것이 아닌 리카의 강요와 자신의 묵인 아래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리카가 고타에게 빠져 1억을 횡령하면서 사치를 누릴 때 또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의 순간적인 욕망을 자제하지 못해 돈의 노예로 전락한다. 아키가 백화점에서 점원이 칭찬하면 자신도 모르게 계산하거나 마키코가 어린 시절의 부유함을 그리워하면서 자신의 아이들에게 과도한 돈을 지출하는 것이 소비의 노예라면 유코는 과도하게 절약하면서 자신의 아이가 도둑질하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유코의 비중이 더 많았으면 한다. 다른 사람과 대비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과도한 소비나 절약이 모두 돈의 노예라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키가 자신의 딸이 보여준 모습에 놀라거나 야마다 가즈키가 아내와 애인의 과도한 지출에 놀라는 장면은 이 두 사람에게 일단 전환의 계기를 마련했음을 알려준다.

 

리카가 횡령으로 파국을 맞이했을 때 자신이 걸어온 길에서 수많은 ‘만약에’을 찾게 된다. 이 ‘만약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후회를 담고 있다. 긴 세월 동안 고타와 누린 사치와 향락이 남편의 멀어진 손길과 애정의 대신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돈을 횡령하고, 이 돈을 채우고 위해 벌였던 수많은 작업과 거짓말들은 이제 멈출 수 없는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그녀의 삶을 삼킨다. 그녀의 내면 속에 자리 잡은 불안과 공포는 순간적으로 향락으로 잠시 사라지지만 젊은 연인을 붙잡기 위한 처절한 노력은 악순환만을 강요할 뿐이다. 그녀가 고타와 함께 있을 때 행복이 느껴지기보다 애잔하고 안쓰러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일상의 평온이 사라진 곳은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해도 결코 그 비워진 공간을 메울 수 없다. 영화도 있다고 하니 언젠가 한 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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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인문학 - 하루를 가장 풍요롭게 시작하는 방법
다이앤 애커먼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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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꼼꼼하게 읽어야 하는 책이다. 가볍게 읽을 것이란 생각으로 책을 펼치면 새벽과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냥 휙~ 하고 지나갈 뿐이다. 함축적인 문장은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그냥 스쳐지나가는 문장이 될 뿐이다. 그래서 다시 앞으로 넘어와서 곱씹어 읽은 적도 많다. 물론 그냥 스쳐지나간 문장은 더 많을 것이다. 새벽에 대한 단상을 담은 조금은 가벼운 책 정도로 생각하고 덤벼들었던 나의 오판이 읽는 내내 혼란을 가져왔다. 아무 곳이나 가볍게 펼쳐 읽은 대목은 분명 쉬운데 연속으로 읽으니 마음의 여유가 부족한 탓에 쉽게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아무 곳이나 펼치니 새롭게 다가온다.

 

새벽. 이제는 새벽에 일어나는 일이 많지 않다. 작년 말 해돋이 보기 위해 동해에서 일어난 것이 새벽을 맞이한 가장 최근의 일이다. 지난 설에 제사 때문에 조금 일찍 일어났지만 이때는 새벽을 감상할 시간도 느낄 여유도 없었다. 졸린 눈으로 제대로 펴지지 않은 몸을 움직였을 뿐이다. 생활 방식이 점점 야행성으로 바뀌면서 새벽은 아련한 기억 속으로 사라진 듯하다. 오래전 해뜨기 전의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겨두고 있는 나의 기억과 너무 다른 모습이다. 겨울이라 더 일어나기 싫은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이 책 분량 중 봄이 가장 많은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새벽을 사계절로 나눠 이야기한다. 봄이 가장 긴 분량이고, 그 다음이 여름이다. 다른 계절은 비슷한 분량이다. 봄이 가장 긴 것은 왜일까 하는 의문이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들었다. 위에 쓴 이상한 이유가 아닌 진짜 이유를 알고 싶지만 이에 대한 글은 없다. 아마 작가의 경험과 사유가 봄의 새벽과 가장 많이 맞아떨어진 것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볼 뿐이다. 하나의 소제목에 달린 분량도 여기가 가장 길다. ‘두루미들을 애도함’이란 장을 읽으면서는 이 책의 정체에 의문이 생겼다. 그러다 영어 원제를 보니 알 것 같았다.

 

이 책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장소다. 봄은 플로리다 팜비치, 여름은 뉴욕 이서커, 가을과 겨울은 특별히 지명이 나오지 않는다. 이 장소들은 작가가 새벽을 맞이하고, 자신의 감각을 일깨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가가 관찰한 동물이나 식물 등이 바로 지역, 날씨 등과 관계있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히 이런 이유만으로 이런 글이 나오지는 않는다. 세심한 관찰과 관련 분야 연구와 깊은 성찰이 동반되어야만 가능하다. 두루미, 개미, 벌, 달팽이, 거미, 딱따구리, 찌르레기 등에 대한 글들을 보면 작가의 성찰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몇 가지 중요한 키워드가 생각난다. 모네, 호쿠사이, 세이 쇼나곤 등이다. 조금 더 많이 늘어놓을 수 있지만 이 단어들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느꼈던 것들이다. 모네에 대한 글은 호쿠사이가 유럽 화풍에 끼친 영향을 떠올려주고, 모네가 어떤 노력을 기울이면서 자신의 작품을 만들었는지 잘 보여준다. 여기에 새벽은 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반면에 세이 쇼나곤은 그녀가 느꼈던 새벽의 풍경과 감각을 작가가 크게 공감하면서 몇 번 인용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문화가 곳곳에 나오는데 심미적인 문화가 작가의 성찰 등과 잘 맞는 모양이다. 서양의 일본 문화 찬미가 이 책 속에서도 가끔 보인다.

 

참 다양한 소재를 새벽과 연결시켰다. 문학, 예술, 종교, 역사, 언어학, 기상학, 생물학 등이 모두 나온다. 사계절과 엮이면서 더 풍성해진다. 덕분에 정신을 빠짝 챙기지 않으면 그냥 흘러갈 뿐이다. 나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하나 배운 게 있다면 잊고 있던 새벽의 아름다움과 의미다. 일회성으로 그친 일출 보기가 아닌 삶의 변화가 더 필요하다. 쉽게 고쳐질 수 있는 습관은 아니지만 조금 더 빨리 일어나려고 노력은 해야겠다. 밤과 새벽이 교차하던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다. 그리고 이제야 문득 왜 새벽의 인문학이란 제목이 붙었는지 알게 되었다. 나의 희미한 머릿속이 조금은 새벽빛이 들어온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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