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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잠 ㅣ 밀리언셀러 클럽 145
가노 료이치 지음, 엄정윤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일본은 엄청난 토건국가다. 한국이 토건 사업으로 국토를 파헤치고 뚫고 막고 세우고 하지만 일본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 유명한 버블경제 시대 엄청난 자산이 부동산으로 몰렸고, 그 여파는 현재까지 이어진다. 버블경제를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토건사업을 펼쳤던 일본의 모습은 지금 한국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어쩌면 일본을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다. 이런 일본의 한 지역 다카하마를 무대로 9일 동안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바닷가를 낀 다카하마는 버블경제 시대 수많은 별장과 기업 부대시설이 세워진 곳이다. 하지만 버블이 꺼지면서 그 건축물들이 페허로 변했다. 철거비용이 땅값보다 더 비싸 누구도 재건축이나 재개발을 할 생각조차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도시에 공항 건설 계획이 생긴다. 지방 토호들은 자신들의 자산을 늘일 좋은 기회이다 보니 찬성을 하고, 지방 주민들은 환경 문제 등을 감안해서 반대한다. 이 두 세력은 서로의 의지를 관철시키려고 노력한다. 이 대립과 갈등은 이 소설의 중요한 배경이다. 이 공항 건설 계획을 읽으면서 한국의 지방 공항들이 생각났는데 더 나가면 복잡해지 여기서 그만 접자.
이 소설을 이끌고 나가는 인물은 카메라맨 다쓰미 쇼이치다. 그는 잡지사가 조작한 사진 때문에 업계에서 쫓겨난다. 그 후 생계를 위해 흥신소 일을 했다. 누명이 벗겨진 후에도 그를 부르는 잡지사는 없다. 이런 그가 관심을 가지는 사진이 있다. 바로 폐허다. 이미 몇 년 전 폐허 사진집을 낸 적이 있다. 다카하마에 온 이유도 폐허가 된 다카하마 호텔을 찍기 위해서다. 새벽빛 속의 다카하마 호텔의 폐허를 찍으려는 그가 호텔 안에서 한 여성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녀는 이 마을 출신의 유명한 작가이자 공항 건설 반대파의 일원인 아이자와 다에코다. 최초의 시체 발견자라는 이유와 그의 이력이 이 살인사건에 발을 담그게 만든다.
다쓰미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 후지코다. 그녀는 잡지사 기자이고, 다에코가 죽기 전 인터뷰한 이력이 있다. 처음에 그녀는 단순히 다쓰미와 다니면서 이 사건의 관련자를 만나는 인물 정도였다. 그런데 다쓰미가 찍은 사진을 현상해서 가지고 나온 후 다카하마 호텔에서 추락한 채 발견된다. 경찰이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고가 아닌 살인을 노린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쓰미의 후지코에 대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그 범인을 잡으려는 열정이 불타게 된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같은 호텔에서 전 아내를 잃은 지방 신문사 기자 안비루가 있다. 그는 친구인 형사 쓰보이로부터 단서를 얻고, 자신들이 찾은 단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다. 다쓰미의 가장 좋은 파트너다.
처음 다에코가 죽었을 때만 해도 단순해 보였다. 공항 건설과 관련된 살인 사건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건을 파헤치면서 만나게 되는 지역의 이권과 과거의 사건은 그렇게 단순하지만 않다. 그리고 그녀가 죽었던 다카하마 호텔은 이전에 정계와 재계에 검은 돈을 뿌렸던 이종원의 아내가 운영했던 호텔이었고, 5년 전 화재가 발생한 곳이다. 이 화재는 이종원의 아내 가나코가 보험금을 노리고 저지른 사건이란 의혹도 있다. 여기에 방화범 용의자였던 인물이 다리에서 떨어져 죽은 사건까지 있다. 덧붙여 공항 건설 반대파의 회장인 스에쓰구 씨는 이종원의 아들이자 다에코의 연인이다. 보통의 살인사건이라면 그의 전남편 안비루나 스에쓰구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될 것이다.
보통의 미스터리라면 공항 건설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폐허가 된 다카하마 호텔이 중요한 단서이자 배경으로 작용한다. 화재 사건에서 비롯한 일들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공항 건설이 완전히 동떨어진 것도 아니다. 야쿠자 조직이 이권을 위해 개입하고, 지역 주민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또 다른 죽음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사건을 몇 가지 단서와 추리만으로 멋지게 해결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다쓰미다. 개인적으로 그의 추론 과정이나 단서 등이 충분히 소설 속에 녹아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매력적인 캐릭터이지만 조금 과장된 듯한 모습이다. 아니면 내가 이야기 속에서 작가가 흘린 단서를 너무 소홀하게 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범인으로 지적될 때 나의 뇌세포도 같이 빠르게 회전하고, 그의 결론에 감탄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여운은 찐하다.